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ing in badland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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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일임.

제일 먼저 사소한 변화를 알아챈 건 팀 내부의 거의 모든 일을 꿰고 있던 스파이도 아니고, 팀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엔지나 헤비도 아니고, 전부터 그저 막연한 기분으로 메딕을 신경쓰고 있었던 데모였음.

헤비와 같이 다니게 되면서 메딕은 예전보다 더 자주 웃게 되었던 것 같음. 만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매드 닥터 특유의 사악한 썩소라던가, 스파이를 우버쏘우로 백스텝하면서 미친듯이 웃어제끼는 거랑은 좀…다른 느낌.

하긴 헤비를 보고 그런 식으로 웃는다면 그것도 문제지만.

그냥 웃는 거임. 그냥. 그냥이라는 게 중요함.

헤비랑 말하다가도, 뛰어다니다가도, 같이 밥 먹을 때도, 전투 준비를 하다가도, 이따금 메딕이 웃는 게 보이는 거임.

어떻게 글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는 표정임. 함뿍? 빙긋? 헤죽?…은 아닌 것 같고.

좌우지간 평소의 메딕이라면… 그러니까 무뚝뚝한데다 신경질적인 의사양반이 그러는 건 좀 이상해.

데모는 어쨌든 팀원들이랑 먹고 마시고 잘 놀고 살았음. 하도 적응을 잘 해서 같이 짐 싸들고 온 다른 클래스들조차도 사실은 원래 베이스에서 신문지 깔고 살고 있다가 기어나온 것 아닌가 의심까지 할 정도였음. 그에 비해서 메딕은 일단 팀을 백업해주는 역할이긴 해도 연장자라는 위치도 있고, 팀에서 손에 꼽는 고학력자라는 입장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 괴팍한 성격 탓에 대화는 커녕 편하게 인사하고 다니는 팀원조차 몇 없는 편이었음. 데모는 소파에 늘어져서 허구한 날마다 곯아떨어져있는데 메딕은 일과에 맞춰서 사는 바른생활 의사양반이었고. 데모는 취해서 방바닥을 뒹구는 건 예사고 욕도 잘 하고 내키는 대로 트림이나 해대는데, 메딕은 아침마다 꼬박꼬박 머리 세팅 끝내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말 이외에는 하지도 않고… 꼽자면 끝도 없었음.

어쨌든 그런 의사양반을 감당할 수 있는 건 덩치만큼이나 통도 큰 사나이 헤비밖에 없었지. 둘이 마주앉아서 밥 먹을 때 메딕이 조용히, 그러면서도 어쩐지 들뜬 것처럼 가만가만 헤비한테 말하다가 미소짓기라도 하면 데모는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곤 했음. 가슴이 조금 울렁거린다고 해야하나. 술을 너무 쳐마셨더니 토가 쏠려서 이러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고. 상한 음식을 먹어서…는 요리 담당인 파이로의 명예에 걸고 절대 아닌 듯 싶고. 자라데? 어차피 알콜 쩐내에 익숙해져서 그까짓것 갖고는 비위도 안 상할 텐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저 인간이 너무 호모새끼처럼 굴어서 속이 안 좋아진 게 틀림없다.

하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적당하게 결론을 지었음.

그런데 그렇게 찰싹 붙어다니던 메딕과 헤비 사이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이 생긴 게 발단이었음.

이전에도 요상했다면 요새는 한층 더 요상해진 것 같다, 는 게 데모맨의 간단한 감상평이었음.

뭐 이상한 걸로 따지면 쓸데없이 저 놈의 의사양반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이 쓰이는 자기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갑자기 메딕이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진 것 같음. 뭐, 아주 안 웃는 건 아님. 여전히 스파이 때려잡을 때는 짧게 웃기도 하고. 대답 대신 미소도 지어보이고 그럼.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 덜 웃게 된 건 확실함. 뇌수까지 맥주에 쩔어서 맛간 미친 독일놈 같은 표정이라던가, 입안 가득 사과주 대신 꿀 한 사발이라도 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기지배같은 표정이라던가. 그런 게 사라진 것 같음. 헤비와의 관계도 그렇고. 예전처럼 서로 붙어다니는 건 여전하지만 훨씬 데면데면해 진 것 같기도 하고. 전에는 메딕이 항상 헤비와 시선을 맞추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서로 될 수 있으면 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하는 느낌임. 그러고보니 헤비 쪽에서도 어딘가 메딕이랑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임. 희한하네. 그러고 보니 식사시간에도 메딕이 안 보임. 저녁 시간만 되면 자기 먹을 것만 챙겨서 의무실에 틀어박혔음. 아침은… 데모가 말똥말똥한 정신을 유지하면서 아침 일찍 깨어 있던 적이 거의 없어서 모르겠고. 그 점에 대해서는 다른 팀원들도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원체 괴팍한 의사양반이다보니 다들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고.

싸우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어차피 사소한 차이일 뿐이고, 별 일 아니겠지 싶어서 신경 끄기로 함.

어차피 나이먹은 할망구마냥 오지랖 넓게 참견할 일도 아니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러던 어느 날이었음. 골든 위크를 맞이해서 Mann.co에서 특별히 며칠 간의 짧은 휴가 허락이 떨어짐.

대부분의 클래스가 싱나게 휴가를 즐기러 떠남. 스카웃은 엄마 보러 가고, 그 시각 레드 스파이도… 이하 생략. 엔지랑 솔저는 이상한 데서 의기투합해서 같이 풋볼 경기 보러가고, 뭐 그런 식이었음. 안 놀러가고 남아있는 클래스는 별로 없었음. 스나이퍼나 데모맨 정도였지.

스나는 어차피 비행기 타고 고향 가 봤자 얼마나 지내겠냐, 그냥 베이스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면서 보내겠다는 입장이었고. 데모맨도 뭐… 비슷한 입장이었고. 사실 며칠 전에 유급 휴가 얻어서 집에 갔다온 뒤라 굳이 갈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하도 잔소리를 얻어먹어가지고 당분간은 누가 등을 떠민다고 해도 별로 가고 싶은 생각도 안 나고… 어머니께는 좀 죄송하긴 했음. 무엇보다도 집에 있는 동안은 술을 못 마셨거든. 아무래도 어머니 앞이잖아. 그러니까 뭐, 휴가 기간 동안 못 마신 술이나 마시면서 간이나 혹사시켜 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딱 공휴일에 난닝구 차림으로 TV 앞에 늘어져 있는 아저씨같은 사고방식이네… 어차피 둘 다 아저씨니까 상관 없나.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서 베이스가 조용해지고 밤이 찾아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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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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