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Girl럭시안 워즈

Cross Line by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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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세이야 여장합작(2021)에 올린 글입니다. 전체적으로 원작의 갤럭시안 워즈 파트의 전개를 반영했지만 원작과 전혀 관련이 없는 패러디 개그물입니다. (당연하지만)
※여장소재 주의 (당연하지만)

합작 공지글 : https://cosmobbattazo.postype.com/post/8190362
합작
공개 페이지 : https://cosmobbattazo.wixsite.com/sts2021


   여기는 도쿄 그라드 콜로세움. 일본으로 돌아온 세이야는 대기실에서 양손에 원피스를 쥐고 부들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 천쪼가리를 입고 저 밖으로 나서야 하는가. 그러나 그에게 선택권은 없던 것이다. 이야기는 그가 페가수스 성의를 들고 온 때로 돌아간다.
  "대체 무슨 소리예요. 여장대회라니!" 세이야는 가만히 듣고 있는 키도 사오리 앞에서 따져물었다. "이러려고 그리스까지 가서 성의를 구해 온 줄 알아? 성의를 가져 오면 누나를 만나게 해준다더니!"
   그 태도에 쟈부가, 아가씨 앞에서 제 주제를 모른다며 세이야를 때려눕히려 들었지만 그라드 재단의 아가씨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를 제지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그라드 재단의 힘으로 당신 누나의 행방을 찾아드리죠."
   "크으윽..."
   세이야는 그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답은 정해져있었다. 혼자 힘으로 누나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대기실에서 나온 세이야는 곧 펼쳐질 시합을 초조하게 보고 있었다. 경기는 토너먼트 형식.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원수로 인해 세이야는 대진표에서 한 번 더 대결해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첫 번째 대결은 라이오넷 반과 유니콘 쟈부의 시합이었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세이야는 그 둘이 가능한 시간을 끌어주기만을 바랐다.
   '쟈부...사오리 아가씨의 취향에 딱 맞는 옷으로 우승을 차지하겠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질린다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 한 선수가 등장했다. 그는 검은 로브로 머리와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날카로운 눈만 빛내고 있었다. 로브를 벗고 정체를 드러낸 남자는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달고, 프릴이 달린 노란 고양이 무늬의 미니 원피스 차림이었다. 
   "누...누구지?"
   처음으로 등장한 선수의 모습에 관객들은 물론, 다른 선수들끼리도 저 사람이 누군지 아리송하기만 한 눈치였다. 다들 시합 전에 사오리 아가씨 옆을 지키던 쟈부의 모습을 보았으니 남은 건 그 상대인 라이오넷 반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이전부터 알던 넙데데한 라이오넷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인지부조화를 겪기 시작했다. 전보다 날렵한 인상이 된 그는 기세등등하게 캣워크를 하며 의미를 모를 대사를 꺼냈다.
  "고마워요, 세인트 세이야 각성(라이징 코스모)!"
   쟈부가 등장하려 할 때 짧게 회의를 거치던 주최측은 긴급 발표를 시작했다.
   "라이오넷 반, 대리출전으로 실격패. 따라서 유니콘 쟈부의 승리입니다."
   라이오넷 반은 본인이 맞다고 항의하려 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사이 조용히 처리되었고 등장 분량을 뺏긴 쟈부만이 사오리에게 호소했다.
   "사오리 아가씨, 저를 봐주세요. ...아가씨!!"
   그러나 사오리에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세이야는 시합이 너무 빨리 끝나버려 영혼 없이 흐린 눈으로 경기장으로 나섰다.     


   페가수스 세이야와 베어 게키는 로브로 몸을 가린 채 경기장에 섰다. 세이야는 로브를 벗고 흰 머리띠에 빨간 퍼프 소매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공개했고 게키도 로브를 벗어 거대한 몸에 걸친 의상을 드러냈다. 갈색 민소매 티에 통이 크고 긴 땡땡이 무늬의 치마 차림이었다. 모두들 첫 인상만으로 덩치가 크지 않은 세이야의 낙승이 될 거라 예상했지만, 게키가 양 팔을 들어 올리자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
   "팔 들어올리지마라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자 경기장에 걸려있던 모니터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승마복 차림으로 나타난 사오리 양이 해설을 시작했다.
   "여장이라함은 단순히 여자와 똑같은 모습이 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남자가 하는 변장임을 드러낼 때 진정한 여장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번 대회에서는 이를 반영하기 위해 여장력 데이터를 도입했습니다. 퍼포먼스로 여장력이 오르면 그에 따라 모니터의 숫자가 올라갈 것입니다."
   "그...그럴수가...! " 그 말에 가만히 서 있던 세이야는 당황했다.
   "요컨대 승패는 여장력으로 판정합니다. 그렇지 않고 비주얼만 본다면 이미 안드로메다가 우승이니까요."
  설명을 마친 사오리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신이 난 게키의 오버액션과 관객의 비명이 넘쳐나고 있는 중에 세이야가 무엇을 할지 기대하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순히 여자 옷만 입고 나오면 될 거라 생각했던 세이야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판도를 뒤엎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지. 그는 게키의 양 팔을 쳐다보다가 문득 예전에 스승인 마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상대가 가진 장점을 역으로 공격하는 거야. 적의 무기를 부수면 쉽게 처치할 수 있으니까."
   '상대의 장점. 저 팔. 장점을... 팔을......'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세이야는 게키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다른 사람은 멀리있어서 모르겠지만. 이 녀석, 겨드랑이 제모가 덜 됐다!"
   "뭐, 뭐야. 방금 전에 제대로 밀고 왔다고!" 관객의 시선이 이상하게 집중되자 게키가 억울해하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세이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네 겨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아? 암내가 나니까 그만두라고!"
   그 말에 관객석이 순간 조용해졌다. 다들 머릿속에서 그 감각을 상상해버린 탓이었다. 어찌보면 이대로 점수를 끌어올려 확실하게 승리를 거머쥘 기회였지만 예상치못한 인신공격에 주눅든 게키가 팔을 얌전히 내렸고 여태의 성과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게키가 자신의 기술을 자체봉인하자 세이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치맛자락을 휘날리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점수를 얻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사오리는 미소를 띄며 옆에 있던 타츠미에게 말했다.
  "이렇게 페가수스의 승리군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두 선수를 어서 불러오세요. 시그너스와 피닉스를...!"

  


   뒤늦게 도착한 시그너스 효가는 간신히 부전패를 면했지만 본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상대는 히드라 이치였는데, 커다란 항아리 속에 몸을 숨기고 얼굴만 드러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없어서 내뺄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용케도 찾아왔군."
   "웃기지 마라. 그런 항아리 속에서 뭘 하겠다고?" 효가는 이치의 빈정거림에 응수했다.
   "지금부터 보여줄 테니 마음껏 즐겨라!"
   뒷짐을 진 채로 항아리에서 나온 이치는 남색의 스쿨미즈를 입고 있었다. 그 수영복 차림에 이름표까지 붙여둔 디테일은 어쩐지 기분나쁠 지경이었다. 그는 양 팔을 크게 뻗어 두 손에 하나씩 끼워진 뱀 손인형을 뽐냈다.
   "크크크큭! 어떠냐, 효가!"
   이치가 항아리에 들어갔다 나오고 손 인형을 움직여 뱀 주둥이를 폈다 접었다 하면서 도발하는 동안 효가는 두 눈을 감고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별볼일 없는 몸짓이군."
   효가는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어던지고 눈처럼 하얀 발레복을 드러냈다. 날개장식이 달린 티아라까지 챙겨 쓴 효가는 발끝으로 선 후 천천히 발레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짐 없이 절도있는 움직임이었다.
   "이 발레복은 나의 어머니가 물려주신 옷이다.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춤을 춰도 얼어붙지 않는 소재지." 그의 우아한 자태에 관객들은 감탄했고 이치는 멍하니 서 있다가 항아리 속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저 춤사위를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기도 했고 어째선지 맨살에 한기가 서려왔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싸우게 된 세이야는 앞선 경기가 또 순식간에 끝나버려 낙담하는 한편 두 번째 출전이라 준비도 철저히 마치고 이미 어느 정도 적응한 듯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경기장에 당도한 세이야는 겉에 걸친 천을 벗어던지고 여자 성투사 복장을 드러냈다. 대강 수선된 듯한 그 옷에는 가죽이 약간 붙어있지만 갑옷이라기엔 맨다리가 거의 드러나고 갑옷의 구실은 전혀 할 수 없어 보였다. 그리스에서 일본으로 떠나기 전, 마린에겐 작아져서 입을 수 없는 옷을 가는 길에 대신 버려달라며 받았던 것이었다.
   시류는 평범한 붉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짐을 실은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 옷에는 금색 실로 용 자수가 새겨져있었고 검은 단화를 신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과 주최측은 그의 수행지가 중국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식상하다는 이유로 초반 포인트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이어진 광경은 기대를 불러모을 수밖에 없었다. 덮어둔 천을 걷은 카트에는 온갖 요리 재료와 조리기구가 있었는데, 시류는 즉석에서 라멘을 만드는 과정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세이야는 경기가 시작되고부터 자기가 수행하던 방식으로 주먹질이며 윗몸 일으키기며 발차기 등을 선보였지만 경기장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 퍼지고 있었고 마침 관객들이 배고플 시간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은 요리를 하는 시류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진하게 끓여둔 국물을 따뜻하게 데워 면과 고명과 함께 그릇에 담아들고는 그릇 여러 개를 2단으로 쌓아들고 관객석으로 걸어갔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손을 내밀며 그 라멘을 먹게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세이야의 눈에는 관객 매수로 보였지만 사실상 이 대회에는 본인이 직접 출전해야 하는 룰과 여장을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항의한다 한들 소용이 없어보였다. 실제로도 모니터에 뜬 점수에 큰 변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장력과는 무관하다고 판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내쪽을 안 보면 별다른 점수를 얻을 수 없다는 거야. 저 퍼포먼스는 최강의 창이자 최강의 방패인가...'
   세이야가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사이,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이야...!"
   "세이야. 네가 지는 건 네 마음이지만 내 옷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건 참을 수 없어."
   "지면 안 돼 세이야! 이기는 거야!"

   "누나... 마린... 미호... 그래. 나는 아직 질 수 없어!"

   예전에 마린이 했던 이야기가 의식의 흐름처럼 세이야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 하지만 실제로 이 둘이 맞부딪치면 어떻게 된다는 거지. 정말 모순이군. 마린의 저 가면은 여러 개일까. 저번에 한 번 훔쳐봤는데 다시 똑같은 걸 쓰고 나타났으니까 말이야. 그 날은 절벽에서 복근운동을 두 배로 시켰었지. 어쩐지 기억이 뒤죽박죽인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여자 성투사들은 여자임을 포기했다고 하면서 가면까지 써놓고 다들 저런 차림인 건 그야말로 모순이 아닐까. 가면을 쓰고 다니니까 모르는 걸까...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 세이야는 숨겨뒀던 여자 성투사 가면을 얼굴에 썼다. 시야가 좁아져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뭐든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게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는 주최측에 타이밍에 맞춰 음악을 하나 틀어달라고 부탁한 후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포즈를 취하며 큐 싸인을 보냈다. 잠시 후 박진감 넘치는 전주가 흘러내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세이야는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기 시작했다. BGM은...「페가수스 판타지」.
   "아, 이건 못 참지!"
   흥이 난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기 시작했다.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렴구에서 노래를 따라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세이야의 의미모를 에어로빅 동작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신나면 어찌되었든 좋은 사람들이 응원봉을 꺼내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완전히 밀려버린 시류는 요리하던 것을 멈추고 세이야의 맞은편으로 가서 앞을 막았다. 그러고는 관객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슌레이에게 넌지시 말했다.
   "슌레이.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러고는 자기 옷 위쪽을 맨손으로 찢어버렸고 세이야도 그에 가담해 가죽 갑옷을 벗어던지고 옷의 어깨끈을 위로 힘차게 잡아당겨 교차했다.
   "간다. 세이야! 전력을 다해 널 이기겠어."
   "좋아. 결판을 내자! 시류!!"
   달아오른 분위기로 노래가 끝나자 이어서 「솔져 드림」이 경기장에 울려퍼졌다.
   두 사람은 에어로빅을 하고 여산승룡패를 날리고 페가수스 유성권을 날리고 할 수 있는 동작은 모조리 선보였고 온몸이 땀으로 코팅이 돼서 윤기있게 빛나고 있었다. 노래의 하이라이트에서 시류는 한 손에 라멘이 담긴 그릇을 든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물구나무를 섰다. 그리고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듯 세이야를 올려다보는데... 시류의 눈에 들어온 건 로우앵글의 각선미를 자랑하고 있는 세이야였다. 그리고 위로 시선이 따라가다가 그만...


   시류는 그 광경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고 충격으로 시력을 잃은 채 쓰러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의료진이 다급하게 시류를 실어 나르려던 차에 슌레이와 한 소녀가 경기장 안으로 달려와 가로막았다.
   "잠깐 기다려주세요!"
   슌레이는 세이야를 붙잡고 애원했다.
   "노사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못 볼 꼴을 보고 잃은 시력은 똑같은 정도의 훌륭한 광경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다른 여장을 하란 말이야? 그렇지만 저번 경기 때 입은 옷은 벗다가 실수로 찢어먹었는데..."
   당황한 세이야가 슌레이에게 옷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지만 여분의 옷이 없던 슌레이는 잠시 주저했다. 그러자 옆에 함께 있었던 금발의 소녀가 자신의 꽃무늬 원피스를 벗어던지고 반팔티와 반바지 차림으로 옷을 건넸다.
   "여기 내 옷을 입어요. 세이야."

   
   "에스메랄다..."
   "내 옷 하나로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날 수 있다면...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딨어." 슌레이는 감격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고 그는 미소를 띄며 답했다.

   
   그렇게 세이야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사투하는 사이 시류를 부축하러 나선 슌은 눈 앞에서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아이를 보고는 잠시 놀랐다. 슌의 팔을 살짝 잡고 불러세운 것은 소녀 쪽이었다.
   "저, 저기..."
   "당신은...대체 누구시죠...?"
   "혹시...아, 아무것도 아녜요."
   먼저 말을 꺼내놓고 물러난다는 점이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슌은 손으로 시류의 감긴 눈꺼풀을 강제로 열었다.
   "작은 힘이지만 이 안드로메다도 돕겠다!"
   혼신의 에어로빅으로 탈진한 세이야가 휘청거리자 멀찍이서 지켜보던 효가는 세이야를 거들었다.
   "팔을 잘 집어넣는 게 좋겠다. 옷이 찢어지면 안 되니까..."
   무사히 꽃무늬 원피스를 챙겨입은 세이야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들면서 몸을 약간 숙이고는 가볍게 인사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맞은 편에 있던 시류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세...세이야, 슌레이. ...방금 눈에 엄청난 빛이 들어왔는데."
   시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에는 그만한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세이야는 원피스를 입은 채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고 슌레이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세이야와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효가는 천을 몸으로 두른 채 이미 선수들과 떨어져있던 것이다. 이후 모든 힘을 짜낸 시류와 세이야는 구석에 준비해 둔 휴게실에서 뻗어버렸고 슌은 다음 경기를 준비하러 돌아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효가는 의구심이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기서 사사로운 싸움이 벌어진다는 성역의 말을 듣고 찾아왔지만...이건 대체 뭘 위한 싸움인 거지. 근원적으로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 

  


   한차례 소동이 끝나자 이어서 안드로메다 슌과 유니콘 쟈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저 녀석만 이긴다면 우승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경기장에 나타난 유니콘 쟈부는 기세등등하게 로브를 벗어던졌고 핑크색 크롭티와 핫팬츠 위로 검은색의 하네스와 벨트가 돋보이는 난해한 복장이 드러났다. 그는 팔에 걸치고 있던 유니콘 머리띠를 쓰고는 저 멀리 승마복을 입은 채 주최석에 앉아있는 사오리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잘 보십시오 아가씨. 이 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쟈부가 수갑과 재갈을 꺼내들고 관객들이 기겁을 하는 사이 그 대전상대는 사뿐사뿐 경기장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몸을 가리고 있던 천을 내려놓고 반짝이는 별모양 목걸이와 치맛자락이 바닥까지 끌리는 새까만 고딕 드레스를 드러내자 관객들은 입을 벌리며 쳐다보았다. 정말 예쁘다는 말이 숨을 내쉬듯 빠져나왔고 저 사람이 정말 남자가 맞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조금씩 섞여 들려왔다. 그는 손에 들고 온 석류를 두 손으로 파란 입술에 가져다대고는 살짝 베어물었다. 모두들 그 동작 하나하나를 바라보느라 쟈부도, 점수가 떠 있을 모니터도 쳐다볼 생각도 않았고 쟈부조차 재갈을 본인 입에 물려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압도적인 격차를 느낀 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렸고 이길 방법을 필사적으로 골몰했다.
   '어차피 여장력을 측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니 주최측에 어필하는 퍼포먼스로 더 높은 점수를 따면...?' 그의 시선이 조심스레 모니터로 향했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숫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측정조차 할 수 없을 정도라는 말인가. 끝없이 좌절스럽지만 그는 손을 석류 쪽으로 뻗었다.
   "입에 무는 건...내가 먼저 하려고 했단 말이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던 중 석류는 그 둘의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쟈부는 상대방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는 것을 봤지만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행동은 빠르게 제지되었다.
   "막지마라, 슌!"
   "잠깐. 지금 저 석류가 중대한 걸 알려주고 있어."
   바닥에는 떨어진 석류알이 글자처럼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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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시어라면 그리스어로, 소중한 것, 가치있는 것...그렇다면..."
   경기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선수들의 시선이 황금성의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선수들이 다급하게 찾아간 장소엔 황금성의 상자가 원래 있던 그대로 놓여있었지만 어쩐지 주변은 불길한 기분이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 상자를 열어 그 안을 확인해보자고 하려던 차에 상자가 안쪽에서 저절로 열리더니 수수께끼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입고 있는 검은 세라복 치마가 펄럭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한 쪽 발을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세이야와 함께 소동의 현장으로 달려온 시류는 갑자기 나타난 인물을 쳐다보며 말했다.
   "역시 피닉스는 안드로메다 슌의 형인...잇키였어."
   "사...살아있었구나, 잇키...형...!"
   하지만 잇키의 표정은 분노로 가득했다. 데스퀸 섬에서 만난 긴 금발머리 남자의 술수로 이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몸에서 떼어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황금성의가 해결책일 거라 판단한 그는 성의를 노리고 찾아왔지만 상자 안에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잇키는 곧장 주최측을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로브를 두를 틈도 없이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울프 나치가 잇키를 가로막았다.
   "잠깐! 네 상대는 이 울프라구."
   그의 행색은 심플한 흰 원피스에 머리에 대충 얹어둔 것 같은 긴 생머리 가발이 산발이 되어 마치 귀신 분장처럼 보일 정도였다. 잇키는 자신을 막은 방해꾼의 복장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썩은 표정하고 있지 마라. 너만 눈이 괴로운 게 아니니까."
   "좋다, 울프! 그렇다면 그보다 더한 꼴을 보여주지."
   잇키는 곧장 손을 들어 나치의 뺨을 때렸고 나치가 무슨 짓이냐고 말하며 노려보려는 찰나, 잇키의 몸이 거대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고는 흠칫했다. 다시보니 잇키의 몸이 커졌다기엔 오히려 자신이 작아졌다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잇키의 손이 나치를 집어들고는 인형놀이를 하듯 포즈를 바꿔보더니, 원피스의 치마 자락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우아아악!!"
   그렇게 옷이 모두 뜯겨나가고 속에 받쳐입었던 반바지만 남은 나치는 커다란 손이 가발을 벗겨내려고 할 때 손가락 끝을 붙잡고 버티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긴 가발이 벗겨지자 처음 느껴보는 휑한 기분이 들어 머리에 손을 가져다대자 원래 있어야 했던 머리카락이 아닌 매끈한 두피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 머리카락이이ㅣㅣ...!"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울프 나치는 가만히 서 있다가 혼자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쓰러졌고 세이야를 비롯한 선수들은 잇키가 만든 환각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잇키는 누구든 자신을 막으면 쓰러뜨리고 가겠다는 듯이 모두를 노려보았다.
   "기다리세요. 잇키!"


 

   "드디어 모두 모였군요. 여러분의 여장은 잘 봤습니다." 광기와 혼란의 현장 속에서 침착한 표정으로 선수들 앞에 나타난 것은 사오리였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의 대결은 의미가 없으니, 지금 이 대회를 끝내도록 하죠."
   이미 모두가 우승자는 안드로메다 슌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차였다. 사오리는 선수들과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에스메랄다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 말에 모두들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제서야 에스메랄다의 얼굴을 보게 된 잇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이해하느라 놀란 얼굴로 그의 이름만 연거푸 부르며 굳은 상태가 되었다. 선수들 앞으로 다가오는 에스메랄다의 손에는 뚜껑이 덮혀 있는 검은 빛의 자그마한 트로피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사오리는 에스메랄다를 뒤따라 슌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분께 알리지 않은 것이 있지만, 이 중에 한 명 불청객이 있고 이 대회는 그 자를 잡아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오리가 눈짓으로 신호하자 에스메랄다는 가발을 벗었다. 가발을 벗고 드러난 머리모양은 그대로지만 머리색은 초록색을 띄고 있었다.
   "슌...!!"
   세이야와 효가, 시류, 멍하니 에스메랄다를 쳐다보던 잇키도 뒤늦게 소녀의 진짜 정체를 깨달았다. 그렇다면...우리와 있던 슌은?? 모두의 시선이 또 다른 슌에게로 향했다. 또 한 명의 슌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검은 오라가 뿜어져 나와 경기장을 메웠기에 가까이 있던 사오리와 다섯 선수들만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사오리는 손에 쥔 지팡이로 그를 가리키며 준엄하게 외쳤다.
   "잘 보세요. 이 자의 정체를...!"
   슌의 머리카락이 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빛나던 눈은 생기를 잃어갔다.
   "서 설마...!"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의 머리는 금빛을 거쳐 완전한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 뒤로 날개가 가득 붙어있는 검은 실루엣의 갑옷이 떠올랐다.
   "그렇다. 나의 정체는 하데스. 성전에서 패하고 니케에 맞아 빈사상태가 됐을 때, 아테나가 내 칼에 당한 페가수스를 구하기 위해 시공을 뒤트는 동안 그 틈새로 대피했다."
   "그...그럴수가!!"
   "그랬더니 여기서 같잖은 경기나 벌이고 있더군. 지금까지 이 놀음을 지켜본 것은 힘을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지. 이제 다 끝이다. 여기서 신성의도 없는 너희 청동성의와 아테나 모두를 전멸시키면 되는 거야!"
   하데스가 자신의 명의를 입으려고 하자 세이야를 비롯한 몇몇은 대기실에 놓고 온 성의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사방이 어두운 기운으로 막혀있어 소용이 없었다. 그 기운이 회오리처럼 휘날리며 성투사들을 바닥으로 내쳤고 세이야는 그 앞에 꿋꿋이 서 있는 사오리를 올려다 보았다.
   "하데스."
   "저 어리석은 인간들의 목숨이라도 구걸할 텐가. 아테나?"
   "아뇨. 이번엔 그 누구도 해칠 수 없어요."
   "날 어떻게 막겠다는 거지? 하나씩 죽어가는 모습을 구경이나 해라!"
   사오리의 싸늘한 시선이 하데스의 명의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검은 갑옷이 그 형체를 드러냈는데...


   "대체 이게 뭐냐...!"
   하데스의 앞에는 롱 스타킹과 면적이 적은 천으로 속옷 한 세트를 이루는 슈퍼섹시코스츔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분명 날개 붙은 실루엣이 명의와 비슷했지만 아무리봐도 이걸 걸치라고 만든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날개 장식을 모조리 떼어다 몸에 붙여야 간신히 몸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야 내 갑옷. 어디에... 이거 뭐야. 뭐냐. 무엇이냐. 이것은."
   상황을 지켜보던 선수들은 도무지 이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데스는 되다 만 문장을 계속 내뱉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냐. 내 서플리스는...?"
   "대회를 여장대회로 변경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시공의 왜곡 속에서 당신을 막고 봉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죠."
   사오리는 슌에게서 항아리를 건네받고는 하데스를 향해 내밀었다. 뚜껑을 열면 항아리가 하데스의 영혼을 끌어낼 것이었다. 하데스는 다시 한 번 자리를 피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야 아테나의 피가 자신을 방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슌이 그의 팔을 잡아 불러세웠을 때, 그 때 묻혀둔 것이 틀림없었다.
   "자, 하데스. 포세이돈처럼 이 항아리 속에서 잠드세요."
   사오리는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고 하데스는 머리를 쥐고 괴로워하다 끝내 봉인되고 말았다. 하데스의 혼이 빠져나간 후 얼마 후, 원래 몸의 주인인 에스메랄다가 눈을 뜨자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잇키는 그를 부르며 쳐다보았다. 에스메랄다는 잇키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짓더니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었나..." 시류는 짧게 탄식했다.
   "이제 다 끝났군요. 하데스와의 싸움도." 슌이 슬픈 눈으로 말했다.
   '고향에 잠들어 계신 어머니를 보고 싶군.' 효가는 잇키에게서 눈을 돌렸다.
   "사오리 씨가 설명한 이야기가 정말인지 믿겨지지 않지만..." 세이야는 아직도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이제 시공이 뒤틀리기 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나요?"
   사오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이렇게 말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거 없어요. 인비저블 소드로부터 목숨이라도 건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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