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의 법칙
미쳤냐니? 제정신이야.
시작은 아버지가 주식투자를 아주 크게 실패한 것이었다. 수진은 당시 공부도 잘하고 인망도 좋은 열아홉살이었다. 막 대학에 가야할 나이에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은 것이다. 물론 수진은 등록금으로 쓰기 위해 아껴놓은 돈이 있었다. 하지만 아래로 두 명 있는 동생들을 보면 차마 제 알량한 지식욕 하나 채우자고 그 어린것들 밥을 굶길 순 없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때 수진은 상당히 도덕적이었고 제정신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수진은 나이가 약간 많은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시대상 으레 그랬듯 -어쩌면 좀 더 형편 좋게도- 대학을 가지 않은 여자는 결혼을 해야했다. 남자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명문대를 나온 성실한 월급쟁이가 남편이란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문제는 수진이었다. 이 지랄맞은 여자는 남자가 약간이라도 선의를 베풀면 꼭 자신을 동정했단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수진은 남자를 거부했다. 그가 자신을 기다려줄때도, 배려해줄때도, 수줍은 연애편지를 한 글자씩 정성들여 쓸때 조차 무시했다.
그에게 마음을 열기라도 하면 제가 그렇게 원하던 명문대학의 남정네놈에게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일방적인 연애가 끝난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봄이었다. 이별통보 하나 없이 죽은 그는 수진의 앞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신재강회의 테러라고 신문 전면에 보도가 났다. 신문과 그의 시체를 한 번씩 번갈아 본 그 즉시 수진은 그를 죽인 사이비 종교 단체로 친히 찾아갔다.
대책은 없었고 수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벌인 테러 사건의 범인을 내놓지 않으면 한 명씩 죽이겠다고 비명을, 비명을 질렀다. 그때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그 칼 내려놓지 그래? 네 손만 다칠걸.’ 처음 칼을 잡는 방법을 알려준 게 앞으로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스승이 되어준 경아였다. 이후에 알았지만, 경아는 조직 내에서도 아주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어째 경아는 수진을 마음에 들어해서 종교조직 내로 들였다. 그리고 이 종교 -경아는 사이비 단체를 종교가 아닌 조직이라 불렀지만-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수진은 경아에게 배운대로 이단심문관 일을 했다. 종교 내에서 배반자가 있으면 고문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회개하도록 유도하고,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희생양을 물어뜯는 일이었다.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곧 꽤 즐겁게 느껴졌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경아는 수진에게 ‘잘 할 수 있다’ 라고 말해주었고, 그 행동은 수진으로 하여금 더 가혹한 행위를 할 수 있는 동기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이단 심문관 일을 4년이나 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는 잊은 지 오래였다. 수진의 옷에선 담배 냄새가 났고 눈은 빛나지 않았다. 수진은 이 일을 제법 즐겼지만 어느 순간 따분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4년차 겨울에 경찰로부터 사이비 종교의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오며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4년 전 남자가 죽은 테러를 계획한 게 경아라는 사실이었다.
수진은 그 사실을 알고 경아를 죽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백명을 고문할 때보다 약한 자극이었고 몇 천명을 테러로 죽일 때보다 아무 느낌 없었다. 지루한 일상에서 한 가지 마침표를 찍어줄 사람이 생겨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수진은 그대로 감옥에 갔다. 당연한 순서였고 딱히 변명할 마음도 없었다. 그때 찾아온게 국안특전이었다. 딱히 이야기할 거리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대충 이야기했다. 신재강회에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건 없으니 굳이 그들이 자신을 보석금을 내고 구출해줄 생각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국안특전의 백도소대 측에선 ‘사정을 봐주겠다’ 말했다. 수진은 그 모습이 재밌다고 생각해 백도 소대에 들어왔다.
수진은 제정신이었다. 정말로 제정신이고 싶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죄책감에 짓눌려 제정신이 아니게 된 때에서야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제정신이다.
관성의 법칙과도 같은 철로 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리 생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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