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마레 연성1

이 망할 웬수야. 혹자는 나를 미쳤다 할 것이다. 조합만 보아도 그렇다. 청산당한 친일 순사와 독립투사. 그것도 임정 요인이었던 작자와는 전혀 화합이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물론 내 생각도 그렇다. 이 망할놈의 설연수란 인간과 나는 동문이란 것 외에는 아무 공통점도, 없다.

..아니. 적어도 20대 즈음엔 엇비슷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놈의 사정을 알게된 건 최근이었다. 그것도 그 빌어먹을 우연이든지, 운명의 장난이든지 해서.

"..형님. 이러다 참말 큰일나십니다."

"나는 괜찮네. 다익이."

딱히 내가 어디가 아파서 손 박사의 병원에 찾아간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안부 차였다. 손 박사가 병원을 옮겼다길래 인사나 하려는 생각이었지. 나는 손 박사 소유의 병원 벽지를 보곤 그 양반 성격답게 참말 먼지하나 없다, 매일마다 직접 청소라도 하는겐가- 하군 창틀에 손가락을 비벼보던 찰나였다. 매끈한 촉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진료실 안에서 손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처럼 화내지는 않지만, 폭발하기 직전의 그 혀를 집어삼키는 듯한 어투였다. 다른 목소리는, 글쎄. 첨엔 긴가민가하였다. 누군가가 떠오르긴했지만, 잔뜩 독이 오른, 조소어린 그 목소리에 비하면 지나치게 맥아리가 없는 목소리여서 그랬던 것도 같다. 어쩌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나,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는 얼굴을 보고는 내 예감이 맞은 줄을 알았다. 사실 첨엔 긴가민가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은 형무소 생활 탓인지는 몰라도 창백한 얼굴 하며 저는 듯한 걸음걸이하며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시체같았으니까. 녀석도 나를 알아본 눈치였다. 인사 치곤 냉랭하게 오랜만이오. 하고 말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 양반이 나간 지 한참만이었다.

"아, 레이시치 경부."

"경부는 무슨. 그 노릇은 관뒀시다. 고건 그렇구 설연수 선생이 형무소에서 나왔다드만 진짠가 보우다."

나는 이제 막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하는 머리칼을 한 가운을 걸친 의사선생에게 말했다. 손다익 박사, 저 치도 제법 늙기 시작했구만. 못본 새에 안경알은 두꺼워졌고, 눈가 주름도 늘었다. 곰같은 인상은 여전하였으나..

"선생도 만나셨군요."

"그걸 만났다 해야할까. 안하느니만 못한 인사를 하더이다. 그건 그렇고, 그 친구 아직도 몸이 안 좋은 모양이군요."

"암만해도 그렇지요. 형무소를 나오고 그 때에 몸조리를 잘 하셨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쳐서.."

"치료가 안됩니까?"

미친 놈. 오지랖도 정도껏이지. 손 박사를 욕하는 게 아니라 내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그놈을 어찌 생각했건 그놈에게 나는 원수 아닌가.

"그건 아니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선 어렵지요."

"지금 상황이라니?"

"며칠이라도 입원치료를 받으시면 훨 괜찮으실텐데, 그럴 시간이 없으시다고 약만 받아가시니까요. 그마저도 들쭉날쭉하게 드시는 모양이고.."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안색은 안 좋긴 하던데."

"고문후유증이 문제지요. 게다가 폐도 썩 좋지가 않아요. 언제 한번 크게 터지지 싶은데.."

크게 터진다라. 나는 의사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질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손 박사의 말이 맞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폐병?"

"간단히 말한다면야 그렇지요. 폐가 터져서 그 안에 피가 괴인 상태였다고 봐야겠지만."

"진작 병원에 오질 않고."

"오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던데, 회의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던가요."

"무슨 일이기에?"

"저야 모르지요."

나는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의사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할까 싶었다.

"숨은 붙어있습니다."

"그래보이는군."

"그나마 저건 호전된 것이오. 처음에 실려올 땐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어서 기도확보도 어려웠으니까.. 더군다나 심정지도 왔었고."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손 박사가 냉정하다 하겠으나 그건 손 박사가 말을 골랐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내뱉는다는 건, 그만치 놀랐다는 뜻이었다.

"지금은요."

"산소호흡기 없인 숨쉬기가 어려우실테지만 혈압도 심박수도 그나마 안정된 편이지요. 의식은 없지만.."

"평소에도 자주 저랬소?"

"이번만큼은 아닙니다."

"토혈은 했단 말이군요."

"형무소에서 나온 후로 계속 몸이 안 좋으시기도 했거니와 쉬질 못했으니까요."

"쉬지를 못했다니?"

"광복이 되었다고 그만인 건 아니었는걸요."

-이건 결국 반쪽짜리 광복이네.

연수 형은 광복이 되던 날 그리 말했다.

안하느니만 못한 광복이다. 나도 대강은 들어 알고있었다. 그렇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하랴 싶었지. 아니, 것보다도 당장은 어쨌든 연수 형이 살아 나온 것만으로도 족해서, 당장은 연수 형이 급했으니까. 그때 나는 무어라 했던가.

-형님. 그러면 어때요. 형님이 살아계신데요. 우리가 살아있는데요. 그럼 우리가 차차 고치면 되는게지요.

형무소에서 있었던 수년간의 옥고, 산 사람을 잘 하면 폐인, 그도 아니면 고인으로 만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죽을 벗겨먹어 사느니 죽는 게 더 낫다던 고문속에서 풀려나와 결국 남은거라곤 뭉툭하니 튀어나온 뼈마디 뿐인 연수 형의 손을 붙들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그건 지나친 낙관이었다. 이승만은 백범선생이 막지 못하리라는 것을, 연수 형을 가만놔두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 것이었다.

-자네는 내가 내 욕심으로 설 선생을 내무장관에 올리려는 줄 알지.

언젠가 백범선생은 그리 말했다. 그럼 아니냐고, 나는 겁없이 되물었다. 하기야 겁없고 말고할 것도 없었다. 당시 백범 선생은 나와 연수 형에게 일종의 빚을 진 상황이었으니까.

-광복 후든 그 전이든 내가 사라지면 이승만은 필시 설 선생부터 칠 거네. 설 선생은 그 강직한 성격 탓에 이승만같은 부류와는 섞일 수가 없으니까. 지금이야 비서관인 탓에 별 수 없다지만 내무장관직을 이어받으면..

연수 형이 그걸 받아들이긴 하던가요. 백범 선생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더랬다. 그러곤 잠시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지 않으면 설 군은 죽을거네. 그 친구도 그걸 모를 리 없어. 어찌되었든 그 친군 내 후임자가 될 거네.

반은 맞았다. 연수 형이 자기가 어떻게 될것인지를 정확히 알고있다는 것은. 그러나 연수 형은 자기 살자고 무언가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삶이란 그에게 거추장스런 껍데기요 족쇄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가? 연수 형은 아니었다. 연수 형에게 죽음과 삶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음으로 하여금 매일 죽음을 맛보는 사람이었다. 연수 형이라면 특정한 이유 없이 그런 지옥을 선택할까? 글쎄. 나는 모르겠소.

"설 선생이 살아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시치 경부는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음성과는 다르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라 나는 잠시 어디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고. 하고 생각했다.

"광복 이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할 겁니다."

"살긴 할 거란 말이군요."

"살 수는 있을 겁니다."

본인이 그걸 원할지는 미지수지만.

레이시치 경부는 내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안도의 한숨이겠지.

"연수 형과는 같은 학교를 나오셨다 했던가요."

"같은 보통학교를 나왔지요."

"많이 친했습니까."

"제법."

독자여러분은 오해 마시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조차도 반쪽짜리 임정사람이라 레이시치 경부에게 사적인 원한은 없었다. 나도 아주 친일을 하지 않았다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누구네처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방패삼아 비난을 기피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만, 연수 형과 그토록 친하였다면 꼭 그에게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을까. 적어도 적당한 선에서 관둘수는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드는 것이다.

"설 선생은 나를 죽이고 싶을까요."

"모르지요."

아니란 말은 않는군요. 하고 레이시치 경부는 말했다.

모른다. 나로선 모를 노릇이었다. 연수 형이 일제를 증오하였고 그럴 이유도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레이시치 경부를 개인적으로 증오했는가.. 그건 다른 문제였다.

"아니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는지요."

없겠지. 청산당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누군들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람을 반가워할까? 반가워하긴 커녕 죽이려들지나 않으면 감지덕지지. 특히나 나는 녀석에게 등을 돌렸던 사람이니까. 마지막 순간에 잡아줄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던 그 때에 나는 놈을 외면해버렸으니까.. 때론 어쩔 수 없었노라 생각해보기도 하였고 시기가 좋지 않았다고, 나는 몰랐다 되뇌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종래에는 나와 녀석이 가치관이 달랐을 뿐이라는 변명으로 둔갑을 하고 있었다. 나를 스스로 속여가면서도 그게 기만이라는 것은 언제나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눈을 돌려버리었던 그 순간조차도.

"..손 박사."

내가 미처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녀석은 말을 내뱉었다. 그 한마디를 뱉는 것도 힘에 부친 모양이었다.

"누가 왔습니까, 손 박사."

나를 못 알아보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며칠 전만해도 내게 적대적이나마 인사를 했었다. 나는 설 선생의 얼굴 바로 앞에 손바닥을 갖다대고 흔들었다. 녀석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설마.

"눈이 안 보이실 겁니다. 일시적이오."

손다익 박사는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안경알에 빛이 비쳐 그 표정을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낭패한 듯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고문 후유증의 부작용같은거지요. 아주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눈앞의 사물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이런 망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앞도 안 보인다? 무슨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자네군.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설 선생은 그 문장을 띄엄띄엄말하고는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소나무 껍질처럼 소리가 거칠었다.

"레이시치. 맞나?"

나는 그제서야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고정되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를 보려고 노력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예전에 고문과 소갈병으로 한쪽 시력을 잃은 조선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꼭 저랬는데.

"지병이 있었나."

"아니."

"내가 안 보여?"

"소리는 들리니 상관없네."

그 말을 마치고 설 선생은 몇차례 쿨럭거렸다. 기계음이 널뛰기하듯 울려 손 박사가 분주해져야 했다.

"연수 형님. 말씀 많이 마십시오. 레이시치 경부,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놈의 경부 소리. 난 그거 때려쳤다니까. 그러나 대꾸하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병문안 오겠단 소릴 하고 나는 나가버렸다.

-

"쉬시라 하질 않았던가요."

손 박사는 나를 힐난하듯이 말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내 짐작이 맞을 것이다.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입술을 짓씹으며 분한겐지 억울한겐지 언뜻 봐서는 분간이 가지 않는 그런 표정일테지.

"이게 쉬는 게 아니면 뭔가."

"마지못해서지요. 형님이 죽을까봐, 제가 억지로 입원시키고서야."

연수 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할 때에 그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인가, 뒤로하고 온 비서관들 생각일까. 그도 아니면..

"퇴원을 한대도 문제군."

그거였구나. 참말 무정타. 무정하단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연수 형이 염치없이 구는 사람이 아니라 좋았지만, 이럴 땐 염치가 좀 없었으면 했다. 연수 형이 병원을 거절하기 보다도, 돈이 거절하는 것이다.

"아직도 비서관들 돈을 형님이 다 대시는가요."

"그러기로 했으니까."

광복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연수 형이 말한 것은 아니고, 연수 형의 고문후유증으로 입원한 대학병원의 원무과장으로부터-그는 연수 형이 임정에 있을 무렵 의무병이기도 했다- 들은 이야기였다. 연수 형은 왠만하면 대학병원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그때 있었던 발작은 일반 병원에서는 처치를 하기가 어려웠으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저는 그날 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줄로만 알았습니다.

-어째서요.

-워낙 토혈을 심하게 하셨으니까요. 선생님께서도 큰 병원에 계셨었으니깐 폐병환자 중에 심한 사람은 누워있으면서도 입에서 피가 거꾸로 치솟아 시트를 흠뻑 적시는 걸 보셨겠지요.

-연수 형이 그랬더란 말입니까?

-말도 말아요. 중도에 쇼크가 와서 심정지가 왔을 땐 내가 죽는 기분입디다.

-그러나 중환자실에서 꺼냈다 하질 않았소. 그럼 인젠 병세가 제법 잡힌 거 아닙니까?

-손 박사님도 참 순진하십니다 그려.

-무슨?

-무어든 간에 돈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법이지요.

-돈 문제로 환자를 뺐다 그 말이오?

-병원장이야 그 이유겠지요. 나는 막을 명분이 없었습니다. 설 선생님 형편이야 뻔히 알고, 어디 독립투사라고 병원빌 없는 걸로 해 줍니까?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요.

-연수 형도 돈을 못 벌지는 않을텐데. 지금 대통령과 사이가 나쁘기는 하여도 비서실장 아니오.

-그러면 뭘 합니까. 덤터기 쓰는 비서실장이지요.

-덤터기라니.

-손 박사님 참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만요.

내가 무얼 모르느냐고, 나는 되물었다. 이야기인 즉슨 이러하였다. 국가재정을 이유로 비서관들의 봉급을 대거 삭감하기로 하였는데, 그 대상은 연수 형의 비서관들이었다. 단지 연수 형의 휘하에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연수 형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편 가르기요. 재정은 핑계고. 애시당초 인원이 더 는 것도 아닌데 무얼 삭감을 해. 해서, 연수 형은 뭐랬는데요. 형님 성격에 가만있진 않았을텐데!

-그야 그렇지요. 그래서 비서관들 문제로 마이너스가 나는 걸 설 선생님께 청구하기로 하질 않았어요.

《자네가 책임져야 할 거네.》

《명줄을 끊어 팔아서라도 책임지지요.》

그 자리에 있었던 비서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원무과장은 내게 전해주었다. 명줄을 팔아서라도. 연수 형은 좀처럼 농담을 하지 않는다. 그건 진담이었다. 그리고 연수 형은 정말로 자기 명줄을 팔아 비서관들의 목숨을 사주고 있는 것이다.

그날부로 연수 형의 병원비는 내 앞으로 달아놓으라 하였다. 나는 그래도 종로에서 자릴 잡은 외과의라, 내 앞으로 떨어지는 것이 많았으니까. 연수 형의 병원비는 다달이 내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 비용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비용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건, 이승만이 작정하고 연수 형의 살점을 뜯어먹고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원무과장에게 함구하라 했지만 비밀은 좀처럼 없는 법이었다.

-자네까지 이러긴가.

-형님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요.

그날 연수 형이 사실을 알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악에 받쳐 처음으로 형님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죽으면 누가 표창이라도 한답디까, 형님이 없으면 형님의 비서관들은 부모 잃은 고아요. 망망대해에서 선장 잃은 선원들이요. 형 잃은 아우들입니다. 형님이 그러지 않았어요, 형님에게 저 비서관들은 자식이고, 아우고, 조카라고. 저들도 같아요. 팔다리가 잘려도 살 수는 있지만 머리가 잘리면 죽어요. 이걸 모르는 게 아니면서 왜 그런 방법을 택하셨어요. 형님-

연수 형은 고개를 푹 숙였다. 딱하시오, 형님. 그러나 이 말은 삼켰다. 내가 이 말까지 하면 연수 형은 그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형님의 목숨은 임정의 것이었고, 이제는 죽음마저도 형님으로선 박탈당한 것이다. 죽으라 할 때 죽어야 했고, 살아있으라 할 때 살아있어야 했다..

"퇴원은 언제쯤 되겠나."

그놈의 퇴원소리. 연수 형은 대학병원에 입원해 수액 줄과 혈액팩을 주렁주렁 달고있을 때에도 퇴원소리를 했다. 그 덕에 병원내에선 악명이 높았다. 퇴원할 몸이 아닌데도 퇴원하게 해달라 조르는 환자로. 당치도 않은 소리. 나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기는 내 소유의 병원이고, 연수 형의 담당의는 나니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제가 내보내드릴 때요."

"이보게."

"저는 그쪽말고 여기에 있는데요."

나는 두 손으로 연수 형이 향하는 얼굴의 방향을 조심스레 틀었다.

"앞도 안 보이시잖아요."

연수 형의 낭패한 얼굴은 일품이었다. 이런 말은 연수 형에게는 안된말이지만 어쩌면 이승만도 저 얼굴을 보고싶어서 괜히 괴롭히는지도 모르겠다. 연수 형은 살이 빠지긴 했어도 여전히 미남자 소릴 들었으니까.

"아예 안 보이진 않네."

"그리고 못 걸으시고요."

"정곡을 찌르는군."

제발 이러지 좀 마세요. 나는 애원조로 말했다. 그러면 연수 형은 이럴 것이다, 자네가 사실을 말했으니까.

"레이시치 경부는 잘 지내나."

허. 이건 뜻밖이었다. 내가 연수 형을 모두 안다곤 못해도 알 만큼은 안다고 자신했는데.

"친하셨다더니 참말인 모양이죠."

-열매속에 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친하다라. 어쩌면. 우습다, 왜 지금 그게 떠오르는지.

레이시치 경부는 내가 야학을 접었을 때에 내게 그 말을 해주었다. 그 어린 것을 먼저 보내고, 내 벗마저 그 뒤를 따랐을 적이었다. 학교로 돌아가지도, 이대로 있지도 못한 내게 어느 날 술이나 한잔 하자고 불러놓고는 했던 말이다.

..꽃 없이 열매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나는 한참의 헛구역질 끝에 그리 말했었다. 왜 하필이면 무화과였을까. 글쎄. 하필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게 하늘 한가운데에 뻗어있는 무화과 가지와 열매였기 때문일까. 나는 썩 그리 감성적인 사람은 못 되는 편이지만 그땐 요상하게도 그런 말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이시치, 그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야 비로소 뒤늦은 무장투쟁에 뛰어들 마음이 들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나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내 지기의 죽음도, 제자의 죽음도 아닌 그 어줍잖은 위로 한마디였다.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임정의 그림자로서는 증오했고,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나로서 말한다면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형님. 숨 천천히 쉬세요."

손 박사의 말이 나를 상념에서 현실로 끄집어 올렸다. 기계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레이시치 경부가, 그렇게 싫으세요?"

"내가 그 친구를 왜."

"친했다고 해도 형님과 척을 진 사이였으니까요."

"싫으면 내가 뭣하러 대화를 해."

"그야 모르지요."

"그런 감정 없네."

감정이 없다라. 그게 더 맞을 것이다. 내가 무슨 감정이 있겠나.

..그리고 내가 감정을 가질 깜냥이나 되는가. 손 박사는 레이시치, 그 친구가 일방적으로 나를 등졌다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실은 우리는 서로를 등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바에야 누가 누굴 등졌느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나는 분명 레이시치 경부를 고운 시선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죽일듯이 미워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저 그런 것이다. 혹자는 이 편이 미워하느니보다 더 무정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외의 감정을 내가 가질 수나 있으려나.

-

화창하구만. 누구같이 찝찝한 기분과는 달리. 나는 집 밖을 나서자 마자 그 생각을 했다. 내가 달리 갈 곳이 있는 건 아녔다. 나는 광복이 된 후에 실직자가 되었으니까. 하기야 실직자라 할 것도 없다. 나는 설연수, 그놈이 붙잡힌 직후에 사표를 썼으니까. 일종의 반항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단 허탈함. 자괴감에 가까울 것이다. 아주 이상한 소리이지만, 나는 놈이 붙잡히지 않는 데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삶의 보람을 느꼈으니까. 나는 그 일종의 교착상태에서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그놈을 쫓고, 그놈은 내 추적을 감쪽같이 따돌리고. 그렇다고 내가 독립군의 밀정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유일하게 독립운동가를 도왔던 건, 설연수 그놈이 현장에서 총을 맞은 걸 손 박사의 부탁으로 몰래 빼내준 것 뿐이었다. 물론 녀석을 형무소에서 빼줄 의향도 있었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놈은 사형수였고, 이미 다죽어가는 몸을 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서 살았는지. 의료기술이 발달했다더만-아마 그보다는 손 박사의 재주였겠지만-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하기야, 얼마전에 마주친 고놈을 보면 썩 괜찮아 보이지도 않더라만도. 놈은 아직 병원에 있단 소식을 들었다. 아암. 그래야지. 폐가 터졌다는데. 어제도 나는 슬쩍 들여보러 갔었다. 이제 호흡기를 달고있지는 않았지만 시력은 아직 온전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부르는 쪽을 쳐다보는 걸 보면 앞이 얼추 보이긴 하는 것 같더라만..

-무엇하러 찾아오나.

-자네 죽었나 확인하려고.

-허탕쳐서 아쉽겠군.

난장할,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이건 녀석을 탓하는 게 아니다. 내 입에서 불쑥 가시돋친 말이 나가는 게 나로서도 당혹스러웠다. 막말로 틀린 말도 아니다. 나를 드러내놓고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썩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어찌보면 그눔 반응이 정상적인거겠지. 우린 서롤 죽이려 해왔으니까. 하루아침에 독립이 되었대서 그 응어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뭐 좋은 소릴 듣겠다고 계속 찾아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똑같은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번엔 손 박사가 나를 불렀기에 가는 길이었다.

"..연수 형을 좀 봐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뭐요?"

손 박사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그 뒤엣말을 하려는 듯이 손 박사는 전구 불빛에 비쳐 반짝이는 안경을 고쳐썼다. 으레 무슨 말인가를 신중히 꺼낼 때 보이는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줄을 압니다."

이상하다라.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아무리 동창생이었다지만 나는 녀석을 여러차례 죽이려 드는 행동에 가담했고, 그녀석역시도 내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과 대동소이한 행동들을 해왔다. 굳이 그걸 미워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굳이 따진다면 놈과 나는 철저하게 비겨온 사이였다. 게다가 그놈 성격에 내게 빚을 지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게다.

"당신이 하면 되잖소. 잠깐이래도 그놈과 같이 임정에 있었다면서. 사정을 봐준대도 아무런 구실 없는 나보다야.."

"바로 그것때문입니다."

뭐? 내 입에서 맴돌던 소리가 총알이 발사되듯 나갔다. 왜 비유가 그따위냐고는 묻지 마시라,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거였고, 무엇보다 지금 자판을 두들기는 놈이 제멋대로 쓴 거니까. 어쨌거나. 나는 발작을 일으키듯 소리쳤다. 손 박사는 내 반응은 아랑곳않는다는 듯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내가.. 임정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을 알기 때문에 연수 형에겐 별다른 도움이 안될 겁니다."

"난 애초에 그놈이 도움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은 알겠지만, 고문후유증이 감기처럼 곧잘 낫는 것도 아니고, 그런 쪽으론.."

"저대로 퇴원해서 두면 연수 형은 며칠도 못 버틸 겁니다. 그대로 죽을 거요."

"퇴원은 선생 재량이라고.."

"물론 그렇습니다. 연수 형이 어느정도 생활을 할 몸상태가 될 때 내보낼 겁니다. 그러나 레이시치 경부, 연수 형은 매번 그렇게 회복시켜 보내도 그 전보다 악화된 상태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한번만이라도 더 그런 상황이 된다면.."

"자신 없는 거군요. 손 박사께서 그러시다면 영락없이 죽겠군."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놈은 자기 몸상탤 모릅니까?"

"모른다기보다 외면을 하시지요."

어쩔 수, 없으시니까요. 저 부터도. 하고 손 박사는 말을 맺었다. 어쩔 수 없단 이유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건 박사님이 즐겨 쓰는 말이 아니던가요. 그놈에게 그건 통하지 않던가요. 내 말에 손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제가 선생을 청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놈은 기분 나쁘겠군. 하필 내가, 나같은 놈이 그놈 보모가 되어야 하니. 그놈은 압니까?"

"넌지시 이야기는 해 보았습니다."

"뭐라던가요."

"묵묵부답이더군요."

-그럴 필요 없네. 죽을 때 되면 죽게 놔둬.

거짓말이었다. 연수 형은 가뜩이나 남의 덕을 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데다가 그게 레이시치 경부라면 혀를 깨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연수 형에게 일순위는 임정식구들이었지만 내 일순위는 연수 형의 삶이니까. 그게 연수 형은 물론이고 레이시치 경부를 난처하게 하는 방식이래도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연수 형에겐 이게 마지막 문턱이고 마지막 고비였다. 광복직후 연수 형은 저승문턱을 몇번이고 밟았다. 형무소에서 고문후유증을 앓고있었던 몸을 이끌고나와 뒷일을 생각않고 여기저기 필요하다며 손 벌리는 데면 모두 연수 형은 찾아가며 일꾼노릇을 했다. 다시 토혈을 하기 시작하였을 때도 그걸 숨겼다. 끝내 귀국한 백범선생 앞에서 토혈을 하고 쓰러졌을 땐 강제로 요양을 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았다. 겨우겨우 걸어다닐 정도나 될까. 조금 더 요양을 하시면 형무소 이전의 몸상탠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을 좀 더 수월하게 하셨을텐데. 그러기에 세상은 연수 형을 너무 필요로 했고, 세상이 부족한 탓에 그 공백을 연수 형이 메워야만 했다. 이러나 저러나 연수 형에겐 여전히 풍진세월이었다.

거짓말이구나. 그럼 그렇지, 그놈이 고분고분할 리가 없지. 나는 일순간 시선을 돌리는 손 박사의 태도를 보고는 확신했다. 그러면 그놈은 무어라 대꾸했을까. 차라리 자길 죽이라고 했을까. 그도 아니면..

..나같은 놈의 도움을 받느니 벼랑에 몸을 던져버리기라도 하겠다고 했을까. 못할 놈도 아니다. 죽는 것도 그만치 모진놈이어야 한다질 않는가. 망할. 그러나 손 박사가 들킬 각오를 하면서까지 놈을 도와달라고 하는 건 어지간히 벼랑에 몰려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로 까딱하면 죽을 몸인 것이다.

내가 가타 부타 말이나 할 입장인가. 나는 손 박사에게 그러마 하였다. 앞으로 일이 어찌될 지는 몰라도.

-

"자네 도움 필요없네."

생각보다 더 가관이었다. 차라리 악을 쓰지. 내게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오한이라도 든 겐가, 놈은 창백한 안색을 한 채로 파들파들 떨면서도 입술을 꽉 깨물곤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고 해야 할까. 나를 쳐다보는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증오도 호감도 그 무엇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등진 세월이 자네에게서 무엇들을 앗아간 건가. 모르긴 몰라도 내가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녀석은 나를 계속 쳐다보면서도 기침을 쿨럭였다. 억지로 기침을 참느라 몸 전체를 떨고있는데도 발작처럼 소리를 토해내는 건 가히 가관이었다.

"더 입원해있지, 아직 몸이 안좋은 모양인데."

"원래대로라면 진작 죽었어야 할 놈이 덤으로 사는데 뭣하러."

"나 같은 놈도 살아있는데."

민족 영웅소릴 들어야 마땅한-물론 자네는 그런 허울좋은 소리는 원치도 않았겠으나-너는 죽었어야 한단 말이냐. 내 귀에는 놈의 말이 스스로가 죽어마땅하단 말로 들렸다. 왜 죽어야 하는데. 누구보다 떳떳해야 할 자네가 어째 그런가. 자네는 나처럼 시대를 핑계삼아 외면을 하지도 않았다. 그땐 어쩔수 없었다, 라는 간편한 핑계조차 취하길 거부한 당신이었다. 스스로를 시대의 죄인으로 자초하고, 조선인으로 사는 것이 죄가 되었던 이 세상에서 죄를 권리로 되찾아 준 당신이 받은 삯이라는 것이 고작 고문후유증으로 망가진 몸뚱아리와, 그 몸뚱아리로 버티는 게 불가능한 과로와 책임의 현실뿐인가.

"자네 같은 사람이 살아남은 것이겠지."

내가 속으로 웅얼대고 있는 동안에 녀석은 나즈막하게 말했다. 나 같은 사람, 무슨 뜻일까. 이러나 저러나 나도 한편으론 이 땅에 남아있으니 거진 조선 백성이란 뜻일까, 아니면 여전히 이 풍진 세상에, 자네같은 '시대의 죄인'이 아닌, '시대의 배반자' 인,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이 여전히 활개치고 사는 세상이라 살아남았다는 것일까. 나는 녀석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도 아니오, 그렇기에 녀석이 말하는 마땅했어야 할 독립이란 어떤 형태인지 모른다. 공화정이니 무어니하는 말을 더더욱 모른다. 그러나 안하느니만 못하단 독립이라는 것은 지금, 녀석의 몰골을 보고는 그보다 더 똑똑히 알 수는 없었다.

"뭘 우두커니 서서만 있나."

나는 짜증비슷한 것이 섞인 말을 듣고는 구더기 떼같은 생각속에서 기어나왔다.

"나가든지, 문을 닫고 앉든지 마음대로 하게."

"내 도움 필요없다면서."

"필요는 없으나 자네를 내쫓을 마음은 없어."

저건 재떨인가. 나는 방에 들어서자 화장장을 한 것처럼 담뱃재가 쌓인 재떨이가 보였다. 폐도 안 좋다는 놈이 무슨놈의.

"자네 미쳤나?"

내 입에서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험한 말이 나갔다.

"자네 의견은 궁금하지 않네."

알고 하는 소리다.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아는 것이다. 내게는 그게 더 부아가 치밀었다. 왜, 내가 홧병으로 죽길 바랐나? 자네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 실컷 괴로워하라 이건가?

"죽고싶어서 환장을 한 게 아니라면 폐병으로 오늘내일 했던 놈이 연초를 태워?"

"그게 맞나부지."

"뭐가 어쩌고 어째?"

"어차피 하루이틀 하는 목숨, 며칠 더 앞당긴대야 뭐가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손 박사가 그래?"

"그 친군 남들 다 포기하래도 날 포기 못하는 친구지. 내 앞에서 죽어도 내가 죽는단 소린 않을거네, 허나."

놈은 숨을 한번 들이쉬고 급하게 내뱉었다. 말을 하는 것도 힘에 부친 것이리라. 망할 놈.

"얼마 안 남았다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지."

"재수 없는 놈."

"내가 언젠 재수가 있었나."

그러곤 우리 둘 다 웃었다. 웃긴 것도 아니었고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웃어야 할 것 같았다.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지냈나."

"만주에서? 아니면 상해에서. 뭐 굳이 상해라고 못박을 것도 없겠군. 거의 떠돌아다녔으니까."

내게 동정을 자아내려는 말은 아니었다. 남들에 대해선 그렇게 연민을 잘 하는 놈이, 자기자신에 관해서는 가차없었다. 그러니까, 저건 그냥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내겐 왜 연락을 안 했어.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말이야. 어쩌면 내가 자네를.."

자네를 따라갔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적어도 우리가 서로를 총으로 겨눌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한편으론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나는 그동안 살아온 내 삶을 자네처럼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꾸러뜨릴 용기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했어."

나는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를 쏘아보지는 않을까. 그러나 녀석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조금 섭하였다.

놈은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받질 않았지. 그러나 이제와서 무슨 말을 서로 하겠나. 나는 자네에게, 자네가 내게 총부리를 겨눈 게 없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젠 광복이 되었지를 않나. 자네와 내 사이의 반목을 당장 어찌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걸 무너뜨릴 발판은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나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이 살아돌아오는 게 가능하다면 자네 말에 동의하겠네."

"남은 인생 얼마나 된다고."

"얼마 되질 않으니까."

"그만하면 오랫동안 독을 품고 살았네. 이젠 그만 풀어놓는 게 어떤가."

"남은 시간동안 못 품을 독도 아니지."

"자네가 그렇게 되고나서, 생각 많이 했네."

녀석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형무소에서의 그 뼈가 시릴 정도의 시퍼런 서슬은 아니었지만, 모든 감각에 무뎌진 듯한 그 기색은 오히려 더 두려웠다. 원망의 말을 예상하고 들으면 차라리 낫지만, 예상이 전혀 가질 않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생각은 그 전에도 여러번 했지. 자네에게 못할 짓을 한 거란 건 아네. 자네에게 용서를 빌어야한다는 것도 늘 생각은 했네. 구차한 변명이라고 생각은 하네마는, 때론 삶이 족쇄가 되는 수도 있지."

"그야 잘 알고 있네. 삶은 격랑이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해서 사람이 어느정도는 끌려가는 것도 있기야 하지. 그러나, 자네가 말하는 용서는 다른 문제네."

"어째 다른 문젠가. 자네의 문제이질 않나."

녀석은 한숨을 한차례 내쉬었다.

"이보게, 레이시치. 나는 나 자신보다는 임정의 하위 부속품으로 존재한 세월이 더 길었어. 나는 다만 다른 부속품들로 다양하게 대체가 가능했을 뿐이야. 자네의 그 용서라는 말은 그러한 무수한 종류의 사람들도 함께 엮여있네. 물론 자네 마음은 알아. 서로 훌훌 털어버리고 남은 인생 낭비하지 말자는 거겠지. 그런 감정에 속박되지 말고 말이야. 그러나 나는 그러고싶지 않아. 때론 그런 데에 속박될 세월이 필요하겠지. 그걸 소위 속죄라고 이를테지만 그리 거창하게 말할 마음은 없네. 나는 애써 우리들의 관계를 고치고 싶지 않아. 어디 어중간하게 부러진 각목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여놓느니 분질러진 그대로 사는 게 차라리 나아. 괴롭기야 하겠지. 그러나 때론 그럴 가치가 있는 괴로움이나, 그래야 마땅한 괴로움도 있다는 걸 자네도 알 거라 생각하네. 평생을 우리들이 죽였거나, 죽인거나 진배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걸 곱씹기만 해도 우리는 모자란 세대이네. 화해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우리의 후대들이나 할 수가 있는거지. 비틀어진 소나무를 억지로 곧게 만들고자 하면 부러지네. 비틀어진 건 비틀어진 대로 놔둘 수도 있어야 하네."

"그럼 나는 자네를 보면서 계속 괴로워해야 한다는 거군. 자네와는 다르게 시대의 배반자라는 족쇄를 평생 차면서."

"그저 나만을 보면서 그럴 이유는 없어.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밟아 온 세월의 증거물들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죄의식 속에서 살 이유는 충분하지. 사실은 그 괴로움조차도 자네가 선택한 것이네. 어쩌면 그래서 다행일지도 몰라. 자네가 원하는 화해는, 자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룩하기 쉬워질테니까."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들은 불가능하고."

"우리들은 스스로 족쇄를 만들어 채운 사람들이 아닌가."

"시대라는 명목으로도 안될까."

"그런 명목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를 내치지는 않을 거지."

"자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럼 됐네."

되었다라. 된 게 맞을까. 기왕지사 돌이킬 수 없으리만치 망가진 관계라지만 방법이 그 뿐인가. 생각이라, 레이시치가 말하는 생각이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광복 직후 생각할 시간이 모자른 그 틈에서도 나는 줄곧 생각을 해왔었다. 이 반목의 끝을 억지로나마 만들 수는 없었을까. 그럴 수야 있겠지, 그러면 안되는 것일 뿐이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니될 줄을 안다, 그럼. 언제? 글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조리 죽은 후에나 가능할까. 나를 기억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들에 대한 것을 아는 사람끼리라면야 화해라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걸 화해라고도 부를 수가 있겠나. 종래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걸 에둘러 말하기는 하였으나..

"왜 그러나?"

"공기가 답답허이. 거기 창문 좀 열어주겠나."

아까만 해도 문 닫고 들어오라더니. 공기가 답답하다기보단 숨쉬기가 힘들단 뜻일 것이다. 하기사 아까도 말하는 중간중간에 기침을 밭아내지를 않았나.

"찬 바람 쐬면 안 좋네."

"잠깐이면 돼."

놈은 짤막하게 말하곤 등을 벽에 기대었다. 손 박사 말마따나 어떻게 살아있는지가 신기하였다.

"그러게 담배 좀 끊지."

"그럼 진작 혀깨물고 죽었네."

이런 식이다. 무엇이 그리도 답답증이 일고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까. 이건 짧은 버릇이 아니었다. 놈은 학교에서도, 대학에 다니고나서도 종종 답답하단 말을 했다. 이 답답하다는 것과 동일한 것인 줄은 몰라도. 어찌보면 평생을 답답증과 울렁증을 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놈에게 토혈 또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것이다. 놈은 평생에 걸쳐 무언갈 부르짖어왔고 또한 그런 의미로 토혈을 했을 것이지만, 그것이 이제서야 증세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쳐다보진 말게. 아주 죽을 날을 받아놓은 건 아니니까. 하기사 그렇대도 아직 죽은 건 아니지."

"원래 폐가 안 좋았나."

"만주에 있을 땐 괜찮았어. 터지긴 임정에 있을 때 즈음인가.."

1920년 중반이라나 후반이라나, 놈의 말로는 국민대표회의가 파토나고 나서 좀 자리를 잡을 만 할 때 즈음 처음으로 폐병을 앓았더라고 한다. 그조차도 첨에 조금씩 토혈을 하기 시작할 때는 가만 놔두다가 업무조차 볼 상황이 안 되어서야 부랴부랴 주변에서 병원으로 떠밀었더라고 하였다.

"치료는 제대로 받았고."

"받기는 하였으나 임정이 그런 데에 돈을 쓸 형편이 아니야. 중도에 치료받다 관뒀지.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도 있는걸."

"또 도졌겠군."

"계절 감기처럼 이따금씩. 그래도 그땐 버틸만 했네."

버틸만 한 게 아니라 버텨야했던 것이겠지. 안 봐도 뻔하다.

"광복 후에 또?"

"한동안은 잠잠했어. 차라리 다행이지, 한참 일하던 때에 도지느니 조금 안심할 때가 낫지 않나."

잠잠한 게 아니라 그동안은 병이 들 시간이 없었던 것일 거다. 병마에 시달릴 시간이 없고, 누워있을 시간이 없어서. 그러다 한시름 놓으려 하니 덜컥 병이 치고 올라온 것일테지. 원래 병마라는 놈은 눈치가 빨라서 사람이 가장 방심할 때에, 가장 약할 때를 노리는 법이니까. 아니, 그보다도 이놈은 병세가 약하다 싶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쉬이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과로를 하는 것도 예사로 여기고, 병도 예사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가랑비에 옷 젖듯 몸뚱이는 서서히 허물어져갔겠지. 그렇게 허물어진 몸뚱이는 기척도 내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다시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는 상태로.

"미련하군."

"미련해 보일지는 몰라도 후회는 없어."

그럴테지, 후회는 자네보다야 내게 더 어울리는 말이니까.

"한결 낫구만."

참말 나은 것인지, 그도 아님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하기야 굳이 그런 척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놈에게 나는 그만치 신경을 쓸 만큼 중요한 사람은 아니니까.

"손 박사가 자네 걱정이 많아."

"그래서 자넬 보낸 거 아닌가."

"이야기가 다 되었다더니 그건 참말인 모양이야."

"나는 싫다고 했네."

예상대로구만. 나만 봉이지.

"자네에게 개인적인 유감이 있어서가 아니야. 누구라도 싫다고 했을 거네."

차라리 개인적인 유감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변화의 가능성이 있었을테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놈도 그걸 알고 있겠지. 이를테면 이건 일종의 거절인 것이다. 그러니까 제 딴에는 위로랍시고 내어놓은 말이었지만 내게는 도리어 조심스레 찌르는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자네가 싫다고 하였지 여기오는 건 내 자유니까."

내 말에 놈은 미간을 찌푸리곤 나를 쳐다보았다.

"손 박사만큼이라도 말을 알아들을 순 없는 건가."

"나는 손 박사도 아니고, 그만치 똑똑치도 못하여. 그러니 허구한 날 경부신세를 면치 못하였지. 그 정도는 자네도 아는 줄로 알았네."

"이제부터라도 똑똑한 노릇을 하여보지 그래."

"자네는 그리 똑똑한 노릇을 할 줄을 몰라서 미련히 굴었나?"

언성을 높여야만 설전인 것은 아니다. 조선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도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이기는 전쟁도 아니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가 자네 말을 들을 이유도 없어. 예전처럼, 자네와 내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튀겨야만 직성이 풀리겠어? 그렇담 자네의 광복이란 무슨 의미가 있지?"

"지금조차도 의미는 없네. 그것자체로는."

"그렇다면 자네는 개죽음을 택하겠단 말이야? 자네가 처해왔던 모든 상황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엔 그리 보이네."

"모르긴 몰라도 손 박사가 과장을 하였나보군."

"과장이 아니네, 의사가 아닌 내 눈에도 자넨 제법 뼈대가 있는 병이 아닌가 싶으니까."

"이보게, 만에하나 그렇다곤 해도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에서 이러기가 자네는 꺼끄럽지도 않은가,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하긴, 자네는 그 생활에서 배운 거라곤 눈앞의 상황에 굴종하여 일시의 매를 피하는 방법뿐이겠군. 고작해야 형무소에서 내 시신 나가길 기다리던 자네가 갑자기 태세를 바꾸어서 내게 이러는 것이, 내 눈에는 어찌 보이는지 짐작이나.."

이제는 아예 경멸을 숨길 생각조차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건 진담조차 아닌 것만 같았다. 그저 나를 질리게 해서 쫓아내려는 수작인 것만 같았다. 해서, 나는 거짓말답지도 않은 소릴 하려거든 낯빛이나 조금 바꾸고서 이야기하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기도 전에 놈은 말을 멈추고 타구를 끌어다가 선짓덩이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보게."

그런 중에도 나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던가. 내 앞에서도 그런 꼴만은 보이기가 그리도 싫었을까. 내가 등이라도 받쳐 줄 요량으로 다가가자 놈은 나를 밀쳐내었다. 한참 뒤에나 욕지기가 멈춘 모양이었다.

"이보게, 약은 어디 뒀나. 손 선생이 처방해준 거래도.."

"어줍잖은 짓하려 들지 말어."

녀석이 숨을 몇차례 몰아쉰 끝에 나온 대답은 영판 엉뚱한 말이었다. 형무소에 있을 적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순사질을 하면서 굴종하는 방법을 배웠다지만 이놈은 만주에서, 상해에서, 형무소에서 그 반대의 것만 배운 모양이었다. 결국 쓰이지도 못할 독을 품고, 그마저도 자신을 해치는 것을 감안하고도 그저 가만히 독을 갖고있는 것만을 배운 것만 같았다.

"내게 보복을 하려거든 이런 것으로는 소용없어. 사람 잘못 골랐네. 자네가 아무리 말을 그리 하여도 왜정 앞잡이놈이라는 괄시는 것보다 백배 천배 갑절로 심하게 받아왔어. 그러니 보복을 하고싶거들랑 자네가 멀쩡히 살아서 내 눈앞을 지나다니는 것보다 심한 보복은 없을거네. 나는 그럴 때마다 자네가 섬뜩할테니까!"

그래도 여전히 입은 열지 않았다. 아예 눈을 딱 감고 누워있었다. 죽은 거나 아닐까. 나는 신경질적으로 서랍장을 뒤졌다. 약은 찾기 어렵지가 않았다. 이렇다 할 세간살림이 없기도 했거니와 비상약도 하나 없었으니까.

"물 여기 있네. 어여 꿀떡 삼키게. 이거 먹는 거 보면 자네 귀찮게 안 하겠네."

그 말은 용케 알아먹은 모양이었다. 여차하면 입을 벌리고 원통 형의 그 정제 알약을 쑤셔넣을 요량이었지만. 그러는 도중에도 분풀이를 하는지 놈에게 나는 내 손가락을 물렸다. 그래. 아주 물어 뜯어라. 잡아먹든지. 나는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귀찮게 아니한다, 하질 않았나."

나를 등지고서 기침을 하느라 등을 들썩이면서도 놈은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자네 거슬릴 소릴 안 한단 뜻이었네."

자네에겐 이것도 거슬리겠지. 잘 아는군. 녀석과 내가 나눈 말은 딱 그 두마디였다. 저놈 성질머리에 도로 약을 토해버리는 거나 아닐까 싶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나의 노고를 헤아렸다기 보다도 손 박사가 자비로 처방한 것이니 그 신의를 지킨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일견 호의라고 보일 법한 행동조차, 여지라고 보일 행동조차도 놈과 나에게 해당되는 행동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했다.

찾아와도, 되겠나. 아니, 찾아오고 싶네. 묵묵부답이었다.

때려치우라고 하면 어쩌나. 손 박사에 이어 나마저도 내치면 어찌하나. 하기야 자신과 가까웠던 손 박사에게마저도 자신의 건강에 대해선 관여를 허용하지 않았던 놈이니까 나를 내치기엔 훨 수월했을 것이다.

된다고 한 적 없네. 놈은 그리 대답했다. 나가란 소린가. 나는 반쯤 체념하고서 말했다. 오지말란 소릴 한 적도 없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의미에서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모른다. 불러다놓고 나를 조롱하려고, 맹렬히 비판하려고, 나를 단죄하려고 그러나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기다 대고 대거리할 말이나 있을까. 전혀. 나를 가지고 놀 테면 가지고 놀아라. 나는 그런 심정이었다.

-

그러나 정작 놈은 내가 찾아갔을 적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나를 철저히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후회스럽단 말도 놈에겐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함부로 후회한단 말 말게, 자네에게는 그 후회마저도 광복이란 상황에서 명줄을 늘리기 위해 택한 길일 뿐이야. 내가 형무소에서 죽었어도, 그리 하여도 광복이 아니 되었어도 그때도 과연 자네는 후회를 하였을까. 아니. 도리어 나더러 헛 죽음하였노라 비웃었을거네. 내 말이 틀려?

분하지 않았다면 거짓부렁일 테지. 그러나 더 분한 것은 그것이 꼭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식사라도 하게."

"바쁘네."

"밥을 먹어야 약을 먹지. 손 선생 면목없이 만들 작정이야?"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다. 이유는 언제나 내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들먹여야 녀석은 사람처럼 살곤 하였다. 그 자리에는 나도 없었고, 심지어는 당사자인 녀석도 없었다. 마치 자신은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아있어야 한다는 듯이. 차라리 내게 패악질이라도 하였으면 그러려니 하련만, 그것하나 없이 잠잠하게 있으니 이거야 원 사람 미칠 지경인 것이다. 어찌하다 저렇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 이유를 알아내기까지 그리 오래걸리지는 않았다. 그 날은 놈이 나와 만난 후 두번째로 손 박사에게 신세를 진 날이었다.

일은 이러하였다. 독자여러분에게 미리 말해두지만 그날 나는 놈을 미행하던 게 아니다. 물론 녀석의 집에 들렀고, 반찬거리가 없던 게 마음에 걸려서 저자까지 나온 거야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놈이 누굴 만난다거나 어떤 대화를 하는지까지 관여하고싶진 않았다. 적어도, 그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게 아니라면..

"...설 선생님은 백범 선생님이 아니잖습니까!"

내가 들은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나이는 녀석에게 자식뻘 즈음 될까. 이제사 막 학생 티를 벗은 것처럼 보이는 작달만한 체구의 청년이 대낮부터 길가에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낮술을 하였나. 그런 것 치곤 낯빛이 정상이었다. 청년의 피부색이 거무튀튀하여 술을 하였다는 게 잘 티는 안날 것 같았지만. 누굴까, 참말 숨겨논 자식이기라도 할까. 그런 것 치곤 눈매는 둥글었고 콧대는 낮았으며, 입술은 두꺼웠다. 한마디로 녀석과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는 거다. 반면에 녀석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분노했던 것일까, 아니면 당혹스러웠던 것일까.

"설 선생님마저 백범선생님처럼 어이없이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습니다. 아시잖아요. 더이상은 저희로도, 선생님으로도 마땅한 수가 없다는 거. 그래요, 당장 고개를 숙이는 건 선생님 성정에 맞지 아니하단 거 압니다. 선생님이 저를 그리 가르치시지 않은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리 쓸모없이 죽으면 누가 알아라도 준답니까. 제 아무리 애를 썼으면 무얼 하여요. 그 잠깐의 굴종이, 모욕이 그리도 견디시기가 힘이 듭디까. 애시당초, 백범 선생님을 지킬 수 없었던 그때부터 이미 끝이 난 겝니다. 제 말 고깝게 듣지 마십시오. 이 박사 말이라고 아주 그른 것도 아닙니다. 이제 선생님이 하긴 무얼 하셔요, 그 몸뚱이로 무얼 어쩌십니까. 기실 폐병쟁이에 불과하신 선생님이 남은 여생을 그리 낭비하셔보아야 뭐가 달라져요."

"..나야 이미 끝이 정해진 사람이라지만,"

그때 알았다. 당혹감보다는 분노에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분노란 다름아닌 자기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어딘가 위험하단 생각도 들었다.

"자네마저도 그런 뜻인가. 자네같은 사람들 마저도 이 반쪽짜리 광복에 갇히어 자포자기를 하였단 말인가. 자네에게는 김 선생님의 죽음도, 내 행동도 고작 그 정도 의미밖에 되질 않는가. 임시정부에 있었을 적의 행동들보다도 무가치하고, 소용없는 행동이었단 뜻인가.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있었던 건 앞으로 죽을 내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자네들이 스스로 일어설 거란 믿음 때문이었네. 그러나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짓이었다면.."

"그래요.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아니, 애시당초 한성정부를 계승하니 어쩌니 할 때부터 그른 짓이었습니다. 우리같은 사람은 총질이나 할 줄로 알았지 첨부터.."

"이 개만도 못한-"

내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을 때 쳐다봤던 모습의 놈은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첨엔 노기를 참느라 그런 줄로만 알았다. 입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고 앞으로 거꾸러지기 전에는. 그제서야 청년은 상황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연수 아저씨-하고서 달려드는 것을 나는 밀쳐냈다.

"손 떼게!"

그때 나는 그 청년과 이 녀석이 무슨 사이인지는 몰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으르렁거렸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녀석도 그걸 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봐, 이보게. 정신차려."

피거품을 물고 눈동자의 흰자위가 홰까닥 넘어가는 것을 보고 겁먹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장담하건대, 없을 것이다. 정신 좀 차리라고 뺨을 수도 없이 때리고, 차량 한 대 없이 도보로 놈을 손 박사가 운영하는 병원까지 안아들고 뛸 생각을 하였을 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처럼 피가 물줄기처럼 콸콸 솟지는 않아도 입에서는 괴인 피가 계속 흘러내렸고, 몸은 축 쳐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숨을 거둔 건 아닐까, 나야말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도없이 들었다.

"...그놈 대체 누구야?!"

목숨줄 한번 질기더라. 놈은 눈을 뜨고나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몸에는 피주머니와 수액 줄을 주렁주렁 달고서. 더군다나 어제까진 기계에 의존하지 않곤 자력으로 숨도 못 쉬던 놈이.

하나도 재미없어. 재미있으라고 한 말 아니네.

나와 함께 온 청년은 내가 꺼지라고 욕설을 내뱉어도 꿋꿋하게 남아있더니, 새벽에야 휑하니 가버렸다. 이럴 것 같으면 있지를 말든지.

"자네가 모르는 걸 보면 제법 내가 잘 숨겨준 모양이지. 아니면 자네 기억력이 안 좋든지."

"무슨 말이야? 말을 알아듣게 해. 아니. 아니다. 자네 지금 깨어난 지도 얼마 되질 않아서 헛소리하는 것 같으니까.."

그래. 저건 헛소리일 거다. 접때만 해도 냉랭하던 놈이 날 보고 실성한 것처럼 실실 웃지를 않나, 농담을 하질 않나. 손 박사 말로는 쇼크가 올까봐(그게 뭔지는 나도 모른다.) 진통제가 제법 많이 들어갔다더니..

"내 제자. 이건 헛소리 아니네."

"헛소리하는 놈은 원래 자기가 헛소리하는 줄 몰라."

"자네가 그리도 증오하던 신흥무관학굘 나왔지."

"날 신랄하게 까대는 걸 보니 제정신이긴 하구먼."

제기랄, 그럼 진짜 제자가 맞는 모양인데. 그럼 자네를 왜 이 꼴로 만들면서까지.

흐흐. 어쭈, 웃어? 웃기지를 않나. 뭐가 그리도 우스워.

우리는 짧게 몇마디를 나눴다.

"내가 백범선생님이 될 수 없다는 말."

"자네는 안 죽었으니까!"

"그러니 우습다는 거 아닌가. 머잖아 그리 될텐데, 혹자는 나더러 백범 선생처럼 되라 하고 혹자는 내가 될 수 없다 하는군. 나도 이제는 모르겠네, 이사람아. 어쩌면 참말 너무 오래 살았는지도 모르지. 죽을 놈이 형무소에서 기어나와서 살아있으니깐 그것부터라도 잘못 된 줄을 뉘 알겠나."

그러곤 놈은 한번 더 실성한 말 울음 같은 소리로 웃었다. 빌어먹을, 자네가 죽었어야 할 놈이문 난 골백번도 더 뒈졌게. 모르는 일이야, 자네보단 내가 사람을 더 죽였을지도 모르지. 덜 죽였다 치더라도 지옥구덩이에서 사람을 빼내려고 한 놈이 나을까, 그 지옥구덩이에 사람을 쳐넣은 놈이 나을까. 우리는 한방씩 주고받았다. 요즘은 이런 식이었다. 말을 할 일이 생기면 서로 말로 발길질을 하곤 했다. 주로 그 발길질에 나가떨어지는 건 나였다. 그러나 왠일인지 내가 걷어차인 후에는 놈도 자신의 발길질에 걷어차이곤 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

"이보게. 필요한 건 없나."

나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궐련갑과 성냥. 불도 붙여주면 더 좋고."

"미친 소리 하려거든 입도 벙긋하지 말어. 손 박사가 담배는 커녕 연기도 쐬지 말라 했네."

"해도 되는 게 있기나 한가. 근자엔 안된단 소리만 들은 기억밖에 없군."

"허세 부리지 말게. 자네 옛날 몸 아니야."

"그래. 지금은 일개 폐병쟁이지. 언제 죽어도 상관없을."

"날 그 배은망덕한 제자놈과 동급으로 보지 마."

"배은망덕?"

놈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배은망덕한 게 아니야. 그건 도리어 자네지. 아니.. 은혜가 없었으니 그도 아니겠군.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이걸 무어라 이름붙여야 할까?"

미친 놈. 정말로 실성을 했나. 풀린 눈으로 중얼중얼.

"왜, 내가 미친 줄로 아나. 그래. 미쳤지. 제 정신으론 이리 살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아직 자결을 아니했다는게 미쳤다는 증거지. 그러나 이것만은 명확허이. 그 친군 배은망덕한 게 아니라 무서운거야. 어린애라서. 아버지 초상을 살아생전 세번씩이나 치르긴 싫었겠지. 자기 친부, 백범 선생, 나.. 물론 백범선생님과 나는 친부는 아녔지만.."

놈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기침을 토해냈다. 저러다 또 토혈을 하면 골치아파질 거다.

"말 줄이게. 손 박사가 지금 상태에서 자네 또 토혈을 하면 죽을 수도 있댔네."

"그랬으면 좋으련만. 자네도 날 귀찮게 보러 올 필요 없고."

"입 다물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자네가 자의로 날 보러 올 이유가 없잖아."

나를 미워한 게 아니라 자네 자신을 증오했나. 증오로 모자라서 경멸하고 멸시한 건가. 천성이 죄책감이란 놈을 쉽게 갖고다니는 놈이라지만, 이같이 할 이유까지야 있는가.

"자네를 싫어하지 않아."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놈이라고 거짓말 할 것 없어."

"대체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자네는 꼭 일부러 이런 꼴을 보이려는 것 같이.. 놈은 젊은시절의 총기를 잃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그게 독이 된 것처럼 보였다. 무너져가는 몸뚱이와 반대로 더 밝게 타오르는 총명함이 녀석의 목숨을 땔감삼아 최후의 빛을 밝히는 것만 같았다.

"자네가 더 잘 알잖아."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는 자네만큼 머리가 좋지 못하니까. 모르면 집어치워. 그게 대답이었다. 그러곤 녀석은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문득 겁이 난 나는 손 박사를 불렀지만,

그냥 주무시는 겁니다, 너무 지치셨어요.

그게 전부였다. 지쳤다라. 몸이, 아니면 정신이? 아마 둘 다겠지. 손 박사는 청진기를 대 보더니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복이 원래 저리 헐렁했던가요.

내 눈엔 거적떼기를 걸쳐놓은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몸이 왜소해 보였다. 덩치가 있던 놈인데.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상태가 안 좋으시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요. 형무소에선 숨만 겨우 붙어있으셨습니다."

"열이 있는데요."

"토혈을 하시면 으레 열이 오르시니까요."

"별다른 투약은.."

"몸이 못 견디실 겁니다. 좀 원시적이긴 해도 차라리 얼음을 끼얹는 게 나을거고요."

-

망할 놈. 녀석은 밤에도 상태가 나아지긴 커녕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해댔다. 내가 모르는 이름들인 걸 보면 같이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겠지. 잠깐 새에 수액 통은 그 가짓수가 늘었다. 가슴에 호스를 연결해 피주머니를 차고, 팔다리 여기저긴 각종 기계들이 들러붙었다. 쉴 새 없이 기계음이 울려서 시끄럽기만 했다. 손 박사는 매일 입진을 했다. 이 짓을 나 없을 때도 했단 말이지.

"살 수 있긴 합니까?"

"완치는 안 돼요."

"살 수 있냐고요."

"당장은."

"그런데 왜 이래요?"

"형님 상태를 말씀드렸잖아요."

"나한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했잖소. 혈소판 수치가 어떻고, 면역이 어떻고.."

"나아지고 있어요."

"내 눈엔 나빠지는 걸로 보여요."

그놈 말대로 당신이 포기 못하는 거겠지.

"심정지가 온 적도 있었습니다."

"뭐요?"

"심장이, 멈췄었다고요."

나도 알아. 그 정도는. 제기랄!

"이번엔 그렇진 않았어요."

"그러길 바라기라도 해요?"

"미쳤소?"

당신 화 내는 거 처음보는군.

"안 죽어요. 살려낼 겁니다. 저번처럼.."

그건 당신 희망사항이겠지. 내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병실을 지키고 있던 원무과 직원이 자리를 박차고 와서 손 박사에게 무어라 알렸다. 손 박사의 표정이 급속히 일그러지는 것으로 봐선 다시 응급상황이 된 모양이었다.

"망할!"

손 박사는 나를 밀치고 뛰쳐나갔다. 놈이 죽으면, 난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까. 놈을 다시 만난 뒤로 줄곧 질문을 던져왔다. 아니. 실은 그 반대야. 나는 놈에게 완전히 묶이게 되는 거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는 녀석에게 붙들리는 거겠지. 아주 잠깐 녀석을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조차도 실은 반대였다.

-자네가 잡았다 생각하나, 내가 잡혀 준 거네.

나는 그 때를 기억한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가 싶어 형무소에서 놈을 쳐다봤을 때 녀석은 아플 정도로 내 어깨를 세게 쥐고선 피가래 끓는 기침을 토해내곤 나를 쳐다봤다.

-보이나, 이러나 저러나 내겐 시간이 별로 없어. 그러나 내게서 자네들이 얻을 건 없을 것이고, 내가 자네들이 헛손질하게 만들거네. 알아듣겠나.

그때부터 녀석은 내 간수였다.

-

"좀 어떤가."

손 박사의 살려낼 거란 말은 아주 헛소리는 아닌 성 싶었다. 상태가 악화되었던 그날 어렵사리 고비를 한번 넘기고, 며칠 후엔 놈이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여전히 긴 대화는 어려웠지만.

"어때보이나."

"선문답은 집어치우고."

"견딜만 해."

퍽이나. 몸에 달린 호스 줄의 개수는 줄었고 의식은 찾았지만 여전히 놈은 고열에 시달렸다.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독한 약품과, 절절 끓는 몸뚱이에 헛구역질까지 하느라 줄곧 앓았다. 식사를 하지 못하니 수액으로 영양소를 공급했다. 생존에는 큰 문제가 없다지만 식사만은 못하니 날이 갈수록 병인의 몸은 여위었다. 지금도 말은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뱉었다. 녀석의 이마와 가슴에 물수건을 대 주어도 좀처럼 체온이 내려갈 생각을 않았다.

"손 선생이 자네 계속 이 상태면 얼음물에 담가버리겠대."

"그렇군."

"그러기 전에 얼른 쉬어서 낫는 게 좋을거네."

"그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녀석은 뒷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도로 눈을 감았다. 오늘은 체력이 허용하는 건 여기까지군.

꼴이 가관이었다. 녀석은 오한이 들어 파르르 떨었다. 그렇지만 이불을 덮어줄 순 없었다. 열이 더 오르면 안되니까.

"저대로 가다간 뼈다귀밖에 안 남겠습니다."

"어쩔 수 있나요. 퇴원하시거든 선생께서 잘 먹이시지요."

"회복은 어떤가요."

"조금씩이라도 회복은 되고 있으니까요."

염증 수치, 혈구 수치, 그리고 다른 표를 보여주면서 손 박사는 말했다. 이게 위조가 아니라면 나아지고 있긴 한 것이다. 하기사, 저만하면 이전보다야 나아진 것이겠지. 그러나 손 박사의 얼굴은 여전히 근심이 덕지덕지 들러붙어보였다.

"레이시치 경부님, 오늘은 어디 가지 마시고 연수 형님 곁에 있어주시면 아니되겠습니까."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는데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가요."

손 박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연수 형님의 근무처에서 사람들이 온답니다."

그럼 병문안 아닌가. 병문객 맞이라도 하란 건가. 못할 거야 없지만.. 왜 굳이.

"형님 근처에 못 오게 하십시오."

이건 의외였다. 왜 그런가. 마치 해코지 할 사람들처럼.

"왜 그럽니까?"

"임정에서 형님과 척을 진 사람들입니다. 일전엔 패악을 부려서 형님을 돌아가시게 할 뻔도 했지요."

"지금은 동료가 아닌가요."

"그게 그리 간단한 관계가 아닌가 봅니다."

손 박사의 말대로 못할 거야 없지만, 내가 들은 일은 다른 문제였다. 이놈은 왜 허구한 날 척을 지고 산답니까. 척을 질 만 해서 지는 겁니다. 손 박사는 그리 답했다. 무언가 아는 것 같았지만 나는 캐묻지 않았다.

"이승만인지 뭔지하는 그 사람인가요."

손 박사는 나를 쳐다봤다. 눈썹이 들썩거렸다.

"나도 경부노릇하던 놈이라 자료는 봐서 압니다. 어떤 사람인진 모르지만. 임시정부에 대한 것도 얼추 들어서 알고 있지요."

그런가요. 손 박사는 짧게 답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가 감정적으로 격앙되어있어보였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화가 나 보였다.

"손 박사께서 보시기에 나쁜 놈인가요. 그 사람이."

"단언컨대 그만큼 추잡스럽고 바닥인 작자는 없을 거외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말종이오."

의외였다. 손 박사는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그게 그를 더욱 냉혈인으로 보이게 하였고, 미안한 말이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 바가 적지않았다.

"손 박사께서도 개인적인 유감이 있나보군요."

"이제서야 말이지만, 나도 연수 형의 일을 도우러 종종 상해로 건너가곤 했습니다."

뭐라구요.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일한 사건이 몇개인데.. 그럼 그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녀석처럼 나를.. 증오했을테지.

"나는 독립운동가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단지 연수 형님을 돕고싶어서, 내 백부님에 대한 죗값을 갚아내야한다는 생각때문이었으니까요. 내가 본 이승만은 반쪽짜리 독립운동가, 아니. 그에 미치지도 못하였어요. 연수 형은 언제든 더 늦기전에 그 작자를 죽일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형님이 다칠까봐 내가 반대했고, 백범 선생을 설득하였습니다. 이제와서 보면 형님이 옳았지만.."

"그래도 설마하니 보는 눈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할까요."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요."

손 박사는 말을 마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가 옳다는 건 곧 알게 되었다.

"너 이 개새끼, 뭘 잘했다고 드러누워있어!"

개새끼는 당신인 것 같은데. 나는 녀석이 목말라하기에 잠시 물을 뜨러 밖으로 나가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사단이 난 것이다. 다짜고짜 들어와 너 때문에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하느냐, 차라리 그럴 거면 뒈지기나 해라..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녀석의 목을 조르려는 걸 내가 거즈 통이 담긴 접시로 그 작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안 봐도 알겠다. 저 작자가 이승만이로구나. 비키쇼. 이미 녀석은 멱살을 한번 잡힌 모양이었다.

"괜찮나, 물 좀 마시게."

"이 시국에 물이 목에 넘어가!"

"거 이상하군."

"뭐가 어째?"

"백범 선생 계실 적엔, 나 하나 빠졌다고, 업무가 이리 휘청인 적, 없었는데.."

말이 중간 중간 토막이 났다. 녀석은 숨이 헐떡거렸다. 하기야, 나랑 짧게 대화할 적에도 힘겨워했으니까.

"너 이 새끼, 백범이 그렇게 된 게 불쌍해서 봐줬더만.."

"눈가리고 아웅 마시오, 김 선생님은, 당신이 죽였잖아."

"이보게."

"꼬라지 한번 보기 좋다. 날더러 반쪽짜리 독립운동가라하더만 이 순사 놈이랑 붙어먹었나?"

"그만 하십시오. 설 선생님은 내버려두시기로 했잖아요."

녀석의 제자라던 놈이 그래도 좀 거들어주었다.

"여간하여야!"

"불쌍해서 봐 주기는.. 당신 목숨 날아갈까봐 그랬겠지요, 각하. 내가, 상해 임정에서, 당신 머리통을 날릴까봐,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그때처럼.."

"말 너무 많이 말게. 이보, 원무과장!"

녀석은 말을 마치고 이미 반쯤 쓰러지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사람이 뛰어왔다. 아마 손 박사가 여기저기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나가주시오."

"이 새끼, 오늘은 일이 바빠서 물러나지만.."

바빴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이제와서 체면치레라도 하겠단 생각인가. 한심스러웠다. 아마 이건 녀석과 내가 유일하게 의견일치를 본 부분일 것이다.

-

"그나마 조용하게 지나간 편이군요."

"더 악화가 되거나 하진 않았던가요. 말을 좀.. 많이 해서."

"다행히요."

"그럼 저건 그냥 자는거다. 그 말이군요."

"놀라시긴 했겠습니다만."

"안 놀란 것 같던데. 입은 잘 놀리더군요. 형무소에서도 그랬지만."

"경부님 말입니다."

"아."

글쎄요, 나도 이런 저런 꼴은 봐서, 개차반이긴 하더군요. 내가 뭐라했습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보다 더 가관이더군요."

"박 선생도 왔던 모양이군요."

"박 선생?"

"아 그렇지, 연수 형의 제자입니다. 뭐. 형님이 거두어 길렀다시피하니깐 자식에 더 가깝겠지요. 박원일이라고.."

"압니다."

누구때문에 저렇게 됐는데. 이건 불필요한 말이란 것은 알았지만, 문득 튀어나왔다.

"박 선생이요, 말도 안됩니다. 형님을 왜?"

"꼭 주먹으로 쳐야만 하던가요. 말로 치는 것도 치는 거지요. 나야 그 제자란 양반이 어떤지 모르지만 이놈에게 폐병쟁이라는 둥 뭐라는 둥.."

"..이젠 그 친구도 아주 못 쓰게 된 모양이군요."

"그래도 아까 말리긴 하데요."

"백범 선생이 야속합니다. 연수 형에게 짐을 너무 많이 지웠어요."

짐이야 평생을 지셨지요. 우리는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를 듣고 등을 돌렸다. 두꺼운 안경알을 끼고 팔짱을 낀 채로 우리를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나이는 이녀석 연배 즈음될까. 입은 장난스레 웃었지만 살기가 있었다. 내가 으레 봐오던 얼굴의 소유자였다. 겉으로는 뜨내기 인력거꾼으로 위장하면서도, 밤이 되면 완전히 겉과 속을 뒤집어버리는. 품에 칼을 숨기고 언제든 찌를 준비를 하는 사람들. 이 녀석처럼.

"오랜만이우, 경부양반."

"나를 압니까."

"가끔 설 선생님 약을 넣어주러 오질 않았어요. 손 박사님께 이야기야 들었지요."

"용케 기억하시는군."

"걱정말아요, 이제와서 보복은 않을거요. 그나저나 내가 좀 늦은 모양이지요. 원일이 그눔이 뛰쳐나가는 걸 보고 곧장 뒤따라왔는데."

"이상원 선생, 그럼 정 선생은.."

"그 겁쟁이 놈은 이런데 올 깜냥이나 되나요."

"형님 보러 오셨으면.."

"상태가 썩 좋아뵈진 않는군요. 이 박사 때문인가요."

"이번엔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레이시치 경부께서 미리.."

"퍽 고마운 일이기야 하네요."

표정은 전혀 고마워보이질 않았지만. 하긴 그럴 것이다. 녀석뿐 아니라 임정사람들이라면. 독립운동을 제대로 한 사람들이라면.

"와서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들은 그대로를 읊었다. 고스란히, 그 작자의 어조와 살이 에는 동장군같던 주변 공기까지도.

"진즉 죽었어야 할 폐병쟁이라곤 않던가요."

뭐라구요. 나는 되물었다. 그 말 자체가 내게 이렇다 할 감명이나 충격을 주진 않았다. 경부로 굴러먹은지가 오랜 세월이라, 그보다 심한 말쯤은 언제든 들어왔고, 때론 내 입에서 내뱉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지금은 일개 폐병쟁이지. 언제 죽어도 상관없을.

그건, 설연수 그놈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었다. 그럼 그 말은 엄연히 말하자면 그놈 생각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라기보다도 어쩌다 생겨버린 몹쓸 습관같은 것이다. 그 빌어먹을 장소, 시간에서 끊임없이 세뇌하듯이 놈에게 되뇌어 오면서.. 물론 녀석은 그런 데에 흔들리는 놈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실성한 놈으로 자처하였던가, 그런 이유로 제정신이었다면 진즉 죽었을 것이라고 한 것인가.. 놈이 그런 생각을 스스로 하기까지, 녀석을 어떻게 몰고갔던 것일까. 형무소에서조차 자신의 신념 하에 자신의 육신은 죽음으로 이끌망정 신념의 죽음만은 허하지 않던 놈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 녀석의 신념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다 못해 오히려 삶이 자신에겐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삶이 녀석에게 족쇄가 되었고, 하루빨리 그 족쇄를 벗어던지고 싶어서, 또한 그 형기를 채우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공교롭게도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이 그 신념과는 같은 방향을 향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놀라우신 모양이지요."

이상원 선생이란 이 친구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놀라움이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분기라고나 해야할 것인가.

"어쩌다가 저렇게 된 겁니까."

"폐병이라면, 임정에서.."

"폐병 뿐 아니라, 정신머리까지도."

"설 선생님이 유독 희생정신이 강하신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야.."

편리하겠군. 한 사람이 해야할 몫을 한 뒤에도 억지로 매어두며 망가져가는 꼴을 내버려두는 것이 고작 그 희생정신이란 말 하나로 일축하는게 전부이니까. 내가 아니꼽고 모순되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안다. 사실은 나야말로 그녀석을 가장 핍박하였고 윽박질러왔으니까. 그러나 그런 내 눈에도..

"..자네왔는가."

"저희때문에 깨셨나보군요."

깨긴 진작 깨었지.하고 녀석은 말했다. 망할 놈, 말을 하지.

"나더러 말 줄이라고 한 건 자네네."

"몸은 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그 소리군. 당장은 안 죽을테니 마음 놓게."

"싸가지하곤."

"자네한테 그런 소리 들을 싸가지는 아니야."

아까보단 말을 띄엄띄엄하는 횟수가 줄었다. 잠깐 쉬었을 뿐인데, 정말 괜찮아진 게 아니라면 그런 척을 하는 것일테지. 그러나 의사까지 속일 수 있을 리.... 그럼 그렇지. 손 박사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만 쉬시지요. 아까 전의 소동으로 상태가 썩 좋질 않은데요."

"쉬는 것도 지겹네."

"징징거리는 걸 보니 쉬긴 쉬어야하나부지."

카테고리
#2차창작
커플링
#마레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