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매패] Longing

악마는 절망을 먹고 자라난다

엘소드 by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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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언젠가부터 내 곁에 자리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소드의 제어에서 풀려난 순간부터? 혹은 약혼자와 동료를 모조리 잃던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내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있었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영역이다. 그가,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도록 도왔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것은 때로는 목소리였고, 손길이었으며… 어떤 순간에서는 그저, 그리움이었다.

A.

한 음절, 그리고 작은 소망. 그것으로, 너는 내 곁에 나타난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확신하는 방법은, 그 특유의 향 덕이다. 아무 것도 맡아지지 않는 향. 전부 지워버린 것처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향. 그것은, 녀석이 나타날 때면 느껴지는 첫 이변이다. 더없이 예민해진 감각에 한 겹 막을 친 듯한 세상. 그렇게 감각이 하나씩 둔해지는 순간,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음을 확신한다. 

난, 너를 볼 수 없는가?

내가 보고 싶어?

웃음 섞인 목소리. 내가 간절히 바란, 안식의 조각이다. 세리스에게 느끼던 안정감과는 다르다. 내 의무조차 내려놓고 쉴 수 있던 그녀의 곁과는 다르다. 그저, 이것은 잠시의 틈새에 불과하다. A는 의무를 잊지 말라 이야기하는 듯, 내 시각만큼은 내버려두곤 했다. 이조차 내가 좋을 대로 붙인 해석이라 말한다면, 나는 할 이야기가 없어지겠지만. 글쎄. 그라면, 어쩐지 이조차 내버려 둘 것 같았다. 네 멋대로 하라, 그렇게 굴면서. 나는 너무 늦지 않게 그의 질문에 답한다. 

그래.

그렇다면, 간절히 소망해.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방금도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했잖아. 그렇지, 레이븐?

... 그래.

그는 나를 언제나 레이븐이라 불렀다. 나는 그의 앞에서는 그 무엇도 아니다. 크로우 용병단의 단장도, 절반뿐인 인간도, 혹은 노바 임퍼레이터조차 아니다. 그저, 레이븐. 그런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 된다. 나는 한 겹 유리된 세상에서 느리게 숨을 뱉어낸다. 그는 내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대화의 끝에서 늘 같은 질문을 했다. 너의 세리스는, 어떤 사람이었어? 나의 절망은 그 순간, 그 무엇보다 생생해진다. 하지만 그를 부르지 않고서는, 나는 견딜 수 없다. 과열되어서 터지고 말 테다. 뇌든, 심장이든. 혹은 다른 무언가에 속하는 것이든… 

A.

나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약에 중독된 것처럼 그를 부른다. 간절한 소망, 그 힘을 담은 언. 세리스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내게 안겨든다. 그녀의 체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난치지 마라.

장난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난 지금 네가 상상하는 모습대로 나타난 것 뿐인걸.

… A.

세 번의 호명. 그 끝에, 그는 소년이 된다.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열 넷의 소년. 그는 피이, 하는 아쉽다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내게 안긴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는 한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다.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고, 그저 팔 위에 무언가가 있다는 감각만이 존재한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이 순간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순간, 내가 숨쉴 수 있는 인간임이 중요한 거지.

딱히 의도한 건 아니야. 난, 네가 원하는 대로 나타나니까. 

그런가. 내 실수인 모양이지. 사과하마.

그럴 것 까지야. 그래서, 무슨 일로 내 모습을 다 보고 싶어 했어? 이건 작은 소망으로는 안될 텐데.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체구지만, 내 팔 위에 올라타 있으니 가능한 행위였다. 그 쓰다듬이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것은 어린 외관인 탓일까?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이건, 우리가 마주보고 해야 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래? 그럼, 끝나고 나랑 약속 하나 하자. 꼭 해줘야 해. 그래도, 이 모습으로 너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해?

그래. 반드시.

응, 좋아. ‘이야기’ 하자.

드물게 떨리는 심장이 느껴진다. 어쩌면 착각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 팔 뿐만이 아니라 내 몸을 이루는 장기 역시도 나소드의 것으로 교체된 지 오래이니, 나의 감각을 전부 믿어서는 안된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A는 내 행동을 기다린다.

나는, 네가 무슨 의도로 내 곁에 있는지 모른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이름조차 제대로 알 지 못하지.

A.그게 내 이름이래도?

이름의 일부겠지. 그 정도도 추측하지 못할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다.

그래서?

네 이름을 알려다오. 그렇다면, 그 약속을 해주지.

이건 이야기가 아니라 거래잖아. 

내 소망이다. 안 되겠나?

… 그래. 그럴게.

두 번의 깜빡임. 세 번째가 되는 순간, 그의 머리카락이 빠르게 자라난다. 아니,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다. 팔, 다리. 몸. 그는 단숨에 성인의 체구로 변모한다. 새카맣게 물든 흰 자위가 이질적이다. 아니, 처음부터 저런 눈이었나?

내 이름은 매드 패러독스. 시공간의 악마지.

… 

이제 내 차례네. 좋아, 레이븐. 함께 해주기로 한 거야? 약속.

레이븐은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지만, 악마는 교활하고, 사악했으며, 영악했다. 

자, 이제 우리는 이어진 거야. 나도 네 이름을 알고, 너도 내 이름을 알지. 약속은 깨질 수 없어. 우리는, 이어진 조각이 된 거야. 기뻐해도 좋아.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아, 아아.

짐승의 울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악마는 제 긴 머리카락으로 검은 짐승을 덮어버린다. 그 밑에서 울부짖는 짐승이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 되도록…

사랑하는 레이븐,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이야기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 그건 그저, 무언가가 해결된다는 착각을 안겨줄 뿐이야. 정작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어진 것들 끼리는, 모든 것을 공유하거든. 쾌락도, 슬픔도. 기쁨도, 절망도… 

자, 이제 마음껏 절망해. 난 네게 쾌락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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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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