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디셈] 친구 미만, 애인 이상
청게 AU : 현대 청춘 (가상에만 존재하는) 남자 고등학생 AU
또 비다. 여름이니까, 자연스러운 일이다. 디셈블러는 익숙하게 길을 적시는 비를 바라본다. 한 방울, 두 방울. 툭 툭 보도블럭의 얼룩처럼 보이던 것은 어느덧 바닥의 채도를 전부 낮춰버린다. 시간에 맞지 않게 어두워진 바깥은 조만간 번개마저 칠 기세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면, 죄다 책에 코라도 박을 기세로 어깨도 웅크리고, 목도 숙이고. 아주 자는 것들도 몇 있고, 눈이 시뻘개진 채로도 공부하겠다고 뭐라도 끼적이는 놈들도 있다. 당연하지. 시험 기간이 열흘이 남은 지금이야 말로, 제일 고등학생들이 미쳐 있을 시기가 아닌가. 하지만...
툭.
딱지 모양으로 정갈하게 접힌 쪽지다. 보냈을 놈은 뻔했다. 이렇게까지 각을 잡아서 종이를 접어대는 완벽주의 강박증 환자는, 디셈블러가 아는 한 하나 뿐이었으니까.
[야자 쨸래?]
답다면 다운, 정갈한 글씨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답지도 않았다. 마스터 마인드. 전교 1등. 우수한 성적에 몸 쓰는 것도 깨나 하고, 손재주도 뛰어나 발명 대회 같은 게 있으면 상을 휩쓸어오는 건 물론. 잘난 얼굴에 적당히 성깔 있는 성질머리. 문무겸비, 신이 내려준 재능충. 성깔이 없으면 이상할 축복받은 미남. 그리고,
자신의 소꿉친구다.
[야자 쨀래?
뒷감당 어쩌게? 오늘 학주 있다]
대강 접혀진 선대로 그대로 접다가, 괜한 심술로 끄트머리를 반으로 접는다. 모서리를 접어버리는 건 심술이다. 폈을 때 글에 사선이 갈 테고, 녀석이 원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어설프게나마 망가트리는 거니까. 아,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참 못된 놈이다. 하지만 십팔년을 비교당하면서 두번째로 살았으면, 이 정도는 괜찮잖아. 별 것도 아닌데. 툭. 뒤로 던진다. 마인드의 자리는 자신의 뒷줄 오른편이었다. 녀석이 창가 자리가 아니라서 좋았다. 창가는 내 자리였으니까.
툭. 다시 쪽지가 돌아온다. 뭐가 이렇게 빨라? 디셈블러는 신경질적으로 꼼꼼하게 접힌 쪽지를 펼친다. 감독하는 선생이 없어서 다행인 일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주변에서 한 번쯤은 힐끗댈 정도였으니까.
[야자 쨀래?
뒷감당 어쩌게? 오늘 학주 있다
내 핑계 대고 가자. 비 오잖아.]
디셈블러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느리게 들어올려 천장을 바라본다. 눈 아픈 백열등이다. 자연스럽게 깜빡이면, 그 잔상은 고스란히 남아서 붉게, 푸르게. 아. 정말. 짜증나. 드르륵. 칵. 툭. 쿵. 시야에 알알이 남은 얼룩이 거슬린다. 꾹, 꾹. 샤프심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다 못해 압축되어 뭉칠 정도로 글씨를 눌러 쓰다가 쪽지를 구겨버린다. 얼룩진 쪽지도, 도로도. 전부 꼴 보기 싫은 것들 뿐이다.
디셈블러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올려두었던 문제집이며 자습서, 필통같은 것들은 죄다 가방에 와르르 쏟아 붓는다. 집중따위, 사라진 지 오래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롱거리는 아지렁이 탓이다. 요란스럽게 전부 정돈하고, 불량스럽게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채로 일어선다. 소란에 교실의 몇몇이 노려보지만 그런 것에 기죽을 디셈블러가 아니었다.
"가자."
"그래."
마인드는 진즉 가방을 싸둔지 오래였다. 책상 위에 올려진 건 보여주기 용 이미 다 푼 문제집이었고, 필통은 없었다. 학교에 두고다니는 흔한 싸구려 볼펜 하나만 책상 위를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사라져도 상관 없을. 저거, 어디서 봤더라? 마인드는 소중하기라도 한 듯, 그 볼펜을 따로 가방에 넣곤 일어선다. 아니. 그냥 용도가 다르니 분류하는 것 뿐이겠지. 디셈블러가 답잖게 조용한 발걸음으로 복도로 나서자, 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따른다.
"또 왜 일찍 가자는 건데?"
"비 오면 너, 신경질 늘어나니까. 그리고, 집중 안돼."
"그건 그냥 혈압이 같이 낮아져서 그렇다고 했잖아.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내가 집중이 안 된다고."
멋대로 말을 자르는 마인드에게 신경질을 부릴 법도 하지만, 디셈블러는 드물게 아량을 베풀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집중이 안된다고 했으면, 저 녀석도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거겠지. 그래, 비가 오는 날은 감성적으로 되기 마련이 아닌가. 하다못해 기압 탓이나 일조량 감소로 컨디션이 평소보다 낮아질 수도 있고! 이번에야 말로, 자신이 마인드를 이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가정만으로도 기대되어 상기된 낯은 고스란히 웃는 낯이 된다. 들뜬 기분은 가벼운 발걸음을 만들어낸다.
"오늘 독서실 안 여는 날인데."
"우리 집 오던가."
"너희 형 있어?"
"지 방에 있겠지."
"흐응~ 갈래. 간만에 인사드려야겠다."
"... 넌 이상하게 도미네이터한테 관심이 많더라?"
"그러면 안돼? 멋지잖아. 어른스럽고, 똑똑하고."
"... 나도 너보다 똑똑해."
"... 어쩌라고!"
교무실로 가는 길은 조금 길었고, 평소보다 어둑한 복도는 사람이 없어 쉽게 소리가 울렸다. 구관에서 본관까지의 거리는 멀었고, 그 사이에는 지붕이 없는 길이 반드시 끼어 있었다. 소리를 지른 곳이 건물 안이 아닌 것은 다행인 일이었지만, 비에 젖어야 하는 둘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우산 있어?"
"... 일기예보에 없었어."
"교무실 가서 싹싹 빌어보지, 뭐."
"일단 저길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인데..."
구관과 신관 사이의 거리는 못해도 50m는 됐다. 그 흔한 구름다리나, 지붕 있는 통로 같은 것을 설치해줄 만큼 학교는 학생들의 복지에 관심이 없었다. 잠깐만. 그 통보만 남기고 마인드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간다. 반에 가려는 건가? 빨리 안 오면 뭐라고 해줘야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디셈블러는 문간에 쪼그려 앉는다. 평소보다 크고,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조급한 걸음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돌아보려던 순간, 디셈블러의 시야는 가려진다.
"켁, 뭐야?"
"체육복. 어제 빨아서 가져왔으니까 안심하고 그냥 뒤집어 써."
"넌 어쩌고."
"같이 써야지."
"이 작은 걸?"
"..."
"차라리 넌 비 맞고 가는 게 어때. 선생한테 보여주기 식으로 시위할 겸."
"... 하아. 너, 정말."
베에. 혓바닥을 장난스럽게 내미는 디셈블러는 짓궃은 낯이다. 저걸 콱 깨물어 버릴 수도 없고. 떄렸다간 제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테고. 어쩌다 자신이 이런 소꿉친구를... 하아. 마인드는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툭, 내려둔다. 자기 물건 관리만큼은 철저한 놈이 보일 태도가 아니라서, 디셈블러는 눈을 끔뻑인다.
"갔다 올 테니까 기다려."
"아니, 같이 가야지. 니 핑계 대고 째려면."
"비 맞는 거, 싫어하잖아."
"... 됐으니까 그냥 가자. 나 어린 애 아니다?"
소꿉친구란 존재는 이럴 때 불편했다. 잊고 싶던 기억도, 전부 공유하고 있으니까. 도리질치며 디셈블러는 마인드의 체육복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 어차피 비가 와서 끝이 곱슬거리기 시작했던 참이다. 보여줄 놈도 마인드 뿐인데 뭐 어때? 옆 힐긋거리면 다시 가방을 맨 마인드가 신발끈을 고쳐신고 있었다.
"나 먼저 간다!"
"야!!"
"빨리 와!"
대낮도, 해변가나 갈대밭도, 하다못해 날이 좋지도 않건만. 그게 무슨 낭만적인 나 잡아봐라, 라도 되는 것마냥 디셈블러는 신이 났다. 그냥 마인드를 골려줄 기회를 놓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답잖게 크기가 서로 다른 리본이 묶인 신발로 마인드는 디셈블러를 따라 잡기 위해 빗길을 내달린다. 말 더럽게 안 듣지. 진짜.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빗소리에 묻힌다. 신관 현관에 다 도착해갔을 즘에, 번개가 내리친다.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세상이 번쩍거린다. 근처에 내리친 모양이다. 학교마저 전등이 깜빡인다.
디셈블러는, 그 자리에 웅크려 머리를 감싼다. 안돼, 아냐. 싫어. 무서워. 벌벌 떨리는 몸을, 마인드는 익숙하게 자신의 품으로 감싼다.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사람의 체온은 그 무엇보다 따뜻하기 마련이다.
"디셈블러. 나 봐."
"엄마. 엄마..."
"나 보라고. 디셈블러."
"흐으... 싫어. 싫어..."
웅크린 몸을 제 몸으로 덮어버리고, 품에 가둔 후에도 도리질치는 고개는 가만히 내버려둔다. 억지로 시선을 돌려봐야 다칠 거라는 사실을 잘 아는 탓이다. 능숙하게 품에 안은 채로, 귓가에 느리게 속삭인다. 디셈블러는 어릴 적부터 청각이 예민했다. 큰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고, 누가 소리를 지르면 노려보며 앙칼지게 마주 소리를 지르고, 불평을 뱉어낼 정도로. 그러니까 이 정도 속삭임이 적당했다.
"어펙트."
"... 아크?"
"그래. 들어가자. 너 춥겠다. 비가 올 뿐이야. 괜찮아."
"어. 아. 응..."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가늠하느라 바쁘게 굴러간다. 흰 벽, 주욱 걸린 초상화와 벽에 적힌 글귀. 묘하게 어두운 복도... 추위인지, 공포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이유로 떨리는 몸은 점점 마인드에게 가까워진다. 걸음이 서로 겹쳐 곤란해질 정도가 되기 전에, 마인드는 능숙하게 디셈블러를 품안에 가둬버린다.
"ㅁ, 뭐야?"
"주사 맞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긴장 좀 풀라고."
"그렇게 애는 아니거든?!"
"그럼 혼자 기다릴래?"
묘하게 어두운 복도를 휙휙 돌아본 디셈블러는 제 양 어깨에 걸린 팔을 괜히 노려보다가 왼손을 꾹 잡아쥔다. 마인드는 왼손잡이였으니까, 주로 쓰는 손이 잡히면 툴툴대곤 했다. 거슬린다고 무어라 하는 수준이 아니라, 놓으라고 신경질마저 부릴 정도로. 유일한 예외가 어펙트였다. 매번 유약한 낯으로 안돼? 하면 그는 꿈뻑 넘어왔으니까. 뭐, 여자애인줄 착각했을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멋대로 잡고 베에, 혀나 내밀 뿐이다.
"학주한테 조퇴증 빨리 받아와. 집 가서 씻고 싶어."
"뻔뻔하긴. 맡겨뒀냐?"
"니가 제안했다?"
"알겠어. 알겠어."
교무실에 다다라서야, 입에 어색하게 오른손 검지 올리며 마인드는 키득인다. 어쩌면 이 순간에서만 즐길 수 있을 일탈이다. 즐겁지 않을 리가 없지. 교무실에 들어서자 이목이 쏠린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 소문이 자자한-사실 디셈블러의 일방적인 짜증이다.-전교 1등과 2등이 손까지 꾹 잡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익숙하게 학생주임의 자리로 가서는 늘 대는 핑계, 열이나 두통같은 것을 대고, 당당히 조퇴증과 우산마저 쟁취해낸다. 하나 뿐인 우산의 크기는 작지 않았기에 남고생 둘이여도 어깨를 맞대고, 서로 끌어안으면 대충 들어갈 만 했다.
"너, 가방에 뭐 들었어?"
"책. 필통. 약."
"그럼 내가 우산 든다?"
"그러던가. 약 젖으면 죽을 줄 알아!"
"못 무는 개가 시끄럽게 짖는데."
"시끄러워!!!"
아득. 마인드의 손바닥을 야무지게도 문 디셈블러는 뻔뻔히 가방을 앞으로 맨다.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네가 진짜 개인 줄 아느냐, 아파 죽겠다 투덜대는 소꿉친구의 말은 안 들린다는 듯 무시한 채다.
"넌 진짜 나 없이 어떻게 살래?"
"잘 살겠지. 아, 네 형한테 대신 부탁해도 되겠다."
"뒤져도 그새낀 나랑 같이 뒤져야겠네."
"뭐라고?"
"못들었으면 됐어."
어깨 으쓱이며 디셈블러의 한쪽 어깨를 감싸쥐고, 마인드는 우산을 펼친다. 소꿉친구의 보폭을 맞추는 것쯤은 익숙한 일이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겠지만, 지금은 좀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제 형을 자신의 대용품으로 쓰겠다니. 짜증이 안 나고 배길 일인가? 제멋대로 구는 친구에겐 좀 벌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멋대로 끌어안은 어깨 잡아 끌며 달려간다. 우산은 디셈블러 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채다.
"야! 천천히 좀 가!"
"안 들려."
"마스터 마인드!!!"
"귀 먹겠다."
"개새끼야, 야!! 나 넘어진다고!!"
"안 넘어질걸?"
"누가 허리에 손 올리래, 미친놈아!!!!!"
"어. 내가."
"미친 새끼야..."
"동네 소문 내줘서 고맙다."
"개새끼... 또라이... 미친놈..."
"어. 그래. 사랑한다고?"
"... 제정신이 아니야..."
야자하는 학생들은 아직이고, 학원에 갔을 학생들도 아직. 야근하는 회사원들마저 퇴근하지 않았을 어중간한 시간대에는 길거리에 사람이 적기 마련이다. 비가 오는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습하지만. 그럼에도 더는 두렵지 않은 건, 둘이 함께 있어서일 테다. 절대 마인드의 온기에 디셈블러가 마음을 놓은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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