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사마마] 시차
1999년 겨울, 그 초입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글쎄, 달라질 게 있나? 호흡하고, 영양분을 섭취하고, 생장하고, 성장하면서. 살겠지. 어쩌면 그쪽이 더 진화한 개체일 지도 모르고.
네 생각은 그렇구나.
그 옛날, 아직 채 도로가 전부 아스팔트로 뒤덮이지 않고, 담에는 담쟁이 넝쿨과 꼬맹이들이 해둔 낙서가 어우러지고, 햇빛이 가려지는 것 없이 온전히 땅으로 내려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보이고, 높은 건물 같은 건 도심에 나가야만 보이던. 우리의 낭만 어린 그 시절.
그 대화를 한 날은 뜬금없이 네가 가자고 이끌던 날. 겨울인 탓에 노을이 일찍 지고 있던, 학교를 마치던 그 날. 우리는 하루의 일탈을 시답잖고 별 의미 없을 행동들을 하며 보냈다. 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군것질거리를 한 컵씩 들고, 문방구에 들러서 그 앞 게임기를 십 오 분쯤 차지하고 있다가 꼬맹이들의 눈총에 물러나고. 신식 아파트니 뭐니를 짓는답시고 요란하게 공사해대던 집터를 지나, 언덕을 올라서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작은 공원에 도착하고 나서는 어린 애처럼 그네를 탔다. 점점 추워지는 바람을 직면하며 시답잖은 농담따먹기를 하고, 넌 나중에 커서 뭐 할 거니 꿈은 있니 명절에나 얼굴 보는 먼 친척 어른 같은 개소리도 좀 지껄이고. 한참이 지나 적막이 찾아오면, 우리는 어스푸름한 어둠과 간간히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가로등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야.
왜.
자살하진 마라.
니가 뭔데.
친구.
... 고민은 해주지.
새끼,
야!
그 날은 답지 않게 별다른 반박도, 변변찮은 욕설도 없이 대화를 나눴다.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네 이야기였다. 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대화했고, 넌 평소와 달리-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순했다. 네 기준에 개소리만도 못할 소리였던-너는 네 의견과 다른 것이 있다면 늘 그런 취급을 했던 것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내 주장을 반박 하나 없이, 부정하지 않으며 수긍했다. 난 네가 왜 그렇게 유해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런 네가 어색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말을 잘 들어주고 친절하게 굴면 그냥 좋다고 받아먹으면 되는데, 그게 왜 그렇게도 어색했는지.
네가 결벽증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어 타인의 접촉을 꺼린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날은, 어쩐지 그래도 될 것만 같아서. 네 목을 감싸고, 머리를 헝클어 버리고, 끌어 안고, 장난을 쳐댔다.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 별다른 무게감도, 의도도 없는. 단순한 장난.
집엔 언제 갈 건데.
오늘 자정이 지나고.
부모님이 안 찾아?
넌?
미리 말만 해두면...
그럼 지금 연락해둬.
그러지, 뭐.
그 장난 이후에 우리 사이엔 불편하지 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너였다. 상대가 얌전하니 홀로 거칠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나는 덩달아 순하게 굴었다. 네 말대로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간간히 기침을 해대면서도 자정까지 그 자리를 지킨 걸 보면, 무언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던 게 틀림 없다.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자정이 지나면 알려줄게.
웬일로 바보라고 안 하네.
그렇게 불리고 싶어?
겠냐.
그럼 조용히 해.
우리 마을에는 낡은 종탑이 있었다. 성당에 딸린 것으로, 주민들의 민원으로 평소에는 소리를 울리지 않지만 특별한 날들에는 종을 종종 울렸다. 새해 첫 날이나 무슨 축일,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만 들을 수 있던 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 이제 가자.
그래서, 뭐였는데?
순교자의 날. 이제 끝났어. 집으로 가자. 각자의 집으로…
너는 그 다음날에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알지 못하는 눈치였고, 네 집은 하루만에 텅 비어졌다. 나만 덩그러니 12월 1일에 보내고, 너는 11월 31일에 남았다.
왜 그런 거야, 마인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차가 있으니, 기다리면 언젠가는 들려줄 거다. 넌 늘 내 질문에 답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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