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당신과 내가 주연인 연극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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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죽음이 나의 악몽이요 그대의 웃음이 나의 행복인데 이것을 사랑이라 칭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우연히 발견한 책을 별생각 없이 펼쳐 짚은 구절이 이래서. A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본다. -짓이라. 문장 끝에 남은 아쉬움에 다시 그대-, 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섯 번쯤 읽었을까. 괜히 간지러운 마음에 고작 한 문장 읽은 책을 다시 덮어놓고 본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 높은 책장 사이를 지나, 고서가 잔뜩 쌓인 책상에 기대 잠시 기다리면 약속 상대가 나타난다.

“전에도 물어봤던 건데, —에 와이파이가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 아주 빠르지.”

“그리고 C 당신은 뉴욕에 살고요.”

“—에 거주 중이지.”

“메일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받을 수 있을 텐데요.”

“물론이지. 하지만 너도 뉴욕에 살잖나. 이웃끼리 얼굴도 좀 보고 살자고.”

사람 참 안 변한다, 가루가 됐다 돌아와도 똑같네. 아마도 대화를 나눈 둘 모두 했을 생각이다. 그래도 관계는 참 잘도 변해서, 800만 인구 뉴욕에서 이웃 농담을 던질 정도는 됐다. 기록을 위해 꺼내놓은 종이를 펼쳐놓으며 C는 A에게 물었다.

“뭐, 여전한가?”

“여전하죠.”

“별일은 없고?”

“특이 사항 없어요.”

지난번보다 확연히 짧은 대답에 C는 한쪽 눈썹을 올려 의문을 표한다. 그러나 맞은편의 A는 딱히 더 긴 대답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잠시 아래층을 내려다보는 듯하더니, 무언가 알아차린 C가 먼저 한숨을 내쉰다. 항복의 뜻이었다.

“그래, 그래. 별문제 없는 것 잘 알겠으니, 얼른 데이트나 하러 가.”

C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A에게 말했다.

“그럼 가볼게요. 다음번엔 냅다 제 앞에 포탈을 열기 전에 부디 메일함을 확인해 주시고요.”

티 나게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한 A가 경쾌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데이트를 방해했다, 그거지. 뒤늦게 확인한 메일함에는 일정이 있으니 이번 보고를 하루 미루자는 메일이 도착해있다. 딱히 사과할 마음도 없었거니와 사과를 받을 사람은 벌써 — 입구에서 일정을 함께할 사람을 만나 떠났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이렇게 바로 앞까지 데리러 올 필요는 없었는데….”

“신사의 기본이지. 자신의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것.”

과장된 몸짓과 함께 한쪽 팔을 내미는 B에 소리 내 웃은 A가 자연스럽게 B의 팔 위로 손을 올린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골목을 지날 때마다 A의 옷은 초록빛과 함께 하나씩 바뀐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일렁이는 흰 빛의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밝고 반짝이는 드레스가 입혀진다. 그다음에는 구두 신겨지고, 그다음에는 가볍게 걸치는 숄이 바뀌고, 마지막에는 지난번 쇼핑에서 A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던 디자인의 귀걸이가 A의 귀에 걸려있다. 상당히 격식을 차린 것 같은 옷은 아마도 A와 팔짱을 끼고 있는 B와 맞춤일 것이다.

“역시, 잘 어울리네.”

“그래요? 고마워요. B도 멋져요.”

“무척이나 아름답고.”

“음…, B도요.”

쏟아지는 칭찬에 부끄러워하는 A를 보며 B는 귀여워하는 것일지 만족스러워하는 것일지 모를 미소를 띤다. 물론 그가 입은 옷도 A의 말처럼 아주 멋을 부린 것이었다. 지구에서 지내며 자연스럽게 파악한 유행과 그의 패션 센스를 합쳐놓은 정장은 B의 큰 키와 미모를 빛내기에 충분했다. A를 데리러 나오기 전 B가 한참을 거울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디테일을 바꿔댄 것은 당연히 A에게 비밀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한, A가 할 액세서리와 색을 맞춘 포켓 스퀘어가 포인트였다.

B의 마법으로 A의 잔머리까지 정리될 즈음, 둘은 거대한 극장의 입구에 도착했다. 며칠 전 함께 봤던 영화의 원작인 오페라가 상영될 곳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A를 흘긋대던 B와, 그런 B의 눈빛이 간지러워 내용에 전혀 집중 못 한 A였기에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시야가 좋다는 박스석에 앉아 무대가 시작되길 기다리면서 B는 제 손가락 사이로 들어온 A의 손가락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옭아맨다. 단단하게, 하지만 아프지는 않게 깍지를 껴오는 것을 느끼며 A는 이번에도 B가 집중하지 못할 것을 알아차렸다.

- ♩ ♫ ♬

커튼이 오르고, 무대를 제외한 극장 안이 어두워진다. 오늘마저 A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지 B는 손을 잡은 채로 얌전히 무대를 바라본다. 화려한 장치와 발랄한 노래, 극적인 대사가 오가고 A는 영화를 볼 때 이해하지 못했던 흐름을 완전히 따라잡는다. A가 극에 완전히 몰입한 걸 알아차린 B는 그제야 살살 A의 손등을 쓸어본다. 사랑에 빠진 두 청춘, 그들을 방해하는 다양한 상황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연인은 노래한다.

- 아아, 내 삶을 그대에게 바치나이다

- 나 역시 내 미래를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 내 삶과 그대의 미래, 이건 당신과 내가 주연인 연극일 테니

- 이제 우리 앞에, 앞에 남은 것은 행복한 결말과 우리가 함께하는 커튼콜

클라이맥스에서 부르는 달콤한 가사에 A는 이곳에 오기 전 읽었던 책의 구절을 떠올린다.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오페라의 주인공들은 행복해 보였다. 세상이 어떤 고난을 주어도 함 견뎌내며 사랑하는 연인의 이야기에, A는 제 옆의 애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짙은 녹빛의 눈동자에, 오롯이 A가 담겨있다. A는 B의 웃음을 마주하는 이 순간이 못 견디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이야기였네요.”

A가 속삭인다. B는 한참을 만지작거린 A의 손을 들어 입 맞춘다. 뻔한 이야기야. B가 마주 속삭인다. 극장 정중앙의 박스석은 생각보다 프라이빗한 공간이었고, 사실 밖에서 좀 본다고 해도….

“뻔한지 어떻게 알아요.”

가까워진 거리에서 A의 속삭임이 더 선명하게 들린다. 입술에 가볍게 한 번, 귓가에 가볍게 한 번. 쪽 소리와 함께 떨어진 B는 바로 A의 귀에 속삭인다.

“당연히 알지. 우리가 지금 행복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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