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주. 젓지 말고, 흔들어서
A scrumpy. shaken, not stirred
이놈의 술. 빌어먹을 사과주.
데모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음. 숙취가 아니고 다른 이유 때문에.
저번에 이어서, 메딕은 사과주가 가득 든 컵을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단숨에 원샷했음. 원샷하고 나서 눈을 조금 깜빡였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괜찮네, 더 따라봐. 하고 또 잔을 내밀었음.
허세부리지 마, 의사양반. 보릿물이나 홀짝대던 양반이 그러고서 멀쩡할 리가 없어.
괜찮잖아. 눈구멍이 하나밖에 뚫려있지 않아서 코 앞에 있는 얼굴 하나 제대로 못 보나?
썅, 메딕, 염병할 눈 이야기는 집어치워. 아까보다 말수가…
아니면 지금 내가 계집애 같다고 무시하나? 방구석에 쳐박혀서 책이나 읽는 샌님이라고?
아니, 그건 아닌데…
됐으니까 따라봐. 나도 다 큰 남자야. 자기 행동에 책임 정도는 질 줄 알아.
…네미랄. 이딴 거에 사나이의 명예 걸지 마라. 진짜 난 모른다?
두 번째로 잔이 채워졌음. 데모맨이 참 우려된다는 얼굴을 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메딕이 컵을 입에 가져다 댔음. 역시 메딕 자신도 두 번 연속으로 원샷을 한다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나봄. 잔을 다 비우고 나서 메딕은 작게 숨을 몰아쉬었음.
…음.
거 봐. 슬슬 꼭지가 도는 모양이네. 내가 말했지?
…닥치고 한 잔 더 따라봐.
어이, 메딕. 이제…
따라봐.
…젠장.
세 잔째 사과주가 들어갔음. 메딕은 아까보다 더 천천히 잔을 비우고는 작게 고개를 흔들더니 몇 번 크게 눈을 깜빡임. 볼도 자세히 보니까 살짝 발갛게 물들어있음.
…어이, 메딕. 진짜 괜찮은 거지? 메딕?
…오, 어…잠깐. 생각 좀 해 보고…
…어이…
…결국 지금은 어떻게 됐냐면…두어 병 정도 남아있던 사과주는 내용물이 홀랑 다 사라진 채로 식탁 밑에서 뒹굴고 있었음.
그리고 그 대부분은 데모가 아니라… 음… 메딕이 비웠음.
그래. 지금 동공이 겔겔 풀어져서는 한참 신경 성장 인자인지 뭔지에 대해서 주절거리다가 자기 혼자 미친듯이 식탁을 두드리면서 웃고있는 메딕 말야…
물론 데모도 나름 할 만큼은 했음. 메딕이 자그마치 반을 마셔버린 첫 번째 사과주 병이 비었을 때, 데모는 슬슬 눈이 맛이 가기 시작한 메딕을 보고 더 이상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음. 그런데 더 마시겠다고 달려드는 메딕을 말리니까, 메딕이 자기 스스로 비실비실 일어나서 냉장고에서 술병을 더 꺼내옴. 그것도 취한 인간 치고는 잽싼 몸놀림으로. 그러고 보니 클래스 중에서 스카웃을 제외하면 가장 빠른 게 메딕임. 나이도 많은 샌님 주제에… 뺏으려고 하니까, 재밌다는 듯이 실실 웃으면서 안 뺏기려고 술병을 샥샥 잘도 빼돌림. 이 시점에서 확실히 맛이 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_`
그래서 데모의 다음 판단이 뭐였냐면, 자기가 빨랑 마셔서 없애버려야겠다는 거였음.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는걸 뭐… 한 두 병 정도 남았나?
그래서 열심히 마셨음. 그래도 메딕이 많이 뺏어먹어서 평소의 반도 못 마심. 사실 지금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 중에는 아까운 사과주를 메딕한테서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책감도 쪼끔 있었음. 스코틀랜드 특산품이라 미국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건데… 아니, 이게 아니라…
…그랴서, 여이허부러가 진댜 웃긴 이야이란 말랴. 이바, 륻고있어?
듣고 있다니까 그러네. 근데말야, 이거 알아? 그 빌어먹을 혓바닥 오그라든 게르만 사투리만 집어치우면 더 잘 들릴 것 같아.
시꾸라아. 니갸 할 말이랴? 니도 치하믄 하나아로 몬알아혀먹을 호리만 디거리자너. 흐홋들랭드 앳구 잣샤.
이 영감이… 아오, 내가 참아야지. 지금 나랑 댁 꼬라지를 비교해 봐. 괜히 오기부리다가 꼴이 이게 뭐야?
그니가아, 그게 리가 핼 소리랴거… 니강.
그러니까, 그게 지금 45도 각도로 기울어져있는 댁이 할 말이냐고. 취해서 지 몸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 양반이.
누가 몬 간수를 몬항래, 멍형햔 돌대갸랴. 시상이 비뚜러 누워잇는뎅, 라도 비뚜러 안자잇슬 수 바께 업댜너.
아, 그러셔. 하긴 나도 병신이지, 이런 샌님한테 좋다고 이딴 걸 퍼먹이다니…
엇저라거. 라라거 둇타거 수리 마시거 시펏겟냐.
말을 마치자마자 메딕은 식탁 위에 성대하게 철퍼덕 엎어졌음. 그 기세에 데모가 안 그래도 날선 메딕의 콧대가 부러지기라도 한 건 아닌가, 순간 걱정이 됐을 정도임. 엎어져서 고개를 꼼질꼼질 옆으로 돌리고선 메딕은 히이, 웃으면서 말했음.
아, 션탕…
좋댄다. 남극점 한가운데다 텐트치고 얼어뒈지면서도 그딴 소리가 나오나 보자고. 뭐, 이딴 데서 자면 최소한 뒈지진 않겠지. 감기나 걸린다면 모를까. 병신마냥 입이라도 돌아가면 거 볼만하겠구만. 하긴 감기걸려서 콧물 찔찔 짜면서 뛰어다니는 의사양반도 볼만하긴 하겠네.
안 댜. 라 혼댜 팀댓가지 거러갈 수 잇서.
퍽이나 그러시겠수다. 뻗대지 말고, 졸리우면 내가…
앗가부더 너마랴. 생님이니, 기지배니, 나 무시하냥?
갑자기 뭔 헛소리야? 사람이 기껏 걱정해 주니까 고작 하는 말이 그거야?
몬 드른 혁 하로 잇느데, 나도 다 알고잇서. 뒤에서 성딜 더러운 영감태기랴느닝, 호모샛기랴느닝 까고잇능 거.
이 영감이 취해서 돌았나…
…머, 엇절 수 업징. 사실이니깐.
내가 진짜 다시는… 뭐?
만약에 데모가 술이라도 머금고 있었으면 바로 뿜었을 거임. 다행히도 메딕이 몽땅 다 마셔버린 탓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메딕을 쳐다봤지만 고개를 돌린 채 엎드려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음. 그 상태로 메딕은 여전히 술에 잔뜩 취해서 배배 꼬인 발음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음.
성딜 더러운 것더, 호모샛기라는 것더 사실이라거.
…어.
하는 수 업잔어. 나도 몰랏다거. 그냥, 만날 쳐바켜서 연구나 하고 잇섯자너. 그니간, 머, 생판 잇대가지 그런 줄더 머르거 사랏징. 머. 그런 식으러 대우밧는 것더 첨이엇거…
…이봐, 메딕. 잠깐만…
…말더 안 대는 서리라는 것더 잘 알거 잇섯지. 엇잿던 노려근 하거 잇섯거. 마냐게 래가 이상햔 맘망 안 머것스면, 머. 갠차낫겟지. 그랭, 내가 빙시짓거리를 햇지. 그래서, 나한테능 갠찬타거는 햇는데, 당항하는 것가진 숨길 수가 업더라거. 머냐, 히헌가튼 거. 롤리능게, 엇뎔 수가 업더라. 엇뎔 스 업는 일이라능 건 나더 알거 잇엇어. 나더 내가 그거엿다능 게 시럿능데, 갸라거 별 스 잇겟냐. 나 마엄 안 상하게 할라거 싱경서즈능 겅 이해하능데, 머. 엇잿거나 에전가튼 사이러 도라가를 수능 업다능 거는 학시랫지…
아오, 썅. 입 좀 닥쳐봐! 지금 댁이 무슨 소리 지껄이는지 알아?!
징그럽냐.
뭐?
나가튼 넘 시러하는 거 아녓냐거. 게이샛기.
데모는 얼어붙었음. 너무 당황해서 순간 머리 속이 새하얗게 날아감. 메딕도 널부러진 자세 그대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음. 벽 한 번 치고 날아가면서 점멸하는 유탄처럼 무시무시한 정적이었음. 그 속에서 데모맨은 알콜의 공격을 피해 살아남은 몇 없는 멀쩡한 뇌세포를 풀가동하고 있었음. 호모가 싫은 건… 음, 맞는 거 같음. 아마도. 근데 지금 앞에 취해서 뻗은 메딕은 아닌 것 같기도 함. 어쨌든 지금 해야 할 거는, 음. 대답을 해야하는데, 그럼 아니라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해야하나, 메딕을 위로하려면 일단 아니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잠깐, 내가 호모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잖아. 장난하냐? 안돼, 난 그렇다를 고르겠어… 그럼 위로가 안 되잖아!!!!!!!!! 아, 어떡하지? 어떻게 하나? 아니면, 씨빨, 몰라. 중립국!
…하고, 데모는 자기가 생각해도 참 얼간이같은 대답을 골랐음.
…왜 그런 걸 물어봐?
…그러거 나니간, 머. 먼가 하서연을 할 데두 업거. 친한 넘두 업거. 다덜 나 시러하는 건 알거 잇거. 성질 드러은 으사양반이라거. 아모러치더 안케 에전 생할러 돌아갈라거 해더, 그럴 수가 업더라. 더넌 나더 나 주변더 예전갓지가 안타는 거 아니깐… 사실 아까더, 먼가, 그러트라. 께석 이므시레서 먹거자거 하니깐, 답다페서. 걍 무작정 바까테 공기나 쌔거 시퍼서, 머, 아님 아모나 만낫스믄. 시퍼서, 현간까제 갓는데, 떠 가니깐 나가기 시러지거, 머, 어카나, 햇능데. 니가 마를 거니깐…
…그런 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그냥, 술기메. 아모한테나 말하고 시펏던 건지더 모르지. 머…
어쩌면 이제 그만 진정시키고 방으로 데려가는 게 좋을 지도 모르지. 데모도 그런 생각은 해 봤음. 하지만 지금 의사양반 상태를 보아하니, 그냥 저렇게 말하게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음. 지금 메딕의 상태에 딱 자기가 지독하게 취해있을 때의 상태가 겹쳐보였거든. 그럴 때는 그냥 하고싶은 대로 냅두는 게 상책임.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마셔대는 거니까. 메딕도 마찬가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집애처럼 웃는데다 스파이마냥 세상에 오직 자기 혼자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는 메딕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적어도 자기는 그랬음. 남들 앞에서 계집애처럼 속내를 털어놓는다거나,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게 싫어서 술을 마시는 거임. 그래놓고 술 탓으로 돌리면 되니까. 사나이란 그런 거임.
한 차례 두서없는 주사를 마치고 나서, 메딕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음. 여전히 표정까지는 모르겠고, 그저 등이 부드럽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헐신 편하네, 이러니깐. 그래더.
…우냐.
아니.
…그럼 말고.
…아무한테나 말하던가. 어차피 상간더 업거…
…안 말해.
왜.
내가 무슨, 떠들기 좋아하는 10대 사춘기 기지배처럼 보이냐?
…끗?
…뭐. 또 이유가 필요해?
…
그냥… 혹시 기억은 나냐? 첫 번째 미션.
아니.
에라이. 그럼 메디건 처음 쓴 날이라고 하면 알아먹냐?
…그래.
그때 내가 무슨 소리 지껄였는지도 기억해?
…
사실은 다 알아들었지?
…그단 런 떠 애 무러.
그냥, 그런 거라고. 이거나, 그거나. 썅, 나 설명 잘 못해. 걍 그렇게만 알아둬.
또 잠깐동안 침묵이 이어졌음. 천천히, 메딕이 입을 열었음.
…니 말 맞나부다. 나가 치하긴 치햇납다.
이제 알았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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