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요한소피
프랑스의 땅이다. 요한 크란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익숙한 내음이 코를 간지럽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리니 수선화 꽃잎을 닮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소피아 로드리고. 열차에서 함께 내려, 독일 다하우 수용소를 밟고, 프랑스까지 같이 온 이. 소피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소피아, 도착했어요.”
프랑스의 하늘은 독일의 하늘과도 미국의 하늘과도 다른 점이 없다. 독일의 공기와도 미국의 공기와도 다른 점은 없다. 다른 점은 하나. 함께 도착하기로 약속한 땅. 요한 크란츠와 소피아 로드리고가 열차에서 내린 이후를 생각하며 도달하기로 한 곳이라는 사실이 그들이 살아가던 땅과 다른 점이다.
“정말 프랑스네요.”
담담한 목소리. 연둣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자, 요한은 소피아에게서 피로감이 묻어나는 걸 알아챈다. 독일에서 프랑스까지 오는 길이 고단했을 테다. 그는 손을 내밀어본다. 숙소를 잡을까요. 고단함을 풀 수 있는 곳으로요. 소피아는 그 손을 잡는다.
문득 요한은 잠에서 깨어난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푹신한 침대가 익숙지 않았다. 독일을 떠나 레지옹 에트랑제에 있을 때는 그저 몸을 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마음을 대가로 탄 열차의 침대는 푹신했지만 그건 ‘열차’의 침대였다. 이런 침대에 눕는 건 요한에게 오랜만의 일이었다.
몸을 일으키며 방안을 바라보니 여전히 어둡다. 아직 밤이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소피아의 자리를 비춘다. 소피아는 곤히 잠들어있다. 고요한 방 안에서 소피아의 옅은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소피아.”
소피아의 이름을 입에 올려본다. 저릿하다. 제가 책임지겠다고 한 사람이다. 요한 크란츠를 따라 열차에서 내리고, 프랑스까지 함께 온 사람이다. 좋아하는 땅에, 좋아하는 사람. 깔끔하게 올려묶은 머리카락이 풀린 채로 어깨 위에 흘러내렸다. 정말로 무방비한 모습이다. 순간 들끓는 충동을 느낀다. 이대로 저 목에 손을 올리고 움켜쥔다면 소피아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자맥질할 거다. 제 손을 떼어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산소가 부족하니 얼굴은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붉어질 거다. 거친 숨을 쉬고 제 이름을 부르고, 어쩌면 보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숨이 부족하면……. 요한은 생각하기를 멈춘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챈다. 손이 소피아의 얼굴 근처에 가 있는 걸 깨닫는다. 그 손은 떨리고 있는가?
요한은 숨을 쉰다. 숨을 쏟아낸다. 소피아가 행복해졌으면 한다. 그래, 행복. 간절한 자신을 상기하며 마른세수를 한다. 충동을 참는다.
“자나요?”
소피아에게 성큼 다가가 가슴께로 귀를 가져다 댄다.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보인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옅은 호흡은 잦아들지 않는다. 소피아는 살아있다. 요한 크란츠의 옆에서. 살아있다는 선명한 증거를 보고 느끼자, 그제야 요한은 제 자리에 눕는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날이 밝으면 산책을 갈까. 머무를 수 있는 집을 구하기 전까지 식사하기 괜찮은 곳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만일, 이 동네가 소피아 마음에 든다면 이곳에서 집을 구하면 된다. 그 집이 소피아가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집이 되기를 바란다.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이곳이 그들이 살아갈 곳이고, 그들이 살아갈 땅이다. 소피아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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