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포(엔딩못냄. 낼 생각도 없음)

청과 흑

Le Bleu et le Noir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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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황무지에 있는 베이스 의무실에는 창문이 없음. 불빛은 조명등이 다임. 시계도 박살났으니까 시간을 알고싶어도 뭐 도리도 없고… 자명종이 울리고 나서 꽤 지나긴 했지. 아침은 지난 게 확실함. 숙취는 어느 정도 나아진 것 같음. 잔뜩 곤두서있던 속도 가라앉았고. 그러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진단 말이지. 다른 놈들은 뭐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머리가 맑아지니까 이것저것 생각이 나기 시작하는 거임.

나가볼까? 이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바로 때려쳤음. 귀찮아. 기분도 엉망이고. 기력도 없고. 미션도 없는데 나가서 뭐하나 싶기도 하고. 피곤에 찌들어 있는 느낌이었음. 어차피 속도 불편하고. 대충 영양제 몇 알 먹고 관둘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음.

메딕의 얼굴을 향해서 뭔 하얀 덩어리가 푸닥, 하고 떨어졌음.

메딕은 깜짝 놀라긴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음. 그래서 그냥 꼼짝도 못하고 읍으엉으푸헙컿크헣하고 입으로만 놀랐음. 겨우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서 이게 뭔가 알아보려고 눈을 떠 보니, 두 갈래로 짝짝 갈라진 닭발 한 쌍이 메딕의 얼굴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음. 넵, 비둘기. 비둘기가 뽀송송하니 하얗고 오동통한 배때기로 메딕의 얼굴을 문대고 있었던 거였음. 놀래갖고 조심스럽게 비둘기를 집어들어서 품에 안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음. 비둘기는 소중하니까여 ´_`이제 보니까 메딕이 키우고 있는 모든 비둘기들이 간이 칸막이니 조명등 위니, 어쨌든 최대한 메딕하고 가까운 장소에 몽실몽실 모여서 말똥말똥 메딕을 쳐다보고 있었음. 마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 생각해 보니까 이제 헤비는 의무실을 찾지 않잖아? 그럼 비둘기 먹이 줄 사람은 메딕밖에 없단 말이지. 그 메딕이 말술 퍼먹고 하루종일 누워서 혼수상태로 끙끙대고 있었잖아? 그럼 누가 비둘기를 먹여살리냔 말야. 그러니까 비둘기들은 거의 하루 가까이 쫄딱 굶은 상태인 거임. 지금 이게 화가 안 나고 배기겠나여, 이게.

잠시 벙쪄있던 메딕도 딱 이해했음. 아, 나는 왜 비둘기 모이 줄 생각을 못 했나. 순 자기생각에만 빠져있느라 비둘기들 생각을 못 한 거지.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나. 메딕은 얼굴에 수직 강하한 비둘기 한 마리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로 비칠비칠 일어났음.

일단 안경을 찾아야지. 시야가 흐릿해서 앞이 잘 안 보임. 안경을 어디다 놨더라.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어떻게 의무실로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남. 제 발로 걸어오기나 한 건가 의심스러움. 어떻게 걸어왔는지 신기하기도 함. 어떻게 왔더라… 가만. 우선 데모맨이랑 술을 마시고, 달걀 찌꺼기를 쓸어넣고. 그리고 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애매함. 당연하지, 필름이 끊겼으니까…´_`일단 도리도리 주변을 둘러봤음. 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저것이 수술대겠고. 저 위에 놓여있는 멍뎅한 게… 저것이 무엇인고? 아직 술이 덜 깨서 휘청휘청하면서 다가가 봤음. 색깔이나 흐릿한 모양새나 자기 코트같이 생겼음. 이런 데다 놨었나? 에라, 모르겠다. 그리고 위에 파란 건 아마도 넥타이겠고. 아니, 도대체 넥타이는 왜 풀었을까? 그리고… 아하. 안경을 집어서 쓰니까 비로소 주변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음. 아까는 그냥 몽실몽실한 깃털 덩어리로 보이던 비둘기들도 잘 보임. 수술대 위에 얌전히 구겨놓은 코트랑 그 위에 얹혀있는 넥타이… 어라?

자기 정신으로 이렇게 안정적으로 내팽개쳐 놨을 리가 없는데. 설마 메딕의 잠재의식이 도저히 코트에 구김살이 지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알콜을 이겨내고… 이건 무리수같고. 그리고 데모맨이 떠오름. 그 주정뱅이가? 맨날 사과주나 퍼마시고 소파 위에서 배때기를 긁으면서 트림이나 하다가 퍼자는 주책바가지가… 그런데 데모맨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잖아. 아니, 어쩌면 자기가 자는 동안 누군가 갖고 와 줬을 수도 있지.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비둘기 모이 쟁여둔 곳으로 향했음. 캐비닛을 여니까 봉지도 뜯지 않은 채로 수북이 쌓여있는 모이 봉다리들이 나타났음. 원래 메딕은 비둘기들한테 시체 해부하고 남은 쪼가리를 주거든. 환경에도 좋고, 값도 싸고, 비둘기들도 좋아합니다. 사료는 그냥 먹일 만한 게 없으면 주는 거였음. 그런데 요사이 헤비가 비둘기 모이 준다고 자주 찾아왔었잖아. 메딕이 아무리 싸이코패스라도 비둘기 모이랍시고 헤비한테 시체 쪼가리를 들이밀 용기는 없었단 말이지. 정작 헤비는 별 생각 없었지만… 여튼간에 이 조류용 건조 사료는 비둘기보다는 헤비한테 주려고 쟁여둔 거란 말이지. 비둘기들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이것도 다 사랑을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암요. 차였지만.

차였지만. 차였지만… 차였지만…… 메딕은 우울해졌음.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의욕 수치가 비로링, 하고 깎이는 소리가 들렸음. 기력이 초당 몇십 밀리그램씩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음… 그러다가 비둘기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음. 지금 상태로는 서 있는 게 좀 힘들었음. 그래서 한 쪽 옆구리에는 비둘기, 다른 한 쪽 옆구리에는 사료 봉다리, 이렇게 끼고 또 비칠비칠 수술대까지 걸어가서 힘겹게 엉덩이를 내려놓았음. 그리고 사료 봉다리를 뜯어서 손바닥에 쏴르르 부었음. 바삭바삭한 작은 알맹이들이 다글거리면서 손에 꽉 들어찼음. 모이가 가득 든 손을 내미니까 순식간에 비둘기들이 푸다다갈닾다갇달앞ㅊㄷ아닭둘닭둘하고 모여들었음. 앞다퉈서 게걸스럽게 모이를 쪼아대는 비둘기들을 보니까 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음. 메딕은 희밋한 엄마 미소를 지으며 비둘기들을 바라봤음. 흐뭇함+힘이 없음=희밋함. 재미 없져? 압니다.

돼두ㄹ…비둘기들의 공격은 사료 한 봉지가 거덜날 때까지 계속되었음. 메딕은 팔 아픈 것도 잊고 잠자코 사료를 퍼서 갖다바쳤음. 비둘기는 소중하니까여, 넵. 그러다가 비둘기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서 메딕 품 안에 폭, 하고 안기는 게 아닌가여. 딱 보니까 이 놈이 아까 메딕 얼굴에 배때기를 문댄 그 놈같음. 먹을거 다 먹었으면 쿨싴하게 날아가야 정상인데 안 날아가고 메딕한테 앵기네. 어디 아픈가? 싶어서 메딕은 살짝 걱정이 되었음. 근데 뒤집어도 보고 배를 꾹꾹 눌러봐도 아픈 것 같지는 않음. 숨도 잘 쉬고. 만져지는 건 사료로 꽉 차서 딴딴한 밥통밖에 없고.

이게 왜 이러나. 메딕은 무심결에 비둘기를 안아들고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음. 비둘기가 기분이 좋은지 조그맣게 구구거리는 게 안아든 손바닥을 통해서 느껴짐. 또 비둘기 몇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서 메딕의 머리에, 어깨에 앉았음. 이것들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네. 어리둥절해서 비둘기들을 돌아보니까, 도로 날아갈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구륵구륵거림. 품 안에 안긴 비둘기를 내려다봤음. 그리고 자기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비둘기의 쪼끄만 눈이랑 마주침. 비둘기의 눈은 조그만 보석처럼 까맣게 반짝거렸음.

퍼뜩, 하고 이런 생각이 들었음. 이 놈들이 설마 날 위로해 주려고 그러나. 평소같으면 코웃음을 치면서 그럴 리 없다고 일축했을 거임. 비둘기와 물고기의 공통점이 뭐게? 밥 줄 때만 주인 찾고, 배부를 때는 상관도 안 한다는 거져, 넵. 차이점은 그럼 뭔 줄 알아? 비둘기는 그냥 넓은 공간만 있으면 되는데, 물고기는 어항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거지. 그게 메딕이 비둘기를 키우는 이유임. 간단한 이유지, 뭐. 고양이나 개처럼 틈만 나면 치대지 않아서 좋잖아. 털도 안 날리고. 진드기? 기생충? 무슨 말씀. 깔끔하게만 관리해 주면 얼마나 청결한데. 길가에 나뒹구는 족보없는 비둘기들이랑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하지. 좌우간 주인이 우울하다고 걱정해주는 놈들이 아닌데. 뭐 다른 이유라도 있나? 흠.

어쨌든 그렇게라도 생각하니까 조금 기분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음. 말 못하는 새들이라도 위로해 준다는 게, 그것도 평소에 밥 주고 씻겨주고 하는 놈들이 말이지. 아주 조금이긴 했어도 품에 안긴 비둘기한테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음. 약간 기운도 나는 것 같았음. 마치 비둘기가 기력을 나눠주기라도 한 것 같았음. 아주 조금이지만.

나가볼까?

그렇게, 메딕이 용기를 내서 의무실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을 먹은 건, 비둘기들의 응원이 지대한 공헌을 미쳤던 것이었음.

꼭 머리에 납덩이라도 든 것 같았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게 중심이 이리저리 쏠렸거든. 머릿속에서 뭔가 덜거덕거리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 같았음. 복도는 또 왜 이렇게 긴 지 모르겠네. 메딕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면서 비칠비칠 전진하고 있었음. 발 두 짝이 자꾸 말을 안 듣고 갈지자로 화려하게 스텝을 밟아대고 있었거든. 어두운 걸 보니 벌써 저녁이 된 것 같았음. 주변도 조용하니 다 방에 틀어박혀 버린 것 같았고. 새삼스레 스코틀랜드 사과주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음. 건장한 어른 남성 한 명을 그냥 하루 가까이 골로 보내버리다니. 위대하다 사과주. 두렵도다 사과주.

어두운 건 거실도 마찬가지였음. 아, 취소. TV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음. 이미 방송 종료 시간도 훨씬 넘었는지, 허리케인에 휘말려 날아가는 얼룩말 무늬 깔개마냥 난잡한 노이즈가 미친듯이 너풀거리고 있었음. 정작 거실마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한 걸 보니까 좀 섭섭하긴 했음. 뭐,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만났으면 하고…

나 원, 세상에. 옆구리가 시리니까 별 생각을 다 하네. 메딕은 궁시렁거리면서 거실 스위치부터 켰음. 일단 앞이 보여야 뭘 하던지 할 거 아냐.

그리고 소파에 구겨져있는 데모를 발견했음.

데모는 TV를 등진 채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었음. 품에는 무슨 베게라도 되는 것마냥 작은 술병을 껴안고 있었음. 모양을 보아하니 아마도 된통 퍼마시고 그대로 혼절해버린 모양이었음. 무엇보다도 빈 술병 몇 개가 더 소파 밑에 뒹굴고 있었단 말이지. 세상에. 메딕은 질색을 하고선 미간을 살짝 구겨뜨렸음. 어젯밤에 그렇게 퍼마셨는데, 오늘도 이 꼬락서니가 되도록 마셨단 말야? 평소에도 취해서 곯아떨어지는 게 일상 다반사였지만 말이지. 아무래도 메딕의 간과 이 놈의 간은 유전자의 태생부터 판이하리만치 다르게 생겨먹기라도 한 모양이었음.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마셔대고 이렇게 누워있는 건지도 모르지. 메딕은 진저리를 치다가, 약간 흔들기만 해도 쿡쿡 쑤셔대는 머리 때문에 움찔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음.

보지도 않으면서 TV는 왜 켜놨는지 모르겠어. 전기 아깝게시리. 뭐, 메딕도 자원을 절약하고 뽕맛을 찬양하는 자연사랑 히피족은 아니지만서도. 일단 TV로 다가가서 전원부터 내렸음. 시끄럽잖어. 그러고선 겨울잠 자는 아르마딜로마냥 있는대로 몸을 옹송그리고 소파에 파묻혀있는 데모에게 다가갔음. 덩치가 소파보다 크다보니까 쭈글쭈글 불편하게 우그러져 있는 게, 보는 메딕까지 저절로 관절이 쑤시는 것처럼 느낄 정도였음. 정작 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꼬릿꼬릿한 술냄새를 풍기면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음. 누가 보면 제 집 안방인 줄 알겠네. 메딕은 두통 때문에 휴짓조각처럼 구겨진 미간을 손 끝으로 지그시 누지르고선,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음. 필름이 끊기고 나서, 필름이… 이 놈이랑 뭘 했더라. 뭔가 골통 속에 진창이라도 들어찬 것 같단 말이지. 생각을 하려고 하면 꼭 두개골에다 대못을 쾅쾅 두들겨 박는 것처럼 푹푹 쑤시는 게 아주 그냥 환장할 노릇이었음. 이게 바로 골치가 아프다는 소리로군요? 굳이 몸 버려가면서 느껴볼 만한 감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넵.

그건 그렇고. 들고 있는 게 평소에 보던 술병이 아니네. 거, 사과주 술병이라고 하면. 우선 갈색이고, 약간 불투명하고, 무엇보다… 크기가 장난이 아니잖아? 사람 머리도 후려갈길 수 있을 만큼 말이지. 그런데 지금 데모가 들고 있는 건 손바닥만한 크리스탈 술병이야. 소파 밑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술병들도 하나같이 색깔이나 모양이 일정하지가 않음. 그것도 죄다 어디 듣보잡 브랜드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싸구려 라벨이 붙어있단 말이지. 데모가 알콜 중독자긴 해도 잘 사는 집안 자제분 아녀? 취향이란 것도 있을 거고. 이런 걸 마시고 다닐 놈은 아니란 말이지. 희한한 일도 다 있네. 뭐, 주정뱅이 술 취향이야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메딕은 그만 널부러져있는 데모에게서 주방으로 관심을 돌리기로 했음. 어차피 깊이 생각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배고프고 자시고는 둘째치고, 일단 목이 말랐음. 뭐 마실 게 없나? 냉장고 문을 달칵 열어봤음. 별 거 없었음. 봉크 깡통이랑, 우유병도 있고, 먹다 남은 샌드비치, 그리고.

사과주?

순간 뭔가가 눈 앞을 스쳐지나갔음. 문을 열고, 이제 그만, 하고, 누가? 그리고, 시원한. 갈색 병. 냄새, 달콤한 사과. 없어. 사과주 병이 없어. 왜? 사과주가, 사과주를, 그래. 메딕이 사과주를 마시고, 데모도 마시고. 그리고…

모르겠다. 메딕은 한 손으로 욱신거리는 머리를 문질렀음. 일단 처음 목적부터 해결을 하는 게 좋겠어. 냉장고 안에는 마실 만한 게 없었음. 별 수 있나, 그럼 물이나 마셔야지. 샌드비치를 만들기 위해 쟁여둔 토마토가 눈에 띄었음. 음… 토마토 수프는 어떨까?

물부터 한 컵 마시고, 그리고 뭉그러진 토마토가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며 냄비 속에서 녹아내렸음. 과육이 자글자글 졸아들면서 절로 식욕이 솟는 진한 토마토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음. 다진 양파는 됐고, 소금은… 충분한가? 그럼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지 뭐. 일단 좀 여유가 생겼으니, 메딕은 국자로 냄비를 휘젓는 걸 그만두고 다시 데모를 흘깃 돌아보았음. 여전히 데모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음. 어지간히 취한 게 틀림없음. 그런데 여기서 보니 소파 뒷쪽에 박살난 술병이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니겠음? 주정을 부리다가 깨먹은 게 아닐까? 그리고 치우지도 않고 퍼자는 게 틀림없음. 에라이, 한심한 놈. 저걸 어떻게 하나. 메딕은 잠깐 고민에 빠졌음. 치워야 하나? 에이, 그만 두지 뭐. 저 놈 잘못인걸. 파이로한테 한 번 단단히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니, 취소.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어차피 골이 빠개질 것 같은 이 두통도, 따지고 보면 저 놈이 원인 아냐? 저 놈이 쓸데없이 불러세우지만 않았으면 술을 마시진 않았을 거 아니냐구. 그게 괘씸해서라도 치워주기 싫단 말이지. 메딕은 데모를 멀거니 쳐다보면서 생각을 계속했음. 세상 모르고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주정뱅이. 딱 오늘 아침까지 기절해 있던 자기 모습이 떠올라서 어쩐지 찝찝해졌음. 이런 데서 이불도 안 덮고 자면 감기 걸릴 텐데. 그러고 보니 자신의 옷가지를 가져와 준 사람은 누구일까. 맨 먼저 헤비가 떠올랐지만, 곧바로 잊어버리기 위해 애를 썼음. 그럴 리가 없음. 헤비가 왔다면 비둘기들이 배를 곯을 이유가 없지. 그럼 누구일까. 어떻게 의무실까지 돌아왔더라. 문득 코 끝을 스치는 새콤짭짜름한 향기에 정신이 돌아왔음. 이제 불을 줄여야지. 돌아서서 가스렌지의 노즐을 비틀면서 냄비 안을 들여다 보기 위해 고개를 수그렸음. 어디 한 번 보자. 뜨거운 증기가 훅, 하고 얼굴을 스치면서 피어올라갔음. 얼굴을 쓸어내리는 크고, 따뜻한 손.

손.

따뜻한 손.

잘 자, 의사 양반.

위장이 노심융용을 일으켰음. 그러니까, 단단히 굳어서, 쿵, 하고 떨어져서, 일직선으로 쭉 맨틀을 가로지르고 중국까지 관통하는 줄 알았다고. 메딕은 비틀비틀 데모를 향해 다가갔음. 세상 모르고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주정뱅이. 술만 들어가면 정신없이 나불대는 주정뱅이. 이 놈하고 무슨 말을 했더라. 신경 성장 인자. 그것 말고. 슈투르가르드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헤비한테 고백했다는 이야기.

아무한테나 말해도 상관 없어.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소릴 한 거지? 메딕은 속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걸 느끼면서 필사적으로 생각했음. 그리고, 무슨 말을 했더라? 무슨 말을.

안 말해.

…뭐. 또 이유가 필요해?

그냥, 그런 거라고. 썅.

그렇게만 알아둬.

마치 갓난아기를 어르듯이 가만가만 흔들리던 넓은 등이 떠올랐음. 얼마나 묵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독한 술냄새도. 그와 함께 피어오르던 훈훈한 온기도.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상황에서, 쌀쌀한 저녁 공기를 가로막듯이 감싸안아주던 그 열기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유난히 크게 고동치던 심장 박동 소리도.

역시 이 놈이 수술대 위에 안경을 놓아둔 모양이야. 메딕은 잠든 데모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면서 생각했음. 쓸데없는 짓은 왜 하고 난리야. 설마 동정해 준답시고 한 짓인가? 싸가지없게스리, 제 주제도 모르고선 말야. 맨날 취해서 아무 데나 널부러져서 자는 외눈박이 알콜 중독자 주제에. 누굴 동정하고 자시고 할 처지인가.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해 줄테다. 계집애들처럼 치마나 입고 다니는 정신빠진 얼간이한테 동정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런 게 아니라면, 뭐, 됐고. 그런데 이 녀석 호모는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호모새끼니, 게이새끼니 하면서. 하긴, 호모를 좋아하는 놈도 없을 테지만.

하지만,

왜 그랬을까. 메딕은 가만히 손을 뻗어서 자기 머리를 만져봤음. 북실북실하니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음. 아마도 끙끙 앓으면서 침대 위에서 뒹구는 바람에 이렇게 엉망이 된 모양이야. 아니면 고주망태가 되어서 쿨쿨 자고 있는 저 외눈박이 폭탄마의 짓이거나. 몰라. 확실히 기억나지 않아. 어쩌면 술김에 헛것을 봤는지도 모르지. 이 놈이 한 짓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거든. 평소의 이 놈이라면. 평소의 데모맨이라면.

뭐, 돌봐준 건 사실이니까.

일단 토마토 수프부터 조심스레 접시에 옮겨담았음. 눌어붙으면 나중에 닦아내기 귀찮잖아. 제법 오래 내버려둔 것 같은데도 수프에서는 아직도 무럭무럭 김이 나고 있었음. 물 한 컵과, 수프 접시와, 스푼.

그리고 빗자루와 쓰레받이. 메딕은 투덜대면서 깨진 병조각을 쓸어담았음. 취해서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난장판이 된 건지. 이래서 술은 마시면 안 된다니까요. 사회악입니다, 사회악. 도대체 왜 다들 기를 쓰고 마시려고 드는지 몰라. 욱신거리는 머리와 욱신거리는 허리에 대해 구시렁거리면서 마지막 한 조각까지 싹싹 쓸어담아 버리고 나서, 다음엔 소파 밑에 뒹구는 작은 술병들도 주워서 버렸음. 술이 남아있는 병도 있었지만, 메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도 남김없이 쓰레기통에 투척했음. 술은 꼴도 보기 싫었음. 끝낸 다음, 메딕은 손을 탁탁 털면서 거실을 둘러봤음. 엎질러진 술이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말끔히 정리가 되었음. 술병이란 술병은 모조리 사라진 깨끗한 거실을 보고 메딕은 약간 뿌듯한 기분에 잠겼음. 마지막으로 데모. 메딕이 부산을 떨거나 말거나, 토마토 수프가 보글보글 끓거나 말거나, 데모는 여전히 곤죽이 되어가지고 씩씩 콧김을 내뿜으면서 잠들어 있었음. 팔자도 좋지. 메딕은 격한 노동으로 시큰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서서 눈살을 찌푸렸음.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되나? 떠메고 옮기기엔 데모의 덩치가 너무 컸음. 그렇다고 여기 가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인데. 너무 춥잖아. 에이, 뭐. 이러고 자는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냅둬도 아무 걱정 없겠지, 뭐. 술먹고 잘만 싸우고 다니는 놈이잖아. 그리고, 잘 자. 하고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떠올랐음.

쓸데없는 짓은 왜 하고 난린지 몰라.

그러니까, 데모가 일찍 일어나게 된 이유는 어쩌면 그 곰팡내나는 모포 덕분인지도 몰랐음.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서 맨 처음 보는 것이 무려 십수년만에 보는 동터오는 아침해라는 것만으로도 기절초풍할 노릇인데, 윗몸을 일으키자마자 웬 듣도보도 못한 주인모를 모포가 스르륵 흘러내리는 게 아닙니까. 순간이었지만, 아, 드디어 내가 과음으로 죽었구나. 이야, 희한하네. 저승이나 이승이나 별 차이 없구만? 설마 술고래만 가는 저승이 따로 있나? 아 참, 여기 술은 있나? 술 생각하니까 술 고프네. 하고,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갈 정도였음.

그리고 데모는 일단 술부터 찾아서 마신 다음, 약간 행복해져서 배때기를 벅벅 긁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서 뒹굴거렸음. 한참을 그렇게 뒹굴거렸음. 계속 뒹굴거리면 심심하니까 모닝 토크쇼를 보면서 좀 낄낄대기도 했음… 모포가 자면서 흘린 데모의 침으로 범벅이 돼 있는 걸 깨닫고서 고민에 빠진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음.

일단 빨아서 돌려줘야겠지? 참, 나도 씻어야지. 근데 누구거냐, 이게.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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