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

단설영

諧倫 段設怜




“그 원한을 어찌 잊겠습니까.”


소인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전하, 소인은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단段 家 설영設怜

字 해윤諧倫







청하의 春. 


평국공부 도언濤彦당. 

평국공이 하나뿐인 장손녀를 무척이나 어여쁘게 여겨 서재를 무르고 지었다는 별당. 그 별당의 도화꽃 만연한 정원을 지나면, 담 하나를 거슬러 자리한 청하삼경淸河三景 청려호. 설영은 호수로 나들이를 갈 때면, 늘 담을 너머 곧장 호수에 가기를 택했다. 그 모습을 본 조부가 설영에게 묻기를, “선비는 우천 시에도 뛰지 않는다 하였거늘, 태자비가 될 아이가 어찌 행실이 부정한 것이냐?” 하니, “단 가의 적손녀로서 몸가짐을 단속하지 못한 것은 과過지만, 담을 돌아갈 시간에 서책 한 장을 더 읽고 청하삼경을 즐길 시간을 얻었으니 이는 분명 실實이지요.” 라 설영이 답하였다. 조부께서 이를 듣고 대소하여 담벼락을 허물어 후문을 짓도록 명했다. 아마 설영의 가림 없는 성정을 기껍게 여겼으리라.

 담벼락에 낸 후문의 주인은 설영만이 아니었다. 담 너머의 호숫가. 진하게 든 볕 따라 물 위에 두 개의 그림자가 진다. 물 흐르는 소리, 새 소리, 서책 넘기는 소리, 그 너머의 낭랑한 음성. 설영은 여느 때처럼 정사를 논했다. 이부상서 문원백을 파직함이 마땅한 처사로 사료되오나, 연루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을 모두 엄벌한다면 당장 실무에 차질이 생길 테지요. 곰곰한 낯으로 서책을 넘기던 손이 무릇 멈추어선다. 바람결에 꽃잎 하나가 날아든 탓이다. 서책 틈새로 스민 봄기운에 시선이 머문다. 책을 내려둔 채 손을 뻗어 꽃잎 하나를 쥔다. 


"날아든 꽃잎을 쥐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합니다."


손 붙잡아 꽃잎을 쥐여주고 나서야 설영의 낯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늘 그렇듯 춘기春氣 만연한 웃음이다. 


"봄입니다, 전하."


다갈색의 투명한 시선. 눈 끝에 담긴 것은 다정이자 동경이고 연심이다. 일다경 채 되지 않는 순간이었으나 그 속에 담긴 것은 분명하다. 이내 곧 날숨인 양 웃음을 분다. 설영이 다시금 서책을 집어둔다. 찰나의 시선이 어긋난다. 한 달 후면 이부 중정관의 임기가 만료되니, 그를 파직하고 새 인사를 등용함이 어떠하겠습니까. 결국 인사의 폐단으로부터 시작된⋯⋯. 전하, 듣고 계십니까?



*

-


가느다란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머리칼이 꼭 사형수를 연상케했다. 설영은 작금의 감각을 헤집는다. 파리한 낯빛, 창백한 손가락, 제 이름을 머금던 입술이⋯. 늘 정돈되어 있던 손님방이 누군가의 흔적으로 어지럽혀졌다. 해은의 물건들이 온 데 널브러져 시선 채이는 곳 마다 흩어져 있었다. 약에 취한듯한 손이 허공을 헛돌다 동앗줄이라도 찾는 것 마냥 비단옷 하나를 잡아쥐었다. 태자비 위를 약속 받던 날 하사 받은 도포였다.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다시 손을 휘저으니 이번엔 벼루를 쥐었다. 쇳덩이를 물끄럼 바라보면 도화꽃과 백윤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손 닿은 곳 마다 해은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사람만 지상에 없는 것처럼 사라졌다. 오직 해은만. 우습게도 눈물 대신 실소가 터져나왔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한참이나 천정을 응시했다. 위태로운 몸이 서안을 밟고 올라섰다.


“날 나무라도 좋으니 제발 한 번만이라도⋯⋯.” 


언뜻 귓가로 윤아, 아니된다. 하고 단호히 말리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설영은 그럴수록 잡아쥔 끈을 더 단단히 묶어낼 뿐이다. 설영은 해은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의 부재로 겪은 시간들이 답해주고 있었다. 


꿈에서도 만날 수 없으니 나, 당신을 따를 수밖에요.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장짓문 사이로 시녀들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늦게라도 설영의 식사를 챙겨두려던 소영의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청하에 내로라 하는 명의는 모두 일러 목숨을 간신히 붙들어 놓았으나 도통 의식을 찾을 기미가 없었다. 의원들은 환자가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열흘 후 설영이 간신히 눈을 떴으나 어떤 성음도 없이 흐느끼다 혼절했다. 잠시 깨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고 죽은듯 잠을 잤다. 불면을 견디지 못한 몸이 미룬 빚을 갚는 것이라 이르던 것과는 달리 흐드러지게 핀 도화가 질 때까지도 설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몽중을 현실로 여기되 현실을 몽중으로 여기니 잠들어 있는 것이지요. 아가씨의 꿈은 아가씨를 지탱하는 마지막 동앗줄입니다. 묵묵히 잠든 설영을 바라보던 평국공은 더 짙은 수면향을 처방하던 의원의 말을 떠올렸다. 때마침 설영에게서 얕은 음성이 들려 급히 상체를 숙여 귀를 가져다 댄 평국공은 낯빛에서 참담함을 숨기지 못했다. 설영이 윤, 이라 부를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나 천자조차도 그를 데려올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반쯤 남은 채반을 들어 넉넉히 약재를 채워넣는 것뿐.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당장 목숨을 붙여둘 방도가 있는 것으로 족하다 여겼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도언당 후문에는 열쇠 없는 자물쇠가 걸렸다. 벼루를 놓아두던 서안 위에는 약재가 쌓였다. 도화 향이 감돌던 내실에는 수면향만이 가득했다. 설영은 더이상 가리개 없이 도언당 밖을 나서지 않는다. 이따금씩 목에 생긴 자욱이 뭉근하게 아려올 때면, 주인 없는 손님방에 홀로 앉아 목덜미를 쓸어냈다. 설영은 아직도 오지 않을 손님을 기다렸다.




*



닷새를 내리 손님방에서 지내던 설영이 도언당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향합의 뚜껑을 도로 덮어두고 약재더미로 엉망이 된 서안을 정리한 뒤에야 자개함 깊숙이 넣어둔 벼루와 붓을 꺼내들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닿은 곳은 자개함에 달린 거울 속 여인이다. 성마른 손, 핏기 없는 입술, 총기를 잃은 눈빛, 버석거리는 머리칼. 모름지기 자신과 가장 친한 것은 자기라 하였으나 설영은 같은 거죽을 쓴 여인이 낯설기만 했다. 한참을 서로를 응시하던 인영이 손을 뻗어 거울 속 여인의 뺨가를 쓸어본다. 해은이 늘상 제게 그랬던 것처럼. 설영이 눈을 꼭 감았다 뜨면, 상에 비치는 모습은 더 이상 여인의 것이 아니었다. 


'윤아.'


냉한 공기를 가르고 살처럼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속에서부터 치솟는 울음을 내리 누르며 설영이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자개함 위로 검은 인영이 아롱졌다. 해은은 무언가를 유심히 살피는 얼굴이었다. 


- 어찌 목에⋯⋯.


말끝이 늘어짐과 동시에 짙은 눈썹이 이지러졌다. 해은의 시선이 닿은 것이 미처 가리지 못한 흉터였음을 뒤늦게 알아챈 설영이 옷깃을 급히 끌어올렸다. 못된 일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동요하는 해은의 얼굴에 설영은 마음이 닳았다. 저 고운 이마에 근심이 어리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늘 고아하고 청명한 저 낯이 상할까 괴로웠다. 해은이 죽고 저가 벌인 모든 일들이 그 연유가 될까, 더더욱.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 것을 가려보았자 그 자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은의 죽음이 그랬듯이. 그럼에도 설영은 분명 고해야할 것이 있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나는 너를⋯.” 

- 알아.

“⋯⋯.”

- 단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도, 너를 의심한 적도 없다.


해가 지고 나서야 설영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설영은 도언당에 홀로 앉아 마묵하며 생각한다. 이따금 붓을 멎게 하는 회의를 곱씹는다. 그러다 깨닫는다. 백윤과 함께 꾸던 꿈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음을. 사람은 죽었으나 그 뜻은 제게 남아있다. 설영은 맑은 눈으로 품었던 대의를 기억한다. 작금에 이르러 군자의 길을 건너다보는 까닭은 붓에 새겨진 문장과 다르지 않다. 화지에 먹이 물들 듯 마음에 그리하여야 한다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마땅히 선하고 의로운 것을 좇아야 한다. 둘째로 사람을 이롭게 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 셋째로⋯⋯.


수지로 목재에 새긴 글자를 훑어내리며 묵묵히 그 뜻을 아로새긴다. 이곳에 나의 쓸모가 남아있다. 남겨진 생의 무게를 지며 나, 살아야겠노라고. 

해은이 유명을 달리한 지 꼭 한 해가 되던 날, 닫혀 있던 도언당의 문이 열렸다.








평국공 노태사 단세민의 장손녀, 어사중승 단윤명의 적장녀.

658년 3월 6일 오시 출생.

청하 단 씨 2남 1녀 중 장녀. 측실을 두었으나 드물게 그에게서 후손을 얻지 않아 단가 적손만 셋이었다. 위로는 두 살 터울의 오라비와 연년생의 남동생을 두었다. 삼남매가 우열 가릴 것 없이 용모가 준수하고 머리가 비상하여 셋 모두가 문관의 길을 택했다. 


 


별호는 도언濤彦. 별당의 이름 자를 따서 도언이라 불리었고, 열다섯에 관례를 치르고서는 해윤이라는 자를 받았다. 제 오라비와 남동생을 포함한 친족은 설영 대신 설아設阿라 부르는 일이 잦았다. 윤아倫阿. 설영을 그리 이를 때면 덤덤한 낯에 침잠하듯 깊은 우울이 번졌다. 유명을 달리한 정인과 함께 묻은 이름이었기에.




고생 하나 모를 법한 단 가의 적손 아기씨는 어릴 적부터 무예를 즐겨 활솜씨로 도언 그 두 글자를 알렸다. 무언가를 쥐고 매만지고 들여다보는 습성은 특히나 궁술에서 빛을 발해 황자들과도 그 실력을 견줄만 했다. 굳은살 박인 수벽과 수지, 연약한 살갗 위로 희미해진 생채기들. 타고난 그릇에 노력이 더해지니, 산수 마저도 슬하에 둘 것이라 여긴 평국공이 무관의 길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설영은 붓으로서 더 넓은 세상을 그리고자 했다. 샛문에 달린 족쇄를 견디지 못해 담을 넘고, 말을 타고 드넓은 초원을 그리는 성정을 지녔음에도 제 발로 궁에 묶이길 택한 것은 제 유년의 이름을 닮은 한 소년 때문이리라. 




말투며 행실에서 온전히 사랑 받고 자란 태가 났다. 올곧고 언사 내뱉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나 그렇다하여 말 마디가 가볍지도 않았다. 총기 어린 맑은 두 눈은 곧 미추를 알아보는 특별한 안목이었다. 군림하려 한다면 취할 수 있었음에도 제 손이 닿지 않는 바닥까지 굽어 살피는 이. 법도 위에 놓인 귀함을 알아보는 이. 신분지하를 막론하고 설영을 따르지 않을 이가 없었다. 

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된다한들 신분조차도 설영이 지닌 심성을 해치진 못했다. 외려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나누고자 했다면 모를까. 태자비 신분으로 아란궁에 거처를 옮기고서 설영이 가장 먼저 벌인 일은 제 몫으로 배정된 봉급을 청하의 흉년을 거드는 데 자금을 편성한 것이다. 내명부의 일원으로서 궁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을 적에도 청하시절 도언당의 담을 넘듯 종종 아란궁의 담을 넘어 상평창의 일손을 거들기도 했다. 

설영이 월담하는 일이 공공연하여 태자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때, 시녀 소영의 옷을 뺏어 입고서 출궁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암행을 나간 태자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설영을 따르는 새끼 궁녀만이 대경실색하여 태자비 마마! 하고 외쳤으나 설영은 담담히 제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댈 뿐이었다. 제 몫의 불경함보다는 이곳에 혼란을 일어 관리들의 시선이 집중되면, 마땅히 구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할까 염려한 것이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태자비 마마를 용서하시어⋯. 궁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자는 의복을 뺏어입은 설영을 보고 외려 대소하며 설영의 궁밖 출입을 황상에게 청했다.

간혹 그 청렴함을 시기한 자들이 선의를 가식으로 폄하하곤 했으나 설영은 개의치 않았다. 묵묵히 자신이 마땅히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고, 걷고자 하는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사람이 지닌 귀함과 선의를 알았고, 가장 천한 이들조차도 의로서 갈고 닦으면 그가 지닌 귀함이 도로 빛을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따금씩 혜민서에 머무는 아이들이 무릎과 손바닥을 더럽혀가며 노닐면,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물가에 데려가 소매에 묻은 뗏국을 지워주는 것이 입궁한 이래로 설영의 가장 큰 낙이었다. 황후가 된 설영의 곁을 늘 지키던 호위대장 역시 설영이 혜민서의 아이들에게 궁술과 글을 가르치며 만난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설영이 온 마음을 다 해 얻은 호의와 신의는 설영이 지닌 가장 큰 무기였다.


 


일 년에 한 번 꼭 궁을 비우는 때가 있다. 천하의 주인이라 일컫는 황제 조차도 황후의 출궁을 막지 못하니, 그 연유를 아는 이 마저도 쉬쉬하며 제 발로 침묵하길 택했다. 함안 태자의 독살과 설영이 겪은 한 해가 넘는 공백은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다들 짐작할 뿐이었다. 

궁을 나서는 설영은 하사 받은 옥빛 도포를 쓰고 있다. 결 좋은 비단 소맷길에는 손목을 따라 도화를 연상케 하는 은실 자수가 놓여 있다. 격식에 비해 소박하여 지나치던 궁인의 의아할 즈음 바람 불면 도포 안쪽으로 새하얀 빛이 일렁인다. 안감 가득히 수놓인 안벽과 구름 속에 난초 한 떨기가 수 놓여 있다. 촘촘하고 어지럽게 그려진 풍경 틈으로 오직 이목은 난초에만 집중된다. 좀처럼 꺼내 입는 법 없으나 이따금 꺼내어 걸어두고 묵묵히 바라보던 그 옷. 설영은 도언당 아래 복사꽃 비가 흠뻑 내리던 그 시절을 상기한다. 그럴때면 선처럼 가늘게 흉이 남은 목덜미의 자욱이 아려오고 제 시간은 청하의 그곳, 그와의 첫만남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기나긴 이별은 슬픔을 무디게 만들었으나 그가 남긴 추억까지는 모조리 지워낼 수 없었다.  


 


 

⋯⋯윤아倫阿.

어찌 해묵은 이름을 입에 담으십니까. 신첩은 오래 전 그 이름을 영영 꺼내어 볼 수 없는 곳에 묻었습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