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포(엔딩못냄. 낼 생각도 없음)

사자와 백합의 서부식 게임

High Noon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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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더럽게 돌아간다. 데모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생각했음.

독한 담배연기가 소파 주변을 뽀얗게 맴돌았음. 어젯 밤에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 난 뒤의 부엌 상황 같기도 함. 미션 때 레드 솔저랑 신나게 폭격질하면서 싸우고 난 뒤에 남은 연기 같기도 하고.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토끼 사냥이었음.

토끼 굴은 복잡하잖아. 그러니까, 굴 속에 있는 토끼를 잡으려면 계획을 짜야 한단 말임. 어설프게 몰았다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입구로 도망가 버려서 잡을 수가 없음. 그러니까 입구를 다 확보한 다음에, 구멍 하나만 남겨놓고 불을 갖다 피움. 그럼 연기가 굴 속으로 퍼진단 말임. 그럼 토끼가 견디지 못하고 연기가 없는 쪽 구멍으로 뛰쳐나옴. 그럼 잡으면 되는 거지. 지금 내 처지가 딱 그 짝이네, 하고 데모는 속으로 투덜거렸음. 사냥꾼이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거지.

어쨌든 자기가 스파이보다 머리가 딸리는 건 사실임. 적어도 사람 다루는 법이나 화술에 대해서는 확실히 밀린단 말임. 저 놈은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사는 놈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지금 뭔가를 숨기고 있는 쪽은 자신임.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대결 구도 면에서도 자기가 불리하고. 암만 생각을 해 봐도 이건 자기가 지는 게임임. 그렇다고 가만 앉아있으면 저 거머리 새끼는 날 샐 때까지 찰싹 달라붙어서 귀찮게 굴 게 분명함. 아니, 이틀이고 사나흘이고 졸래졸래 쫓아다니면서 데모의 일거수 일투족을 샅샅이 캐고 다닐 게 분명함. 결국은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면 치고 나가야 한다는 소리지. 최대한 꼬투리 안 잡히게 조심하면서, 최소한의 진실만 말하려고 노력하면서, 침착하게 대처를 해야 함. 초조해져서 조금의 실수라도 저질렀다간 돌이킬 수가 없음. 스파이는 프로니까.

담배.

데모가 툭, 내뱉은 한 마디에 스파이는 정신이 들었음. 무슨 말이 이어질까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데모가 다시 입을 열었음.

진짜 없는 게 맞긴 하냐.

…다 떨어진 건 사실이야. 담배 조를 만큼 한가한 사람이 너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라이터도?

가지고 있지. 흡연자니까.

능구렁이 새끼. 라는 말이 목울대까지 넘어왔지만 도로 꾹꾹 밀어넣었음. 쓸데없는 소리를 하게 되면 흥분하게 되고, 흥분하게 되면 실수하게 될 게 뻔함. 스파이도 아마 그걸 노리고 이것저것 찔러볼 거임. 침착, 침착하자. 데모는 심호흡을 하듯이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음.

스파이도 데모의 말이 짧아졌다는 걸 알아챔. 평소에 밥먹듯이 붙이던 욕설도 사라졌고. 이건 담배를 꺼내 물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음. 데모가 바짝 날이 섰다는 걸 의미하는 거겠지. 보아하니 어떻게 찔러봐도 입을 열지 않을 기세야. 데모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경우는 드뭄. 게다가 자기 신상 이야기도 아닌데 이렇게 나오는 경우는 굉장히 드뭄. 이건 좀 크다. 스파이도 구미가 바싹 당김. 대신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 데모는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음. 멱살이나 잡히면 다행이고. 피를 볼 일이 생길지도 모름. 이 오밤중에, 그것도 팀내 몸짱 Top3에 들어가는 흑횽 데모와의 마찰은 피하고 싶음. 그렇다면…

스파이는 담배를 한 쪽 어금닛새로 옮겨 문 다음, 혀 끝으로 빈 입술을 살짝 훑었음. Garde.

서부극 좋아하나?

데모는 짜증이 살짝 치밀어오르는 걸 느끼고 속으로 투덜거렸음. 씨발. 갑자기 뭔 헛소리야. 어쨌든 이것도 스파이의 전략 중에 하나임. 쓸데없는 소리로 경계가 느슨한 틈을 찔러서 정보를 빼내는 거지. 최소한의 진실, 최대한의 침묵. 명심하자. 조용히 화를 삼키고 데모는 운을 뗐음.

난 아냐. 스나이퍼는 좋아하지.

흠? 하긴. 어떻게 알게 됐나?

…저번에 같이 TV 보다가. 클린트 뭐시기던가가 나오더라고. 난 배우는 잘 몰라.

흠. 마카로니 웨스턴이 취향이시다. 알만하군.

너도냐? 프랑스 새꺄.

아니, 난 애국자거든. 예술과 로맨스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게임이 있지. 아나?

내가 초능력자냐?

서로 등을 돌린 채, 총알을 장전하고, 하나, 둘, 셋… 탕. 오직 하나만이 살아남는 거지. 자네도 좋아하지 않던가?

…괜찮은 방식이지.

지금 우리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 안 드나? 서로 등을 돌리고 선 두 사내. 어떤 명예가 걸린 문제.

니끼한 놈. 헛소리 집어치워.

왜?

넌 총이 있고, 난 없어. 불공평하잖아.

서부식 게임을 끝내려면 어느 한 쪽이 죽어야 함. 하지만 이 상황은 데모가 숨기고 있는 걸 털어놓아야 끝나는 상황임. 반대로 스파이는 잃을 게 없음. 가만히 기다리고 앉아있으면 스파이가 이기는 싸움임. 데모가 말하고자 한 건 그거임. 불공평하다. 스파이도 그걸 알아들었음.

…공평한 게임은 없지.

그래. 나도 별로 게임하고 싶은 생각 없다. 거래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상호 교류 없이 성립하는 게임도 얼마든지 있어.

스파이.

말해.

짙은 연기가 뿌옇게 흘러나와 공기 중에 흩어졌음. 데모는 잠시 성한 한 쪽 눈으로 말없이 담배 연기를 노려보고 있었음. 조금 후 나직하게 말하기 시작했음. 소름끼치게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듯이.

우린 팀 메이트지?

자꾸 그딴 식으로 깝치면 유혈 사태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스파이 수준의 눈치 대장이 아니더라도 알아먹을 수준의 경고였음. 정말 데모가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를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음. 안 취한 상태의 데모는 빈말하는 놈이 아님. 게다가 이 정도로 험악하게 나온다는 건 보통 빡친 정도가 아니란 소리임. 영정에다 고이 담아서 모셔놓고 두고두고 되새겨드리겠다는 협박이기도 함. 농담이 아니라, 전투 중에 갑자기 아군의 유탄이 등짝을 향해 날아와서 사분오열 당할 가능성도 있음. 스파이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음.

담배.

없어, 새꺄.

다 피우면 들어가 보지.

…너무 길어.

아직 공평하지 않나?

멀었어.

…자네 선에서 탐색을 끝낸다면?

무슨 이야기가 나와도?

함구하도록 하지. 알아낸다고 해도.

그건 당연한 거고, 새꺄. 거절하면?

보는 눈은 많고, 듣는 귀는 많지. 말할 입도 얼마든지 있고. 대충 대상은 정해놨어.

허세. 어쩌면 그럴 지도 모름. 따로 정보를 얻어낼 놈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한테 매달릴 리가 없음. 어차피 그날 밤에는 아무도 없었음. 스나는 방에 쳐박혀서 나오지 않았고, 다른 팀원들은 나가있었음. 자기들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일임. 하지만… 데모는 담배 필터를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었음. 스파이가 메딕한테 간다면?

개구락지놈 말대로 자기랑 메딕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님. 어쩌면 스파이를 상대하는 데에는 자신보다 나을 수도 있음. 적어도 자신보다는 똑똑할 테니까. 알아서 잘 처신할 거임. 그 과정에서 걸레짝이 될 의사양반 멘탈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음. 그럴 친분도 없고. 오히려 어지간히 나잇살 쳐먹은 영감을 감싸준다는 것 자체가 오지랖일 수도 있음. 그러니까, 이건 자신이 걱정할 일은 아님. 귀찮은 일에 괜히 모가지를 쳐넣을 필요는 없음.

식탁 위에 엎어져서 웅얼대던 메딕이 떠올랐음. 얇아빠진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가던 메딕도. 마지막으로 한 말도. 잘 가.

…씨발. 그렇게까지 해서 알아내고 싶냐?

직업이야. 친구.

진심으로, 다른 직업 찾아봐라. 당분간 뒷통수 조심하고.

대답은?

너? 아님 나?

내 담배.

빨랑 피우고 꺼져.

Allez. 전투 개시. 스파이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 질문을 꺼냈음.

메딕이 사과주를 마신 이유는?

단도직입적이었음. 데모도 예상했던 바고. 어쨌든 데모로서도 스파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음. 그걸 알아야 적어도 반격의 여지 정도는 생길 테니까.

스나이퍼는?

취한 인간이 밴을 몰고 외출하나?

그 놈도 술 센데.

그래? 사과주 5병을 비우고 핸들을 잡을 수 있을 만큼? 호주인의 핏줄엔 맥주가 흐른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5병이나 마셨던가… 데모는 말없이 미간을 찡그리고 패배의 쓴 연기를 뻐끔뻐끔 내뱉었음. 씨발, 그렇게 쳐마시니까 그 꼬락서니가 되는 거 아냐. 데모는 이전에 스파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음. 빈 사과주 병, 외출한 스나이퍼, 사라진 팀원. 일단 빈 사과주 병이 5병, 스나이퍼가 밴을 몰고 외출했다는 건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마지막은 메딕인가? 아침에는 데모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음. 아직 휴가 기간 도중이라 미션도 없었고. 그렇다면 아마도 메딕이 오늘 하루 종일 의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건 확실한 것 같음. 하긴 데모같아도 사과주 5병 정도를 퍼마셨다면 뻗어서 움직이지 못할 성 싶지만. 일단 확인은 해 볼 가치가 있음.

왜 메딕이야?

자네가 비웠다면 호주 출신 총잡이가 밴을 몰고 나갈 일도 없었겠지.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소거법. 스나이퍼, 자네. 남는 건 하나뿐이지.

염병할 놈. 저쪽도 호락호락 정보를 넘겨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음. 이럴 줄 알았으면 낮에 의무실 좀 기웃거려 볼 걸. 데모는 후회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음. 어차피 스파이 놈이 의무실 안팎을 체크하고 있었을 게 뻔했음. 차라리 안 찾아가 본 게 잘 한 짓인지도 모름. 어쨌든 시간을 벌어야 함.

마셨는지 버렸는지 어떻게 알아?

농담 치고는 궁색하군. 누가, 무엇 때문에? 파이로가 맨 처음 베이스로 돌아왔지. 그리고 식탁 밑에서 뒹굴고 있는 사과주 병을 거둬서 버렸고. 어제 점심까지 식탁 밑에는 빈 사과주 병이 뒹굴고 있지 않았어. 따라서 비워진 건 어제 오후부터 오늘 새벽 사이라는 말이 되지. 그 동안 누가 사과주를 버릴까? 자네는 아니지. 스나이퍼? 메딕? 자네의 화를 돋궈서 무슨 득을 보려고? 그리고…

스파이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즐기듯이 뜸을 들였음. 저 여우같이 교활한 놈이 마음에 안 드는 게 그거였음. 쓸데없이 여유가 넘쳐흐르는 거임. 자기가 불리하거나 유리하거나 그런 건 상관이 없음. 좀처럼 당황해서 허둥대는 꼴을 볼 수가 없음. 아, 있긴 있다. 불 붙었을 때나 자라데 맞고 허우적 댈 때. 지금도 화염방사기가 있어야 하는데. 데모는 잠시 하늘에서 불똥이나 오줌병이 떨어지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봤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네.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기적인 거죠. 암요.

자네는 누가 사과주 병을 비웠는지 알고 있지.

왜?

술이 모두 사라져버렸어. 덕분에 자네는 아침부터 고생이 많았고. 그런데 자네는 범인을 찾거나 화를 내지 않았지. 단 한 번도.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랬겠지. 그리고 그 이유도.

메딕은 왜 사과주를 마셨을까? 평소에 메딕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어. 담배도 안 피우고. 친애하는 우리의 닥터가, 휴가 첫날에, 갑자기 사과주를 입에 댔다… 그리고 그걸 자네는 그냥 보고만 있었지.

내가 보고만 있었다고?

아니면 같이 마셨거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네는 누가 마셨는지 잘 알고 있어. 언제부터 메딕과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안 친해도 같이 마실 수는 있어. 썅. 걍 마시고 싶다길래 줬지.

자네는 아무 이유도 없이 허락했다?

한 두어잔 마시면 나가떨어질 줄 알았지. 근데 나중에는 자기가 알아서 비우더라고. 알잖아, 그 영감태기 잽싼 거.

그래봤자 주정뱅이지. 닥터보다 힘도 센 자네가 그걸 제압을 못 했다고? 아침에 금단 증상이 시작됐으면 얼마 마시지도 않았을 텐데.

진짜라니까 그러네. 나중에는 포기하고 나도 같이 마셨어. 기왕 얼마 안 남은 거, 빨랑 비워버리려고…

…아니, 뭐. 그땐 솔직히, 좀, 나도, 취했던 것도 같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슬프군.

…닥쳐. 나도 후회중이니까.

그럼 일단 그게 사실이라고 해 두고…

스파이가 한숨을 푹 내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음. 아니, 담배연기를 내뱉는 소린가? 어쨌든 요상하게 데모의 심장에 사무치는 소리긴 했음. 정확히는 심장은 아닌 것 같고, 심장 언저리의 털이 숭숭 돋은 무언가를 자극하는 느낌이었지만…

닥터는 왜 술을 마시려고 했을까.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은 그거였음. 데모는 알고 있지만 죽어도 대답하기 싫어하는 그거. 가장 중요한 의문이기도 했고. 스파이는 방금 전까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허둥대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데모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음. 당황하는 모양을 보니 방금 전 이야기는 사실인 것 같음. 그것도 상당히 정확한 사실인 모양이었음. 그렇다면 데모는 메딕이 술을 달래서 술을 제공했고, 둘이서 정신없이 퍼마셨다는 소리가 됨. 정신이 온전한 인간이 없다보니 술이 남아있는지, 다 떨어졌는지도 몰랐다는 말이 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소리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아떨어지긴 했음.

어쨌든 데모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었음. 이제 도망갈 여지가 없으니까. 섣부르게 말을 돌리려 들었다간 스파이의 역공에 당하고, 그렇게 되면 필요 없는 소리까지 늘어놓게 되리라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였음. 데모도 바보는 아니니까. 이제 정공법으로 공략하는 건 시간 낭비임.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음.

맨 처음에 돌아온 건 파이로였지. 다음은 엔지니어와 솔저였고. 마침 솔저의 집 근처에서 경기가 있었던 모양이야. 둘 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날이 새자마자 돌아왔네. 그런데 애석하게도, 각자 상대편 팀의 팬이었던 모양이야. 경기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더군. 우스운 일이지. 그것 때문인지 두 사람 다 돌아오고 나서도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니었네. 그 다음으로 돌아온 건 헤비였고.

현관에서 만났지. 나도 거의 동시에 도착했거든. 마침 파이로가 분리수거를 하려고 쓰레기를 옮기던 참이었네.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 중엔 사과주 술병도 있었네. 어마어마한 양에,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었지. 헤비가 픽 웃으면서 말하더군. ‘아무래도 굉장한 파티가 있었던 모양이야.’

거실에 들어서자 솔저와 엔지가 앉아있었지. 한창 누가 더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나 내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어. 다른 팀원들은 보이지 않았네. 헤비가 말했네. '다른 꼬마 친구들은 아직 안 돌아왔나?’ 먼저 입을 연 건 엔지니어 쪽이었지. 하긴 솔저는 그런 일에 둔감한 편이지.

'스카웃만. 나머지는 다 돌아왔어.’

'그래? 왜 여기 없어?’

'몰라, 스나이퍼는 나갔고, 메딕은 모르겠고.’

'음… 파이로, 솔저, 엔지, 스카웃… 데모는?’

'방에 있어.’

'응? 뭐야, 아직도 취해서 자나?’

'앓아 누웠어. 술을 못 마셨대. 희한한 일도 다 있지.’

그 뒤에 솔저가 뭐라고 시비를 걸고 두 사람의 입씨름이 시작됐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헤비의 안색을 살폈네. 헤비도 내 쪽을 봤고. 우리 둘 다 술병을 봤으니까. 그 수많은 빈 술병들. 하지만 자네는 방에 쳐박혀 있었지. 술을 못 마셔서 축 늘어진 채로. 그래. 희한한 일도 다 있지. 그런데, 더 희한한 일이 있었어.

헤비. 메딕과 헤비. 데모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음. 여기서 헤비가 나왔다. 저 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 헤비의 뭐가 신경쓰였다는 걸까?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음. 슬슬 머릿속에서 술 좀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왕왕 울려퍼지고 있었거든. 데모는 신경실적으로 필터를 질겅질겅 씹어대기 시작했음. 스파이가 하는 말에 귀를 바싹 세우고 있느라고 자기가 그러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맨 처음에 나타난 표정은 의아함이었네. 나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그리고 놀라움. 하긴, 흔한 일은 아니니까. 그 다음이 문제였지.

헤비의 표정은 단순한 편이야.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읽어낼 수 있을 정도지.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해. 헤비는 속내를 감출 필요가 없지. 솔직함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충분한 의지도. 그의 가장 큰, 그리고 지방덩어리에 파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 장점이기도 하지. 어쨌든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네.

아주 잠깐동안에 스쳐지나간 표정이었지만, 분명했지.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었어. 이상한 일이지. 헤비가 자네를 걱정할 리는 없지. 자네야 술마시고 곯아떨어지는 게 일상 아닌가. 헤비가 아무리 호인이라도 자네를 그 정도로 걱정해 줄 리 없지. 그런 인간이었다면 여기서 미니건… 사샤던가? 어쨌든. 그걸 끌어안고 멧돼지처럼 쏘다니고 있을 리가 없지. 모스크바 어디 한 구석에서 다 얼어죽어가며 성냥이나 좀 사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을걸. 그렇다면 누구일까.

메딕. 헤비는 제쳐두더라도, 메딕의 인간 관계는 협소한 편이네. 친하다고 하면 헤비 정도겠지. 미션 중에도 항상 붙어다니고. 식사도 항상 같이 했었고. 식사라. 그러고 보니 문득 의문이 생기더군. 요새 메딕 본 적 있나?

본론을 말해.

데모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음.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라는 경고 신호였음. 스파이는 말없이 입맛을 다셨음. 입술을 축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르기 시작하고 있었음. 담배는 조금만 더 있다간 필터까지 태울 기세였음.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였음. 심증은 있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판돈을 거느냐, 마느냐, 아니면 물러서느냐. 그 이상의 선택을 바라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실수하면, 터진다. 다음은 없다. 답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음.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원한다면. 헤비도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벌레씹은 표정을 짓더군. 몇 마디 나눴지만 당연히 말하려 들지 않았네. 여러가지 의미로 무거운 남자니까. 나는 결국 자세히 묻는 건 포기하고 헤비에게 거래를 제안했네. 단 하나의 질문에만 대답해 주면 더 이상은 묻지 않겠다고. 그도 피곤했는지 두 말 않고 응했고.

내가 자네에게 제안한 것처럼. 스파이는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음. 슬쩍 데모의 눈치를 살폈음. 데모는 가만히 앉아있었음. 아마 스파이가 하는 말에 귀를 바짝 세우고 있겠지. 그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음.

내 질문은 이거였어. '메딕이 헤비를 배신했는가?’ 헤비는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어.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네. '그래’

거짓말이다. 데모는 확신했음. 헤비는 그런 소리를 할 놈이 아님. 순간적으로 스파이가 자기한테 속임수를 걸고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자,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데모의 이성이 훅 날아가버렸음.

구라치지 마라.

왜?

닥치고 바른대로…

미안해.

단순한 대답이었음. 단순하면서도 이상한 대답이었음. 미안해? 뭐가?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저 새끼가 자기 거짓말에 미안해 할 리가 없음. 천지가 개벽하고 대영제국이 민주공화국이 되는 사태가 벌어져도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였음. 그렇다면 뭐가 미안하다는 말인가?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등뼈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음. 데모는 필사적으로 자기가 무슨 실수를 했나 생각했음. 이 불안한 느낌은 뭘까? 스파이가 조용히 말했음.

헤비는 나보다 조금 늦게 돌아왔어.

Feinte, 그리고 Coup droit. 데모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음.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분명해지자마자 데모는 냅다 술병을 치켜들고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튀어올라 돌아서서 스파이가 있던 곳을 향해 힘껏 내려갈겼음. 데모의 손에서 빠져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동댕이쳐진 크리스탈 술병이 쨍그랑, 하고 아주 조금 남아있던 술과 유리 파편을 흩뿌리며 깨끗하게 두 조각으로 동강나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졌지만 정작 스파이는 이미 클로킹을 마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뒤였음.

데모는 씨근덕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봤음. 어디에도 스파이는 보이지 않았음. 당연히 클로킹하고 멀리멀리 튀었겠지. 안 그랬다간 데모가 자길 두쪽내버릴 게 분명하니까. 그래도 두 눈이 벌게져서 두리번거리는데 복도 쪽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음.

무슨 일이야?

솔저의 목소리 같았음. 당연히 이 늦은 밤에 술병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니까,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민 거임. 데모는 순간적으로 멈칫했음. 지금 이 상황을 다른 클래스가 보게 되면 더 사태가 악화될 게 틀림없었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고, 그러다보면 또 일이 꼬일 게 분명하니까.

…아니! 별 일 아냐, 술병을 깨뜨렸어.

…작작 마셔라, 군기가 빠져서는.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문이 닫히는 작은 소리와 함께 사라졌음. 데모는 스파이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었음. 저 야비한 협잡군 새끼가 기어코 자기를 속여먹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봤자 스파이의 기억까지 날아가 버리지는 않음. 그렇지. 스파이는 데모한테 야바위를 걸었고, 성공했음. 속여서 미안해. 생략된 단어를 덧붙인 완전한 의미는 그거였음. 어떤 결론에 도달한 거임. 그렇지 않고서야 속임수라는 걸 고백할 리가 없음. 데모는 차라리 자기 머리라도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아니, 애초부터 이런 미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음. 내기라니. 씨발. 그것도 스파이를 상대로. 병신같은 짓이었음. 상황도 불리하고, 능력도 딸림. 여러모로 보나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음. 쓸데없이 기사도 정신이 발동한 게 문제였음. 괜히 나서서 자기 입으로 술술 불어대다니. 그냥 저 새끼가 귀찮게 따라붙으면서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무시하면 됐을걸. 차라리 시원하게 후드려패서 쫓아버리면 그만일걸. 하지만 그러면 스파이는 다른 사람한테 들러붙었을 거임. 자기 입으로도 그렇게 말했고. 언젠가는 메딕에게도 달라붙었겠지. 스파이는 끈질겼음. 결국 헤비든, 메딕이든, 자신이든, 누군가는 실토하게 될 일이긴 했음. 운 나쁘게 자신이 당첨되었을 뿐임.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스파이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 끝까지 비밀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음. 씨발. 고작 생각나는 건 욕밖에 없었음. 스파이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다리가 풀려서 서 있을 수 조차 없었음. 데모는 머리를 감싸쥐고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음. 천천히, 무너져내리듯이.

Salut. 스파이는 거실 출구 옆의 벽을 등지고 기대섰음. 조용히 클로킹을 풀면서 데모 쪽을 살폈음. 데모는 소파에 푹 파묻힌 채로 움직이지 않았음. 아무래도 더 이상 움직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음. 그걸 보고있자니 조금 미안해졌음. 애초에 스파이가 데모한테 제안한 건 서부식 게임이었단 말이지. 속임수 없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뭐 이런 소리였단 말임. 적어도 데모는 그렇게 알아들었음. 문제는 스파이는 애초에 그럴 마음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단 소리지. 스파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데모와 펜싱을 벌이고 있었음. 방아쇠를 당기는 시점에서 끝장인 서부식 게임이 아니라. 뭐, 어쩔 수 없잖아? 직업이니까. 애초에 증거도 얼마 없는데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고 달려드는 게 이상한 거지. 그래도 약속은 기억해두지. 물론 이 말을 직접 해 주러 다가갔다간 강판에 갈린 사과 꼴이 될 테니까 조용히 마음 한 구석에만 담아뒀음.

스파이는 담배를 봤음. 이제 거의 필터밖에 남아있지 않았음. 그래도 오래 버틴 편이군. 그리고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자비없이 바닥에 내버리고 구둣굽으로 비벼껐음. 스파이는 팀원은 존중하지만 베이스의 환경 상태는 별로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이었음.

처음부터 확실했던 사실은 하나밖에 없었음. 메딕은 술을 마셨다. 나머지는 가장 확률이 높아보이는 가설을 가지고 친 도박에 불과했음.

누구부터 조사해 볼까? 우선 스나이퍼는 그날 하루종일 밴에서 늘어져 있었다고 말했음. 스나이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음.

다음, 헤비. 실제로 헤비를 건드려 보긴 했었음. 다만 그 때는 그저 무뚝뚝한 반응만 돌아왔을 뿐이었음. 하지만 스파이와 헤비가 들어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파이로가 분리수거를 하고 있었겠지. 헤비는 행동은 굼뜨긴 해도 머리는 잘 돌아갔음. 멍청한 인간이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도 없었겠지. 가끔씩 보이는 계산적인 일면도 그렇고. 짧은 시간동안 스파이가 접근해올 것을 예상하고 대비를 했으리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었음. 방벽을 구축한 헤비는 상당한 강적이었음.

다음, 메딕. 사건의 핵심이지. 하지만 접촉할 기회가 없음. 최근에는 의무실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대상이기도 했음. 메딕의 약점은 오만임. 자신감이 넘칠 때의 메딕은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음. 하지만 한 번 태세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었음. 기세등등할 때의 그와 허둥대고 있을 때의 그는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음. 언뜻 보기에는 쉽게 동요시켜서 정보를 빼내기 쉬울 것처럼 들리지만, 까다로운 문제였음.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는 양반이지만, 사실 집요하게 캐내다보면 종잡을 수 없는 양반임. 다른 팀원들에 비해 팀에 대한 소속감이나 유대도 희박한 편이고. 수틀리면 그야말로 인정사정 없이 스파이를 대할 가능성이 높음. 괜히 찔러봤다가 메딕이 이성을 잃기라도 하면? 작두타기나 다름없지. 리스크가 너무 컸음.

다음, 데모. 메딕과 같이 술을 마셨지. 적어도 메딕은 3병 이상의 사과주를 비웠음.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이상할 것은 없지. 데모는 뭔가 알고 있을 심산이 컸음. 데모는 실력있는 용병임. 당연히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님. 인내심도 상당하고. 점착 폭탄을 다루는 솜씨는 웬만한 인내심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음. 하지만 데모도 약점이 있지. 술. 데모는 알콜 중 독자이지. 그리고 자기 존중감도 낮음. 그의 여유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 자포자기한 인간이나 내보이는 종류의 여유임.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방어적으로 돌변했음. 그걸 신중함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음. 하지만 스파이가 보기에 그건 신중한 게 아님. 지레 겁먹고 패닉 상태에 빠진 거임. 한 번 당황하기 시작하면 쓸데없이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 데모의 약점이었음. 곯아떨어진 메딕을 옮긴 것은 데모가 틀림없음. 그럼 늦게까지 깨어있었다는 소리겠지. 게다가 술 좋아하는 데모의 일이니 아마도 적절하게 반주도 넣었을 게 틀림없음. 그리고 아침에는 금단 증상에 시달렸고. 안 그래도 달랑달랑 했던 데모의 정신줄은 스파이의 심문에 시달리면서 착실하게 닳아없어져 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음.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소리기도 하지. 그래도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메딕보다는 나았음. 술에 취하지는 않았어도 자제력이 떨어진 데모라면 해 볼 만한 상대였음.

일단 데모는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음. 자기 방 침대에서 끙끙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 데모에게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나 말했을 수도 있지. 흠. 메딕이라. 데모는 스파이가 메딕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 그런데 굳이 메딕에 대해서 물어봤다. 무엇때문에? 시간을 끌기 위해서? 여기서 잠깐, 데모는 스파이를 경계하며 말을 아끼고 있었음. 그런데 굳이 메딕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두 번. 제법 집요하게. 어젯 밤 이후의 메딕의 상태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함. 일단 아침 시간대를 소재로 데모가 어떻게 나오나 보자. 등장 인물은 헤비.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지. 평소에 메딕과 가장 친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데모의 속내를 떠 보기에는 이만큼 적합한 등장 인물은 없음. 다수의 대상과 가상의 사건을 꾸며내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한 명의 대상을 가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 게다가 타인으로 가장하는 건 자신의 직업이기도 함. 아침에 일어난 일은 정말 있었던 일이었음. 단지 자신의 자리에 헤비를 집어넣었을 뿐이지. 최소한의 진실, 최대한의 침묵. 나머지는 데모가 어떻게 나오나를 봐서 그때그때 대처하면 될 일이고.

침착한 메딕이 폭음을 할 만한 사건은? 그것도 휴가 첫날에, 느닷없이. 휴가 기간동안 변한 건 뭐지? 미션이 중지되었음. 미션과 관련된 일인가? 요즘 전투는 딱히 어느 한 쪽이 밀린다거나 우세한 편은 아니었음. 전투 성과 때문인 것 같지는 않음. 레드 팀과의 마찰. 특정 레드 클래스와 마찰이 일어났을 가능성. 누군가에게 집요할 정도로 점사를 당해서 노이로제에 걸렸다거나. 하지만 그런 전조는 없었음. 미션에 나가지 않겠다고 뻗댄 적도 없고. 그리고 다른 가능성은…

여기서 최근 메딕의 행동이 떠오름. 사건은 휴가 첫날에 일어났다. 왜? 외출한 팀원들 중에 피하고 싶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싸한 가설이긴 하지만 근거가 희박함. 메딕이 요즘 들어 부쩍 안 보이게 된 건 사실임. 하지만 워낙 괴팍한 양반인 것도 사실이지. 그냥 내키는 대로 행동한 것일 수도 있음. 그리고 메딕은 자존심도 보통 높은 게 아님. 웬만한 일 가지고서는 꿈쩍하지도 않을 양반이지.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여기서 헤비가 떠오름. 메딕이 헤비를 피한다?

일단 헤비가 메딕을 피한다는 이야기를 흘려봄. 데모가 반응했음.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지. 그냥 신경질을 부린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시간을 끌면 데모가 이기지. 데모도 그걸 알고 있고. 스파이가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면 데모가 유리해지는 거지. 그런데 저기서 왜 갑자기 말허리를 자르고 나섰을까. 사실이기 때문에. 메딕은 확실히 헤비를 피하고 있는 게 분명함. 그리고 헤비가 없는 날 의무실에서 나와서 술을 마셨다…

둘 다 실력은 상위권임. 서로의 실력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가능성은 희박함. 불만이 있었더라도 둘다 참고 있을 만한 위인들은 아니지.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을 거임.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음. 배신. 어느 한 쪽이 배신했다. 솔저와 레드 데모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없을 만한 일은 아니지. 흠. 또 마찰이 일어날 만한 요소는… 사업, 금전, 연애… 연애?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뻔한 패턴은 삼각관계지.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함. 두 사람 다 시내에 나가는 일은 드뭄. 거기다가 받는 우편물도 손에 꼽음. 특히 메딕은 의학 소식지 외에는 사적인 편지는 한 통도 오지 않았음. 그럼…

…설마. 어쨌든 헤비와 메딕은 서로 자주 붙어다녔고, 신나서 절골톱을 휘두를 때 빼고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메딕이 유일하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상대였고. 농담삼아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긴 했음. 하지만… 설마. 스파이는 이걸 고려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좀 고심했음. 남에게는 말 못할 아주아주 사적인 일이긴 하지. 하지만… 에이, 설마. 하지만 정황을 생각해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어쨌든 이 둘 외에는 가능성이 없음. 다른 가능성을 꼽자면 베이스 외의 일까지 고려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조사 범위가 장난아니게 넓어져서 좀 귀찮아짐. 난이도로 치자면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수준.

자, 어느 쪽일까. 메딕인가, 헤비인가. 둘 다라는 가능성은 없어. 만약 그렇다면 메딕이 사과주를 마시겠다고 들 정도로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겠지. 우선, 헤비의 배신. 헤비가 레드 팀과 내통을 했고, 메딕이 헤비의 배신을 알았다. 그리고 평소의 친분 관계 탓에 차마 남에게 말하지는 못하고 혼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는 헤비의 고백. 헤비가 메딕에게 고백하고, 거절당했다. 그리고 메딕은 배신감에 몸을 떨며 술을 퍼먹고 곯아떨어졌다. 적어도 삼류 코메디보다는 재밌는 가설이야.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의 콧대 높은 닥터는 배신감이 아니라, 모멸감에 치를 떨었겠지. 애초에 그게 사실이라면 메딕은 의무실에 틀어박혔는데, 헤비는 왜 멀쩡하게 나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메딕은 어떤가? 메딕의 배신. 헤비가 메딕의 배신을 알았다. 그리고 메딕은 약점을 잡혔다. 그럴 리는 없어. 헤비는 팀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지. 팀을 좋아하고 있고. 메딕이 배신을 했고, 헤비가 그걸 알았다면 그냥 내버려두고 있을 리가 없지. 뭔가 조치를 취했을 거야. 메딕의 고백. 메딕이 헤비에게 고백을 하고, 거절당했다. 그리고 술을 퍼마셨다. 그 메딕이? 이것도 믿기 힘든 가설이긴 하지만 정황을 보면 제법 그럴싸함. 그래서 어느 쪽이냐, 헤비의 배신이냐, 메딕의 고백이냐. 심증은 있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판돈을 거느냐, 마느냐, 아니면 물러서느냐. 그 이상의 선택을 바라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실수하면, 터진다. 다음은 없다.

그리고 스파이는 판돈을 따냈음. 데모의 믿음과 헤비의 명예를 내기 칩으로 걸고.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아니, 간단한 승리는 아니었음. 임기응변만으로 이 정도까지 잘 해낼 수는 없음.

스파이는 전문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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