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를 빌려드립니다
I sell my hangovers
들어서자마자 마치 냉장고 문을 연 것처럼 약간의 습기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얼굴에 엉겨붙었음. 소독용 알콜의 알싸한 냄새에 새똥 냄새 비스무리한 게 뒤섞인 냄새도 희미하게 풍겼고.
막상 의무실 안은 평소랑 다를 거 없었음.그러니까 비둘기들이 조명등 위에 올라앉아서 구구거리고 있고, 의무실 한 켠에는 흰 가운이라던지 셔츠라던지가 가지런하게 걸려있고, 안에는 샌드비치부터 괴랄한 정체불명의 생물체 내장 같은 것 까지 들어있는 냉장고도 있고. 이게 살림집인지, 동물원인지, 의무실인지… 온갖 잡다한 것들은 많았지만 원체 방이 넓은데다 병원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사람 사는 곳이라기보단 버려진지 조금 된 멸균실에 더 가까워보였지. 메딕이 외출한답시고 불을 꺼 놔서 잘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다들 병원 무서워하잖아. 그건 데모도 마찬가지였고. 아니, 데모는 사나이라서 병원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음. 그냥 병원이 싫을 뿐임. 단지 그것 뿐임. 어쨌든 자주 방문할 만한 장소도 아닌데다, 의무실 안에 들어갔을 때는 항상 불이 환히 켜져있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두리번두리번 전원 스위치는 어디 있나, 하고 찾고 있으려니까 뒤에서 또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음.
수술대, 왼쪽.
뭐 대충 그런 말인 듯 했음. 아니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단어가 그것뿐이었다거나. 어쨌든 그 말에 데모는 무사히 스위치를 찾아 눌렀음.
팟, 하고 하얀 조명등이 켜지면서 어두컴컴한 의무실에 창백한 불빛이 퍼졌음. 그 통에 위에 앉아있던 비둘기들이 놀라서 요란스레 푸드덕 거리면서 날아올랐음. 눈이 부실 만큼 밝긴 했지만 넓은 의무실을 다 비춰줄 정도는 아니었지. 좌우간 데모는 이 인간을 어디다 눕혀야 하나, 설마 수술대에 눕히라는 소린 아니겠지? 하고 이리저리 메딕을 메다꽂을 만한 장소를 찾았음. 그러다가 의무실 한쪽에 쳐 놓은 커튼이 눈에 띔. 다가가서 걷어보니 의료용 침대 하나가 놓여있었음. 이불… 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수준의 얇이를 자랑하는 천쪼가리랑 함께. 주변에는 자명종 시계니, 간이 책꽂이니, 뭐 그런 것들이 있는 걸로 봐서 아마 여기서 자는 건 확실한 것 같았음.
이딴 데서 자냐… 데모는 앙상하게 생긴 침대를 보면서 혀를 찼음. 도저히 편안한 수면시간을 보장해 줄 것처럼 생기진 않았거든. 맨날 얼큰하게 취해서 소파 내지 마룻바닥에서 뒹구는 인간이 할 소린 아니지만. 어쨌든 이제는 새근거리는 숨소리까지 내면서 잠든 메딕을 흔들어 깨워서 침대로 옮기기로 했음. 이제는 메딕도 별 말 없이 고분고분 수술용 침대에 널부러졌음. 뭐가 좋은지 여전히 빵끗빵끗 웃는 얼굴로. 친절한 데모는 적어도 이불 정도는 제대로 덮어주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음. 물론 속으로는 신나게 욕을 해 대면서. 한 차례 이불이랑 씨름을 한 끝에, 비교적 단정하게 이불을 덮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메딕을 보고 데모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음. 이제 끝인가? 하고 생각해 보니까, 식당에 아직도 메딕의 옷가지들이 남아있다는 게 기억남. 마지막으로 그거나 갖다놓고 술이나… 아, 없지… 그럼 담배나 좀 태우다 자야지 뭐. 하고 의무실을 나서려고 돌아섰을 때였음.
가게?
뒤에서 메딕이 말했음.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놀라서 돌아본 데모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잘 가.
하고선 꼬물꼬물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썼음.
지랄, 왜 혼자 자문자답하고 난리야. 하고 생각했을 거임. 평소대로라면. 그런데 메딕이 답잖게 고분고분하게 굴잖아. 비맞은 멍멍이처럼 구는 게 뭔가 좀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젠장. 그냥 못 들은 척 해 주기로 함.
의무실을 나선 후에도 오랫동안 등에 남아있는 미지근한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음. 마치 쐐기처럼 가슴 깊이 파고들던 단조로운 심장 박동도.
적당히 코트니 안경이니를 챙겨서 돌아왔음. 의무실은 여전히 나갔던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음. 심지어는 비둘기들조차 깃털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음. 자기가 없는 동안은 시간이 멈춰있었던 거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음. 어쨌든 가지고 온 것들을 어디다 놓을지 고민하다 대충 수술대 위에 내려놓음. 의무실 한가운데 있는데다 크기도 크고. 넓적하니 뭐 놓기도 좋고.
데모는 마지막으로 불을 끄기 전에 뭐 남긴 일은 없나 생각해 봤음. 암만 고민해 봐도 더는 없는 것 같은데, 자꾸 뭐가 남은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음. 슬슬 술기운이 떨어져가서 그러나? 그러고 보니 뭔가 손이 달달 떨리는 것 같은 게… 하면서 자꾸 메딕 쪽을 뜯어보다가, 문득 머리 끝까지 덮인 이불이 눈에 띄었음. 저거 도로 끌어내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가뜩이나 취한 양반이 저렇게 이불에 푹 파묻혀서 자면 숨쉬기 힘들 거 아냐. 쓸데없이 자꾸 이불에 집착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다가가서 조심조심 이불을 걷어내림. 메딕 깰까봐. 딱히 이불을 움켜쥐고 있다거나 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었음.
이불이 내려가고 메딕의 얼굴이 나타났음. 이제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살짝 입을 헤 벌린 채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음. 아무래도 데모 생각에는 추워서 그런 것 같았음. 좀 더 두꺼운 이불을 덮을 것이지. 설마 이불이 이거 하나뿐인 거 아냐? 데모는 나중에 메딕한테 이불 하나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음. 어차피 자긴 쓰지도 않고… 하늘을 이불삼아 땅을 침대보삼아 술을 벗삼아 잠드는 호탕한 사나이니까여. 넹. 그걸 네 글자로 줄여서 거렁ㅂ… 어라, 현관문에 돌격 타지
남 술 다 뺏어먹고, 실컷 고생까지 시켜놓고, 자기는 태평하게 누워서 자고 있으니까,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건 사실이었음. 빙구같이 자고있는 의사양반 얼굴을 보니까 화난 것도 가라앉았지만. 에라, 모르겠다. 내 술 뺏어먹고 주사부렸다고 두고두고 놀려먹는 걸로 때우지 뭐. 하고 데모는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올려놓았음. 메딕 안 깨게 조심조심. 그 난리를 피워서 그런지 피곤한 것 같기도 함. 숙취도 덜 깬 상태에서 술도 마시고, 또 그 난리도 피워댔으니까. 좀 쉬고 가도 뭐라고 안 하겠지. 그러고선 의무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음. 평소엔 이유도 없이 들어오면 메딕이 짜증내서 여유롭게 둘러볼 기회가 전혀 없었거든.
아까도 한 생각이지만, 대체 이딴 삭막한 데서 어떻게 견디고 사는지 궁금해졌음. 평소 메딕 이미지를 보면 빠딱빠딱하게 정돈되어 있을 것 같았음. 방문하면서 얼핏 구경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고. 근데 이렇게 앉아서 , 메딕의 짜증 없이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으니까 뭔가 아님. 아까도 느꼈지만 무슨 창고나 폐허같은 느낌. 이 양반도 이제보니 살인기계같은 인간은 아니구만. 데모는 멍하니 생각했음. 동시에 하도 정소하질 않아서 먼지랑 화약 가루가 풀풀 날리는 자기 방이 생각남. 슬슬 청소하지 않으면 작업하기 힘들 텐데. 방 날려먹기 싫으면 슬슬 정리해야지. 어, 축음기다. 음악 좋아하나? 스카웃이랑 비슷한 구석이 있군. 취향은 클래식 정도려나.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바이올린 켜는 시늉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저 비둘기들은 왜 계속 가만 앉아서 날 노려봐. 기분 나쁘게시리… 설마 공격해 오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 눈 쪼이면 어떻게 하나. 하나밖에 없는 눈을 저런 비만 조류한테 잃으면 어떡하지. 아마 어머니가 날 가문에서 때려 내쫓지는 않으실까. 아, 술고프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데모는 다시 메딕의 얼굴을 내려다 봤음. 이렇게 보니까 메딕 얼굴도 각이 딱딱 잡히고 선도 쭉쭉 곧게 뻗어서 탄탄해 보임. 뭐 사내새끼 얼굴답긴 하지. 그런데 얼굴 진짜 작네. 그냥 덩치에 비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어쨌든 취해서 쿨쿨 자고 있는 지금도 워낙 흐트러진 것 하나 없이 단정해서, 데모는 답답해졌음. 그냥 가볍게 뭔가가 자기를 내리누르는 느낌이 들었음. 어쩌면 이 방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걸지도 모름. 가벼운 위화감이라고 해야하나. 자기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어수선한데, 마치 그림으로 그려서 떼다 붙인 것처럼 정적인 공기가 가득 찬 이 방이. 저 비둘기들이. 메딕의 모습이. 마치 액자에 넣어서 장식해 놓은 그림 한가운데에 끼어든 느낌. 데모는 명화 감상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 예술은 자고로 폭발이지. 암.
갑자기, 충동적으로 데모는 손을 뻗어서 메딕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음. 왜냐고 물으면, 그냥. 그러고 싶어서. 뭔가 그래야만 속이 시원해 질 것 같았음. 엉망이 된 메딕의 머리를 보고 데모는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음. 위화감으로 터질 것 같은 방의 분위기도 누그러진 것 같았고. 비둘기들이 조용히 구구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쑥대밭이 된 메딕의 머리를 보니까 그림에서 놓여난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하나. 일어나면 화내려나? 뭐, 내라지. 솔직히 오늘 밤 일어난 일을 때우려면 주사거리 하나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안 그래?
잘 자, 의사양반.
그렇게 말하고서 데모는 제법 유쾌한 기분으로 의무실을 나섰음. 불 꺼진 조명등이랑, 비둘기랑, 메딕을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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