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포(엔딩못냄. 낼 생각도 없음)

사과주와 담배

scrumpy and tobacco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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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는 술병을 끌어안고 편하게 소파에 누워있었음. 아, 아주 편하지는 않았음. 키가 크다보니까 장딴지 언저리는 반 정도 소파 바깥으로 삐져나가 있었음. 소파 가장자리는 베고 눕기에는 살짝 높았고. 어쨌든 항상 딩굴던 곳이었으니까. 들고 있는 게 사과주 술병이 아니고 손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크리스탈 술병이라는 것만 빼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음. 스파이는 데모의 머리가 얹혀있는 쪽의 소파 등받이에 비딱하게 기대어 서서 데모를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고. 이것도 데모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였음. 물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술기운이 점점 가시고 있다는 거였지만. 뭐 스코틀랜드산 사과주도 그렇게 비싼 술은 아니긴 함.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싸구려 술은 취기가 빨리 올라오는 건 좋은데 그만큼 빨리 가신다는 게 단점이었음. 숙취는 또 더럽게 오래가고.

어쨌든 데모는 스파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 하긴 어떤 클래스가 스파이한테 안심하고 마음을 터 놓겠냐만서도. 그나마 데모는 알콜을 원동력으로 해서 모든 클래스와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으니, 스파이랑도 어느 정도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였지. 넓어지는 친우관계와 그에 비해 초라해지는 간장… 시덥잖은 소리는 그만하고. 아무튼 그래서 데모는 스파이한테 거저 담배를 주기는 싫었음. 아무리 자기가 파이로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불이 붙을 만큼 술에 벙벙하게 절어있다고 해도, 그래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절대 주기 싫을 것 같았음. 데모의 부루퉁한 표정을 본 스파이는 가만히 발라클라바로 뒤덮인 자기 턱 끝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생각에 잠겼음.

이런 자세로 자네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돌연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군. 그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선선한 날씨였지. 비구름처럼 음울한 빛을 띤 보도를 향해 아롱져 떨어져내리는 낙엽이 노을빛보다도 더 붉게 물들어 있던 프랑크푸르트의 1957년 10월…

…지껄이던가.

이거 놀랍군, 자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가슴으로 이해할 만큼의 감수성이 남아있었다니. 자네가 날려버린 수많은 머리와 몸통조각에 휩쓸려 진작에 사라진 줄 알고 있었거든. 날려버린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마침 사과주가 휘발되어 날아가 버리는 이미지가 떠오르는군. 흔적도 안 남는다는 점이 마치 인생같지 않나? 자네가 거기 누워서 하릴없이 낭비하고 있는 그것 말일세. 여하튼 굳이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서 내 시덥잖은 연애담을 들어주겠다니 감사할 따름이야. 어디보자, 그해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여자가 네다섯 명쯤 되는데 그 중에서…

아가리에 유탄을 쳐넣어서 갈아만든 달팽이 요리로 만들어도 시원찮을 놈이, 듣자듣자하니까 날 새도록 조잘댈 기세네. 그렇게 떠들어 대는데 입 안 아프냐?

그러니까 담배 하나만 줘, 데모. 물론 내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잔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 자네가 잠을 설치는 것만 구경하면서도 밤새도록 즐겁게 보낼 수 있을 테니 말이지.

그게 부탁을 하는 놈이 할 소리냐? 됐어, 닥쳐. 내가 졌다, 씨발.

말을 마치고 데모는 투덜대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담뱃갑을 끄집어냈음. 탄피니 기폭 장치 같은 것들도 같이 넣어놨던 탓에 표면에 온통 고운 화약 가루가 새까맣게 묻어있었음. 담배 한 번 피려다 폭사하면 큰일인데. 스파이가 뒤에서 비아냥거렸음.데모는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커피색 담배 한 개피를 쏙 뽑아 들어올렸음. 다행히 화약 가루가 묻은 건 담뱃갑 뿐이었고, 담배 자체는 무사했음. 스파이는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써서 담배를 집어가면서 재수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음.

merci.

집어치워, 개구락지 쌍판아… 왜 안 가?

불 좀 빌려줘.

야이, 후장 강도놈아. 면상에다 철판을 깔고 다니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담배 피운다는 놈이 라이터도 안 갖고다녀?

아무래도 직업 탓인지 신상 가까이에 화기를 두는 게 껄끄러워서 말야. 비슷한 처지의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혹시 간경변이라는 의학 용어 들어본 적 있나?

자꾸 쓸데없는 말 덧붙이면 니 입구녕에 담배 말고 진짜 유탄을 쳐넣어버릴 줄 알아라, 앙?

이번에는 작은 지포라이터가 딸려올라왔음. 여전히 화약 가루가 보슬보슬 떨어져 내렸지만, 은은한 금속빛이나 무늬를 보아하니 꽤 값나가는 골동품 같아보였음. 스파이의 시선을 눈치채고 데모가, 증조 할아버지 거야, 하고 부루퉁하니 내뱉었음. 익숙하게 덮개를 제끼고 공이를 튀기자 한순간 화륵, 하고 엄청난 기세로 불꽃이 타올랐음. 정작 데모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이 씨발, 쫌만 있어봐. 하고 말았지만. 그러고선 화약가루가 다 타버리고 불길이 사그라든 걸 확인하자 자유의 여신상마냥 쭉 치켜들었음. 꽤 웃기는 폼이라고 생각하면서 스파이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라이터에 가까이 가져다 댔음. 그리고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허리만 펴고 만족스럽게 담배를 쭉 빨아들였다가 내뿜었음. 바로 이거야. 그러더니 약간 미간을 찡그린 채로 담배를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음. 그 꼬락서니를 보고 데모가 고래고래 악을 썼음.

피우려면 저쪽 가서 피워, 예절머리 없는 호모새꺄! 내 쌍판이 재떨이로 보이냐?

독하네. 내 취향은 아니야.

어지자지 새끼가, 얻어피우는 주제에 취향 따지고 앉아있어? 그 꽁초 빨랑 저리 안 치우냐!

아, 담배는 좋아하지만 담뱃재는 불만이신가? oui, 친절한 해명 감사드리네, 애연가 선생.

뺀질뺀질 비아냥거리면서 스파이는 우아하게, 그러니까 데모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속 터지게 느려빠진 몸놀림으로 소파 등받이 한가운데로 돌아서서 등을 기댔음. 데모에게는 콧구녕이 말라붙을 것처럼 지독하게 냄새나는 니코틴 덩어리밖에 안 되었지만, 담배가 고팠던 스파이는 사랑스러운 여인의 눈을 들여다 보는 것 마냥 몽롱한 눈길로 흩어지는 연기를 더듬다가 나직하게 운을 뗐음.

술 취향을 고려하자면, 좀 더 부드러운 맛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뭐,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내 취향도 아냐. 난 시가가 더 좋걸랑, 계집애들 담배나 태우는 개구락지 샛꺄. 그건 가끔 사과주 마시다 텁텁해지면 태우는 거고.

오호라, 이제보니 우리의 자랑스런 피투성이 하이랜더께서는 고상한 취향의 소유자셨군.

걍 졸부 티가 난다고 해라, 쓸데없이 빙빙 말 돌리지 말고. 혀꼬부라진 니코틴 중독자 새꺄.

같은 중독자끼리 이거 왜 그러시나, 알콜 중독자 양반. 그러고보니 평소에 마시는 술이 아닌걸. 그것도 기분 전환을 위해서인가?

…뭐, 그렇지. 남이 고량주를 퍼마시던, 꼬냑을 퍼마시던 뭔 상관이야, 게이자식아. 포도주 간은 볼 줄 아냐? 낄낄…

그래? 아쉽군. 숨기는 일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는 줄 알았는데, 우리 사이에.

징그러운 소리 집어치워, 후장털이. 쓸데없는 탐색은 집어치우고. 원하는 거라도 있냐?

탐정 놀이를 계속하는 중이지. 흥미로운 단서들이 눈에 띄었거든. 깨끗하게 사라진 사과주, 갑자기 밴을 몰고 외출한 쿨가이 건맨, 그리고 사라진 팀원… 간소하나마 한 편의 스릴러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

지랄하고 자빠졌다, 미끄덩거리는 개구리 면상같은 새끼야. 슬슬 남 뒤나 캐고 다니는 거 말고 다른 취미를 찾아보지 그러냐?

밤 늦게까지 닥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스파이가 한 차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후 말하자, 데모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꾹 감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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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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