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난테

늦가을의 황당한 저주

베리베리


늦가을의 하늘이 맑다. 오래전이라면 이즈음도 눈보라가 쳤을 테지만 기어코 북부에도 가을이 비집고 자리를 차지했다. 창밖에선 아직 맑은 햇살이 구름 사이를 간간이 지나 성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작은 창이 난 복도를 거닐던 이바르 베르트손은 홀로 날아다니던 종이비행기가 창문을 지나 망토에 콕 날아와 박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털 사이로 얌전히 안착한 종이비행기는 잠시간 바스락대다가 조용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성의 재정 관리를 맡은 이후로 종종 이런 장난질을 쳤다. 정작 종이에 적힌 내용은 별것 아닌 사담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시종을 붙여준다 했건만 한사코 거절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비행기는 하루에 한 통씩 꾸준히 이바르를 찾아왔다. 보통은 노을이 지기 이전 느지막한 오후에 날아오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만 오늘은 어쩐지 시간이 일렀다. 아직 정오까지는 한참 시간이 남아 오찬을 들기도 전이었다. 이바르는 종이가 날아온 창밖에 잠시간 시선을 두었다가 망토에 꽂힌 종이비행기를 뽑아 들었다. 마법이 실렸던 종이는 둔탁한 손길이 닿자 금세 일반적인 종이로 바뀌어 순순히 접힌 반대 방향으로 펼쳐졌다. 종이에는 단 한 문장만이 끔찍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당장 집무실로 와!]

이바르는 문장을 읽기 위해―사실은 해독한다는 말이 더 어울렸으리라― 약간의 시간을 들여야 했는데, 꼭 짧은 몽당연필을 끝까지 쥐어 쓰려고 각오한 자가 삐뚤빼뚤 적기라도 한 것처럼 이해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애초 같은 사람이 보낸 게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지만 이 성에서 이런 마법을 성주에게 감히 들이밀 이가 어디 둘이나 되던가. 이바르는 종이를 그러쥐고 종이비행기가 날아왔을 장소로 향했다. 집무실로 향하는 도중 잠시간 성에 짐승이 들어왔다며 부산을 부리는 사용인들의 이야기가 들렸지만 크게 신경 쓸 건 못 됐다. 집무실 문을 열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므로 로시난테 베르디우스와 이바르 베르트손이 어느 늦은 가을날 공식적으로 얼굴을 마주한 시점은 아침을 지나 정오가 되기 이전의 집무실이다. 이바르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을 때 본 장면은 단순했다. 귀한 종이와 양피지가 마구 날리다 못해 엉망으로 흩어져 있는 책상 위, 그사이에 간간이 찍힌 짐승의 발자국, 인기척이라곤 없는 텅 빈 방. 짐승이 성안에 들어왔다더니 집무실까지 기어코 걸음 한 모양이다. 한참 일을 하고 있을 법한 사람이 자리에 없으니 짐승을 내쫓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방 안 낮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바르? 자네 맞나?”

“안에 있는 줄은 몰랐는데.”

사람이 있을 법한 자리는 없는데. 이것도 마법의 일종인가? 이바르는 미간을 잠시간 좁혔다. 어디선가 안도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자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발소리라기엔 작았다.

“아, 말은 통하는군! 다행이야. 자네 검은 안 들고 왔지?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빼지 말라고.”

“집무실에서 검을 빼 들 일이 뭐가 있어.”

“아니… 있어. 여기까지 피신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자네도 놀라지 말게. 검도 내려놓고 손도 가만히 두고 그냥 봐.”

결론 없이 장황하기만 한 게 평소의 대화와 다를 바 없긴 하다. 책상 구석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싶더니 곧이어 의자 위로 짐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너구리가 됐다니까?”

너구리인가? 비슷하게 보이기는 했다. 여하튼 짐승이 사람 말을 했다. 이바르는 잠시간 침묵하다 한 음절을 뱉었다.

“뭐?”

너구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잘 들어보니 로시난테의 목소리와 닮…았나?

“아니, 내가 너구리가 됐다고!”

음, 어쩌면 본인인 것도 같았다.

 

***

 

이후 로시난테가 설명한 대략적인 상황을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늦가을 아침 정체 모를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지난 밤사이 한 마리의 자그마한 너구리로 변했음을 깨달았다. 꼬리와 귀하며, 손까지 완벽한 작은 짐승의 모양새가 된 모습을 확인한 로시난테는 잠시간 치미는 비명을 삼켰다가, 이 일이 누군가의 저주, 혹은 고약한 마법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결론을 냈다. 어쩐지 눈을 떴을 때 방이 유난히 커 보이더라니 이상한 짐승으로 변했을 줄이야.

사실 마법이나 저주 계통이라면 언젠가는 저절로 풀릴 문제였으니 신경 쓸 계제가 못 됐고, 흘려보낼 시간이라면 어차피 충분했으므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로시난테가 집중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하필이면 자작성의 결산일이 가까워져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봐야 하는 업무가 한가득 쌓여 있고 어제도 내일부터 하자며 시원하게 미뤄두고 왔는데, 이런 몸으로 일을 볼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오후에는 성을 돌며 늦가을이 지나기 전 보수해야 하는 곳들도 다시 점검할 계획이었는데, 산재한 일이 이렇게 많건만 몸이 이래서 돌아다닐 수 있겠나! 잠시간 속으로 작게 역정을 내던 로시난테는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고민을 이어가다가, 일단 해보기는 해야겠다는 결론을 냈다. 당연하게도 주변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게 패착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그런 얘기였다.

긴 이야기를 격렬하게 이어가던 로시난테(너구리)는 한숨을 푹 쉬며 책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돼서 방에서 나오다 사용인들에게 쫓기고 해명할 새도 없이 어떻게 집무실까지 용케 도망왔다가 막상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이 뭔 말도 안 되는 손으론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서류 몇 개는 망쳐버리고 책상은 난리가 나고 여하튼 장황한 내용은 오늘 오전이 참 길었다 정도로 정리가 된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바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로시난테(너구리)는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긴 한숨을 푹 내뱉고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을 데구루루 이바르의 앞으로 굴렸다. 뻔뻔하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기까지 했다.

“일 좀 도와줘.”

“지금 그 상태로 일을,”

로시난테(너구리)가 이바르의 말을 도중에 끊고 주절댔다. 이건 뭐 넋두리라고 해도 무방해보였다.

“지금 밀린 게 몇 갠데 해야지 그럼……. 이바르, 이거 자네 성 재정 관리야. 내가 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 기본적으로 자네 소유라고. 그러니 펜 들고 앉게. 내가 옆에서 알려줄 테니까 받아 적기만 해도 돼.”

대꾸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이어가는 모양새가 평소와 다를 바 없으니 저건 로시난테 베르디우스가 맞다. 오늘은 뭘 해야 하고 머잖아 상단이 들어온댔는데 이것도 조율해야 하고 보수할 곳도 확인해야 하니 조금 뒤에 어깨에 얹고 다니라는 둥……. 듣자 하니 요구사항도 참 많았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이닥친 늦가을의 황당한 저주는 두 사람에게 다른 모습으로 지속될 듯 싶다.

카테고리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