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난테

북녘의 바람

베리베리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노라 예견했던 시점에서 스무 해 정도를 더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그 기간이 한 사람을 바꾸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몸에 밴 습관 정도는 적절히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미 오랜 나날을 살아와 고착화 된 것이 많이 배어 있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로시난테는 북부에 온 이래로 예민한 몇몇 부분들이 제법 무뎌졌음을 새삼스레 실감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저택, 그곳을 채운 사용인, 추위 따위의 것들은 오래전의 어느 날엔 분명 극렬히 거부했던 요소들이나 이제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만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그런 날에는 자연히 희미한 과거의 편린들에 시선이 닿았다. 묵과와 방기는 기억과 거리를 두기 위한 훌륭한 수단이다. 이미 한 번 묻힌 것들은 그를 더 이상 상처 입히지 못했다.

다만 어떤 문답은 과거를 복기하는 매개가 되어 깨진 기억을 들춰야만 하는 상황을 쥐여준다. 북부는 서늘하고, 춥고, 무언가를 묻기에 참 좋은 곳이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무언가를 상기해야 하는 때가 찾아왔다. 외면과 망각, 끝내 그것들을 수용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으려 마음먹었던 자에게 마냥 기꺼운 일은 아니다. 로시난테는 불현듯 시선을 돌려 창 너머를 보았다. 남향을 막고 선 석벽 가운데에 작게 난 창문은 흘러드는 바람을 막기 위해 유난히 작게 나 있다. 두터운 창 너머로 바람이 희미하게 우는 것을 보니 머잖아 강풍이 들이닥칠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간 한숨을 삼키고 습관처럼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시선은 여전히 밖에 둔 채였다. 앞선 물음은 다음과 같았다……. 자네는 무슨 중요한 걸 잊고 살았길래.

“글쎄다, 자네도 알잖아. 내 뭐든 잘 기억 않는 거.”

자네도 가만 보면 짓궂은 구석이 있어. 시답잖게 덧붙이는 말과 함께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자 비슷한 높이에서 눈이 맞물렸다. 조금 낮거나 높았다면 좋았을 것을. 괜스레 한 번 흘기는 건 나름의 심통이다. 로시난테는 이바르 베르트손의 무감각해 뵈는 회색빛 눈을 마주할 때마다 언제나 묘한 감상을 받았다. 호오의 영역으로 따질 수 없는, 어느 공백과도 같은 지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자연스레 마주하는 날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미묘한 부분만큼은 끝내 변함없이 그대로일 것 같다. 어쩐지 난처한 감각을 지울 수가 없어 로시난테는 우선 질문에서 꼭 반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어느 시기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꼭 그만큼의 품이 들었다. 이바르가 그 간극을 기다려 줄 거라는 나름의 믿음도 얹혀 있었다.

로시난테는 아주 조금 멀어진 거리 속에서 난처함의 이유를 복기했는데, 근원을 짚어보니 비단 물음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꼽는다면 딱 한 문장 앞, 이바르 베르트손이 물음 이전 흘려낸 말이다. 남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연결되는 물음. 당신은 무얼 잊었는가.

재미있는 일이다. 재미있다기보다는 곤란한 쪽에 가깝긴 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으레 사람들이 중요하다 여기는 것들을 하나같이 버리지 못해 품에 담았다가 결국 망각의 저편으로 떠나보낸 사람이었으므로.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그를 오래 본 이들이 모르지 않듯, 답하기 모호한 물음에 운을 띄우기 전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래전에는 웃지 마,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는 다른 곳으로 튀려는 사고를 가까스로 갈무리하고 다시 집중했다. 대화에, 물음에, 답변에. 그러고보니 그에게 오래도록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주 예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내 몸소 다시 꼽아주지. 아,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잠자코 듣고 있어. 내가 말하라고 할 때까지.”

이바르라면 어쩌면 기가 찬 표정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문장을 고르기에 앞서 시선을 내리감고 웃음 섞인 한숨이 슬쩍 샌다. 이어 로시난테가 이바르의 손을 툭 건드리고 먼저 앞서 지나쳐 걸었다. 그는 가끔 짧은 동작으로 동행을 청하곤 했다. 인적 드문 복도 위로 가벼이 얹히는 걸음은 고요하고 단정하다. 마주한 시선이 흩어지니 그제야 수월하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처음에는 가족이 있었지. 그다음은 아주 오래 묵힌 이름. 이제는 전소된 저택, 사라진 사람들. 가정에서 비롯된 무수한 망상과 망령들. 유의미한 관계. 그것들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중요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쥐고 살아갈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마냥 그런 것도 아냐.”

이야기를 이어가던 와중 언뜻 어깨에 서늘함이 얹혔는데 석벽 사이를 바람이 비집고 들어온 것인지 그저 여전히 응시에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는 건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이번 해의 겨울은 오랜만에 몹시도 서늘할 거란 이유 모를 직감이 든다. 그렇다면 올해는 눈이 온 대지를 덮을 만큼 내렸으면 좋겠다. 예전처럼. 아주 오래전의 한때처럼.

“내가 자네에게 물음을 건네면서 간과한 첫 번째는 자네가 ‘보통의’ 사람은 아니라는 거고, 두 번째는 이런 물음이 돌아올 걸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인데,”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가면 사용인들의 구역이다. 이쯤에서 방향을 트는 게 좋겠다 싶어 몸을 반쯤 돌리면 오래전의 모습과 조금은 변한, 어쩌면 아주 변함없는 이의 모습이 흘끔 보였다. 어쩌면 변하거나 무엇도 변하지 못한 건 이쪽일지도 모른다. 말했듯, 스무 해는 사람을 모든 것에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이다. 어느 쪽에 익숙해졌을까? 당장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세월이 오래 흘러도 영영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부분도 분명 있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참 이상한 게, 끝을 정해두고 나아가니 대강 뭘 해야 할지 알겠더라고. 난 참 많은 걸 잊고 살았잖아. 이젠 나도 시간에 마모되어 그네들에게 잊힐 일뿐이 남지 않았고. 미련 같은 건 별로 없다만, 이제 와서야 다른 부분에서 욕심이 나는 거야.”

애매하게 시선을 마주한 채로 다시 옆으로 한 걸음. 간간이 난 창 너머로 들이친 햇빛이 징검다리처럼 바닥에 머문다. 이제 자작저의 구조 정도는 눈 감고도 헤아릴 수 있다. 이제는 망설임 없이 성큼 딛는 모습이 제법 오랜 거주자 같다. 어느새 앞서 걷기보다는 나란히 보폭을 맞추어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복도 저편에서 날이 좋다는 이야기가 언뜻 들려온 듯싶었다.

“자네도 좀 더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이젠 한 줌뿐이 남지 않은 시간도 그렇게 외롭지는 않겠다, 뭐 그런 거. 가끔은 내게 주어진 시간이 자네보다 먼저 끝이 나는 게 가끔은 걱정도 돼, 이바르. 걱정보다는 아쉽다는 말이 맞을지도.”

예고 없이 걸음이 멎는다. 붉은 기 머금은 자락이 허공을 느릿하게 가른다. 한참 엇나가 있던 시선이 그제야 바로 맞물렸다.

“또 한참 이야기가 샜는데……. 쓸모없는 부분은 넘겨도, 내가 자넬 신경 쓴다는 부분은 허투루 넘기지 마. 굉장히 드문 진심이거든. 알지?”

아, 이제는 말해도 돼. 말이 많은 게, 참 내 유일한 단점이라니까……. 덧붙이는 말이 한 박자 늦다. 멋쩍은 듯한 웃음소리가 습관처럼 뒤따른다. 북부의 겨울은 수도보다 이르게 찾아오지만, 날이 좋다니 오늘만큼은 이대로 나가 성벽 근처를 걸어도 좋겠다. 공기가 서늘해도 해가 남아있을 때엔 여전히 나돌아다닐 만했다. 한쪽 어깨에 걸쳐둔 망토를 괜스레 가슴팍 앞으로 고쳐 당겼다. 바람 정도는 적당히 막겠거니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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