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이걸로 모든 존재를 지운다.

하나의 세계를 부수며

이수진이 누구인가?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동시에 가진 기묘한 이상성애자, 한마디 말도 없이 정해진 대로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냉혈한, 그러고서 남편의 복수를 할 때는 줄줄 울었던 미친 여자.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녀는 모순적이었다.

수진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경아는 그런 수진을 바라보았다. 짧은 곱슬머리의 여자의 한 쪽 눈이 무기질적으로 수진을 바라본다. 푸른 눈의 여자와 죽은 회색 눈의 여자가 대치했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에요, 도박으로 집안 밑천까지 싹 날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사기꾼이나 도박사를 보면 지긋지긋하거든요."

녹색의 길다란 생머리를 가진 여자는 칼을 들고 덜덜 떨며 말했다.

"나조차 당신을 증오하지 않는데 당신은 왜 날 증오합니까?" 

경아야, 너가 왜 나를 증오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나조차 너를 증오하지 않는데 너는 왜 날 증오하니. 


두가지의 성향을 가졌단 건 하나의 성향이 채워지면 하나의 성향에 갈증을 느낀다는 말이다. 마조히즘이 채워지면 사디즘을 느꼈고, 사디즘이 채워지면 마조히즘을 느꼈다. 스스로와 누군가를 학대해야만 하는 버릇이 여실히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늘 희생하며 헌신했던 로맨티스트는 채워지지 못하는 감각에 취한 마조히스트였고, 그 결여된 감각을 타인에게 푸는 사디스트였으며, 순애라 믿은 친구와의 관계는 기묘한 집착일 뿐이었다. 

여자는 상대가 아닌 자신만 병들게 만들었다. 타인이 자신을 발판 삼아 올라가길 기도했다. 깊은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타인에게 받는 감정은 물들고 그런 것들이 스스로를 좀먹고 살아간단 사실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친우인 그녀가 자신을 증오마저 했단 사실을 알게 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냐는 말이야. 좆같게."

그녀는 허공의 환영을 향해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네. 전부 제 탓이죠. 당신 탓은 없어요, 수진.”

경아가 담배 끝에 불을 붙이자 천천히 타들어갔다. 이수진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윤경아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나 하기로 결심했다.

“저는 오랫동안 그렇게 말해줄 사람을 기다렸어요.”

연기가 허공으로 퍼져간다.

“당신은 저와 다른 사람입니다. 걸어온 길도 다르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데다 신체로 나뉘어져 있는 한 우리는 남이고요. 하지만 당신이 그 꼬라지가 되고 난 후에 계속 생각을 해봤단 말입니다. 왜 당신을 보면 계속 화가 나는지.”

화가 나고,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고,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은 상황에조차 감정에 휘말려야했다. 윤경아는 조직이라는 안온한 불행속에 살았으니 새로운 이물질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요. 나는 당신을 나와 비슷하다 생각한 주제에 동정하고 있던거야. 그러니까 씨발, 이게… …괴로웠던거지. 엉망으로 추락시켜놓은 게 나란 사실도, 그런 당신을 정면으로 마주봐야한다는 사실까지.”

경아는 눈을 감고 느긋하게 웃어보였다.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양팔을 벌리고 누웠다.

“...자. 찔러.”

양팔을 벌리고 순순히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꼴은 정말이지, 주제에도 순례를 기다리는 어느 성자 같아 불온하기까지 했다.

윤경아는 이게 제 마지막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다시 시작하기엔 늦어버렸고, 지속하기엔 지쳤으며, 새로운 감정은 이전의 감정을 아프게 만들었다. 죽을때만큼은 증오하고 싶었다. 너무 오랫동안 사랑에 찌들어 살지 않았던가. 


난 당신을 증오한다. 그렇기에 애정하고 싶었다.

결국 죄 어쭙잖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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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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