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포(엔딩못냄. 낼 생각도 없음)

넌 절대 여기를 지나갈 수 없어

There can be only one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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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땡겼음. 그냥 필름이 끊길 때까지 실컷 퍼마시고 곯아떨어지고 싶었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취기가 돌기 시작하면 무슨 말을 하게 될 지 모를 것 같았음. 스파이를 상대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음. 저 징글맞은 독사새끼는 얻고 싶은 게 있으면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서 반드시 원하는 걸 캐내고야 마는 놈임. 씨발, 야비하고 음흉하고 음험한 첩자새끼. 데모는 울고싶은 기분이었음. 만약에 자기가 남자가 아니었다면 진짜 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음. 이게 지금 저 계집애마냥 비리비리하니 샹송같이 생겨먹은 놈을 향한 울분인지, 아니면 오만가지 다채로운 형태의 재앙을 일으켜서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즐거운 휴일을 선사해주신 하느님을 향한 울분인지는 모르겠음. 이도저도 아니라면, 자기 것도 아닌 남의 명예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스스로를 향한 울분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꾸 병목을 빨고 싶어서 혓바닥이 달달 떨렸지만, 데모는 잠자코 폭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담배를 한 개피 더 꺼내 물었음. 그리고 부시시 일어나 앉아서는 양 무릎을 지지대 삼아서 상체의 중심을 앞으로 기울였음. 될 수 있으면 스파이랑 등을 맞대는 건 피하고 싶었기 때문임. 불을 붙이고 쭈욱 빨아들이자 지독하리만치 씁쓸한 연기가 입 안을 가득 채웠음. 원래 데모는 담배 잘 안 피움. 주로 혼자 있을 때나 폭탄 제조할 때나 피우지. 딱히 담배보다는 술병을 입에 물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서 그런 건 아님.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대신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판단력이 둔해지게 됨. 안 그래도 데모는 살던 집을 통째로 날려먹은 경험이 있잖아? 티끌만한 수산화 나트륨 하나 계량하는 데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때에 병나발을 분다는 건 데모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짓거리였음. 반대로 담배를 피면 머리가 확 깨니까 정신을 집중하기엔 좋았지. 니트로 글리세린을 계량해야 할 때라던가, 홀로 한 명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 할 때라던가, 쓸데없이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비겁한 염탐꾼을 상대해야 할 때라던가. 응. 바로 지금 같은 때 말임. 폭약 만질 때 담배를 핀다는 것도 이상한 소리긴 하지만… 뭐 데모는 프로니까 ´_`담뱃불 조심하면서 작업하겠지. 대신에 머리가 핑핑 돌아가다 보니까, 평소에는 술로 억누르고 있는 신경줄까지 날이 바짝 선다는 점이 문제였음.

데모는 신사의 나라에서 온 친절한 술주정뱅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약하리만치 성질 더러운 고산지대 출신 스코틀랜드 인이기도 했음. 혈통 대대로 전해져내려오는 데모맨의 험악한 기질도 덤으로 가지고 태어났고. 그러니까, 데모가 다혈질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는 거지. 기분이 저조한 데모는 안전핀 빠진 수류탄같은 인간이라는 소리임. 친부모와 상봉한 후 거친 혹독한 훈련이 다져준 인내심, 그리고 짜증을 어느 정도 잠재워주는 술은 데모의 성깔머리를 막아주고 있는 방파제나 다름없었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점점 더 지독해지고 있는 알콜 의존증이 점점 더 통제를 힘들어지게 만들고 있어서 문제였지만. 알콜은 기분을 고양시켜서 짜증을 어느 정도 누그려뜨려 주었지만, 일단 한 번 기분이 나빠지기만 하면 오히려 한층 더 파괴적인 데모의 성향을 부추겼음. 데모는 웬만하면 남들이 자기를 유쾌한 미치광이 주정뱅이로기억해주길 바랬음. 신경질적인 미치광이 스코틀랜드 외눈박이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데모 스스로도 마찬가지였고. 상냥한 주정뱅이 신사, 추한 외눈박이 괴물, 그리고 데모맨인 자신. 정신 분열증 걸린 성격 파탄자마냥 그때그때 간편하게 인격을 갈아치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자기 통제가 가능할 만큼의 도움은 주었음. 데모는 소태마냥 쓴 잿빛 담배 연기가 뇌수 대신 자기 머리에 가득 들어찬 황금빛 사과주에 짙게 스며드는 걸 느끼며 생각했음.

자, 이제 이 귀찮은 거머리를 어떻게 떼어버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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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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