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포(엔딩못냄. 낼 생각도 없음)

적과 백

Le Rouge et le Blanc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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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닥터.

짧지만, 충분한 대답이었어. 너무나도 충분한. 마치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더 이상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의 끝자락처럼 말야.

해피엔딩이 아니란 게 문제였지만.

대답은 차마 할 수 없었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였어. 평소에도 둘 사이에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지. 그냥 눈짓 하나, 고갯짓 한 번만 봐도 의사소통이 가능했지. 둘의 사이는 그 정도였어. 딱 그 정도. 적어도 헤비의 생각은 그랬지.

좀 더 여유롭게 대처할 수도 있었는데.

메딕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런 생각이 맴돌았어. 수십 년은 어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 잘 대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고백같은 실수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거야. 충분히 참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결국 견디지 못했어. 그리고 실패했고. 단 한 번의 실패. 돌이킬 수 없는 실패. 계속해서 헤비의 당황한 표정이 떠올라. 상냥한 얼굴에 떠오른 소리없는 대답도. 헤비는 그저 가볍게 손을 내밀어서 메딕을 저지했을 뿐이었어. 아, 실제로 그랬다는 소리는 아니고. 하지만 메딕은 센트리의 집중사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저 멀리 나동그라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 헤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답은 나와있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

그 이후로 둘 사이에 벽이 생겼어. 보이진 않지만 견고한 벽이. 한없이 얇은 벽. 하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 이제까지는 그저 모호한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었어. 깊이도, 거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 말야. 적어도 희망 정도는 있었지. 이젠 아니지만.

감정 따위는 그저 신경 전달 물질의 농간일 뿐이야. 그러니까,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단 소리지. 그러니까, 이성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잖아. 고백하기 전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으면서. 거절당하면 깨끗하게 마음을 접기로 말이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고. 뭐… 거절당하진 않으리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싫다고 했으면 그냥 자기가 마음을 정리하기만 하면 돼. 헤비도 앞으로 계속해서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했고. 난 게이는 아니지만, 닥터는 좋은 사람이니까. 상냥한 말이었지. 호모새끼라고 욕이나 얻어먹지 않은 게 어디야. 그럼 끝난 거야. 다시 예전처럼 지내면 돼. 이제 냉정하게 생각을 해 봐.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그저 사소한 사건 하나만이 일어났을 뿐이야. 자기가 헤비한테 고백하고, 그리고 차였다는 사실.

절대 변하지 않을 사실.

확고부동한 사실.

명명백백한 사실.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메딕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사실이었지.

정작 지금 메딕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건 따로 있었지만. 바로 지독한 숙취였지.

끔찍한 두통, 오한, 발열, 현기증, 구토증, 기타등등. 메딕이 깨어나자마자 바로 숙취가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증상들이 머리를 강타했음. 대단히 모범적인 목록이라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조금 감탄할 정도였음. 당연하지. 사과주는 그래봬도 제법 독한 술이지 말입니다… 생전 맥주 말고는 술을 제대로 마셔본 적 없는 양반이 그걸, 그것도 하룻밤만에, 최소 3병은 더 되는 양을 퍼마셨으니 사단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있나요. 속이 곤두서서 토하러 가고 싶어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 조차 없었음. 그나마 다행인 건 먹은게 없다보니 토할 것도 없다는 거였음. 니주가리 송판이 된 햄에그 스크램블? 그게 요리던가요? 게다가 양도 개미 눈꼽만큼밖에 없었는데?… 어쨌든 입에서 막 저절로 끄어어으어어하고 신음소리가 흘러나옴. 아니, 이건 신음소리가 아님. 죽기 직전에 내지르는 단말마 비슷한 뭔가의 번데기임… 막 헛것도 보이고 그럼. 무슨 주마등 같은 것도 스쳐지나가는 것 같고 그래. 어쩌면 간이 녹아내렸을 지도 몰라. 메딕은 내장이 모조리 녹아내린 보노보처럼 침대 위에서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키며 생각했음. 이런 걸 꼬박꼬박 하루 한 병씩 비워대고도 멀쩡히 미션을 뛰어다니는 데모한테 약간의 존경심 비슷한 것까지 생길 지경이었음. 어, 하긴, 데모가 멀쩡한 상태로 미션을 수행하는 건 아니긴 해. 하지만 그런 사소한 데에 신경쓸 여유따윈 없었지. 시트를 쥐어뜯으면서 꺽꺽대고 있는 지금의 의사양반으로서는 말야. 그래서 메딕이 어떻게 눈을 떴느냐?

침대 옆의 서랍 위에 놓아둔 자명종 시계가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거든. 1960년대니까 그때 치고는 신식 시계겠지? 아마도. 좌우간 메딕은 독일 사람이잖어. 게다가 이과계 사나이. 하루 일과 정도는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매일 아침 기상시간이 정해져 있을 것 같단 말야. 평소같으면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뜨고 나름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음. 두개골 밑바닥에 찐득하게 눌어붙어있는 술기운이 머리를 때리고 있었으니까. 마치 불난 데 부채질하듯이 좋아라 머리를 두들겨대는 자명종 소리는 웬수같았겠지. 어쨌든 메딕은 남아있는 모든 기력을 다 짜내서 팔을 휘둘러서 자명종을 끄려고 노력했음. 어떻게든 정상적인 방식으로 끄려고 말야. 결국 자명종 시계는 허우적대는 팔에 후려맞고 기세좋게 밑으로 떨어져서 박살이 났음. 제법 비싼 거긴 해도 뭐 어쩌겠어. 일단 소리가 멈췄다는 게 중요한 거지.

눈을 뜬 건 좋은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느냔 말이지. 일어나 앉을 수도 없고. 메딕은 반쯤 맛이 가서 눈에 촛점이 사라진 채로 한동안 그렇게 허으어으어으어하고 말로 설명 못할 고통에 시달리다가 어느 순간 까무룩 정신을 놨음.

숙취 때문에 몸이 안 좋은 탓인지 오싹오싹하니 오한이 일어. 어쩌면 냉랭한 의무실 안의 공기 때문일지도 몰라. 얇아빠진 이불 탓도 있겠지. 평소에는 별로 춥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말야. 오히려 따뜻한 것 보다는 살짝 서늘한 편이 더 좋았지. 자면서 땀 흘릴 일은 없을 거 아냐. 땀 흘리는 거 싫잖아. 끈적거리고, 불쾌하고. 동료들한테 맨날 영감소리 듣긴 해도 어차피 신체 건강한 남성 아닙니까. 조금 추운 것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지. 적어도 상태가 괜찮을 땐 그랬어. 뇌수가 알콜에 쩔어서 곤죽이 된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금은 아니지만.

여긴 너무 추워.

온기가 필요해. 방으로 돌아가면 푹신한 침대와 모포가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일어날 기운도 없어. 게다가 안 쓴지 하도 오래되어서 방이 어떤 꼴이 되어있을지 모르겠어. 춥다보니까 자꾸 따뜻한 게 생각나. 난로라던지, 모닥불이라던지 말야. 두서없이 짧은 기억들이 떠올랐어. 전날 있었던 일이 어렴풋이 기억나. 취해서 맛이 간 상태긴 했지만 따뜻한 체온이 기억나. 규칙적으로 고동치는 심장 소리도. 크고 따뜻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아. 누군가의 말소리도. 잘 자.

…어쩌면 그냥 꿈이었을 수도 있어. 메딕이 원하던 거였으니까. 헤비가 쓰다듬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다정하게 인사해 주는 거.

평소에도 다정하게 인사해 주긴 했지. 하지만 메딕이 원하던 건 좀 더 다른 거였어. 그러니까, 있잖아. 동료한테 건네는 종류의 그런 것 말고. 좀 더 특별한 거. 예전부터 다른 팀원들에 비해서 메딕을 좀 더 상냥하게 대해주긴 했지.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동료로서 대우해 주는 거잖아. 메딕이 원했던 건 동료 이상의 대우였지. 서로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눈다던가,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여준다던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어. 처음부터 그런 걸 원하던 건 아니었는데. 메딕은 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어.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걸까.

체중 조절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둔해빠진 볼셰비키놈.

헤비에 대한 메딕의 첫인상이었어. 뭐, 다른 팀원들에 대한 평가도 결코 좋은 건 아니었지만. 이 신랄한 평가에는 인절미 떡판에 묻은 콩가루마냥 풍비박산이 난 첫 미션의 전과도 살짝 영향을 미쳤지 말입니다. 어쨌든 한 번 같이 전투를 뛰어보고 나서 보니까, 팀원들 중에서 가장 따라다니기 괜찮은 상대는 아무래도 헤비같아. 덩치가 크니까 멀리서도 잘 보이니, 찾기도 편하고. 맷집도 좋고. 여차하면 도망갈 때 방패로 써먹을 수도 있고. 실력도 동료 중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고. 그래서 메딕은 미션때면 거의 헤비랑 붙어다니다시피 했지. 헤비도 그런 메딕을 잘 보살펴줬고.

서로 실리를 따지다보니 어쩌다 맺게 된 관계라고 봐야겠지. 습격해 오는 스파이를 해치워주는 것도, 메디킷을 양보해 주는 것도, 총에 맞지 않도록 등 뒤에 숨겨주는 것도, 그건 다 당연한 거야. 메딕은 의사양반이니까. 메딕이 없으면 팀원들을 치료해 줄 사람이 없잖아. 합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당연한 행동이지. 그렇잖아? 그러니까, 집중포화를 받아서 다 죽어간다고 해도 메딕을 지켜주는 게 헤비의 의무야. 어차피 대충 정리하고 나서 치료해 주면 그만 아냐. 의사가 붙어있으면 그 정도는 당연히 가볍게 해치워야지. 가끔은 싸우다가 메딕을 한 번 돌아보고는 씨익 웃어. 웃긴 또 왜 웃어. 유치하게스리, 부끄럽지도 않나. 온갖 화기에 점사당해서 만신창이인 주제에 허세부리긴. 왜 웃냐니깐, 메딕이 멀쩡해서 좋대. 머리가 모자란 거 아냐? 의사양반을 지키는 건 다른 팀원들의 의무라니까. 다치지 않은 건 메딕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서 그런 거야. 헤비가 잘해서가 아니고. 느려터진 러시아 놈 쫓아다니면서 총알 피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뭐, 어쨌든 지켜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

다른 팀원들, 그러니까 제 잘난 맛에 사는 호주 출신 보이스카웃이나, 대낮부터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는 애꾸눈 알콜중독자 같은 놈들. 그런 놈들에 비한다면야 헤비는 괜찮은 편이지. 그건 사실이야. 약간의 선심 정도는 써 줄 수도 있지 뭐. 일종의 보상 차원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헤비를 위해서 샌드비치를 만들어 준다던지 말이지. 그 정도쯤이야 어쩌다 해 줄 수도 있지 뭐. 샌드비치 정도야 누구나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거잖아. 그리고 만나면 뭐, 아는 척 정도는 해 준다거나. 이것도 간단한 일이지.

다른 녀석들이 볼 일도 없는 주제에 의무실에 들어오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헤비라면 상관은 없을 것 같아. 일단 얌전하잖아. 아니, 뭐. 미션이 시작되기만 하면 신이 나가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뛰어다니긴 해. 심심하면 쏘지도 않을 거면서 시끄럽게 미니건을 돌려대질 않나. 그건, 뭐, 메딕도 미션이 시작되기만 하면 신이 나서 절골톱을 휘두르고 다니니까, 뭐, 딱히 할 말은 없지. 어차피 미션이 없을 때는 조용하잖아. 가끔은, 그러니까 소파에 앉아서 달로코스 바를 우물거리면서 멍하니 TV를 보고 있을 때라던지 말야. 스카웃이랑 감자칩이 든 그릇을 끼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말야. 그런 걸 보고있자면, 어떨 때는 바보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야. 교묘하게 샛길로 빠져서 레드 팀을 기습하는 잔머리를 보면 진짜 멍청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소란을 떨어서 비둘기들을 놀라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아. 그래서 헤비한테는 허락을 해 줬어. 의무실에 맘대로 드나들어도 좋다고 말야. 그랬더니 헤비는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멋쩍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하는 거야.

의무실에는 별로 볼일이 없는데.

그럼 관두던가, 둔해빠진 돌대가리 자식아. 제 주제도 모르고 말야. 기껏 선심을 써 줬는데 반응이 그게 뭐야.

실제로 그렇게 쏘아붙이진 않았지만. 그냥 부루퉁하게 자네 마음대로 하게, 하곤 말았지. 어쨌든 그 후에 헤비가 의무실을 방문하긴 했어. 그냥 닥터가 뭐하나 보러 왔다면서 말야. 왔으면 그냥 닥치고 둘러보기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소리는 왜 지껄이고 난리야. 그러고선 헤비는 멀뚱히 서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의무실을 한차례 휘이 둘러봤어. 처음 와 보는 것처럼 굴기는.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몰라. 적어도 우버 수술 받았을 때 정도는 들렀을 거 아냐. 저러는 거 보면 진짜 바보같다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음… 좀 있다 나갈 거야.

금방 가 볼 생각인가봐. 하긴, 의무실이 놀이터는 아니니까. 재미있는 곳은 아니지. 어차피 가던 말던 상관은 없어. 메딕은 한참 보급품 목록을 체크하는 중이었으니까. 자기 몫은 꼼꼼하게 챙겨놔야지. 어쩌면 회사가 의약품을 슬쩍 빼돌릴 수도 있고. 아직까지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그러니까, 메딕은 바빴단 말이지. 접객 같은 귀찮은 짓은 할 여유도 없을 만큼 말야.

비둘기 키워?

헤비의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어봤어. 헤비는 의무실 한 구석에 오몰오몰 모여서 앉아있는 하얀 비둘기들을 보고 있었어. 비둘기들은 낮선 사람이 들어와서 그런지, 경계하는 것처럼 조용히 헤비를 노려보고 있었지.

왜, 비둘기 처음 봐?

닥터는 애완동물이 있었군. 비둘기 좋아해?

…그냥. 이상한가?

비둘기를 키우는 용병은 본 적 없어.

남이 상관할 일은 아니지. 내 맘이야.

닥터는 해부만 좋아하는 게 아니고?

한 가지 취미생활에만 매달리라는 법 있나? 그리고 딱히 비둘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음, 닥터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왜?

동물 키우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없거든.

…근거는 있는 소리인가?

아니, 그냥. 내 생각은 그래.

주사기로 사람 죽이는 의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엄…

시체 해부가 취미인 인간이 나쁜 사람이 아니야?

다른 의사도 해부는 하잖아.

…그건 그래. 그럼 절골톱으로 사람 죽이는 의사는 나쁘지 않고?

나도 용병이야. 닥터는 어떻게 생각해?

뭘?

나도 나쁜 사람 같아?

…것 봐. 대답 못하네. 여기서 나쁘고 안 나쁘고는 쓸데없는 소리야. 알잖아.

…Badland에서. 그리고 헤비는 재밌다는듯이 낄낄 웃었어. 썰렁해. 더럽게 썰렁해. 지금 그걸 개그라고 했냐. 기본적인 영어 회화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주제에 그딴 드립 치지 마라. 개그감각이 남들보다 심각하게 떨어지는 의사양반마저도 정색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 그래도 헤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진 알겠어. 대충은.

비둘기 보러 또 올게, 나중에. 헤비는 헤헤 웃고는 나가버렸어. 그냥 인사치레삼아 해 본 소리라는 것 정도는 알아. 그나저나 웃기는 놈이야. 실력을 보아하니 용병질 하루이틀 해 먹은 놈도 아닌 것 같은데 나사빠진 소리나 하고 앉아있어. 비둘기가 좋냐느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느니 말야. 아무리 빈말이라도 말이지. 어쩌면 정말 머리가 딸리는 놈 아닌가 몰라.

그런데, 진짜 또 실실 웃으면서 찾아오더라구.

비둘기 먹이 줘 봐도 돼? 이러면서.

그 후에도 종종 헤비는 비둘기를 보러 찾아왔어. 비둘기를 좋아하나. 한 번 물어봤더니 동물은 다 좋대. 단순해서 그렇다나. 아하, 자기랑 비슷한 수준이라 이거군.

언제는 스카웃도 같이 오면 안 되냐고 하더라고.

스카웃도 동물 좋아하는데.

하지만 메딕은 단호하게 거절했어.

안 돼, 시끄러워. 그리고 불결해. 게다가 그 놈한테 비둘기를 보여준다고? 동물을 좋아해? 잡아서 구워먹겠다는 소리가 아니고?

헤비는 시무룩해졌지만 그 이상 부탁하지는 않았어.

헤비는 그랬어. 좋고 싫은 게 분명했단 소리야. 자기 편이라고 판단하면 정말 친절했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었다니까. 대신, 선을 넘으면 가차없었지. 마피아같은 사고방식이지. 누가 러시아 놈 아니랄까봐. 그래도 알기 쉽다는 점 하나는 좋았지. 무엇보다 헤비는 같은 편이잖아. 그리고 헤비는 메딕을 좋아했어. 메딕은 좋은 사람이니까. 헤비는 헤헤 웃으면서 그랬지. 헤비는 영어를 잘 못해. 언젠가 한 번 스파이랑 같이 있을 때 그런 말이 나왔거든. 그랬더니, 그럼 당신은 어떻고? 의사양반. 이러면서 이죽거리더라고. 지는 어떻고, 혀꼬부라진 프랑스 촌놈이. 머리에 뒤집어 쓴 고무장갑이나 벗고 말하던가. 어쨌든, 그러니까 헤비가 ‘좋다'고 말했다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숨어있다는 소리였지.

아. 물론, '사랑한다'는 의미는 없었지만.

알고보니 헤비는 영어를 잘 못하는 것 뿐이지 바보는 아니었어. 말이 짧은 건 원래 과묵한 성격인 탓이기도 했지만. 많은 말은 필요없지, 진심이 담겨있다면. 언젠가 이유를 물어봤더니 그러더라구. 한쪽 눈썹만 까딱, 하고 치켜 떠 보이면서 말야. 하긴, 차라리 조용한 편이 낫지. 메딕도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거든. 어쩌면 행동이 굼뜬 건 덩치가 커서가 아니라 항상 행동하기 전에 생각부터 하고 봐서인지도 몰라. 가끔은 답답하기도 했지만, 뭐. 그것만 빼면 괜찮은 놈이니까. 잔머리도 제법 돌아가는지, 헤비가 내리는 지시대로만 움직이면 난데없이 죽을 걱정은 없었어. 아주 없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가끔 메딕이 눈치만으로 헤비를 보조해주면 헤비는 헤헤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어.

닥터는 머리가 좋아.

당연하지. 의사는 폼으로 된 줄 아나? 머리가 좋은 건 당연한 거야. 참, 면허 뺏겼지. 어쨌든 메딕은 헤비보단 훨씬 똑똑하단 말야. 나이도 많고. 그런데 세 살 먹은 꼬맹이 대하듯이 말하잖아? 버릇없게스리. 아무리 영어를 못한다지만 좀 더 정중하게 말할 순 없나. 어차피 다른 팀원들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하긴 하지만. 그래도 메딕은 연장자라구, 연장자.

다른 팀원들 하니까 생각났어. 헤비는 기분이 좋을 때에는 옆에 있는 팀원을 끌어안거나 어깨를 툭툭 치기도 했어. 그러니까, 스킨쉽이 잦은 편이었단 말이지.

다들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헤비는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어. 어쨌거나 한 팀 아냐. 헤비는 좀 굼뜨긴 했어도 좋은 친구였고, 금방 다른 클래스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어. 헤비는 블루 팀의 작은 친구들을 좋아했어. 작은 친구들. 하긴, 헤비는 팀원들 중에서 덩치가 제일 크지. 그래서 그런지 다른 클래스들을 어린 아이 취급하더라고. 꼬마 친구들이니, 작은 아기들이니. 영어를 잘 못 하니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말하는 건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던 딱히 상관은 없잖아.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게? 헤비는 스카웃을 좋아했어. 팀 메이트 중에서 제일 작잖아. 그러니까 귀엽다나. 덩치도 산만한 놈이 쓸데없이 귀엽다는 소리나 하고 앉아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생 비슷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아. 같이 붙어있는 꼴을 보면 형과 아우 사이라기보단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스카웃을 으스러져라 꼭 껴안고는 했어. 그 때마다 스카웃은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지. 관절이 나갈 것 같다느니, 징그럽다느니, 저리 치우라느니,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다느니… 스나이퍼의 평가에 따르자면, 꼭 덩치 큰 불곰이 꿀 따먹는답시고 나무둥치를 뿌리채 뽑으려고 드는 것 같다나.

그런데… 아니, 그게, 별 뜻은 없고, 그냥 기분 좋을 때면 그런다는 건 아는데, 음. 하긴 스카웃이 덩치가 작으니까. 헤비가 동생처럼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그러니까 팀원들 중에서 가장 껴안기 편한 상대라는 건 이해한단 말야. 그런데 유독 스카웃한테만 그러잖아, 음. 그러니까, 뭐냐. 형평성이 떨어지는 거 아냐? 안 그래? 다른 팀원들은 도통 껴안지를 않잖아. 어, 뭐. 최근에 엔지보고 텔레포터 깔아줘서 고맙다면서 껴안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해. 엔지가 나 죽는다고 꽥꽥 비명을 질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음. 하긴 엔지도 덩치가 작은 편이긴 하지. 어쩌면 덩치가 큰 팀원들은 껴안기 싫을 수도 있어. 뭐… 스나이퍼라던가, 솔저라던가… 메딕도. 뭐, 덩치가 작은 편은 아니니까. 나이도 좀 있고. 뼈대도 굵고, 음. 껴안으면 배길 지도 모르지, 뭐. 아니, 그, 딱히 헤비가 꼭 껴안아 줬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건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징그럽게스리.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이거지. 어쨌든 메딕은 다른 팀원들에 비해서 더 오랫동안 헤비랑 붙어다녔잖아. 그러니까 팀원들 중에서는 가장 친한 사이란 말야, 아마도. 그런데 뭔가 좀 불공평하지 않냐 이거야. 불공평의 의미가 좀 어긋난 것 같다고? 신경 꺼! 요지는 그거야. 좀 식상하지 않냐고. 맨날 의무실에 찾아와서 비둘기 모이주고, 샌드비치 맛있다면서 칭찬해주고.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다른 거 없냐고, 다른 거. 그, 껴안아달란 소리는 아니고, 음. 진짜.

뭐, 지금 이대로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 후에 있었던 일이야.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 그냥 처음으로 완승을 거두었던 날이었어. 나중에 찾아보면 기억 나겠지 뭐.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미션 종료라는 방송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신이 나서 레드 베이스로 뛰어갔어. 헤비만 빼고. 헤비는 이겼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너무 좋아하면서 바로 옆에 있던 메딕한테 달려들었어.

우리 이겼다, 닥터!

아무리 이겼다지만 정신은 좀 차리고 행동할 것이지. 한참 뛰어다니느라고 땀투성이잖아. 게다가 온통 피칠갑을 하고 있단 말야. 힘들어서 어디에든 쓰러져 있고 싶은 지경인데. 8명의 모자란 녀석들을 안 죽으려고 도망다니면서 치료하기가 얼마나 피곤한 줄 알아? 몸 상태도 안 좋은데 무식하게 덤벼들고 난리야. 덩치도 큰 놈이 말야. 당하는 남 생각도 해 줘야 될 거 아냐.

그런데, 뭔가.

헤비가 꽉 끌어안으니까, 뭔가. 아니,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는 건 느낄 수 있는데 말야. 편안한 거야. 말 그대로 폭 파묻히는 느낌이었어. 덩치가 크다보니까 가슴팍도 넓구나, 싶더라고. 살집도 있다보니 폭신폭신하고 말야. 솜이불처럼 푹신푹신하단 소리는 아니지만. 한참 뛰어다니고 난 후라 그런지 좀 따뜻하기도 하고. 가만, 헤비도 땀이랑 피로 범벅이 돼 있을 거 아냐. 그런데 그런 건 전혀 모르겠어.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도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그냥 크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런 것만 자꾸 떠오르는 거야. 머리에 뭔가 알 수 없는 게 꽉 들어찬 것 같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게 말야. 게다가 점점 커지도 있는 것 같아. 뭔가 생각을 하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돼. 이게 뭘까.

이건 뭔가.

뭔가.

정신이 들어보니까 식당에 앉아있었어.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헤비는 어떻게 됐는지, 어떻게 베이스로 돌아왔는지, 그런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사실, 어떻게 왔는지 대강 떠오르는 것 같긴 해. 그런데 그게 정말 실제로 일어난 건지, 꿈이라도 꾼 건지는 잘 모르겠어. 도통 자기가 겪은 일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엔지가 약간 맹한 표정을 하고 저 쪽에서 자꾸 메딕을 부르는 거야.

메딕, 이봐, 메딕.

…뭐?

식욕이 없어?

무슨 헛소리야? 라고 말하려다 문득 생각이 나는 게, 아까부터 빈 포크만 빨고 있는 거였어. 멍하니 앉아갖고 말이지. 앞에 놓여있는 비프 스테이크 접시는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아. 다진 양파랑 삶은 옥수수는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말이지. 스테이크는 무슨 짐승이 물어뜯은 것 같은 흔적도 있고… 잠깐, 물어뜯어? 누가?

몸이 안 좋아?

맞은 편에 앉아있던 헤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메딕의 얼굴을 들여다봤어. 그러니까 또 이상하게 현기증 비슷한 게 일어. 머리가 멍해지고, 귀가 윙윙 울리고, 눈앞이 몽롱해지고. 사지에 힘이 쫙 풀리고. 이건 이상해. 정말 이상해. 왜 이러나 모르겠어.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쨌든 이런 곳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일 순 없어. 9명이 다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잇는 식당 한복판에서 말야. 메딕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 헤비도 꼴사납다고 생각할 거 아냐.

어, 아니. 피곤해서…

어떻게든 자꾸 게슴츠레 해지는 눈을 똑바로 뜨려고 노력하면서 메딕이 말했어. 일단 헤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안 되는 것 같아. 이유는 잘 모르겠어.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거든. 바보들이랑 같이 살다보니 바보가 옮았나. 그러니까 저 쪽에서 얼음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던 데모도 한 마디 거들었어. 보아하니 브랜디를 마시고 남은 얼음인 모양인가 봐.

거, 감기 아녀? 어째 목도 약간 쉰 것 같은데.

취해서 잘못 들은 거 아냐? 주정뱅이! 근데, 진짜 소리가 좀 이상하긴 하네. 군의관이 감기에 걸리다니! 군기가 빠졌구만!

솔저도 맞장구를 쳤어. 감기같진 않지만, 어쨌든 빠져나가기 좋은 구실인 것 같아. 일단 의무실로 돌아가야겠어. 원인은 돌아가서 생각해야지 뭐. 더 이상 여기 앉아있다간 정말 쓰러질지도 몰라.

데려다 줘?

…아니, 괜찮아. 내버려 둬.

헤비가 물어봤지만 거절했어. 헤비는 안 돼. 이유는 모르겠지만 헤비는 안 돼.

진짜 어디 아픈가본데? 비틀거리잖아.

불안한데…

거 성깔있는 양반이 성질내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다는데 그냥 냅둬. 알아서 하겠지 뭐.

다른 동료들이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 하나도 모르겠어. 점점 멀어져 가. 몰라, 상관없어. 일단 어디 좀 누워야겠어. 그럼 좀 나아질 거야. 다리에 힘이 없어서 그런지 허공에서 헤엄이라도 치고 있는 것 같아. 발을 내딛는 감각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의무실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던가? 왜 이렇게 발걸음이 무거워질까?

의무실로 돌아가서 침대에 누웠어. 조금씩이지만 감각이 돌아오는 것도 같아. 서늘하고, 약간 어두운 의무실. 음식 냄새도 나지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동료들도 없어. 메딕과, 비둘기들과, 희미한 소독약 냄새만이 있을 뿐이야. 비둘기들은 침대 옆에 놓인 간이 칸막이 위에 쪼르르 앉아 메딕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어. 보송보송하고 하얀 비둘기들. 단조로운 회색과 청회색으로 채색된 벽.웅웅 단조로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기계들. 점점 안정이 되는 게 느껴져. 뒤죽박죽이던 시야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것 같아. 그리고 머리도.

어떻게 된 일일까?

귓바퀴까지 화끈화끈하게 올라왔던 열이 점점 내려가는 게 느껴져. 열이라니, 정말 감기인 걸까. 하지만 몸살은 느끼지 못했는데. 춥지도 않고. 오히려 온 몸의 신경이 마비된 것 같아. 전신 마취라도 당한 것처럼. 도대체 이유가 뭘까. 이거랑 비슷한 느낌이 뭐더라? 공포.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단 말야. 아니,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건 아닌 것 같아. 그럼 이건 도대체 뭘까? 즐거움. 쾌감? 인체 실험을 할 때는 즐겁지. 내장을 토막내고, 이어붙이고, 전기 충격을 주고, 약물 반응을 관찰하고. 실험을 할 때면 항상 기분이 고양되는 느낌이 들어. 무언가를 이뤄내고 있다는 성취감도 함께 말야. 너무 신이 나서 붕 뜬 것 같은 기분 말이지. 하지만 그럴 땐 언제나 즐거워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있었단 말야. 이건 그런 인식조차 없어. 자기 자신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야. 스스로가 녹아서 없어져 버리고 텅 비어버리는 느낌.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뭔가 꽉 들어차는 느낌. 그래, 어쩌면 만족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어. 하지만 그것도 아니야. 이 상태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어지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을 곰곰히 되짚어 봐. 맞아, 헤비가 메딕을 처음으로 껴안아 줬을 때야.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말도 안 돼. 다시 한 번 헤비가 껴안아 줬을 때를 떠올려. 헤비의 품 속에 폭 파묻히는 느낌. 부드럽고, 푹신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아찔한 기분을 느껴. 우중충한 회색빛 천장이 조명등의 불빛처럼 하얗게 명멸하는 듯한 느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고, 약간 미지근한 손바닥의 온도를 느껴. 그와는 반대로 화끈거리는 메딕 자신의 얼굴도. 세상에, 마치 철도 안 든 계집애같은 꼴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울고 싶어져. 그것마저도 계집애같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쳤어. 어떤 결론 때문에.

헤비를 좋아한다는 결론.

믿기지가 않았어. 이 나이에, 그 뚱뚱한 바보한테 빠졌다고? 고작 되다 만 비곗덩어리 볼셰비키 찌끄러기가 포옹 한 번 해 줬다고 그렇게 된단 말야? 비둘기한테 모이 주면서 꼴에 자기도 흉내 좀 내보겠답시고 입술 쭉 내밀고 구구거리는 얼간이한테 안겼다고? 달로코스 바 하나 가지고 서로 먹겠다고 주정뱅이나, 수염도 안 난 꼬맹이와 함께 주먹다짐을 벌이는 멍청이한테? 게다가 남자인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아마도 레드 메딕이 뭔가 저지른 걸 거야. 전투 중에 이상한 약물을 주입했다거나, 아니면 정신 공격을 당했다거나. 아니면 머리에 너무 과도한 충격이 가해져서 정신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런 일이, 평생동안 한 번도 일어나 본 적이 없는 일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이. 믿겨지지 않는 일이. 다시 한 번 헤비가 껴안아 줬을 때를 떠올려 봐. 이미 원인도 밝혀진 마당에 굳이 왜 자꾸 떠올리려고 드는지 모르겠어. 잠시동안이지만 굉장히 편안하다고 생각했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충만한 감정은 느끼지 못한 것 같아. 이 감정도 뭔가 잘못된 탓일까?

감정, 감정, 감정. 논리적이지 않아. 불확실해. 감정에 휘둘리는 짓 따위는 어린애들에게나 어울려.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어른은 절대 그러지 않아. 메딕은 충분히 다 큰 어른이고. 자제심 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어. 음… 아마도. 감정 따위는 그저 화학 물질들의 농간일 뿐이야. 마음만 단단히 먹는다면야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 메딕이 느끼고 있는 건 그거야. 좋아한다는 마음. 단순히 정의하자면, 그냥 호감이라는 감정에 불과하단 말야. 남들보다 헤비한테 조금 더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란 말이지. 지금이야 처음 겪는 일이라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별 거 아냐.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의 편차를 다 구한 다음 평균을 계산하고, 구체적으로 환산해서 그래프로 표시한다고 쳐 봐. 전체적으로 별 차이 없을걸? 별 거 있나.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안심이 되었어. 그 후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꼴사납게 허둥대지는 않았어. 음,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가끔은 그랬지. 자주는 아니었어. 헤비가 메딕의 솜씨를 칭찬해 주거나, 아아아주 가끔 헤비가 메딕을 껴안아주면 말야. 그래도, 즐겁다는 기분 자체는 해롭지 않잖아. 오히려 생활에 긍정적인 작용을 가져다 준단 말야. 어차피 헤비와 떨어져 있을 수 는 없는 노릇이잖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야. 메딕이 정신만 잘 차리고 있으면 괜찮겠지, 뭐. 가끔 자신이 휘둘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 적도 있어. 쓸데없는 걱정이 틀림없어. 자다가 퍼뜩 깨어나서 헤비를 찾는다거나 하는 일도, 뭐, 가끔은 그럴 수도 있지. 자다가 깨는 일이야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팀원들이 착해서 좋다고 하는 말이 꼭 자기한테 하는 소리처럼 들리더라도 말야, 바로 정신 차렸으니까 괜찮잖아.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음. 당연히. 자기가 착각이라고 자각할 수 있으면 정상이지 뭐. 안 그래?

아직도 헤비가 처음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줬을 때가 기억나. 그때 건네줬던 말도 기억나. 고마워, 닥터. 헤비의 커다란 손이 얼굴을 쓰다듬는 감촉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크고, 억세고, 두텁고, 부드럽고, 따뜻해. 희미하게 화약냄새도 나는 것 같고.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제까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는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어쩌면.

어쩌면.

너무 행복해지면 쇼크로 죽어버릴 지도 몰라.

그것도 다 지난 이야기지.

메딕은 우중충한 회색빛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어. 숙취탓인지 어지럽게 일렁이고 있었어. 예전에도 이러고 있었던 적이 있었지, 아마.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처럼 느껴져. 숙취는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아. 기분도 덩달아 가라앉아 있었고. 몸이 너무 무거워. 침대 밑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아. 차라리 그렇게 푹, 하고 빨려들어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러기엔 침대는 너무 단단하고 차가웠지만.

자제력은 무슨. 참으면 참을 수록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막연한 감정들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여만 갔어. 점점 커지고, 사나워지고, 구체적으로 변해갔어. 설마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새라도 있을까 꼼꼼이 덧칠하고, 켜켜이 쌓아올린 이성의 장벽을 안에서부터 야금야금 갉아먹어가고 있었지. 점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마저 힘이 들었어. 뜬 눈으로 밤을 새는 날이 점점 늘어만 갔어. 마치 정신병자처럼 망상하는 시간도 점점 늘어가. 헤비가 자기를 좋아할 리 없어. 혹시 좋아하지 않을까. 아니, 제발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 미친 사람같지 뭐야. 돌이켜 보면 헤비한테 고백하기 직전의 메딕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자신이 맞나 싶을 정도였어. 감정이 가득 차올라서 주체를 못할 정도였어. 마치 바람을 채워넣은 풍선처럼, 비눗방울처럼.

언젠가는 터지게 마련이지.

그 날 고백한 건 우연이었어. 수없이 머릿속에 그려보고,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 거절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계속 고민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바램일 뿐이었지. 작정하고 오래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한 고백은 아니었어. 어쩌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야. 고백하기 적절한 시간대에, 고백하기 적절한 장소에서, 헤비와 단 둘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말이지. 아마 저번 날의 미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같아. 잘은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헤비의 말이 끝나고 나서 잠깐 침묵이 이어졌어. 무심코 입을 열었어. 마치 무언가에 등을 떠밀린 것처럼 말이지. 그러니까, 충동적으로.

…헤비.

음?

…그래서…어떤가?…난.

흠? 닥터는 괜찮지. 괜찮아. 아주.

…얼마나?

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헤비가 메딕의 눈을 들여다봤어. 차가운 얼음처럼 파랗게 빛나는 눈. 마치 뢴트겐 선처럼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말야. 헤비의 눈을 마주 보자 순식간에 모든 용기가 달아나 버린 것처럼 느껴졌어. 잊고 싶었던 사실이 연이어서 머릿속에 떠올랏어. 아주 선명하게. 자신이 나이도 많고, 성질도 더럽고, 말주변도 없고, 무엇보다 남자라는 거.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결코 '정상적'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정상적'이 아니라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 말야. 그리고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거. 만일 헤비가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건 또 별개의 문제지. 괜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어. 지금 입을 다물고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평소처럼 지내면 돼. 아주 친한 친구 사이로.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언제나처럼 메딕만 참으면 돼. 언제나처럼.

…친구로서?

…아니면.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어. 도저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냥 헤비를 쳐다보기만 했지. 간절히.

평소에도 둘 사이에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지. 그냥 눈짓 한 번, 고갯짓 한 번이면 소통이 가능했어. 둘의 사이는 그 정도였거든.

그 정도.

적어도 헤비의 생각은 그랬어.

헤비는 잠시 후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어. 당연하지, 머리가 좋으니까. 미처 감출 수 없었던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어.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메딕도 어느 정도 결과를 예감하고 있었지. 그래도 헤비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충분히 긴 시간동안 고민한 끝에, 헤비가 입을 열었어.

미안, 닥터.

메딕은 팔을 들어올려서 눈을 가렸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이 보이지 않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말야. 세상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아니면 자신이 사라져 버리거나. 그렇다고 자살하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고. 차였다고 자살하면 그것도 웃음거리지. 애초에 웬만해서는 자살을 생각할 멘탈의 소유자도 아니고.

일생동안 단 한번 해 본 고백이었어. 그것도 진심으로. 뚱뚱하고, 멍청하고, 대머리에,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러시아 촌놈한테 말이야. 메딕의 자존심은 엄청나게 상처를 입었어. 그런 놈한테 실컷 휘둘린 끝에 차였다니 말야… 아니. 사실, 그래. 정신이 나갔던 건 순전히 자기 탓이야. 헤비의 잘못은 하나도 없어. 고백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여전히 상냥하게 대해줬고. 메딕을 혐오하거나 경멸하지도 않았고 말야. 그리고 멍청하지도 않고, 사실 지방보다는 근육이 더 많고, 대머리가 아니라 스킨헤드고, 머리털 하나 없어도 헤비는 여전히 잘생겼… 아, 이런. 어쨌든, 메딕이 정말 화가 나는 건 헤비한테 차였다는 거, 그리고 그 사실이 메딕의 자존심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어.

차인 후에도 여전히 헤비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지.

헤비가 자신의 고백을 정중하게 거절했고, 여전히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면 자기도 그에 답해줘야 해. 그게 예의일 거 아냐. 메딕은 헤비보다 똑똑하고, 나이도 많고, 실력도 있단 말야. 그러니까 맺고 끊는 데 있어서는 헤비보다 더 잘 해야 될 거 아냐. 깔끔하게. 뒤끝없게. 더 이상 헤비한테 부끄러운 꼴을 보일 순 없잖아. 그런데도,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어. 혹시나, 헤비가 마음을 돌리지나 않을까, 하고. 손톱만큼의 가능성도 없는데 말이지. 헤비를 잘 알고 있는 메딕이니까, 그런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야. 아직도 그 유치한 감정 하나 제대로 정리를 못 해서 질질 끌려다니고 있어. 게다가 가끔은 그것 때문에 헤비를 원망하기까지 해. 바로 후회하긴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못난 인간이었나,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아.

고백한 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어떻게든 평소대로 행동을 하려고 했어. 헤비에게 줄 샌드비치를 만들었어. 이제는 일상이 된 일이었지. 매일매일 헤비에게 줄 샌드비치를 만드는 거. 자신이 만든 샌드비치를 맛있다면서 먹는 헤비를 보는 게 작은 행복이었어. 소소한 일상의 행복.

이걸 어떻게 갖다주나.

느릿느릿 토마토를 자르면서, 양배추를 다듬으면서 생각했어. 예전에는 그냥 자기가 좋아서 하던 일이었거든.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잖아. 헤비한테 샌드비치를 주는 건 상관 없어. 여전히 샌드비치를 만들어 주는 건 좋았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헤비가 샌드비치를 먹는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볼 수는 없을 것 같아. 혹시 샌드비치를 가져다 주면 헤비가 싫어하진 않을까. 그런 일이 있었던 뒤잖아. 그래도 언제나 하던 일이니까. 갑자기 그만 둬 버리면 오히려 헤비를 더 신경쓰이게 만들 것 같아. 그건 싫어.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꾸역꾸역 샌드비치가 완성되었어. 깨끗한 하얀 접시에 담아서 헤비를 기다렸어.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헤비가 느릿느릿 식당으로 들어섰지. 메딕은 다가가서 준비해 둔 샌드비치를 조심스레 내밀었어. 헤비는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눈으로 메딕과 샌드비치를 잠시 훑어봤어. 그리고 접시를 받아들었어. 끝. 이제 의무실로 돌아가야지. 아침은 먹고 싶지 않아. 식욕이 없으니까. 영양제로 대충 때우지 뭐. 돌아서서 터덜터덜 의무실로 향하는 메딕을, 갑자기 헤비가 불러세웠어.

닥터.

메딕은 뒤를 돌아봤어. 약간, 아주 약간이지만 어떤 기대를 품고서 말이지. 그럴 리가 없는데. 잘 알고 있으면서. 헤비의 눈을 마주 볼 용기는 나지 않았어. 헤비가 머뭇머뭇 다가오는 동안 메딕은 그 자리에 그렇게 못박힌 것처럼 서 있었어.

닥터.

…음.

…그…힘들면, 굳이 할 필요 없어. 이런 거. 닥터 편한 대로 해.

…음.

헤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메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어. 따뜻하고, 부드럽게. 헤비의 손길이 너무 상냥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창피하게스리. 정말로 울진 않았지만. 이런 생각만 하고 말았지. 그냥 어깨만 두드리고 마는구나.

앞으로도 헤비가 껴안아 줄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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