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

서교연

完寧 徐巧衍


 

“소녀, 기필코 전하 곁에 남을 것입니다.”

 

신첩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전하의 눈길이 내내 그 아이를 향한다는 것을요. 전하께서 신첩을 바라보는 눈과 다르다는 것을요. 신첩도 알고 싶지 않았답니다. 애석하게도 신첩은 내내 전하만을 바라와서,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혹자는 미쳤다지요. 정도正道가 아니라 하더이다. 그럼에도 신첩은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전하는 오롯이⋯⋯.

 



서徐 교연巧衍 

字 완녕完寧 




 

 

 

 

 

촉하燭下에 곱게 일렁이는 낯은 정성껏 수공한 옥처럼, 음영을 풍부히 그려낸 화첩 속의 미인도처럼 보였다. 바람결에 가늘게 흔들리는 촛불 마냥 선이 얇은 몸이 미약하게 떨린다. 불빛에 비친 그림자가 퍽 애처롭다. 교연은 검은 장막 같은 비단 금침 앞에 서 있다. 한 걸음 내딛자 마자 코 끝에 스미는 진한 향내. 와실臥室 안 사방이 향초로 가득하다. 정체 모를 향은 달콤하면서도 관능적이다. 분명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향이었다.

촛대 기둥 따라 쓸어내던 손길이 문득 멈추었을 때, 교연은 그 답을 찾아낸다. 말리화茉莉花였다. 꽃잎을 곱게 말려 차로도 즐기나 그 효능은 별개로 존재하여, 창백한 살결을 붉게 물들이는⋯⋯. 교연은 그제야 손길을 무른다. 말간 낯이 모란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호흡 가다듬으려 숨 크게 들이쉬자 향내가 폐부 깊숙이 들이찬다. 무엇에 취한 것마냥 정갈한 시선이 이지러진다. 여린 눈 끝이 금침을 향했다. 주인의 눈을 닮은 선명한 먹색. 짙은 밤의 색. 침상 끝에 걸터 앉으니 몸 들인 만큼 폭 가라앉는다. 손 끝으로 비단결 쓸어내다 문득 금침 한 가운데에 놓인 것을 알아챈다. 속이 비치는 붉은 천을 들자 의복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있다. 금실로 화려하게 수 놓인 혼례복. 예복을 들어 소중한 것 마냥 품에 꼭 끌어 안는다. 뺨에 살결 맞대자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교연은 생경한 촉감만큼이나 낯설었던 첫만남을 떠올린다.

사실상 혼례를 준비하던 몇 달 동안, 제게 어떤 일이 닥쳤는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교연은 선명한 대여섯 개의 순간을 기억한다. 물가에 내몰려 깊이를 가늠하던 것을, 꼭 잠겨 죽으리라 생각하던 찰나에 저를 붙잡던 손을, 혼인을 청하던 붉은 입술을, 사주단자와 함께 오가던 예물들을, 입 맞추며 울부짖던 난경을⋯⋯.

 

 



*

 

 



숨 들이 쉴 때마다 폐부로 물이 가득찼다. 이 악물고 버둥거려도 결국 침잠하는 것이 꼭 제 운명 같았다. 태생부터 박정한 팔자였으니 애써 탓할 것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제서야 교연은 생의 마지막 순간임을 실감한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라앉는다.

그리고 찰나에 뻗어진 손.


 ⋯⋯정신이 드는가. 음성의 주인 알아챌 틈도 없이 급히 숨을 쉰다. 밀려오는 토악질을 견디지 못하고 품에 안겨 잘게 기침했다. 근 사흘 간 고뿔 내리 앓은 탓에 규방을 벗어나 간만에 산보하던 차였다. 제 아무리 무예에 능하다 하여도 기력 하나 없는 상태에서 물에 내몰리면 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교연은 헤엄치는 법을 몰랐다. 이를 잘 알았던 윤승*의 간교였다. 교연이 차분히 호흡을 고른다. 시야에 한 사람이 들었다. 

*교연의 손윗누이. 형부상서의 적장녀.

 

이 사람이구나. 

교연은 단번에 알아챘다. 형부상서 서희겸의 적장녀 서윤승의 정혼자. 정확히는 그녀의 부군이 될 사람. 건평제의 2황자 정군왕. 주제도 모르고 탐이 났다. 이대로 오래 품에 안겨 있고만 싶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원⋯⋯.” 

 

그 이름을 홀린듯이 입에 머금는다.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황가의 존함을 입 밖으로 곧이 내뱉을 수 있었냐 물으면 교연도 달리 답할 길이 없었다. 발악이었다. 집요한 시선이 얽혀들었다. 황자의 이름을 감히 읊는 맹랑한 소녀를 바라보는 눈에서 이제는 괴이함마저 뒤섞이려던 찰나에, 교연이 먼저 수를 두었다. 맑은 두 눈에 물기가 어렸다. 매끈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형부상서 서희림의 차녀 교연이옵니다. 분명, 정왕 전하께서 소녀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일테지요. 전하께 폐를 끼쳐⋯⋯.”

“곧 형부 상서 댁에 경사가 있을진데, 어째서 울고 있지?” 

“감히 욕심내어서는 아니 되는 것들을 바라니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 역시 천명이나⋯⋯ 전하께 빚진 목숨값은 소녀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럼 나와 혼인하는 것은 어떠하냐. 본왕은 네가 마음에 드는데.” 

 

부친, 전 이 사람이 아니면 평생 갇혀 살다 죽고 말 거예요. 

 

교연은 셈에 능했다. 지독히 살아 남기 위한 본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과연 이번 일은 분명 실보다 득이 많았다.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치사였다. 살아생전 갖지 못할 것들을 이제야 보상받는 게 아닐까 멋대로 생각했다. 어쩌면 현세를 떠난 몸이 내세에서 깨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여겼다. 다만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잡고 싶은 그런 간절함이었으니, 교연은 제 부군을 만난 연못 아래에 유년을 묻어두어야만 했다.

 

온전히 그만을 사랑하기 위해서.

도무지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

 

 



사가를 떠난 지 반 년하고도 사흘만에 정왕부에 서찰 하나가 들었다. 

교연은 일체 시녀를 물리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진실로, 홀로 남고서야 서신을 펼쳤다. 글씨체 마저 익숙한 것이라 구태여 누구의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없었다. 한 자씩 차근히 훑어내리는 낯이 참담하다. 서신 붙든 손 끝이 잘게 떨렸다. 애당초 창백한 피부가 희게 질릴 정도로 서신을 세게 쥐었다. 앉은 몸가짐 하나 흐트러짐 없었으나, 그 속에 담긴 것을 마주한 낯은 무너진지 오래였다. 답신을 써야만 했다. 붓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물자국에 먹 번진 탓에 몇 번씩이나 붓을 들었다 놓았다. 


아림.

서신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어찌나 기뻤는지 아림은 모를겁니다. 누이는 낙양에서 부족함 없이 편히 지내고 있답니다. 분에 넘치게 행복한 삶이라 외려 겁이 날 정도로요. 종종 꿈에서 깨는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할 때가 있어요. (중략) …그러니 입신양명만을 생각하시어 오롯이 학문에 정진하시면 됩니다. 

아림이 염려할 일은 없습니다. 

후에 아림이 조당에 들어 낙양으로 돌아오면, 어쩌면 우리가 다시 볼 날이 있겠지요. 

完寧 

 




 

  


一 

658년 12월 14일 묘시 출생. 낙양 본향.

 형부상서 서희겸의 서차녀. 1남 2녀 중 차녀로, 위로는 적장녀 윤승 자 낙청과, 아래로는 적장자 난경 자 운림과 1살 터울이었다. 제 남동생과는 사이가 유난스러웠다.

친모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고 구태여 찾아 묻지도 않았다. 몰락 귀족 출신에, 출산 도중에 숨졌다는 것이 교연이 아는 전부다. 제 어미를 떠올릴 때마다 공허한 눈을 하는 아비를 보고서 일곱 이후에는 모친에 대해 일절 함구했다. 그것이 법도인 마냥.


정화 10년*. 황태후 민 씨가 훙한 지 1년여 만에 상서령 민재헌을 필두로 몇몇 대신들이 반역을 모의하다 이 일이 온 천하에 드러나니, 민 가를 포함한 그 연루자들을 모두 참수하여…….

*서기 658년

 



 

관례를 치르지 마자 팔려가듯 성급히 혼담이 오고 갔다. 지방의 한미한 서생이나, 성정이 올곧으며 물질적으로도 크게 부족할 것이 없다는 말이 혼처에 관해 저가 들은 전부였다. 교연은 낙양을 떠나기 싫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나고 자란 곳이며 마땅히 여생을 꿈꾸던 곳이자, 난경이 있는 곳이니…….

윤승은 도리어 제 꾀에 발목 잡힌 꼴이 되었다. 정군왕부 측비 자리를 놓고 겨룬 셈이었다. 제 삶을 흔들어 놓은 승리. 한편으로는 난경을 떠올려 슬피 울면서도 교연은 끔찍하게 웃었다. 언니. 평생 그날을 후회하며 살아요. 

 여원은 교연이 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를 넘어섰다. 가질수록 더 탐이 났다. 애당초 제게 허락한 것은 연심이 아니었음에도.

 



 

몸이 약한 정왕비를 대신하여 왕부의 크고 작은 일을 맡아 말끔히 해냈다. 방의 장식품마저도 교연이 직접 골랐으니, 어느 하나 제 손을 거처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왕비와도 친밀하여 서로 의지하며 친자매처럼 지냈다. 

영강 5년, 정왕비가 병사하였으나 새로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부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연은 자신이 정비인 양 행동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마치 교연이 정비인 것처럼 굴었다. 여원이 친왕에 봉해질 때까지만 해도 정왕부의 안주인은 분명 교연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전하께 천하를 안겨 드리고 싶어요.

 

언젠가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감히 천하를 드리고 싶다고. 넘치는 연심을 못 견뎌 말간 낯을 하고 내뱉은 것이 제 운명이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완완, 나를 위해 동궁을 죽여다오. 완완, 그리 부르는 음성이 너무도 달콤하여 덜컥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유는 많았다. 단지 여원이 원한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원이 천하를 꿈 꾸면, 이는 곧 교연의 꿈이자 사명이었다.

 情 때문에 죽였고 情 때문에 죽었다. 

우습게도 사람 목숨 하나 탐하는 것이 너무도 쉬웠다. 몇날 며칠을 밤 새워 고민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태자는 쉽게 무너졌다. 오랜 친우라는 연유로 설영의 시녀 하나를 포섭하고, 오랜 친우라는 연유로 용의자에서 벗어났다. 교연을 의심스럽게 여기는 이 하나 없었다. 증좌도 없었으나, 청하 시절부터 둘도 없는 지기였다는 것이 연유였다. 옥에 든 설영을 찾아가 그 손을 붙잡고 아무 말도 못했다. 여원의 품에 안겨 쓰러질 때까지 통곡했다. 해은, 오라버니. 태자 전하. 소녀를 원망하세요. 다만 전하께서는 죄가 없으시니, 전하의 죗값마저도 소녀가 치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전하를 가엽게 여기시어…….

다음 날, 난경이 왕부에 들었다.

 


 


 

영강 7년, 정군왕 경여원 3류 친왕에 봉해지다.

영강 8년, 정친왕 경여원 태자에 봉해지다.

 

비어 있던 정비 자리가 문제였을까. 고조 황제의 유지에 따라, 태자는 바뀌어도 태자비는 변치 않았다. 교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독한 분노를 느꼈다. 문을 걸어잠근 와실에서 화병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저지른 죗값도 모르고 설영을 미워했다. 그럼에도 교연은 견딜 수 있었다. 여원의 마음은 온전히 제 것이라 여겼다. 

어느 날, 설영을 바라보는 여원의 시선을 보고서야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전하. 전하께서는 정녕 황위만을 바라셨습니까? 교연은 묻지 않았다. 돌이키기에는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즉위 후 정2품 소의 책봉.

정1품 혜비 책봉.

 

 

 

 

 

 

여원, 부디 나를 원망치 마세요.

당신이 내게 진 빚과 내가 당신에게 진 빚은⋯⋯ 이미 얽힐 대로 얽혀버린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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