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난테

Edgewalker

러닝

<기다리는 것>

그레미움 침공 전일

딸랑,

이른 오후, 무겁지 않은 손길로 페인트칠이 반쯤 벗겨진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소음이 들린다. 아주 오랜만에 방문한 가게임에도 짤랑대는 풍경의 소리만큼은 변한 게 없었다. 로시난테는 고개를 들어 빛바랜 청동 물고기를 일별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부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가로로 길게 배치된 유리 전시장 위에 양팔을 기댄 채로 상체를 숙여 비스듬히 섰다. 통로에 길게 빼둔 다리를 반쯤 꼰 채로 기대듯 서 있는 자세만 보면 영락없는 불량배가 따로 없었다. 뒤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를 제하면 가게 내부는 몹시도 적막했다.

장갑 낀 손가락이 반쯤 닦이다 말아 뿌연 유리 위를 톡, 톡 두드린다. 진열장 안에 놓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값이 나가 보이는 골동품들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는 소리다. 커다란 호박이 박힌 브로치부터 세밀하게 세공되어 유약을 바른 뒤 구워낸 도자기 목걸이, 후가공을 거쳐 은 식기처럼 보이도록 만든 철제 수저, 벨벳 천 깐 상자 위에 가지런히 진열해둔 가짜 금장 액세서리까지.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이라면 호구를 제대로 잡혀 비싼 값에 골동품으로 둔갑한 쓰레기들을 샀겠지만, 로시난테는 이런 것들을 질릴 만큼 팔아 치운 전적이 있으므로 당연하게도 눈에 드는 물건도 마땅히 없었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호박 브로치인데 그마저도 가격표에 적힌 대로 고스란히 값을 치러줄 생각은 없었다. 양심이 있으면 저따위 가격으로 팔면 안 되지. 마지막으로 이 인간 아직도 쓸모없는 것들만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팔아치우는 모양이군. 인내심 있게 품목들을 살피며 가게 주인을 기다리던 로시난테의 귀에 저 뒤 구석 창고에서 땡땡땅깽깡!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인간 자주 흘리는 건 여전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삼켜낸 로시난테가 유리 진열장 위를 요란스레 두드리며 드디어 운을 뗐다.

“주인장, 안 나오나? 영업 접었어?”

“아휴, 손님이 오셨군! 금방 나갑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불만을 숨길 의지라곤 없는 신경질적인 어조에 그제야 창고에서 한참 일을 보던 주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물건이 새로 많이 들어와서요, 따위의 변명을 덧붙이며 나오는 노인은 몹시도 저자세였다. 희게 샌 머리와 굽은 어깨, 비굴한 듯 웃는 낯은 사람들에게 얕잡아 보이기 참 좋은 요소였는데, 로시난테는 저 인간이 그런 지점을 노리고 가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초 그가 전수해준 비법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비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주인장, 내놓은 물건이 왜 이따위야. 장사 제대로 안 해?”

“이따위라뇨, 손님. 아니 그리고 초면에 반말을 하면. 이게 이래 봬도 굉장히…….”

귀한 물건들인데요, 그렇게 말을 마치려던 주인장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무례한 손님의 낯을 바로 마주했다. 저 인간을 어디서 봤지? 로 시작해서 아니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지? 로 끝이 나는 다채로운 낯짝의 변화는 언제 봐도 즐겁다. 손님의 정체를 알아챈 주인장은 잠시간 말을 잃은 듯 입을 떡 벌렸다가, 이윽고 능청스레 웃고 있는 로시난테에게 대뜸 주먹을 휘둘렀다. 팔이 짧아 몸을 뒤로 빼는 것만으로도 쉽게 피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씩씩대는 주인장과 기분 좋게 웃는 손님 사이로 장식장이 놓여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어느새 반듯한 자세로 선 로시난테가 소맷단을 단정히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내리 뜬 눈이 흘끔 주인장에게 향했다.

“아니, 얼마만에 봤다고 주먹질이야. 반겨주지는 못할망정.”

“이 미친 놈. 듣기로는 길바닥에서 죽었다더만?”

“뭔 이상한 소문을 주워 듣고 다니네. 이렇게 살아 있잖나.”

로시난테가 양팔을 크게 벌리며 연극조로 지껄였고, 그걸 보던 주인장은 로시난테를 진정으로 한 대 쥐어패고 싶다는 듯 무참히 낯을 구겼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가 느린 주먹을 순순히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는 게 유일한 문제였을 것이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돈한 로시난테는 장식장 앞으로 반걸음 다가서더니, 이제는 아예 상체를 반절 즈음 굽혀 기대고 턱을 괴었다. 키 차이가 제법 나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맞은 건 그 시점이다. 그대로 주먹을 휘두르면 단번에 얻어맞을 텐데도 그렇게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도 다른 사람의 속을 긁는 데에는 도가 텄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잠시간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대던 주인장이 머잖아 낯을 풀어내고 미간을 짚었다. 비굴한 태도는 진작 가셨다지만 작은 키만큼은 여전했다.

“그간 뭐 하고 살았냐? 로난테. 어디 신분 샀다는 얘기는 들리던데.”

“엉, 이제 준귀족이야. 베르디우스 경이라고 불러도 돼.”

“미친 놈. 그래서 안 보였던 거냐? 영지 관리 같은 거 한다고?”

“그럴 리가, 그냥 여행 다녔는데?”

“아니 뭔…… 니 방금 신분 샀다매.”

“엉. 샀는데 이후로 그냥 여행 다녔다고. 정령사도 됐어. 사실 내가 말이다, 원래 마법사였거든. 그리고 기사도 됐지. 세상 구하는 ‘그’ 기사단 말야. 기념으로 간만에 얼굴 비추러 온 거니까 좋은 물건 좀 꺼내 봐. 이런 조잡한 거 말고.”

쉴 새 없이 주절대는 말 이후로, 조금 풀리나 싶었던 주인장의 낯이 웬 제정신 아닌 인간을 보는 눈으로 변하기까지는 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시난테는 내내 웃고 있었지만 얘기를 나누는 동안 몸을 바로 세우고서 양손으로 진열장 위를 짚어냈다. 말을 마친 뒤에는 고개를 휘 돌려 내부를 살폈는데, 세세히 오가는 단편적인 시선엔 몹시도 익숙한 장소를 보는 듯, 아주 낯선 장소를 보는 듯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흘끔 보던 주인장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니한테 내가 안 좋은 거 팔겠나. 네가 팔아치우면 치웠지. 뭐 찾는 거라도 있어?”

“단도.”

대답은 간결하다. 뒤이어 따라붙는 문장은 장황했다.

“손잡이가 미끄럽지 않으면 좋겠어. 조금만 힘을 줘도 단단히 붙들릴 만큼. 아주 무겁거나 몹시 가볍지는 않아야 하고, 장식이 있어도 괜찮은데 거추장스러우면 안 돼. 검집은 화려해도 상관없긴 하다만 너무 조잡해 보이진 않는 거로. 낡았거나, 손 많이 탄 것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알아서 또 손질할 거니까. 그러니까 날이 무뎌도 상관은 없는데, 무르진 않아야 해.”

“미친 놈…….”

“왜, 찾아올 거잖아.”

“정신 나간 수전노 새끼…….”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로시난테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찾아가야 하는 장소가 여기뿐만은 아니었다. 얼마 안 되는 여유시간 동안 발을 바쁘게 놀릴 계획을 세운 로시난테는 타박하듯 말을 이었다.

“한두 시간 줄 테니까 찾아두고 있어 봐. 겸사겸사 도망갈 준비도 하고. 마물이 밀려온다는데 무슨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어.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가게 두고 내가 어딜 가냐? 평생 터 잡고 살았는데 묻혀도 여기서 묻혀 죽지.”

“가만 보면 돈에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제이슨, 이 화상아.”

“그래, 그래! 이번엔 돈도 받을 거다. 돈에 파묻혀 죽어야지.”

“아휴……. 묻혀 죽을 만큼 드릴 테니 물건이나 잘 찾아두세요. 나는 공방이나 다녀오련다.”

항복하듯 양손을 들고 고개를 젓는다. 이어 무게 없는 걸음이 회칠 덜 된 문을 향한다. 재회는 짧고, 나눈 대화는 그보다 적었다. 문을 밀어 열기 직전, 로시난테가 물음 하나를 건넸다.

“케인네 공방 아직 안 망했지? 뭐 하나 안 받아둔 거 있는데.”

 

* * *

 

케인 집안에서 꾸준히 이어오는 공방이라 케인 공방으로 이름 지어진 무기 제작소 겸 판매소는 직접 제작하는 것 외에도 각종 주문제작품의 의뢰를 받고 장인들과 연결해주는 가게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니는 공방은 지금까지 일곱 번의 탈세 의혹에도 무혐의를 받았다.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은 검문이 시행됐을 텐데 이렇다 할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으니 여전히 뻔뻔하게 운영을 잘 해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하튼 공방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골동품 상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제로 물건이 날아다녔다는 것이고, 로시난테는 어째 잘 피하나 싶더니 결국 공구 하나에 팔뚝을 얻어맞았다. 어디서 이야기가 이상하게 와전된 건지 모르지만, 과거 ‘로난테’를 알던 사람들은 ‘로난테’가 영락없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는 게 참 이상한 일이었다. 다신 볼 일 없다 생각했던 낯짝을 들이미니 분노가 치민 모양이다. 아니면 연락 한 번 않은 것에 성질이 났거나. 공방 구석에 반쯤 찌그러진 채로 팔뚝을 괜스레 매만지던 로시난테가 예의 무게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뭔 이상한 소문을 주워 듣고 화풀이를 하나. 덕분에 검도 못 들게 생겼어, 지금. 당장 조금 뒤에 일 치러야 하는데.”

“물건 주문한 인간이 십이 년째 찾으러 오질 않는데 당연히 죽은 줄 알지. 그것도 년에 한 번은 얼굴 비췄던 양반이.”

쌀쌀맞은 태도로 몰아붙이는 사람에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걸 보면 로시난테도 나름대로 제 잘못을 아는 것 같긴 했다. 아니면 그냥 대꾸하기도 귀찮거나. 어깨만 잠시 으쓱이던 로시난테가 불쑥 물음을 내놓았다.

“다 사정이 있었다니까……. 그 물건 말야, 아직도 보관해두고 있나?”

“당연하지. 그런 걸 누가 사가. 당신 말고.”

뭘 시켰더라? 사실 뭔가 값나가는 주문 제작품을 넣어 놨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정작 쓸모가 없어진 이후에는 찾으러 갈 생각도 잊어서 정확히 어떤 품목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물건을 찾으러 올 주인은 따로 있었다. 아직 시간이 적당히 있다고 생각한 건지, 로시난테는 한가롭게 딴소리나 했다.

“당신도 마물 온다는데 피할 생각도 안 하나 봐. 제이슨은 묻혀도 같이 묻혀 죽겠다던데?”

“쯧, 한가한 소리를 해. 여기서 피하면 어디로 가나. 중앙?”

“어디든 목숨은 보전해야지. 붙어만 있으면 이어지는 게 삶이잖나.”

“평생 공방이랑 가게만 보고 살았는데, 다 잃은 뒤에는 뭐 하고 살라고.”

우린 너같이 떠돌면서 살 수 있는 족속이 아냐, 로난테. 덧붙이는 말에는 로시난테도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한 곳에서 진득하게 몸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해 정도야 한다지만. 이해는 습관에 가까웠으니 이곳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장갑 낀 손이 괜스레 목께를 두어번 긁적이고 아래로 떨어졌다.

“됐다, 됐어. 다 끝난 뒤에 여기도 안 무너지고 남아 있으면, 사람 두 명이 찾아올 거거든? 키는 나만한 검은 머리 기사 하나랑, 빨간 머리 작은 기사 하나. 활이니, 뭐 그런 것들 찾는다길래 알려줬어. 그때 내가 시켰던 거 빨간 머리 기사님한테 넘겨달라고.”

“그걸 왜? 기사가 그걸 쓸 일이 있어?”

“어엉, 언젠가 쓸 일 있겠거니 싶다.”

주인장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듯 하다가도 금세 한숨과 함께 풀어졌다. 그 모습에 로시난테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품 안을 뒤적이면 묵직한 가죽 주머니 하나와 종이 조각이 잡힌다.

“그리고 좀 싸게 해줘. 둘 다 북부 출신이라 수도 물가도 잘 모를 걸. 로시난테 경이든 베르디우스 경이든 아무튼 비슷한 이름에게 소개받고 왔다고 하면 알아서 반값, 아니 반의 반값만 받아. 지금 어느 정도 주고 갈 테니까.”

“아주 벼룩의 간을 빼먹으려고 드시는구만. 얼마나 내놓겠다고 그래, 수전노 주제에.”

“뭐~ 적당히, 나쁘지 않을 만큼. 나도 이제 제법 씀씀이가 커졌어, 케인.”

손에 든 주머니는 상당히 묵직했다. 고작 무기 두 개를 주문한다기에는 많은 금액이었다. 꼬깃꼬깃 접어둔 종이를 펼쳐 본 로시난테는 괜히 주머니를 위로 가볍게 던졌다가 받았다. 얇은 가죽 너머로 쩔렁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도 들렸다.

“그리고 짐승 쫓는 막대 있잖아. 그거 가벼운 재질로 두 개 만들어 줘. 빨간 보석 하나, 노란 보석 하나 박아서 안 투박해 보이게. 박아 넣을 보석은 주고 갈게. 마물 부속 재료도 있긴 한데, 이건 필요 없지?”

“뭘 그렇게 많이 부탁해. 네가 들고 다니려고?”

“아니, 나는 더 안 쓸 거야. 남은 무기도 팔아 치워야 하는데…… 그냥 같이 두고 갈 테니까, 필요하면 쓰고, 아니면 쓸 만한 부속만 떼고 버리든 해.”

주머니를 낚아챈 주인이 입구를 슬쩍 벌려보고선 또다시 께름칙한 표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담긴 돈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로시난테는 별다른 말도 없이 주머니 입구에 접힌 종이를 잘 쑤셔 넣었다. 당장 시킬 주문제작품들은 입으로 직접 말한 것보다 양이 꽤 됐으므로, 확인한 뒤에는 알아서 잘 만들어주겠거니 싶었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로시난테를 응시하던 케인이 불쑥 말을 걸었다.

“뭐 어디 죽으러 가?”

“글쎄다……. 거야 모르지. 죽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래 봬도 기사라니까. 종말에서 구해드리러 왔다니까.”

“저 인간 저거 사기 치던 때에서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창밖에서 시계탑의 종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케인이 혀를 끌끌 차는 와중에도 로시난테는 제멋대로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이제 한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남은 시간을 알차게 써야 한다. 이후의 동선을 짜는 동안에는 습관처럼 턱에 손을 짚었다. 어디 보자, 이제 마련해야 하는 게…….

“옷 좀 사러 가야겠는데. 괜찮은 곳 있으면 추천 좀 해 줘. 한동안 안 와서 어디가 괜찮은지 모르겠네. 가격은 상관없고.”

“기사단이라며? 요즘 기사단은 제복도 안 주나보다.”

“주긴 주는데, 내 취향 아냐.”

“별……. 그래서 강도처럼 입고 다니는 거냐?”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강도이자 기사이자 불법 침입자이자 웬만한 곳들에서는 도통 환영받지 못하던 과거를 상기하던 로시난테는 어쩐지 촉촉해진 낯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마저도 가장이었음을 모르지 않던 케인은 별 난리를 다 보겠다는 듯 익숙하게 그를 무시하고선 종이 위에 주소 하나를 적어줬다. 옷가게는 멀지 않은 골목에 있었다. 로시난테가 만족스러운 낯으로 다시금 걸음을 떼었다. 무기와 재료 등 웬만한 것들은 공방에 떨궈 뒀으므로, 어쩐지 가게를 지날수록 짐이 점점 더 덜어지는 형국이었다. 로시난테의 발걸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수도에 입성한 이래, 간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혹은 몹시도 예민해졌거나.


<찾아가는 것>

그레미움 침공 당일

 

그렇게 로시난테 베르디우스가 이틀 동안 쓴 돈은 웬만한 노동자들의 몇 달 치 급여에 가까웠다. 기사라고 해도 아직 견습이고 출정을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봉급을 그렇게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그간 모아둔 돈이란 돈을 바닥까지 긁어 사치를 부리는 형국이었다. 수도에 오니 날이 덥다는 핑계로 코트 하나를 새롭게 맞추고 (심지어 무겁지 않아야 한다는 요청으로 반을 쪼갰다. 남은 반쪽은 어디에 쓰냐며 울먹이던 주인장에게 로시난테는 ‘나 같은 사람에게 팔아보라’며 몹시 정당히 코트 한 벌 값을 치르고 나왔다.) 셔츠도 두 벌 맞춘 뒤 (목을 반절 이상 덮으며 단추가 겉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삼십 분 내로 처리해야 했던 재봉사는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를 온 마음으로 저주했다.) 종아리를 모두 덮는 부츠도 새로 마련했다. 놀랍게도 부츠를 맞출 때에는 한 번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걸 갈아치운 뒤에는 오랜 취향 참 어디 가지 않는다고 젊은 시절의 복장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거리를 걷던 로시난테는 문득 가게 진열장에 반투명하게 비친 제 모습을 마주하고선 피식 웃었고, 직후 더 바쁜 체 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많은 게 여전하고 모든 게 바뀐 수도에서는 쉴 새 없이 인파에 섞이지 않고선 이방인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특히 재난을 목전에 둔 의도적인 어수선함 속에서는 더더욱.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대중의 삶에 녹아드는 데에 익숙한 작자였다.

복장을 갈아치운 뒤에는 가게를 돌아다니며 막대 사탕을 샀다. 담배를 더는 피우지 말아야겠노라 다짐했다지만 누군가 말했듯 흡연은 원래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것에 가깝지 않던가. 로시난테는 인내심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충동에 휩쓸리는 일이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그런 충동적인 생각으로 고른 일들이 어째 하나같이 다 어그러지고 엉망이 된 데다가 때를 놓친 결정이 되어 인생의 분기점마다 지표로 남았기에, 그는 한동안은 제 정신머리를 놓치지 않을 수단이 필요로 했다. 사탕은 나름대로 훌륭한 도구였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단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콤한 사탕을 한참 입에 물고 있을 때면 밀려드는 불유쾌함이 그를 현실 위로 붙드는 도구가 되었다. 설탕만 잘 녹아 있다면 맛은 어떻든 상관 없다만, 기분이 나빠지려면 감초 사탕이 제일이었다. 한때 무기가 가득 붙어 있었던 망토 안쪽과 코트에는 사탕이 우수수 들어가 있었다. 허리춤에 내내 차고 다니던 검이 아니었다면 외부인의 눈에는 이게 대체 무슨 기사인가 싶었을 것이다.

문득 다시금 정신이 애먼 곳으로 튄다 싶어 잘 포장된 사탕을 까 바로 입에 쑤셔 넣었다. 무슨 맛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는데, 말했듯, 가미된 맛이나 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탕은, 정말, 너무 달았다. 내내 매끈했던 미간이 반사적으로 단번에 좁아질 만큼. 짧은 한숨을 뱉은 로시난테는 느릿느릿 수도 외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정말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한참 미뤄둔 것을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때가 왔다. 이미 한 번 늦은 추모의 시기는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아가야만 했다.

최근의 일을 돌이켜보면 정신머리가 내내 우울한 진창에 처박혀 있었다. 극도에 달한 예민함과 신경질을 받아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그 역시 구태여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은연중 새어 나오는 냉소를 덮어내기가 참 어려웠다. 로시난테는 거리를 걸으며 그간의 일을 복기했다. 기사가 되고 싶어서 북부까지 걸음 했건만, 막상 이후 겪은 일들은 그가 오롯 홀로 감당하기에는 다소 버거웠다. 묻어둔 것들이 하나하나 빼곡히 줄지어 튀어나오는데 그걸 다시 묻을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아 변덕스레 굴었던 나날이 잦았다. 이제 와 해명하기도 웃기지만, 그는 사실 성격이 아주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던 덕분에 적절히 상황을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제어할 수 있는 수단 없이 휘둘리기만 했다. 그건 영 좋지 않았다. 부정을 내보이는 건 누구에게도 득될 것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는 지표가 되고 싶었다. 발에 채이는 걸림돌이 아니라. 그건 살아온 내내 염원하던 일이기도 했다.

단정한 발걸음이 소리 없이 기척을 감춘다. 수도에 들어온 직후 게이멜은 내내 깨어있는 채였다. 수도 외곽을 간신히 돌아다니며 보여줬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도시 내에 입성한 적은 없었으므로 중앙의 풍경을 보고 싶다는 게 이유인 모양이었다. 다만 깨어있다고 해도 정령은 로시난테에게 그렇게 자주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저 그를 놓치지 않도록 어깨니, 손끝이니, 발등이니 하는 곳에 바짝 따라붙었을 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언지 궁금해하면서. 하지만 번화한 거리를 뒤로 하고 성곽 아래의 인적 드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정령 역시 궁금함을 마냥 묻어둘 수는 없는 듯 보였다. 민가가 사라지고 흙길이 시작되자, 드디어 가시화 된 녹색 빛이 로시난테의 눈가 주위에서 일렁였다.

‘뭘 찾으러 가는 거야?’

“음……. 그냥 예전에 만들어 놨던 거.”

‘그게 뭔데? 나는 도시의 풍경이 더 보고 싶어.’

로시난테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어물쩍 말머리를 돌렸다. 무언가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듯한 시선만큼은 여전했다.

“도시는… 사람도 너무 많고 복잡하지 않나? 너라면 이런 곳을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네가 보여준 적이 없어서, 그냥 궁금해서.’

“별 게 다 궁금하십니다……. 별로 볼 것도 없는데.”

‘그리고 여기가 네 고향이라면서. 그래서 더 궁금했어. 네가 떠나온 곳이 어디인지.’

불현듯 발걸음이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면, 이제는 빼곡하진 않아도 적당히 나무들이 심겨진 탓에 나아갈 길을 절반 정도만 가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재난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던 모양인지 도시의 외곽에는 사람이 없었다. 흙길 위로 발을 디딘 이래 한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로시난테는 눈두덩이를 덮었던 안대를 밀어 올렸다. 두 눈으로 수도의 풍경을 담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해묵은 흉터가 이제 와 아플 이유도 없는데 눈두덩이 위를 바늘로 쑤시는 듯 통증이 일었다. 이것도 결국 아주 오래된 염습이다. 오른쪽 눈가를 더듬듯 내리누르던 로시난테는 머잖아 손을 뗐다. 당장 의문을 가진다 한들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정말 시간에 쫓기는 형국이었으므로 발을 바쁘게 놀려야만 했다.

“네가 생각하는 고향의 의미는 아니야. 그냥 정말 여기에서 태어났다, 그거지. 그리고 정말 살았던 장소는 첸트룸에 가깝고…… 거긴 개인적으로 갈 생각 없어.”

실제로 오래전엔 근처에서 염을 했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신전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시신이 세 구 있었다. 두 눈으로 사람 없는 숲속을 본 뒤에야 조금 더 위치가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듯하다가도 거기가 거기처럼 느껴져서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 여름이라서 그런 건지, 그때가 겨울이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이든 풍경이든 무엇 하나가 단단히 변질된 건지……. 겨울이었음에도 무성한 풀숲 너머로 나무가 세 그루 자라 있던 모습만큼은 뚜렷한데, 아무리 인적 드문 곳을 뒤져보아도 부합하는 장소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표시라도 남겨둘 걸 그랬나. 짧은 후회가 남았지만, 사실 수도 외곽 지역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다. 숲도 많고, 나무도 많고, 꼭 이 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일 수도 있었다. 이곳은 글로리어스, 대륙의 중심. 게다가 수도 정중앙을 감싸고 있는 마을은 많지 않던가. 하지만 이곳을 뒤지고 난 뒤에 남은 것이 없다 한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찾아볼 생각은 마땅히 들지 않았다. 여력이 없다는 게 더 옳았다.

막연한 기분을 치워버리고자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상체를 쭉 젖힌다. 시선 끝에는 서서히 노랗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보인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엔 상황이 어떻든 사람의 기분을 미묘하게 상기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어디선가 짐승이 수풀을 스치고 지나는 소리가 들려 로시난테는 다시금 재빠르게 안대를 눈에 댔다. 질끈 동여 묶는 손길은 제 것 아닌 물건을 다루는 듯 아주 능숙해 뵈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금 반절이 된다. 짧게 한숨을 흘리고서 몸을 휙 돌렸다. 이제는 찾는 게 의미가 없어진 때인 듯 싶었다. 사십 년이 지났으니까 닳고 닳아 없어졌을 법도 하다. 정령에게 부탁하는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느릿느릿 턱을 쓸어내리며 왔던 길을 돌아간다. 잠시간 침묵하던 정령은 그제야 뒤늦은 질문을 던졌다.

‘……왜?’

“이제는 다 의미 없으니까. 찾아다니는 것도, 다른 뭘 하는 것도.”

짧은 물음에 대한 답변은 그보다 단순하다. 로시난테의 품에는 이제 무기가 없었다. 공방에 모조리 떠넘기고 온 까닭이다. 정확히는 반쪽짜리 코트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무언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 옳았다. 어제 골동품 가게에서 구매했던 작은 단도 하나는 주인장이 제법 신경을 써서 찾은 물건임을 증명하듯 그가 요구한 사항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었다. 처음 가게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호박색 브로치는 어느새 망토를 고정하는 버튼이 되어 로시난테의 어깻죽지에 단정히 머물러 있었다. 장갑 낀 손이 브로치의 표면을 가볍게 쓸었다가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과거의 무덤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도움을 청하지 않거나, 누군가 기껏 내민 손을 거절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기도 했다. 정령은 물음 너머로 다시금 침묵이었다. 빼곡하다기에는 다소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를 지나, 흙길을 밟고, 벽돌이 잘 박힌 말끔한 거리까지 다다랐을 즈음에는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로시난테는 임시로 마련된 숙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들 준비가 한창이었기에 로시난테 베르디우스 역시 그 사이에 어렵지 않게 섞여 남은 채비를 마쳤다. 이제는 성전의 도입이다. 결말이 어떻게 끝날 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머리를 울리는 아득한 기분에 로시난테는 부러 입꼬리를 과장되게 밀어 올렸다.


 

<깨달음은 언제나 느리게 온다>

첸트룸 입성 당일

 

수도 중앙의 풍경을 제대로 볼 새도 없었다는 게 로시난테에게는 나름대로의 호재였다. 감옥에 처박힌 건 악재였지만, 그래도 다 같이 팔이 묶여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정신을 놓을 새도 없고 괜찮았다. 말수가 줄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입을 잘 열지 않게 되는 건 몇 인간군상의 특이점이 아니던가. 자기합리화에 가깝겠으나 로시난테는 그러니 괜찮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석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냉기는 도무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력도, 정령도 쓸 수 없으니 기다리는 걸 제하면 별다른 묘수가 없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이렇게 묶이고 지하에 처박힌 상황에서 그저 예민해지기만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덤 없이 짧은 추모를 마친 뒤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었는지, 어느 정도는 견딜 만 하다는 게 우스웠다. 그는 언제나 삶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타인과 마땅한 관계를 맺은 뒤에도 훌쩍 떠나 사라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일종의 회피다. 지금껏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묻고 덮어두었던 만큼,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인생에서 직면해야 하는 많은 사건을 그렇게 외면하고 있었다.

무덤을 더는 찾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사십 년 전의 일이니 이제는 남은 게 없을 것이라 되도 않는 합리화를 지껄이고선 도움조차 청하지 않았던 것처럼. 걱정이나 염려를 묵살하고 무시하며 살아온 나날 속에서 벌어진 모든 재난은 결국 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는 무덤 대신 고목 아래 핀 들꽃이 있다. 세 구의 시신과 네 개의 이름은 모두에게 잊혀졌으나 그들을 추도할 장소는 다시금 생겨났다. 추도가 죽은 이들의 안식 아닌 생자의 안정을 위해 자행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정도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이름자가 삶의 많은 부분을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난테니, 단테니, 이름을 오래도록, 자주 바꿔치기하는 삶을 살아온 그로서는 도무지 삶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고도 여겼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이름을 묻어두고 아예 다른 사람처럼 굴고 살아온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지금까지 지내온 이래, 이미 한 번 버린 이름 위로는 묘비가 세워지고 다시는 지상 위로 올라와 빛을 볼 일이 없었다. 기사단에 입성한 뒤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상념이 이어진다. 로난테로 살아오는 동안에는 참 미친 짓을 많이 했다. 사기도 많이 쳤고, 부귀한 자들의 뒤통수를 쳐 목표한 금액을 채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물을 술로 속여 팔아치운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의 그에게 앞으로 넌 이렇게 살 거다, 라고 언질을 준다면 대번에 검을 빼들고 모욕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일 만큼 막 살았다. 사실 그 시절에는 정말 이렇게 살 줄 몰랐는데. 몇몇 사람들에게 말한 바 있듯 그때에는 정말 기사로 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음지와 연관된 일이라고는 하나 없이, 황실 기사단이든 어느 가문에든 배속되어 은퇴하기 직전까지 명예를 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막연하지만 당연한 소망이었다.

단테로 살았던 삶은, 사실 더 막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기를 치지 않았다뿐이지 별별 일을 다 했다. 수금을 하러 다니거나 협박을 하는 일은 예사였고 가끔은 투기장이나 도박판에 흘러 들어가 오가는 금전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다뤘다. 손놀림이 빠르다는 건 그에게 있는 몇 안 되는 장점이었지만, 장점을 범법으로 물들이는 데에는 많은 사건이 필요하진 않았다. 차라리 그때 마탑에 들어갈 걸 그랬다, 따위의 미련이 남는 건 결국 제대로 살아본 적 없는 삶에 대한 일종의 회한이다. 정작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 한들, 모든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한들 로시난테에게는 자신이 밟아온 대로 인생을 망치며 살아가게 될 거란 확신이 있다.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잘 된 건가 싶기도 했다. 기사가 되었다고 아주 명예롭지만은 않았을 거였다. 철없는 마음에 미뤄둔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암살 도구를 잘 다루는 기사를 선호하던 잠시간의 풍조였다. 정정당당을 표방하는 기사의 삶에 그게 무슨 말이 되는 일인지. 그때는 그게 잘못된 줄 몰랐다. ‘네 어머니께 들키는 날이면…….’ 철없이 살아가던 나날 속에서도 그런 말을 해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로시난테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음성을 들었다. 목소리만큼은 뚜렷하다만 막상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뜨면 여전히 우중충한 석재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그때의 조언을 들을 걸 그랬다. 조언을 받아들이고 애먼 곳들에 눈을 팔지 않았다면 과거의 친우는 멀쩡하게 백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로시난테는 기사가 되었을 것이다. 베르디우스의 성을 가지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예전의 이름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두 명뿐이다. 묻어둔 이름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새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그의 손에 얹혔다.

살아오며 많은 걸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남은 게 많다. 아직 죽이지 못한 성질머리가 대표적이다. ‘로시난테’로 살길 결정한 뒤로는 못 했던 만큼 잘 살아봐야지, 마음 먹었지만 아무리 성격을 죽이고 죽인다 한들 예고 없이 치미는 예민함만큼은 도통 잡아내기가 어렵다. 그걸 고치려면 아예 생각을 않는 수밖에 없다만 그렇게 살다간 기껏 다져둔 길이 다시 어그러질 것만 같다.

그러니 이제는 마주해야 했다. 종말을 목전에 두고서야 깨닫는다. 더 묻어두지 않고, 의미 없이 던져둔 것처럼 보였던 공수표에는 기실 그만한 소망이 얹혀 있었다. 사람의 영혼이 기억으로 이어진다면, 사실 그에게는 남은 영혼의 무게가 얼마 되지 않지만, ‘로시난테 베르디우스’에게만큼은 어느 정도의 무게가 주어질 것만 같다.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세월을 살아야 한다. 모두에게 그만큼의 무게를 올려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주 의미가 없는 삶도 아니었다.

회고하자면, 수도에는 묻은 것들이 참 많다. 그는 아직 살아있으나 실재하는 무덤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베르디우스 백작가 본저의 뒷마당 한 구석에 마련되었다던 조촐한 무덤이고, 다른 한 곳은 수도 외곽의 어느 구덩이다. 도망쳐 나온 뒤에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 이름자가 남지 않았다는 점 역시 같다. 그러니 대륙의 중심이자 선도하는 유행의 근원지, 혹자에게는 안락한 고향일 장소가 그에게는 결국 거대한 무덤으로밖에 작동하지 않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을 지도 모른다. 긴 세월을 이곳에 발 붙인 채 살아왔다고 해도 그랬다. 이제는 위로 드리운 장막을 걷어낼 때가 됐다. 묻힌 이름을 놓아주고, 부득불 꺼내 둔 것들을 쥐어야 할 때가 왔다.

우선 단도부터 정리하자. 습격 이후에도 공방은 나름대로 멀쩡해 보였으니 물건들이 마련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지금껏 그렇게 살았듯, 모든 게 마무리 된 뒤에는 분명 떠날 테니 약속한 것들을 쥐여주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집에 갈까 싶었다. 백작저가 위치한 대로변을 끼고 오른쪽으로 크게 돌면 보이는 골목 하나. 좌측인지 우측인지 굽이굽이 지나면 보이는 작은 이층 집 하나. 이제는 터밖에 남지 않았거나, 새로운 집이 들어섰거나, 아예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보러가야 할 것 같았다. 추모의 장은 마련했다지만 끝내 무덤을 찾지 못했으므로 잊혀진 자들을 회상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과거의 향수를 불러올 수 있는 장소뿐이다.

그리고, 수도에서의 일이 모두 다 끝난 뒤에는 님벌스에 가야겠어. 우리 정령님도 많은 풍경을 봤지만, 결국 가장 사랑하는 풍경은 오래도록 살아온 대지가 아니겠나. ‘보리밭을 보러 갈 생각은 없어? 근처인데. 지척에 있는데. 여기까지 온 것도 아주 오랜만이잖아.’ ‘안 갈 거야.’ 님벌스에서 잠시간 머물 때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상기한다. 그때에는 단호하게 잘라냈지만, 안에 담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도 않았다. 게이멜과의 약속도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됐다.

이어지는 가정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다. 우린 자네같이 떠돌면서 살 수 있는 족속이 아냐, 로난테. 그건 비단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었다. 결국 그 역시 평생을 마음 둘 곳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깨달음은 언제나 느리게 온다. 이번만큼은 아주 늦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다시금 눈을 감는다. 어둠은 이제 기껍게 느껴지는 침묵과 같다. 로시난테는 그렇게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들지 않은 채로. 맴도는 회상 속에 머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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