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히카휘틀]과실의 이름은
자캐 빛전 설정 과다 함유 O
-가내 빛의 전사 설정 (남비에라 / 이름 란와) 설정 짙음
숲의 수호자 란와. 그는 따라올 자가 없는 활잡이었다.
그러나 숲이 불탔던 그날, 그는 활 대신 창을 들었다. 제국인이 사용하는 총 앞에서 활은 무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창을 버렸다. 제1세계의 빛에 저항하기 위해선 보이드의 어둠을 끌어와 균형을 맞춰야 했다. 란와에게 낫을 건네던 갈레말인은 이렇게 말했다.
-갈레말인은 마법을 쓰지 못한다. 그렇기에 어둠의 요마와 계약해 공격하는 리퍼의 기술이 생겼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초대 황제, 솔 조스 갈부스는 갈레말의 독 같은 인물이야. 그렇기에 리퍼의 기술로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에오르제아의 영웅. 네가 우리의 못 다한 한을 풀어주겠다고? 그렇다면 리퍼의 기술을 전수해주마.
란와는 약속을 지켰다. 그들이 알려준 기술로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죽였으니까.
이제 그는 원초세계의 빛의 전사였으며 제1세계의 빛을 몰아낸 어둠의 전사였다.
세상은 조화로워졌고 사람들은 평화를 누렸으며 밤낮없이 고생했던 새벽 일행은 건강을 되찾았다. 란와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공허해.
밤에는 잠들 수 없고 원초세계로 돌아왔을지언정 시시때때로 제1세계에 들리고 만다. 에메트셀크가 만든 환영의 도시의 조명을 바라보고 앉으면 고요 저편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란와는 아모로트에서 주운 아젬의 소크를 꽉 쥐었다. 환청이야. 이건 환청이야. 설령 아모로트에 종말의 재앙이 닥쳐온다고 한들 내가 지키는 건…… 지금의 분단된…….
란와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늦게 찾아온 PTSD를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공포와 좌절을 겪은 사람은 야수가 됐다. 그리고 야수는 다른 야수를 불러들였다. 우리는 명백히 종말로 나아가고 있었다.
해결할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과거로 돌아가면 실마리가 있을지 모르잖아. 일단 가능한지는…… 제1세계로 돌아가서 확인해봐야겠지만. 그리 이야기하는 란와의 낯빛은 평이했으나 사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당신, 정말 괜찮은 거야? 무리하지 않아도 돼.”
“정보를 모으는 건 이쪽에서도 할 수 있어요. 라나, 당신은 쉬는 게 좋아 보여요.”
“괜찮아. 아직 움직일 수 있어.”
란와가 웃어보였다. 이럴 때면 예전에 쓰고 다니던 개구리 탈이 떠올랐다. 개구리 탈을 쓰고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면 다들 괜찮은 줄 알고 보내줬는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니 허전하다. 란와는 손을 뻗고 과할 정도로 휘두르며 자신이 건강하단 사실을 어필했다. 그래봤자 새벽 일행의 얼굴 색은 어두워졌지만. 그러나 세계의 존망에 걸린 문제인지라, 그들도 이 이상 란와를 붙잡을 순 없었다.
“자네가 그렇다면 알겠네. 허나, 조심히 다녀오게. 우리 쪽도 온힘을 다해 조사하고 있을 테니까.”
“응. 너무 무리하면 안 돼, 알피노.”
알피노의 배웅을 뒤로 한 채 제1세계로 향했다. 다행히 리위나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녀가 정중하게예법을 갖춰 인사했다. 성견의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출입증을 받을 수 있냐고 묻자 곧바로 리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천천히 다녀와.”
딱 좋게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이 생겼다. 란와는 여관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뒤, 심호흡했다. 머릿속이 온통 어질어질했다.
‘젠장….’
근 한 달도 안되는 시간동안 혹사시킨 몸은 긴장이 풀리자 급격히 늘어졌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일을 많이 치긴 했어. 제국으로 향해 바브일 탑을 점거했으며 태초의 야만신, 조디아크를 토벌하고 그 직후 종말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사방을 뛰어다녔다. 1초에 수십 명이 죽어가고 있단 생각을 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일이 끝나면 좀 쉬어야지.’
란와는 식은땀을 닦으며 미래를 생각했다. 알피노와 알리제도 어린나이에 고생했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같이 좀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을 듯 했다. 아니면 아예 낚시는 어떨까? 왜, 어부 길드에서 주기적으로 띄우는 승리호에 타서 싱싱한 생선을 낚아올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해체해서 회로 먹으면 맛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래, 그리다니아의 우거진 숲으로 꽃을 보러 가는 것도 좋겠다. 그곳은 내가 지키던 성지와 닮아서 마음이 편해지니까.
“어둠의 전사님. 성견의 방 출입 열쇠를 가져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응? 응. 잠시 옷이 젖어서…. 금방 나갈게.”
란와는 거울 앞에 서 표정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부디 종말의 단서를 얻을 수 있길 바랬다.
-*-
에메트셀크가 탄식했다. 일이 귀찮게 늘어지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빤히 보이는 눈이었다. 엘피스의 정원을 둘러보던 휘틀로다이우스가 그런 친구를 향해 잔망스럽게 웃었다.
“너 말이야, 너무 표정에 대놓고 들어나지 않아? 피곤하다던가 귀찮다던가. 그러면서 걱정된다는 얼굴 말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면서.”
“후후. 그건 부정할 수 없겠네.”
“그래서. 그 녀석은 어디갔지? 우리에게 ‘종말이 찾아올 겁니다~’하고 뻔뻔하게 폭탄을 떨어트려놓고 사라져버린 건 아니겠지?”
“아. 그라면 저기에 있어.”
휘틀로다이우스가 고개를 돌리자 에메트셀크 역시 그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보였다. 아젬의 색과 똑닮았으나 미약하기 짝이 없는 에테르가.
“잠시 산책한다고 했거든. 아마 저쪽에서 분수를 보고 있지 않을까? 여기 올 때부터 그랬지만, 계속 피곤하단 얼굴이었으니까. 가볼 거야?”
“그 녀석은 요주 인물이야.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지.”
곧바로 란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란와는 혼자 있지 않았다. 다른 고대인이 란와를 붙잡고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젬님의 사역마니? 전투에 능하다면 나를 도와줄 수 있겠어?”
“무슨 일인데?”
“말도 할 수 있구나. 보기 드문 사역마네. 저기 있는 거대한 발톱이 달린 창조물이 보이니? 보지 못한 사이 개체 수가 너무 많이 늘어났거든. 좀 줄이고 싶어서 말이야. 혹시 가능하면 네가 제거해줄 수 있을까?”
“응. 바로 처리하면 돼?”
“그래주면 좋고.”
란와가 무기를 꺼냈다.
에메트셀크는 뒤따라온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말했다.
“숨어.”
“응? 잠깐, 왜?”
“전투하려 하는군.”
“그러네. 어…? 낫이잖아? 전에는 활을 사용했지 않았어?”
“비장의 수가 있단느 걸,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리고 숨기는덴 이유가 있었을 테고.”
하여튼 의심스러운 녀석이라니까. 에메트셀크의 시선이 란와를 고정했다. 그는 달려드는 짐승들을 낫으로 단단하게 붙잡고 쳐낸 뒤, 달려들어 목을 베어냈다. 가만 보니 그냥 낫을 무기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등 뒤에 이상한 것도 달고 있었다. 어둠 속성에 무척 치우친 영혼 말이다.
싸우는 걸 관찰하는데, 제법 신기했다. 웬만한 사역마가 아니란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안으로 찌르고 베어내는 힘이 상당했으며 혈투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저흴 공격하는 적에 무리를 지어 복수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수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투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와. 능숙하네……. 솔직히 눈으로 따라잡는 게 고작이야.”
“그래. 그렇지. 역시 평범한 사역마는 아니야.”
“아니긴 하지……. 왜, 아까 들었잖아? 평범한 사역마가 아니라…….”
“아젬의 일부.”
에메트셀크의 말은 단조로웠으나 어투만은 그렇지 않았다. 분노. 짜증. 귀찮음. 절망. 애탄. 좋지 못한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 휘틀로다이우스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너, 왜 그렇게 화났어?”
“화난 거 아니다. 기분 나빠서 그래.”
아젬과 연관된 건 귀찮다. 그와 연관된 건 문제 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젬’자리의 역할이지, 문제를 만들어오는 게 아닐 텐데. 그렇게 이야기해도 아젬은 늘 꼬장꼬장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내 앞으로 끌고 와야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주둥이를 몇 번이나 치고 싶었던가?
봐라. 저것도 문제였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 화산 분화 문제, 사람 여럿을 죽인 이데아 논란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종말이 닥쳐올 미래를 아는 아젬의 조각만큼 큰 문제는 되지 못한다. 저놈은… 무척 께름직한 존재였다.
“아젬의 조각이라고 해서 내가 저 녀석을 왜 좋아해줘야 하는 거지? 저 녀석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어디 있냔 말이야. 게다가 말이지, 저 녀석은 어중간하게 아젬을 닮아서 더 짜증나.”
죽은 친구 몸에서 손목이 떨어져 나가 손가락으로 걷고 있는 걸 본 기분. 딱 그런 느낌이었다.
“저 녀석이 우리에게 정보를 캐내려는 것처럼. 우리도 딱 그정도면 돼.”
“흐음……. 네 생각은 그렇구나.”
“뭐야, 그 말은. 사람 놀리나?”
“아, 아니. 조금 저 애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디가?”
휘틀로다이우스가 후후후 웃었다.
“저 애가 너를 많이 아끼잖아. 눈만 봐도 알겠던데.”
“저 녀석이?”
“응. 내 눈엔 그래보이던걸. 너도 할 말 많아 보이고. 역시 신경 쓰이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신경을 쓸 수밖에…”
“아젬 말이야.”
휘틀로다이우스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아젬. 에메트셀크는 제 친구가 앉은 자리의 이름이자, 이제는 그를 나타내는 언어를 입 안에 되새김질했다.
“저 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쨌든 아젬의 일부가… 너를 죽인 거 아니겠어?”
그런데 왜, 생각해봐. 얼마전에 아젬이 말했잖아.
-어느날 우리가 크게 싸워서 내가 너희를 죽인다고 생각해봐.
-뭔 말도 안되는…
-어떨 거 같아?
에메트셀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각해볼만한 토론주제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럴 일이 없다는 이야기로 결론 났었지.”
“맞아. 그런데…… 어쩌면 아젬은 미래를 봤을지도 모르겠네. 왜 우리가 에테르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젬은 영혼이 가진 가능성… 이른바 미래를 볼 수 있었으니까.”
너무 아젬과 그 아이를 따로 생각하지 말아줘. 아젬이 논쟁을 던진 것도. 그리고 오고 싶어했으면서 이곳에 오지 않은 이유도. 나는 그 아이에게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때였다. 위부터 아래까지 단숨에 내리치는 굉음이 터졌다. 와, 정말 대단한데. 정말 저 아이가 사역마였다면 누구나 탐낼만한 사역마였겠어. 휘틀로다이우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지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며 턱으로는 땀 한 방울이 흘렀다.
전투가 끝나자 고대인은 양손을 꼬옥 붙잡은 채 란와에게 다가갔다. 정말 고맙다. 덕에 살았어.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헤르메스 소장님께 어떻게 보고했을지. 아젬님께 감사를 표해야겠어! …물론 다음에! 아, 맞다. 보상이라 하기엔 뭐하지만, 받아줄래? 이 근처에 자생하는 나무의 열매야. 확인해 봤는데 독은 없어. 너는 사역마니까 음식을 먹어야 하잖니. 한 일에 비해 별 대단한 보상도 아니었지만, 란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건지 미소 지었다.
“정말 고마워.”
에메트셀크는 휘틀로다이우스를 끌고 자리를 피했다. 잠깐, 말 걸어보는 거 아니었어? 할 말 없어. 에메트셀크가 일축했다.
…아젬과 닮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젬, 그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깜짝 놀라울 정도로 호의만 보이던 녀석이었기에. 똑 닮은 영혼으로 이리 거리를 두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뭐 문제 있나?’
유독 거대한 나무 위로 올라가 풍경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엘피스는 참 아름다운 곳이다. 하늘은 푸르렀고 그 아래에서 자라는 생명들은 원기가 넘쳤다. 너무 과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해서 부족하진 않게 제어되는 세상. 시간이 멈춘 세상 같았다. 모든 게 한결같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한 때 에메트셀크가 왜 그리 고대에 집착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이곳에 오고 몸 상태도 괜찮아졌다. 잘 먹고 잘 자고. 에메트셀크에게 다가가면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리고 귀찮은 티를 숨기지 않으며 에테르를 나눠줬으니까. 근 한 달 중, 가장 상태가 좋아서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사람 관계는 몸 상태가 좋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에메트셀크는 에테르는 나눠줄지언정 호의를 보이진 않았으니까.
꼿꼿하게 눈썹을 구겨대는 거라던지 하나하나 시비조로 대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는데 가끔 가다가 이것저것 캐묻는데 내용 하나하나가 가관이었다.
-네 동료라는 작자가 있다며. 누구들이지? 그 녀석들도 너처럼 영혼이 약한가?
-분명 몸을 꼼꼼히 보강해줬는데 이 정도 움직였다고 배가 고프다느니 졸렵다느니. 정말 약해빠진 몸뚱이로군. 미래의 인류가 다 이렇다고? 하.
‘왜 시비지,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란와는 나름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원초적인 응어리가 몇 개 있었다. 란와가 지켰던 숲에 침범한 것. 그가 아끼는 제자들을 제국군의 군대를 통해 죽여버린 것. 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숨통을 시시각각 위협한 것까지. 그러나 이 모든 울분은 과거 에메트셀크를 제 손으로 죽이며 풀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제로로 돌아갔다고, 그러니 이번에는 내 쪽이 먼저 협력관계를 제안해야 한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왜 시비지, 진짜. 내가 어디서 잘못했나? 그냥 자기 친구 아젬 조각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드는건가?
-넌 그 영혼의 소유자니까. 조금 다를 거라 생각했어서 말이지.
-뭐가?
-어쩌면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이야기지.
일전 에메트셀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내가 아젬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 특별히 선심 쓴다고 해놓고는 이젠 박하게 평가한다니.
완전 자기 멋대로구만.
그런 줄은 알았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발 밑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너.”
“나?”
“그래.”
에메트셀크였다. 옆에서는 휘틀로다이우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저기까지 갔지? 궁금해 하는 목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가볍게 그들의 앞에 떨어져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 와! 어디 다치지 않았어?”
“나는 점프력이 좋아. 저기 하늘을 나는 용… 음, 여긴 용이 없지, 참. 눈에 보이는 거라면 뭐든 점프해서 닿을 수 있어.”
“기술력이야? 아니면 조각났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
“음. 내 종족은 대체로 점프력이 좋아. 물론 나는 조금 더 공부한 거지만. 비행 생물을 잡을 일이 좀 많이 있었거든.”
“들을수록 흥미로워. 네가 여기에 오래 있었다면 한 번쯤 너를 창조물 관리국에 데려가보는건데. 전에 말했었나? 나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어. 보통 새로운 이데아… 그러니까 창조물 종류에 허락을 내려주지만, 종종 대토론실에 자리를 빌려 ‘적합한 이데아’에 대해 논의해야 하거든.”
만약 너를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이것저것 배울 수 있을 텐데. 휘틀로다이우스가 란와의 손에 스스럼없이 손을 뻗었다. 높은 곳에 떨어져 볼 앞쪽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해주자 란와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음….”
“왜?”
“날 너무 동물보듯… 보는 거 아닌가 싶어서.”
“아, 그런가? 그렇지만 불쾌하진 않았지?”
묘하게 당당하다. 보통 여기서 사과를 하지 않나?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당황한 거였을 뿐이지, 불쾌한건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이번에 알아낸 게 있어서. 네가 말했던 엘피스 꽃 말인데…….”
휘틀로다이우스가 란와가 대화를 나눴다. 에메트셀크는 그걸 옆에서 불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휘틀로다이우스를 대하는 게 익숙하면서도… 다르군.’
헤르메스나 저에게 보였던 반응과는 다르다. 조금 더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미래에 환영으로나마 휘틀로다이우스를 만났다고 했지. 나와 다르게 대립하지 않고 잘 지냈다고? 웃기는군. 아젬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래. 이 녀석은 아젬이 아니야… 아젬이 아니라고.
에메트셀크는 란와가 아젬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너무 약했고. 너무 미약했고. 너무 작았고. 그런 이유를 하나하나 꼽고 있는데 문득 란와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줄게.”
“뭐?”
“싫으면 버려도 돼. 대신 남에게 던지진 말고.”
“너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무슨 소리야?”
“괜한 일 가지고 나한테 툴툴대면서 금방 눈치 보고. 그러면서도 하지 말라는 일은 따박따박 하고. 한 오 분 뒤쯤에는 다시 모르는 척 하고 말이지. 다섯 살 짜리 애처럼 말이야.”
솔직히 네가 이러는 이유를 잘 모르겠단 말이지.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더 있었나? 에메트셀크의 이야기에 란와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잠시 뿐이었지만, 그걸 놓칠 에메트셀크가 아니었다.
“호오, 뭔가 더 있었나보군.”
“없는데.”
“눈 피하지 마. 누굴 닮아서.”
에메트셀크가 이쪽 길을 막아섰다. 낭패다. 란와가 비에라 언어로 욕을 짓씹었다. 이래서 탈이 필요하다. 개구리 탈을 쓰고 다니면 우스꽝스럽다 비웃음 받긴 했어도 표정을 확인할 수 없어 다 넘어가줬는데 말이다.
“우리가 무슨 관계였지?”
“뭔 관계라고 할 만한 것도…….”
“와, 그거 나도 참 궁금한데.”
휘틀로다이우스가 옆에 달라붙었다. 이런 일에만 호기심을 불태운다. 만약 저들이 진짜 친구라도 됐으면 한 대씩 쥐어박으면 되는건데. 란와는 에메트셀크의 손에 들린 과육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너완 친해지고 싶으니까.”
“친해지고 싶다고? 그런 것치곤 나를 피하지 않나?”
“너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랬어. 네가 말했지. ‘아씨엔 에메트셀크’는 내가 아니라고.”
그런 추한 원념덩어리가 자신일 리가 없다고.
란와가 에메트셀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난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싫어. 그 녀석은 내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걸 가져갔거든.”
“…….”
“그렇지만 그 녀석의 죄가 네것이 아니라면…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어.”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란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망친 것이다. 허, 기가 막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싱글벙글 웃는 게, 등 뒤에서 느껴졌다.
“지나치게 솔직하군.”
“왜, 귀엽잖아.”
“저게?”
“응. 너는?”
“…뭐, 웃기긴하군.”
좋겠다. 친해지고 싶다는 소리도 듣고. 아, 나도 친해지고 싶다. 왜, 옆에 두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 매번 멀리 나가는 아젬과 달리 우리 옆에 붙어 있어줄 거 같고. 그리고 나중에 아젬에게 소개하면 두 배로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하고. 휘틀로다이우스가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줄 알았지만, 이번이 유독 그랬다. 저 녀석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가?
“그럼 더 친해지던지. 나처럼 과실도 받고 싶으면 말이지.”
“그러려면 아마 다음 에테르 보충은 내가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너와 달리 마력이 얼마 없단 말이지. 에테르를 주고 앞에서 끙끙대면 볼품없어 보이지 않을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아니면 다른 걸로 낚싯대를 던져보던지. 재미있는 창조 생물을 보여준다거나. 그런 거 잘 하잖아.”
“나쁘지 않네. 후후, 지금보다 더 친해지고 싶다. 일이 잘 풀리면 좋을 텐데. 정말 아모로트에 데려갈 수 있게.”
“이데아 허가가 나오지 않은 사역마를 데리고 다녀도 괜찮은 건가, 창조물 관리국 국장?”
“그거야 이번처럼 ‘아젬의 사역마’라고 소개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안 그래, 14인의 위원회 에메트셀크?”
흥.
에메트셀크는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손에 쥔 과육은 얼마나 품고 다녔는지 끝이 살짝 물렁해진 상태였다. 에메트셀크는 과육에 보관 마법을 건 뒤, 품 안에 넣었다.
그는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건 그가 이곳에서 일하고 얻은 보수.
다음에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과육을 돌려주는 일은 없었다.
“우린 우리 나름대로 종말의 재앙을 이겨낼 방법을 찾을 테니까.”
“네 도움 없어도 할 수 있거든.”
에메트셀크가 대검을 헤르메스에게 겨누었다. 종말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기억을 삭제하기 위해, 시침이 돌아갔다. 그 뒤로 아르고스에 매달려 하늘을 누비는 란와가 보였다.
이제는 안다.
그는 영원히 아젬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형태는 다를지언정 결국 아젬의 흔적.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가라.”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가 열어준 길로 그가 빠져나갔다.
그 흔적이 유난히 밝게 보여, 둘은 영혼의 색이 완전히 사라질 때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건 뭐지?”
“과육이잖아? 아야야… 이 난리통에 으깨지고 잘 있네. …응? 마법까지 걸었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이런 과일은 어딜 가든 있어. 내가 이걸 왜 보관해뒀는지까진 기억 나지 않지만.”
“미안해, 에메트셀크. 그리고 휘틀로다이우스…. 이런 일에 너희까지 휘말리게 해서.”
헤르메스가 사과해왔다. 기억 삭제 사고라니… 조물원 내에 있었던 일은 모조리 내 책임이야, 사과할게. 그리 말하는 낯은 어두웠고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아니야. 짜릿한 경험이었어. 휘틀로다이우스가 후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네…….”
“기억에 빈 곳이 생기니 그러는 거 아니겠어.”
에메트셀크가 손 안에 쥔 과실을 살펴보며 답했다. 끝이… 물렀군. 어차피 쓸모도 없는 거. 그대로 손에 들린 과실을 던져 버리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과실을 쪼갰다.
“석류네.”
“석류?”
“응. 먹긴 힘들지만……. 누군가 답례로 주고 간 게 아닐까?”
에메트셀크가 한 줌을 먹었다. 얼마 뒤, 남은 몫엔 소멸 마법을 걸었다.
“별로군.”
너무 일찍 수확해, 텁텁하기만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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