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 케이스, 연초 세 대, 정원
러닝
무게 없는 걸음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신전에 도착한 시간이 제법 늦었으니 아직까지 열려 있는 상가는 많지 않겠으나, 그래도 돌아보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나 뿐인 시선이 문을 닫은 가게들을 훑어보듯 둘러본다. 어둠 속에서는 사물을 가름하기가 영 쉽지가 않아서 미간을 좁혀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골목 사이사이로 간간이 웃음소리가 번지는 게 생경했다. 파베르에서의 참상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이곳만큼은 여전히 사람이 살아 있다는 생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주 멀지 않은 곳, 지리적으로 같은 지역으로 분류되는 두 도시는 기실 아주 멀지만은 않은 곳이었음에도 생의 흔적만큼은 명백히 차이가 났다. 진정 삶에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이토록 한 장소에만 불합리하게 흘러갈 일은 없을 텐데. 그러므로 신은 더이상 인간을 돌보지 않는 것이 맞다.
문득 허한 기분이 들어 품을 뒤적여 얇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쉽게 습기가 배어들지 않도록 두 번의 옻칠과 몇 겹씩 발린 밀랍으로 단단하게 봉해진 상자, 엄지손가락으로 위를 열면 나란히 담겨 있는 담배 세 개비가 보인다. 노려보기라도 하듯 잠시간 내부를 응시하던 로시난테는 뚜껑을 다시 그대로 닫아 다시금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자주 피운 것 같지도 않은데, 이젠 연초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애초 피우는 일이 그리 잦지 않아 이 정도면 괜찮겠거니 싶어 열 개비를 겨우 채워 담아 온 건데, 사람 일이란 건 정말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게 맞다. 훈련 기간에는 맨정신으로 있겠다 생각해 대지 않고, 출발한 직후에는 영 피울 정신머리가 못 됐는데, 크레이오스를 거친 뒤로부터는 하루걸러 한 번씩 손에 댔다.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영 이상해 역산해보니 필요해 뵈는 사람에게 하나, 정신머리가 영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을 때 하나씩 태운 일들이 떠오른다. 결국 일곱 개가 출발한 지 이 주도 되지 않아 증발한 게 맞다. 내일도 이른 시간에 출발해야 할 테니 상자 안을 새로운 연초로 채울 일은 요원해 보였다. 문을 연 가게가 있을까 싶어 걸음하기는 했다만 그렇다 할 기대는 없었다. 많은 일들을 대하는 태도와 같이.
한참 생각 없이 걷던 도중 골목에서 앳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정 실재하는 것인지 제정신 아닌 머리가 만들어낸 헛된 소음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는데, 시선 끄트머리에 닿은 곳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는 아직 재난이 닥쳐오지 않았다. 아직 거리마다 죽음이 산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소음을 뒤로 하고 한참을 돌아다녀도 문을 연 가게를 찾기란 요원해 보여 로시난테는 결국 비어있는 담배는 채우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정신을 조금 더 챙기든, 담배를 조금 더 챙기든 했어야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아 이 사달이 났다. 짐작과 예단을 이젠 정말 그만둬야겠다는 판단이 선다. 이젠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낀 머릿속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는 차라리 남의 손에 판단을 쥐여주는 게 더 타당한 결과를 낳을 것 같다.
남은 연초가 세 개비. 이제는 정말 견딜 수 있는 역치도 딱 세 번이다. 다른 이들이 종종 손에 쥐여주곤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타인이 쥐여주는 것과 정말 난관에 봉착했다 느낄 때 입에 무는 건 무게가 달랐다. 흡연은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와중에 충동을 내리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에 가까웠다. 머리가 맑아져서 입에 댄다기보다는 애초 행위에 의미가 있다. 애초 자주 입에 대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반 통만이 차 있는 성냥갑을 꺼내 불을 붙인다. 몇 초간 응시하다 종이로 잘 감긴 마른 담뱃잎에 불을 붙이고, 끄트머리가 타 들어가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인내를 쌓는다. 이후 다시금 퇴적된 인내에 기반하여,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걷어차든 끌어내든 억지로든 사고하게 만들고 끝내 마주한 상황을 이해하면 된다. 이런 일이 살아오면서 아주 없지는 않았다. 몹시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적당히 흘려넘길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그건 전혀 괜찮지 않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굳이 밖으로 내고 끊임없이 되뇐 뒤에야 평소의 낯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는 게 참 피곤했다.
신전에 돌아온 뒤에는 술판이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방 안이었다. 술을 몹시 들이키지는 않았음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이전의 일이 꽤 많은 압박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그는 종종 몇몇 기억을 망각으로 떠밀어 삶을 유지했다. 나름 차림새도 멀끔하고, 흘끗 살펴본 외부의 술판도 단정하게 갈무리하고 돌아왔으니 괜찮은 것 같았다. 뭐, 그러면 됐지……. 신전에서 잠시나마 기거하는 일은 상당히 껄끄러웠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히 체면을 챙겨주고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니면 뭐든 괜찮으니까. 이어 님벌스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막막했지만, 그래도 한 번 들어온 이상 따라야 했다. 언젠가는 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공저에 들어온 뒤로 로시난테는 떠나온 사실을 아주 조금은 후회했다. 세계수의 뿌리에 대적한단 사실이 불경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게이멜도 나름대로 힘을 빌려주었으므로 결국 죽은 이 하나 없이 모두가 살아 다시금 대지에 발 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예고하지 않고 마주한 저택 안의 풍경에는 신경이 줄곧 가늘어져 말과 행동을 한참 골라야 했다. 그렇게 고른 말들도 결국 날이 서 있거나 제멋대로 이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 그는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가, 아예 저택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착한 날 들판을 보러 떠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다,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다. 묘하게 뾰족한 시간이 이어지는 이래 정령왕은 드물게도 잠들지 않고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목소리에 낮은 웃음 이외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몰아치는 상념 속에서도 로시난테는 정령에게만큼은 이전처럼 굴어주고 싶었다. 그는 다행히도, 아직 미치진 않았지만, 타오르는 님벌스의 풍경, 끝내 불 지르지 못한 어느 저택의 모습, 유난히 소리가 울리는 복도, 호화스런 만찬과 금싸라기가 띄워진 잔을 볼 때마다 인내가 고갈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모든 것들이 같거나 아주 같지만은 않고, 그 시절과 비슷한 인물은 하나 없는데 밤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큼은 흡사했다. 그건 잊고자 하는 과거의 향취를 불러오는 힘이 있었다.
품 안에는 여전히 담배 세 개비가 남았다. 피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작 과거에 눌려 예민해졌을 뿐인데 이걸 입에 댈 만한 가치가 있나? 하지만 고작이라고 일축하기엔 무력하게 테이블 위로 엎어져 숨만 쉬어야만 했던 역사가 있다. 정원 한구석에 기대 가리지 않은 눈이 뚫어질 듯 나뭇결을 노려보며 헤아리며 골몰하는데, 그렇게 생각을 현재 아닌 다른 곳으로 가둬 버린 동안에도 게이멜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일전의 물음이 단발적으로 끊기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답지 않게도 몹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라 그도 어쩔 수 없이 답을 해줘야만 했다. “안 피워.” 그제야 한 마디 대꾸한 것이 마음에 놓였는지 정령은 조금 더 문장을 길게 늘였다. 조잘댐보다는 짧은 질문에 가까웠음에도 칼 같은 단답이 돌아갔다. “안 갈 거야.” 단호하게 끊어냈음에도 이러쿵저러쿵 단어를 붙여 빙빙 돌려대는 모습이 제법 노력한다 싶었으므로, 로시난테는 마지막 대꾸만큼은 제법 성의를 담아 해 주기로 결정했다. “네 장례 치를 때 아니면 안 간다고 했잖아. 거기가 머물 장소 아닌 것도 알고, 네가 아직 돌아갈 마음 없는 것도 아는데 내가 왜 가. 이왕 온 김에 한 번쯤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혼자 다녀와도 되잖아. 기사단에 머무는 게 네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런 거면 그건 어쩔 수 없어, 네가 허락한 일이기도 하고. 그리 좋은 모습 못 보여준 건 미안하게 됐지만 당장 떠나기는 힘들어.” 정령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나. 그들에겐 침묵이 익숙했다. 정정하자, 로시난테는 해명하지 않는 삶에 익숙하다.
몸을 일으킨다. 피우지 않겠다 선언했으니 입에 댈 일도 없다. 곧 저택을 떠날 예정이니 매몰될 여지도 얼추 줄었다. 인내심 세 가닥은 미래를 위한 상황으로 남겨두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괴리와 유리, 한데 섞여 일렁이는 과거와 현재 속에서 그나마 온전한 건 미래 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마도공학이니 뭐니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머리가 복잡했다. 이럴 때엔 사고를 끊는 게 좋았다. 예고 없이 생각을 절단하고 저택을 향해 걷는다. 얼마나 더 이럴 수 있을지 가늠하기가 영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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