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외반
레닌그라드의 겨울이다. 창문을 가린 커튼을 들추니, 유리창 넘어 길가에 쌓인 눈더미가 보인다. 지금까지 머문 곳의 겨울은 어떻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시시한 감상만이 떠오르자 외젠 로베르는 들춘 커튼을 놓고 주전자를 든다. 때마침 물이 끓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으니 적절한 순간이다. 준비해 둔 두 머그잔에 물을 붓고 한 손에 하나씩 든다.
양손에 머그잔을 든 채로 외젠은 거실로 향한다. 거실에는 이반 파블로프가 소파에 앉아 책을 본다. 외젠은 부러 소리를 내어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둔다. 탁, 하고 표면이 맞닿는 소리와 무시할 수 없는 기척에 이반의 시선이 책에서 떨어져 하얀 머그잔에 닿고, 느릿하게 그에게로 옮겨진다. 눈이 마주친다. 외젠은 고개를 까닥인다. 뜻을 알아차린 이반은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리다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간다. 프렌치들이란. 이반이 생략했을 문장이 외젠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몇 번이고 들어온 말이다. 익숙한 떠올림이란 소리였다. 외젠은 제 웃음을 삼키며 이반의 옆자리를 차지한다.
언제나처럼 빳빳하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흘러내린 채다. 각 잡힌 군복 대신 입은 옷은 조금 아쉽긴 해도 괜찮은 차림이다. 특석에 앉아 그를 구경하니 역시 눈보다 이렇게나 기다린 소련인이 낫다. 난로 소리와 간간이 책장 넘어가는 소리에 말소리가 얹어진다. 이반이 읽는 책을 알아본 외젠의 목소리다. 여전한 센스, 혹은 취향에 외젠은 책장을 툭 친다.
“오늘도 편파적인 독서네요. 다른 걸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까?”
외젠의 행동에 이반은 눈동자만 틀어 그를 본다. 이반이 선택한 책은 군사학에 대한 책이다. 레닌그라드에 오기 전부터 들고 있던 책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선택은 군사학 아니면 시집이었으니 말이다. 이반은 다시 눈동자를 틀어 책에 시선을 둔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외젠이 여간 신경 쓰인다.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자다. 신경을 갉작인다. 그에 반해 외젠은 평온하다. 이반의 속도 모르는 건지,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외젠은 여유롭게 그의 손등을 건드린다. 마주친 이반의 붉은 눈은 여전히 좋은 감상을 내놓을 수 있는 눈이라는 걸 떠올린다.
“당신, 눈이 제법 겨울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에 이반이 시선이 외젠에게 꽂힌다. 외젠은 그 시선을 느끼며 소파 등받이에 기댄다.
“소련 국기랑도 잘 어울렸지만… 겨울도 잘 어울리네요. 희멀건 색들 사이에서 유달리 선명해서, 뭐 잊어버릴 일은 없겠습니다. 잃어버릴 일도요.”
짧은 헛웃음. 외젠은 제게 옮겨진 시선과 그 시선이 시작인 붉은 눈동자를 눈에 담는다.
“그렇다는 겁니다.”
결국 이반은 책을 덮는다. 더는 책에 시선을 둘 집중력은 없다. 글자도 읽히지 않는다. 이반에 죄다 가져가 버린 까닭이다. 신경을 갉작거리더니 이제는 어이없는 말을 한다. 주황빛 조명 아래 외젠을 본다. 편한 옷차림에 정돈된 머리카락. 하지만 배회하던 시선이 결국 향하는 곳은 눈동자다. 한쪽이 조금 탁한 올리브색. 성급하게 입을 연다. 답을 바라지 않는 중얼거림이다.
“…자네 눈도 겨울과 어울리군.”
“음?”
“단조로운 색들 사이에서 단조롭지 않은 색 아닌가. 이러면 어울리지 않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이반은 느릿하게 답을 한다. 중얼거림과 같은 말에 돌아온 대답에 숨을 내쉬고 말을 고른다.
“내 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겁니까?”
“그냥 그렇단 말이네.”
자신의 답과 같은 답에 외젠은 웃는다. 이반은 외젠의 웃음에 미간을 찌푸린다. 하지만 결국 이반은 헛숨을 들이키고 내뱉는다. 레닌그라드의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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