헤븐 번즈 레드

[루카유키] 다시 시작한 미래에서

sn 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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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븐 번즈 레드 4장 전편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점은 4장 후편 이후)

발치에서 마른 낙엽이 바스러진다. 어느새 나무는 옷을 갈아입고, 스산한 바람이 몸속을 파고든다. 거리의 풍광에서 계절이 완연히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루카가 떨어진 낙엽 줄기를 집어들어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그렇구나, 벌써 그런 계절이 되었구나.

벚꽃이 흐드러지던 봄에 시작한 31기의 전쟁은 가을까지도 이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의 계절을 넘어서 계속될 싸움이었다. 어쩌면 새로운 계절을 맞지 못하고 끝날지도 모르겠으나, 그 끝이 인류의 종전이 되지는 못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가을바람보다도 서늘한 한기가 가슴을 스쳤다.

그렇다 하더라도 31A는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스컬 페더 토벌이라는 큰 고비를 넘기고 다음 작전을 대비해 훈련 중이었다. 지금은 출격 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사령부에서 작전을 세우고 나면 31A는 다시 캔서와 싸우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 것이다. 첫 출격 때는 그 사실이 두려웠고 실제로 헬기 안에서 떨기도 했지만, 지금은 각오를 다지고 매일의 훈련과 임무에 전념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음 전장을 위해 숨을 고르는 시기였다. 언제까지 이 평화가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각별한 시간이었다. 지금 이렇게 보낼 수 있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자. 그런 마음으로 루카는 훈련이 끝난 뒤의 자유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뭐를 하면 좋을까? 카레링과 함께 오락실에 갈까? 이롯치를 불러서 나비 광장에서 그림을 그릴까? 후부킹과 영혼을 울리는 소리를 주제로 토론해볼까? 아니면….

그런 상념에 잠겨 루카가 기지 내를 걷고 있을 때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중2병이 깨어나는 주문과 함께 부적을 붙이는 코즈에가 루카의 눈에 띄었다. 언제 봐도 기합이 들어있는 주문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루카가 코즈에에게 다가갔다.

"안녕, 코쥬! 오늘도 결계 강화를 열심히 하고 있네."

"안녕하세요, 카야모리 씨! 오늘은 평소보다도 주의를 기울여서 결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 시기에는 유령들이 특히 날뛰거든요."

"그래? 유령들도 더위가 가시니까 기운이 나는 건가?"

"우리처럼 시원해져서 활발해졌다기보다는,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면 유령들이 더욱 힘을 얻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일이 할로윈이니까요."

"아~, 벌써 할로윈인가? 트릭 오어 트릿! 코쥬, 사탕 줘!"

"할로윈은 내일이라니까요. 그리고 내일이 되어도 저는 바빠서 사탕을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할로윈은 유령들이 가장 힘을 얻는 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게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해요."

"헤에~, 일본 귀신인데 서양 명절을 따르나?"

"할로윈에 음기가 강해지는 것은 틀림없으니까요."

말을 마친 코즈에가 품 안에서 부적을 꺼내서 루카에게 건넸다.

"카야모리 씨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내일은 이 부적을 계속 지니고 있으세요. 카야모리 씨는 제게 영력이 옮아서 유령들의 표적이 되기 쉬워요."

"윽, 코쥬가 말하니까 농담으로 안 들려. 화장실이나 목욕탕에서도 꼭 가지고 있을게."

"종이라 방수는 안 되니까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

코즈에와 작별인사를 한 루카는 건네받은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거리를 걸었다. 왠지 오싹한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그래도 이때까지 유령한테 정말로 당한 적은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얼마 전에 코쥬를 흉내 낸 유령으로부터 저승으로 끌려갈 뻔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루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단 부적을 가지고 다녀서 나쁠 건 없으니까 잘 간직하고 다녀야겠다. 자켓 안에 부적을 넣으니 얇은 종이라 별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뭘 할까 싶었지만, 방금 코즈에에게 들은 얘기 때문에 오늘은 얌전히 기숙사에 있어야겠다고 루카는 생각했다. 할로윈이 지나갈 때까지는 조용히 지내자. 왠지 평소처럼 살면 유령에게 천벌을 받을 것 같다. 딱히 평소라고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아니지만! 천벌 받을 짓은 전혀! 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음기를 불러일으킬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했다.

31A 기숙사 방에 들어가 보니 벌써 잠옷으로 갈아입은 유키가 침대에 앉아서 전자군인수첩을 조작하고 있었다. 한쪽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물기가 어린 것으로 보아서 이미 목욕도 마쳤나 보다. 루카의 시선을 느낀 유키가 고개를 들어 루카를 바라봤다.

"윳키, 벌써 목욕하고 온 거야?"

"응, 오늘따라 많이 피곤하네. 감기가 아니라면 좋겠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윳키! 나랑 같이 목욕을 안 하다니! 이건 바람이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자주 다른 애들이랑 목욕하잖아."

"그렇지만 윳키가 나 이외의 사람과 목욕하는 건 싫어!"

"웬 생떼야. 그리고 달리 누구랑 목욕한 거 아니고 혼자 했으니까 그만 칭얼거려."

"그럼 좀 낫지만, 앞으로는 꼭 나랑 목욕해."

"생각해볼게."

논리도 없이 우기는 루카에게 질린 듯이 유키는 다시 시선을 내리고 전첩을 조작하는 것에 몰두했다. 그런 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가 유키의 옆에 앉았다. 슬쩍 옆에 앉은 루카를 힐끗 본 유키가 루카와 눈이 마주치자 부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 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옆얼굴이 언뜻 붉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양감을 느낀 루카는 유키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동시에 화들짝 물러난 유키가 소리를 질렀다.

"무, 무슨 짓이야?! 너 거리감이 왜 그래?!"

"그치만 윳키는 막 목욕했잖아? 그러니까 좋은 냄새가 날 것 같아서."

"아, 아무리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 있잖아?! 너한텐 퍼스널 스페이스란 게 없냐고!"

"그야 있을 수도 있지만 나와 윳키의 사이인데 뭐 어때?"

"뭐가 어떠냐니?! 당연히 안되지! 가까이 오지 마!"

태연하게 대꾸하는 루카에게 유키가 새되게 외쳤다. 얼굴 붉히고 목을 가리고 있는 유키는 보기 좋았지만, 저렇게 질색을 하는데 몰아붙이기도 그랬다. 바라던 대로 거리를 벌리는 루카를 보고, 유키가 서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루카가 침대 가장자리로 물러나자 유키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 이불을 끌어당겼다.

"나, 난 이제 잘 테니까 넌 이제 목욕이나 하고 와!"

몸을 보호하는 콩벌레처럼 유키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유키의 말에서 묘한 문맥을 읽어낸 루카가 은근하게 물었다.

"목욕하고 오면 윳키 냄새 맡아도 돼?"

루카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불을 홱 걷은 유키가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안되지! 허튼소리 하지 말고, 씻고 잠이나 자!"

철벽 같은 유키의 수비에 루카가 할 수 없이 대답했다.

"네~."

루카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유키는 소리도 없이 자고 있었다. 유키의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루카가 잠든 유키를 내려다보았다. 반듯하게 누운 채로 잠든 유키는 숨도 쉬지 않는 것만 같았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든 루카가 유키의 가슴에 귀를 댔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의 고동이 전해져온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별일 없을 게 당연한데도 침착해지지 않았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언제까지고 듣고 싶은 소리였다.

한동안 유키의 심장 소리를 듣던 루카가 겨우 유키로부터 귀를 떼고 보랏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계속 이 평화가 이어지기를, 조금이라도 오래 이들과 계속 일상을 보낼 수 있기를. 그런 쑥스러운 감상을 가슴에 품고 루카도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10월 31일, 할로윈의 아침은 이상하게 눈이 반짝 떠졌다.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깜박이던 루카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늘어지는 하품을 하고 시간을 보니 5시였다. 기상시각보다 30분 앞섰다.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은데. 코쥬가 준 부적의 힘인가. 오랜만에 느끼는 좋은 예감에 상쾌하게 기지개를 켠 루카가 잠든 부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모자를 쓴 채로 새근새근 자는 오타마님, 마치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얌전하게 자는 카레링, 잠든 모습은 영락없는 쿨뷰티인 츠카삿치, 요란하게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메구밍, 그리고….

눈이 마주친 유키에게 루카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일찍 일어났네, 윳키."

"응. 좋은 아침이야, 카야…, 루카."

오늘따라 얼굴이 상기된 것 같은 유키가 어색하게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유키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들떠 있었다. 루카가 걱정스레 유키를 바라봤다.

"윳키, 어디 아파? 얼굴이 붉은데?"

루카가 가까이 다가와 유키의 앞에 손을 휘휘 젓자, 유키가 입을 조금 벌리고 멍하니 루카를 쳐다보았다. 루카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열이라도 나는 걸까? 열을 재보려고 루카가 유키의 이마에 손을 대려는 순간, 유키가 부산스럽게 루카를 피하며 대답했다.

"나, 난 괜찮아! 그냥 카야… 루카를 봐서 놀란 것뿐이니까!"

"나, 뭔가 윳키가 놀랄 만한 짓 했어?"

"그건 아닌데, 정말로 내가 루, 카와 만날 줄은 몰라서…. 새삼스럽지만! 이미 항상 얼굴 보고 있지만!"

"매일 같이 보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역시 윳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괜찮아!"

루카가 언뜻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유키는 여전히 허둥대고 있었다. 침착하지 못한 윳키는 오랜만에 보네. 걱정스러운 루카의 시선을 유키가 비스듬히 피했다. 역시 이상해.

방금의 바보 같은 대화로 다른 31A 부대원들도 하나둘 일어나서 오늘은 조금 일찍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점호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유키가 루카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루카, 오늘은 무슨 일정 있어?"

"음, 오늘은 아침 먹고, 교실에서 수업 듣고, 점심 먹고, 아레나에서 전투 훈련하고, 그 뒤로는 자유 시간이니까 딱히 약속은 없으려나. 그런데 윳키가 나한테 일정을 묻다니 의외네. 원래 항상 윳키가 챙겨줬잖아."

"아니, 몰랐던 건 아니야. 그게 아니라 자유 시간에 혹시 나랑 같이 가줄 수 있나 해서."

조심스러운 태도가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비치는 모습으로 유키가 루카에게 속삭였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루카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윳키, 오늘따라 부끄럼을 많이 타네. 이거 혹시 데이트 신청이야?"

한순간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은 윳키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붉어진 귀 끝을 보고 루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어라, 장난이었는데. 평소라면 큰 소리로 부정했을 유키가 돌려서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인 말을 하니까, 루카도 덩달아 가슴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그 자리에 멈춰선 루카를 보고, 유키도 걸음을 멈추고 붉어진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주위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하이고, 그만 꼴값 떨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안카나."

"움쪽쪽 타임인가요?!"

"둘이 사이좋은 건 알겠지만 일단 밥부터 먹자."

"응응. 나중에 계속해도 되니까."

어느새 한 마디씩 던지는 31A를 보고 유키가 정신을 차렸는지 헛기침을 했다. 루카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래, 일단 카페테리아에 가자."

"으응…."

가라앉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유키에게 루카가 입술 옆에 손을 대고 유키 쪽으로 재빠르게 속삭였다.

"이따가 오후에 시간 비워놓을 테니까."

루카의 말에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수줍음을 참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왠지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기분을 삼키며 루카가 가볍게 걸어갔다.


오후 훈련이 끝나고 저녁을 먹는 동안 유키의 분위기는 어쩐지 침울했다. 31A는 유키의 눈치를 살피며 저녁을 먹었다. 그럴 만도 하지. 오늘 훈련에서 유키는 여러 번 지적을 받았다. 수많은 전투 경험으로 실력이 많이 향상된 31A인데, 오늘의 유키는 마치 처음 훈련을 받았을 때처럼 초보적인 실수를 많이 했다. 서투른 이즈미 유키는 부대원들 입장에서는 신선했지만, 사령부에는 안 좋게 비쳤으리라.

"유키 씨, 이거 먹고 힘내세요!"

타마가 유키의 접시에 완두콩을 올려놓았다. 메구미가 얼빠진 표정으로 태클을 걸었다.

"아무리 봐도 싸움 거는 거 아이가?"

"그럴 리가요! 콩을 먹고 건강해지라는 의미였어요! 콩은 영양 만점이니까요!"

"그래, 잘 먹을게."

이 상황에서 한 번쯤 화를 냈을 유키는 조용히 타마가 준 완두콩을 먹었다. 평소와 다른 유키의 모습에 31A는 다시 술렁였다.

"이게 무슨 일이고? 이즈미가 성을 안내다니?"

"이즈미 씨, 어지간히 충격받았나 봐."

"평소에는 참모 역할이었는데 이번에는 실수를 자주 저질렀으니까."

31A가 웅성거려도 유키는 침울한 상태 그대로 아무 태클도 걸지 않았다.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네. 루카가 유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신경 쓰지 마, 윳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거니까."

"응…. 나라면 처음이라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 직접 해보지 않으면 어렵네."

"음…, 이따가 같이 데이트하기로 했잖아.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가고 싶은 곳…. 원래 외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가고 싶다고 할만한 곳은 없어."

자신감이 한층 떨어졌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유키를 향해 루카가 웃어 보였다.

"그럼 일단 쇼핑부터 하자. 예쁜 옷을 입으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거야. 그 다음에는 영화를 보고, 귀여운 카페에도 가자. 오락실에 가서 인형 뽑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고. 오늘은 어디든 어울려줄 테니까."

유키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루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훈훈한 미소를 띠고 루카가 유키에게 말했다.

"오늘의 윳키는 왠지 어리광쟁이네."

"…오늘만이니까."

멋쩍은 듯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유키에게 루카가 방긋 웃어 보였다. 좋아, 오늘은 윳키의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자. 속으로 그런 다짐을 했다.


저녁 식사 이후, 루카와 유키는 같이 카페테리아를 나왔다. 왠지 초조해 보이는 유키를 돌아보며 루카가 밝은 목소리를 냈다.

"자, 이제 레저 거리로 가볼까? 일단 귀여운 옷부터 사자."

한발 앞서 나간 루카는 유키가 옆에 서는 것을 기다렸다. 유키는 선뜻 루카에게로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설였다. 루카가 가만히 서서 유키를 바라보았다.

오늘의 유키는 평소보다 솔직하고, 서툴고, 아무튼 평소와 달랐다. 루카가 유키의 위화감이라기엔 제법 귀엽게 느껴지는 차이를 곱씹고 있는 동안, 이윽고 결심한 듯이 유키가 루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카, 손, 잡아줄 수 있어?"

루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유키가 먼저 스킨쉽을 해달라고 했다. 그것도 손을 잡는다는 제법 친밀한 스킨쉽을. 먼저 부탁했으면서 눈에 띄게 부끄러워하는 유키의 모습에 루카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유키에게 성큼 다가온 루카가 조심스럽게 유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와 동시에 정전기와 같은 따끔한 감각이 튀었다.

"앗!"

"어라?"

감전된 듯이 튀어 올랐던 유키가 재빨리 루카에게서 멀어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당황해서 자신의 손과 유키를 번갈아 보는 루카에게 유키가 필사적으로 얼버무렸다.

"아, 가을이라 정전기가 일어나나 보네! 손은 잡지 말고 가자."

"어, 아, 응! 그럴까?"

유키는 창피한 듯이 재빨리 앞서서 레저 거리로 향했다. 루카가 얼떨떨하게 유키를 쳐다보다가 그 뒤를 쫓았다. 아까의 그 반응은 뭐였지.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것도 같았지만, 루카에겐 일단은 유키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정말, 이런 게 어울려?"

탈의실 안에서 한참을 있다가 겨우 꺼낸 유키의 한 마디에 루카가 즐겁게 대답했다.

"일단 보여줘야 알 것 같은데? 나와서 거울을 보자."

"역시 원래 옷으로 갈아입을래."

"그러지 말고 일단 직접 보고 나서 생각하자! 내가 보기에는 윳키한테 잘 어울릴 거야."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지? 놀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응! 윳키는 미소녀니까."

"…그럼 나올게."

한 차례 심호흡하는 소리와 함께 탈의실의 문이 열렸다. 차분한 색상의 플레어스커트에 가을에 어울리는 갈색 톤의 레이어드 블라우스를 입은 유키가 부끄러움과 떨떠름함이 반씩 섞인 얼굴로 루카를 쳐다보았다. 어색하게 팔로 몸을 감싸는 유키를 루카가 싱글거리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제 슬슬 윳키가 스스로 미소녀라는 자각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유키에게 루카가 거울을 가리켰다.

"봐봐, 정말 잘 어울린다니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루카를 보던 유키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잘 어울리나…? 자신이 입기에는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옷 같았는데, 루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끄럽다. 쭈뼛거리며 자신의 차림을 살펴보는 유키에게 루카가 속삭였다.

"예뻐, 윳키."

나지막한 루카의 목소리에 유키가 당황하며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유키를 루카가 미소로 지켜보았다. 오늘따라 유키가 지나치게 귀엽다. 마치 평소의 리미트를 해제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그럼 이 옷으로 할까."

"응응, 그대로 입고 나랑 데이트하자. 여기 계산할게요!"

루카는 한번에 유키가 입은 옷을 계산했다. 옷가게를 나오면서 유키가 겸연쩍게 말했다.

"내 옷이니까 내가 내야 하는데."

"오늘은 내가 윳키를 에스코트하는 거니까 당연히 내가 내야지. 그리고 내가 보고 싶다고 한 거잖아."

"고마워, 루카."

지금도 유키는 순정만화 속의 소녀처럼 솔직하게 수줍어했다. 정말 오늘의 유키는 무슨 일인 걸까. 마치 지금이 아니면 진심을 전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유키에게 루카가 성실하게 답했다.

"그럼 마저 데이트를 즐기러 갈까?"

루카가 유키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곧 무언가를 깨닫고 손을 거둬들였다.

"정전기가 일어난댔지?"

유키가 쓸쓸한 눈으로 루카의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손은 잡지 말고 가자."

루카가 유키의 옆에 나란히 섰다. 어깨가 스칠 것 같은 거리를 두고 둘은 잘 꾸며진 길을 걸어나갔다.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오락실에서 인형 뽑기까지 했다. 정석적인 데이트 코스를 마치고 루카와 유키는 분수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인형을 끌어안고 있던 유키가 큰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은 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가 말을 꺼냈다.

"윳키."

"응?"

"지금 윳키는 내가 아는 윳키가 아니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으며 유키가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음, 훈련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는데, 손을 잡았을 때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코쥬가 가진 부적, 가지고 있었으니까."

유령이라면 코쥬 덕에 실컷 봐왔다. 그러니 이 현상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어색하게 목덜미를 쓰다듬던 루카가 유키의 눈을 보고 말했다.

"그치만 윳키는 윳키인거지?"

눈을 내리깐 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함이 감도는 표정으로 유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나, 라고 해야 하나? 너희 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어.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나는 이승에서의 나의 할 일을 다했고,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이가 좋은 너희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부럽다는 생각을 했나 봐."

유키가 정면으로 루카의 눈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슬픔에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미소가 유키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오래 이 몸을 차지할 생각은 없어. 딱 오늘 하루만이니까."

죽은 자가 돌아온다는 할로윈, 그 하루가 '이즈미 유키'의 마지막 일탈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풀려버릴, 과거로부터 온 마법.

일렁이는 비취색의 눈동자를 마주 보던 루카는 결심한 듯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불어오는 바람에 손끝에서 부적을 날려보내고, 루카가 유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유키를 품에 안았다.

오늘 처음으로 마주 닿은 몸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유키가 느끼는 뭉클한 감정이 뜨거운 숨으로 토해졌다. 다정히 유키를 끌어안으며 루카가 진심을 전했다.

"이 세상에 존재해줘서 고마워. 윳키가 없었다면 지금의 윳키도 없었을 테고, 만약 그랬다면 나는 분명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품안에 안긴 온기로부터 전해오는 고동을 소중하게 기억에 새기며 루카가 속삭였다.

"다음에도 만날 수 있다면 다시 데이트를 하자. 하루가 아깝지 않을 시간을 보내자."

천천히 한쪽 어깨가 젖어들어 가는 걸 느끼며 루카가 눈을 감고 유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떠미는 손길에 루카가 눈을 반짝 뜨고 고개를 들었다.

"루카?! 왜 날 끌어안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왜 분수대 앞에 있는 거지? 벌써 저녁이야?"

아무래도 돌아왔나 보구나. 루카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리둥절해하는 유키에게 말했다.

"윳키가 데이트하자고 해서."

"뭐?! 내가 언제?!"

"오늘 윳키는 정말 귀여웠는데."

"…나 혹시 최면이라도 걸렸어?"

"다음 할로윈에도 또 데이트하자."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유키를 두고 루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유키가 루카의 뒤를 쫓아오며 물었다.

"도대체 오늘 뭐가 벌어진 거야?"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의 유키를 향해 미소를 그리며 루카가 입술 위에 검지를 댔다.

"윳키에게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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