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들려줘
엘소드 블루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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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교환 작업물입니다.
비고트가 어떤 폭풍에 휘말려 에픽 수색대가 있는 시간선에 떨어졌다는 설정의 날조...
이런 말도 안 되는 식물에게 붙잡힌 건 절대 비고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들 주위를 둘러싼 뒤 단단한 벽을 세운 정체 모를 식물. 너무도 억세고 강했다.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 만큼. 비고트는 벽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제 힘을 투영해 벽을 부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일순간 일그러지는 비고트의 얼굴. 얼기설기 얽힌 식물이 일순간 진동했다. 비고트의 주먹으로 인해. 그러나 돌아온 것은 고통뿐. 제대로 된 타격이 들어갈 리 없었다. 젠장, 젠장! 비고트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식물보다 더 기분 나쁜 건, 여상스레 뒤에 다리를 꼬고 앉아 비고트를 바라보는 블루헨이었다.
“소용없다니까요.”
웃음기 가득한 얼굴에서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밭은 숨을 고르며 주저앉은 비고트와는 완벽히 대조되는 태도였다. 블루헨은 비고트를 눈으로 슬쩍 훑더니 아무렇지 않게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저 빌어먹을 느긋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날이 서다가도 무참히 흩어졌다.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블루헨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겠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비고트는 부러 블루헨에게서 멀찍하게 떨어져 앉았다. 우스운 듯 눈을 찡긋거리는 블루헨은 덤.
“그래서, 뭔데요? 이걸 쫓아낼 방법이란 게.”
“이 식물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진 않아요. 다만…….”
“다만?”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고, 모험가들의 이야기도 좋아하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풀어준다고 하더군요?”
“뭐 그딴…….”
점점 더 일그러지는 비고트의 표정. 블루헨은 이런 상황에서도 태평했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은 태연자약한 자신감을 담고 있었다. 뭐 그딴 게 다 있어요? 비고트는 당장이라도 식물을 전부 베어버릴 기세로 달려들었으나, 역시나 소용없었다. 블루헨의 말이 맞았다. 일반적인 물리력으로는 쫓아낼 수 없는 듯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인지, 위해를 끼칠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줄기와 잎으로 단단한 벽을 만든 채 놓아주지 않을 뿐이었다.
“…… 그럼 네가 해봐요. 그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거.”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그런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이미 이 식물을 많이 만나봤거든요. 나에게 들을 이야기는 전부 들었을 걸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내가 먼저 해볼까요?”
블루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물의 꽃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커다란 꽃은 천천히 제 꽃잎을 펄럭거렸다. 아마도 식물의 본체인 듯했다. 비고트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외형까지도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며. 블루헨은 꽃을 마주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엘 수색대와 있었던 이야기. 엘리시스가 실수로 고기를 전부 태운 일이나 아이샤가 마법봉을 잘못 가지고 온 이야기, 라비가 애드의 다이너모에게 말을 걸다가 혼난 이야기 따위였다. 그러나 식물은 그저 조용히 블루헨을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는 식상한가 봐요. 반응도 하지 않네요.”
“…….”
싱긋 웃는 눈꼬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블루헨이 서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리 오라는 듯 살랑살랑 흔들리는 손. 비고트는 그를 노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꽃 앞에 섰다. 푸른 꽃이 부드럽게 꽃잎을 접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저를 지켜보듯 내려다보는 식물. 그 끝에서 미미한 엘의 기운이 느껴졌다. 불쾌했다. 비고트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이 식물을 처리하는 일은 우선 여기서 벗어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이 최우선. 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일순간 불쾌한 기분이 머리를 잠식했다. 꽃보다 더 기분 나쁜 것은 옆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빤히 바라보는 블루헨의 시선이었다. 저렇게 여유로운 태도라니. 이 망할 꽃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는데. 비고트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였다. 비고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힘이 약해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식물에 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존재하는 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로 점철된 과거뿐. 이따위 이야기가 흥미로울 리 없었다.
“나는…… 버터 바른 빵을 좋아해요.”
“…….”
“또…….”
푸핫. 옆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또 블루헨이었다. 비고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분노 담긴 중얼거림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젠장, 젠장. 당장 떠올리라고 해도 흥미로운 일 따윈 저에게 없었다.
비고트가 블루헨에게 협력하기 시작한 건 제 의지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꼬인 시간선과 빼앗긴 힘. 처음부터 끝까지 원치 않은 일뿐. 미미한 엘의 힘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간 속에서 비고트를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엘 수색대였다. 블루헨은 단번에 그가 타락한 천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을 구한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마법사 씨와 수호자 씨가 근처에서 당신을 발견했더군요. 동료들이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다른 세계의 아인 체이스 이스마엘은 동료니, 정이니 하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 이상한 자였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당장 저항할 힘이 없는 지금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저 자를 싫어하고요.”
“나를요?”
블루헨이 어깨를 으쓱였다.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상처인데요. 아, 너무해라. 더욱 굳어진 비고트의 얼굴과 여전히 반응 없는 식물. 비고트는 조용히 무거운 숨을 토했다. 느릿하게 감기는 눈. 생각하자. 침착해지려고 해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비고트는 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또 다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서는. 정말 싫었다. 비고트의 시선이 꽃잎을 향했다.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이 당장이라도 꽃을 베어낼 것만 같았다. 곧이어 튀어나온 문장.
“…… 죽이려고 했어요.”
“…….”
협력할 생각 따위 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면. 빌어먹을 세계 따위가 아니라 정말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전부 끝내버리자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까득. 혀끝으로 느껴지는 비릿한 맛. 깨문 입술에 상처가 났다. 아픔도 모른 채 짓누르고 있었다. 난 정말로 모르겠다고요. 이런 상황 따위! 울분에 찬 목소리. 비고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이어 이어진 사건은 그를 무너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장 돌아갈, 아니 뭐라도 해보일 힘이 있었다면. 언제나 운명은 저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풍경도, 전부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짐짓 블루헨 쪽을 모른 체했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평생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주위 풍경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꽃잎이 하나 둘 접히고, 꽃받침은 고개를 숙였다. 비고트의 외침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듯 커진 눈. 그들을 둘러싼 줄기가 하나 둘 스르르 풀렸다. 단단하게 그를 감쌌던 벽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꽃은 작아졌다. 금세 땅 속으로 자취를 감춘 꽃. 이딴 게 흥미롭다니, 너도 참 악취미군요.
그리고 천천히 걸어나오는 블루헨. 비고트의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여전히 웃는 낯짝이었다. 여유작작한 미소. 비고트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제 갈까요? 아까 했던 말은 모른 척해줄게요.”
“…… 쓸데없는 소리를.”
“조심 좀 해야겠어요. 네가 날 죽일지도 모르잖아요.”
“장난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저 속을 알 수 없는 웃음. 블루헨은 어깨를 으쓱이며 앞장서 걸었다. …… 지금이라도 죽일까. 뒤늦게 이는 충동이 머리를 잠식했다. 비고트는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가, 폈다. 손 안에 모이는 엘의 기운. 희미하게 모였다 흩어지는 빛무리. 소용없다는 듯 작은 반짝임이 손끝에서 부서졌다. 협력할 생각 따위 없었지만……. 비고트는 블루헨의 뒷모습,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같은 개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태. 그러나 바라보고 있을 때면 기이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정말, 싫었다. 죽을 만큼.
“저 숲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참, 그런 이상한 식물은 대체 뭔지.”
“식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둠 브링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비고트는 이전에 만났던 꽃을 다시금 떠올렸다. 기분 나쁘다는 듯 좁아진 미간이 비고트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퉁명스러운 어투가 뒤를 이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풀어주는 꽃이요.”
“그게 대체 무슨 꽃인데?”
비고트는 둠 브링어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고트가 묘사하는 꽃의 이야기를 듣던 둠 브링어의 표정이 점점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놀람, 궁금증, 다음은 황당함. 비고트는 말을 이어갔다. 그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로.
“하여간, 이상한 것도 많군요. 빌어먹을 시간선 같으니.”
“하, 바보냐? 세상에 그런 꽃이 어딨어?”
“무슨 소리예요?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그건 그냥 스타후르츠를 좋아하는 꽃이다. 대충 아무 과일이나 줘도 마음에 들면 풀어준단 말이다. 알겠냐? 어디 가서 사기나 당하지 마라. 애송이.”
“…… 그게 무슨…….”
문득 떠오르는 과거. 이곳의 엘리오스가 제가 살던 엘리오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런 위험한 식물에 대해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꽃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건 전부 블루헨이었다……. 그 말은 즉…….
둠 브링어는 방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비고트를 부러 붙잡지 않았다. 저 멍청한 애송이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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