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The Taste Of Others
이 자식이, 축구랑 풋볼은 다르다니까 그러네?
뭐, 새꺄. 니네가 축구를 갖고 가서, 풋볼을 만들고, 그니까 그게 그러케 된 거 아니냐고. 꼽냐?
되긴 뭐가 돼? 짜식아. 우선 봐라. 이 똥그란 게 축구공이고, 그리고, 길쭉한 이게 풋볼이다. 봐라, 이게 똑같이 생겼냐?
공은 공이잖어, 그니까. 발로 까는 것도 똑같잖냐. 봐라, 풋볼. 까지? 축구공. 까지? 똑같잖어?
임마, 축구공은 계속 차잖아? 풋볼은 아니잖아!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어쨌든 공은 공 아니냐고, 샛꺄. 본질을 봐라. 결국 원조는 축구잖어, 축구. 근데 닌 그 군모 언제 벗냐?
안 벗어! 오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지. 블루 팀에 경례! 미국 만세!… 어쨌든. 자, 봐라. 축구공은 얼룩덜룩하지? 풋볼은 일관된 갈색이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
그러니까 본질을 보라고, 이 돌대가리 짜식아. 도대체 풋볼 그딴 거 뭣하러 보냐? 축구가 더 재미나지 않냐?… 딸꾹.
야이, 군기빠진 고문관 자식아. 그게 뭐가 재밌다고 그 난리야? 고작해야 제대로 된 전투 하나 벌어지지 않는 공차기 놀음 아냐?
또 며칠인가가 지났음.
딱히 바뀐 건 없었음. 휴가가 끝나고, 미션이 시작되고, 해가 지고, 해가 뜨고, 싸우고, 자고, 이기고, 지고. 딱히 할 말이 없네요…
데모랑 메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를 무시했음. 아니, 무시하려고 노력했음. 휴가가 끝나고 나서 첫 미션이 있었던 날이었음. 데모는 점착 폭탄을 탄창에 쑤셔넣으면서 메딕 쪽을 흘깃흘깃 살폈음. 그러거나 말거나 메딕은 데모한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음. 헤비가 메딕을 굽어보면서 뭐라고 말을 건네는 모습도 보였음. 아마도 걱정하는 거겠지. 메딕은 시종일관 무심하게 뭐라고 짧게만 대답하고 말았음. 헤비는 멋쩍은 듯이 뭐라고 말하곤 물러섰음. 겉보기엔 멀쩡한 것 같았음. 한참 미션 중일 때도 잘만 뛰어다녔고. 망할 중늙은이. 괜히 메딕을 신경쓰다 레드 데모 도끼질 한 방에 목이 달아난 건 솔직히, 뭐. 데모 본인 잘못이지. 그래도 뭔가 억울함. 뭔가 짜증남. 뭔가…
불만스러움. 데모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리스폰 장치를 나서면서 투덜거렸음. 그렇게 신경을 써 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안 하네. 아, 결국 모포는 깨끗하게 빨아서 소파에 개켜뒀음. 어차피 누가 덮어줬는지도 모르잖어. 그 날 하루 종일 누가 한 짓인지 물어보고 다녔는데, 결국 알아내질 못했거든. 모포를 덮어줄 만큼 여유가 쩔어넘치는 놈들한텐 한 번씩 다 물어보고 다녔는데도 말이지. 엔지랑, 솔저랑, 파이로랑, 음… 스카웃은 역시 아니었고. 스파이일 리는 죽어도 없을 것이고. 스나도 아닌 것 같고. 메딕?… 에이, 설마. 어쨌든 거기 놓으면 알아서 거둬가겠지 뭐. 그리고, 음… 좀 망설였지만, 그냥 냅두긴 뭣하니까 쪽지도 한 장 끼워뒀음. 스코틀랜드 하이랜더의 자부심 넘치는 유려한 필체로 몇 자 휘휘 갈겨적어서. 대충 요약하자면 이러함. 이불 빌려준 건 고마운데, 곰팡내가 너무 쩔어서 괴로웠음. 다음에는 좀 나은 모포로 골라서 덮어주길 바람. 이상, 친절머리 넘치는 자선가 양반에게. 그리고 데모의 예상대로 다음 날에 보니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음. 답장은 없었음. 누군진 몰라도 개그 센스 떨어지는 신사 양반임이 분명함. 투덜투덜.
그리고 데모는 한동안 자기 방에 기어들어가서 잤음. 거실에서 빈둥거리려니 찝찝하더라구. 스파이 만날까봐서. 그 놈만 보면 자꾸 입방정을 떤 한심한 기억이 떠오르거든.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미친듯이 술이 땡겨요, 아주. 어쩌겠어? 잘 하는 게 그것밖에 없는 걸, 뭐. 애초에 주책바가지 외눈박이한테 입단속을 바라는 쪽이 잘못 아닙니까요. 헤헤헤. 스파이 쪽에서도 데모를 피하는 모양인지, 미션때 말고는 통 볼 수가 없었음. 미션 때도 마찬가지였음. 뭐, 원래 직업 관계상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지만. 하긴, 스파이는 바보가 아님. 지금 이 타이밍에 괜히 데모 앞을 알짱거렸다간 작살나게 될 게 틀림없었음. 데모가 술만 잘 마시는 게 아니잖아. 허구한 날마다 거짓말이나 지껄이는 간사한 기생오라비 자식을 산산조각 내는 일도 데모의 특기였음. 그나마 다행인 건 스파이가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거였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 물론 아주 믿을 약속은 못 되지. 남 등쳐먹고 다니는 게 그 자식 천성 아니냐.
어쨌든, 그렇게 하루가 지났음. 또 지났음. 계속해서 지나갔음. 매일매일 뼈와 살과 피가 튀기는 것만 빼면 참 무사태평한 나날들이었음. 데모도 메딕도 슬슬, 자기들이 정말 같이 술을 마시긴 한 건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할 정도였음.
그리고 지금, 데모는 솔저와 투닥투닥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음. 드디어 도착한 사과주 한 상자를 받아들고, 좋아라 한 병 따서 들이키고, 약간 알딸딸한 상태에서 말이지. 시간대는 또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라고 치자. 발단은 저녁 뉴스에서 뜬금없이 내보낸 월드컵 특집이었음. 월드컵 시즌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뭐, 역사와 전통의 축빠국민 데모와 ,자유와 풋볼을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미합중국의 민간인 솔저의 사이에 불협화음을 조장하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떡밥이었음. 뭐? 친구라면서 왜 고작 그런 것 가지고 싸우냐고? 친구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암요. 그리고 둘 다 바보잖아. 팀원들의 평균 지능 지수를 떨어뜨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요원들이란 말이지.
새꺄, 스포츠맨쉽 모르냐? 스포츠맨쉽. 무슨 공차기 하는 데 일일이 치고박고 해서 쓰겠냐? 뽈질이란 건 말이다, 공이 굴러다니는 걸 보는 거다, 공이. 울긋불긋한 마운틴 고릴라 수십마리가 우격다짐 하는 거 구경하는 게 아니고.
너는, 자식아. 반팔에 반바지 입고 뛰어다니는 코딱지만한 기생오라비들 공놀음이 눈에 들어오냐? 차라리 같은 돈 주고 발레인지 뭔지나 보는 게 낫겠구만! 왜, 그 전신 타이츠 차려입고 춤춘답시고 사지 배배 꼬아대는 거 있잖아.
그거랑 그게 같냐? 골통도 네모지게 생겨먹어서는 내용물도 똑같이 사각사각 각져먹었냐? 덜 떨어진 군바리 자식아. 각진 TV 모서리로 한 번 맞아볼텨?
뭐야, 지금 시비거는 거야? 오오냐, 좋다. 요 체크무늬 스커트나 차려입고 다니는 귀염둥이 자식아. 전부터 네놈 혈관에 빨간 피가 흐르나, 스카치 위스키가 흐르나 궁금하던 참이었지!
누가 귀염둥이라굽쇼? 제인 도우 아주머니. 쪼오아, 축구의 고장 출신, 원조 훌리건 나가신다. 이 참에 누가 더 솜씨 좋은 용병인지 시험해 보자고.
씨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이제와서 후회하긴 늦었다. 넌 날 정말 화나게 만들었어, 요 곯아터진 산양 뱃속으로 만들어서 푹 삭아빠진 해기스같은 자식아!
…그렇게, 데모가 살기등등하게 빈 사과주 병을 붕붕 휘두르면서 어깨 관절을 뚜둑뚜둑 꺾어대고, 솔리가 험악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나무 의자를 집어들어서 무게를 가늠하듯이 훙훙 휘두르고, 여왕 폐하의 가호 아래 광대한 영토에 해 질날 없는 대영제국과 온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는 떠오르는 태양 북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기 다른 두 사람에 의해, 바야흐로 독립전쟁 이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처절한 대 사투가 벌어지려는 찰나였는데…
…뭐하쇼? 둘 다.
무잉?
어디서 태평한 말소리가 들려왔음. 거실 입구에 스카웃이랑 파이로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멍뎅하게 서 있었음. 스카웃의 다른 한 쪽 옆구리에는 모노폴리 상자가 낑겨있었음.
앙? 뭐야, 너네냐? 애들은 들어가 자라, 자.
그래, 너넨 저리 가 있어. 우린 지금 좀 바쁘다, 인석들아. 일단 요 복실복실한 양털대가리 짜식한테 한 방 날리고…
뭔 헛소린지. 설마 또 까먹은 건 아니죠? 솔저.
…엉, 뭘?
…무후웅.
존나…것 봐라, 파이로. 내 말 맞지? 어제 모노폴리 하다가 졸립다며 내일 마저 하자던 게 누굽니까, 예? 댁 아니냐고요.
어, 음…그랬었나?
한참 달리다가 자기가 질 것 같으니까 은근슬쩍 그렇게 말하잖아요? 아, 그런 법이 어딨냐니까 글쎄, 다 큰 어른이 창피하지도 않나? 막 부득부득 억지를 쓰면서…
뭣. 내, 내가 언제?!
무잉. 무앙무아앙, 무앙무뫙무왕!
얼씨구, 어르신. 또 치매끼가 도지셨슴까? 봐요, 파이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잖아요? 도망가는 거냐니까 내일은 기필코 결판을 내겠다면서 고집을 부린 게 어디 사는 누구시더라?
어랍쇼? 듣고보니 아주 비겁한 양반이셨네, 제인 도우 아주머니? 전선 이탈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거리 아녔나?
누, 누가 겁쟁이야! 그리고 은근슬쩍 또 그 이름으로 불렀겠다, 이 사악한 애꾸눈 자식아! 그냥 잊어먹은 거다, 그냥!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겁쟁이래요, 겁쟁이래요. 제인 도우는 겁쟁이래요.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이.
오, 그거 좋다. 굿잡, 데모! 얼렁 따라오시던가요, 말년 병장 어르신. 아니면 우리 둘 다 내일부터 저 노래를 동네방네 부르고…
야, 야이 자식아. 그런 짓은 왜 하려고 들어?! 유치하게스리!
무앙! 무아아아앙, 무아아아앙!
그러게, 아주 입에 짝짝 붙는다. 그지이? 우리 이거 미션 때도 부르고 다니자, 레드 팀한테도 들려줘야지 하지 않겠냐, 이 명곡을! 안 그래? 제인 도우느으으은, 겁쟁이래요! 캬캬캬캬캬!
무후후후후앙!
그치, 즉석에서 만들어 부른 것 치고는 죽여주지 않냐? 내가 말야, 짜식들아. 왕년에는 알아주는 노래쟁이라…
…아니, 그건 됐는뎁쇼. 별로 알고 싶지도 않거든요.
…무앙, 무앙.
이 자식들이, 보자보자하니까…알았어! 간다, 가! 누가 안 가겠다고 말이나 했냐?!
진작에 그렇게 나오셨어야지! 좋았어, 오늘은 이긴다! 기다려라, 우주정거장!
무앙! 무앙무앙, 무앙!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은 사라지고, 암묵적인 휴전 협약이 맺어졌음. 다시 한 번 거실에 평화가 찾아왔음. 잔뜩 신난 것처럼 보이는 파이로가 깡총깡총 모둠발로 뛰면서 발빠르게 기숙사로 달려갔음. 어젯 밤 1등은 파이로였단 말이지. 그런데, 한참 이기고 있는데 말야. 억울하게 놓쳐버렸단 말야, 1등을.
승리를.
이찌방을.
퍼스트를.
이게 다 모 미필 망상벽 환자가 판을 엎어버린 탓입니다.
그래서 파이로는 약이 잔뜩 올라있었음. 지독한 원한이 베갯잎을 쥐어뜯으며 날밤을 새고 나서도 하루가 다 가도록 사라지지 않았음. 오오, 원통한지고. 내 이 날을 죽어도 잊을 손가. 어드메에 호소한단 말이냐, 이 울분을… 그러니까, 오늘 미션 내내 레드 솔저를 죽어라고 쫓아다니면서 우체통으로 작신작신 후드려패서, 기어코 저 놈 싫다며 오늘 왜 저러냐며 엉엉 울게 만들어버린 데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지 말입니다. 지금 이 때조차도 반드시 1등을 먹고 말겠다면서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죄다 무앙무앙으로 들려서 아무도 못 알아들었음. 솔리는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투덜거리면서 파이로의 뒤를 따라갔음. 스카웃도 방금 전에 불렀던 노래를 콧소리로 흥얼거리며 뒤따라 가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멈춰섰음. 그리고 여전히 빈 사과주 병을 들고선 거실 한 가운데에 뻘쭘하게 서 있는 데모를 돌아봤음.
…아, 참. 데모, 어쩔래요? 마침 자리 하나 비는데.
엉? 뭐야, 누구 빠졌냐?
원래는 헤비도 끼어서 4명이서 하댔거든요? 근데, 오늘은 빠진다대요. 피곤하다나?
…음, 아니. 난 됐다. 너네끼리 놀아라.
에이, 뭘 빼고 그래요? 딱 한 판만 같이 뜁시다. 네? 댁이 끼면 존나 재밌을 것 같은데!
걍, 난…됐어. 뭐냐, 나도 피곤하걸랑, 음. 술을 너무 마셨나봐.
쩝, 그럼 엔지 영감님이라도 불러서 놀죠, 뭐. 세 명이서 뛰면 재미없으니까. 그럼, 조오온 밤 보내십쇼오.
오오냐, 느네도 너무 늦게 놀지 말고, 졸리면 식고 자라.
예이, 예이. 그쪽이야말로 늦게까지 술마시지 말고, 일찍 디비 잡셔어.
쓸데없는 걱정 치아라, 간지럽다. 딸꾹.
그 쪽이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심다. 맨날 꼬맹이 취급하고 있어!
뭘, 임마. 꼬맹이 맞잖어?
내가 진짜 저 영감태기를…아, 됐슴다. 예. 내가 참아야지.
얼씨구, 성인군자 납셨네. 그래, 가라 임마.
…그렇게, 스카웃도 사라지고, 거실에는 TV와 데모만 덩그러니 남겨졌음. 어쩌나? 데모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냉장고에서 새 술병을 하나 꺼내와서 옆구리에 꿰어찼음. 그리고선 그대로 소파에 대자로 자빠졌음. 아까 쓸데없는 일로 괜히 열내서 좀 덥단 말이지. 아직까지도 머리 끝까지 차오른 핏기가 가시질 않았음. 거실은 선선하니까 좋아. 공기도 맑고. 데모의 방은 화약 냄새랑 담배 냄새로 푹푹 쩔어있단 말이지. 잘 익은 사과주 향기도 더해서 말야. 사과주 냄새가 암만 좋으면 뭣합니까. 악취에 악취를 더하고, 거기에다 향기를 집어넣으면, 더 지독한 악취말고 뭐가 되겠습니까? 그게. 소파에도 참 오래간만에 누워본단 말야. 잠깐, 그러고 보니 방에서 자게 되고 나서 며칠이나 지났더라? 에이, 몰라. 데모는 꼬깃꼬깃 드러누운 채로 TV를 봤음. 밤이 깊은 탓인지 볼만한 프로그램은 얼마 없었음. 방송 종료 시간까지 딩굴거리다 방으로 들어가야지. 데모는 사과주 병목을 쭈압쭈압 빨면서 맹하니 생각했음.
그리고 자그만치 사과주 반 병 분량의 시간이 지나갔음. 뉴스가 끝나고, 퀴즈 쇼가 끝나고, 유행가가 몇 곡인가 흘러가고, 방송과 함께 마지막 곡도 끝나가고 있던 참이었음. 졸려서 하품을 짝짝 해대면서 소파에 파묻혀있던 데모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 생각 없었음. 그냥 보는 거임. 술과, 소파가 있으면, TV를 봐야 함. 그것은 관성의 법칙임. 황무지에는 슬픈 전설이 있지… 음악도 귀에 안 들어오는데, 발걸음 소리라고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그래서 데모는 메딕이 거실에 들어서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
정작 펄쩍 뛰어오를 만큼 깜짝 놀란 건 데모뿐이었음. 메딕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기를 보고 있는 데모를 힐끗 보고선, 그냥 휘적휘적 걸어서 식당 의자에 턱, 하고 걸터앉았음. 그러더니 잠자코 들고있던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음.
그게 끝이었음.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음. 간간이 사각사각 책장 넘어가는 소리랑, 아나운서가 대본을 읽어내려가는 단조로운 목소리만 울려퍼졌음. 벙쪄가지고선 메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데모는 더듬더듬 리모컨을 찾아서 TV의 전원을 껐음. 퍽, 하고 진공관에서 전기가 빠져나가는 요란스러운 소음이 들리고, 그리고 조용해졌음. 메딕은 여전히 책만 읽고 있었음. 데모나 TV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음.
…인사 정도는 하지 그래?
데모가 부루퉁하니 몹시 불편하신 심기를 역력히 드러내는 어투로 한참만에 입을 뗐음. 메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음. 사각, 하고 얇은 책장 하나가 넘어갔음. 그래도 메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음. 짜증이 치밀 대로 치민 데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지나가는 말처럼 심드렁하게 메딕이 대꾸했음.
그럴 필요 있나? 새삼스럽게.
야이. 새삼은 무슨, 삼나무 친척이냐? 만났으면 반갑다고 손이라도 흔들어야 할 거 아냐?
반가워.
끝이었음. 또 사각, 하고 얇은 책장 하나가 넘어갔음. 그리고 메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
…이 영감태기가 지금 누구 놀리나, 야이!
뭐?
인사 말야, 인사! 제대로…
했잖아.
엉?
했잖아, 제대로.
그게 제대로 한 거냐?!
그렇게 중요한가? 인사가.
어? 그, 아니…잠깐만. 어어? 그게… 그, 뭐시기냐. 좌우간 그거. 썅, 댁이 이상한 소릴 하니까 말이 자꾸 꼬이잖아?
이상한 소리라니?
했잖아! 아, 그…좌우간! 내가 뭘 말하고 싶었냐면, 팀 메이트답게 굴라고. 팀 메이트면. 끝이다. 어때? 떫냐?
…취했군, 자네.
…뭐, 임마? 취하긴 누가 취했다고 그래? 그래! 취했다니까 말인데, 댁이랑 나랑 술도 같이 마시고, 밥도 같이 쳐먹고, 뭐 그런 사이 아냐. 아녀?
그래서?
그니까! 뭐, 밥은 잡수셨수? 라던가, 아, 오늘 날씨가 참 좋구만요? 라던가, 그런 건, 그래! 별로 바라지도 않는데, 쫌 곰살맞게 굴 수는 없냐 이거야! 뭔, 시방, 말투 하나하나마다 그냥, 아주 밥맛이 뚝뚝 떨어지게스리, 그래서? 저래서? 자네 취했구만…이게 뭐냔 말야?
평소와 다를 것 없잖아.
야이, 요 늙다리 염소 샛갸. 이런저런그런 일이 있었는데, 평소? 펴엉소오? 취해서 정신줄 놨을때 누가 간수해 줬는지 알고는 있냐? 엉?
그게 뭐?
엉? 뭐, 이…내, 이 쉬어터진 맥주통을 그냥…
처음 말을 꺼낸 건 자네잖아.
…야이, 술 달라고 조른 건 누구야?! 댁 아니냐고?!
말리지 못한 자네 탓이지.
…어우. 이야. 아주 수준급이다, 수준급. 남 빡치게 만드는 데 아주 타고나셨어. 책임 전가도 기똥차요, 그냥. 그래서, 뭐? 그게 아니꼬와서 지금 시위하는 거라, 이거냐?
사각, 하고 얇은 책장 하나가 넘어갔음. 메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 데모도 아무런 말이 없었음. 아무도 말이 없었음.
또 사각, 하고 얇은 책장 하나가 넘어갔음. 메딕은 여전히 데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음.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릴 해라. 지금 내 표정 보이냐? 엉? 하긴, 책 보느라 바빠갖고 보이지도 않지?
그래서, 바라는 게 뭔가?
뭘?
인사는 했잖아.
…됐다, 씨발.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무슨 기대?
치우라고. 귓구녕을 틀어막았냐? 책이나 봐.
배은망덕한 돌팔이 영감태기. 데모는 도로 메딕한테서 등을 돌려서 소파까지 터벅터벅 걸어갔음. 그리고선 풀썩, 하고 도로 드러누워 버렸음. 사실, 딱히 뭘 바라고 말을 건 건 아니었단 말이지. 어쨌든 같이 술을 마시긴 했잖아. 아는 척 정도는 해 줬으면 좋겠다, 뭐 이런 가벼운 생각으로 말을 건 거란 말야. 그리고…단 둘이서 만난 건 오랫만이잖아. 미션 빼고, 사적으로. 그러니까…반갑잖아? 적어도 평소보단 좀 살갑게 굴 수는 없느냐, 이거지.
…뭐. 어쩔 수 없다고 쳐. 메딕 성격은 원래 저러니까. 관심거리가 아니면 입도 뻥끗 안 하는 괴팍한 영감태기니까. 사람 성질머리가 술 먹고 뻗는다고 하루아침만에 바뀔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뭘 바라고 아는 척을 한 건지 모르겠어. 사실,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함. 원래 저 인간이 저렇게 밥맛없는 성격인 걸 빤히 아는데 말야. 순 자기밖에 모르고, 남은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눈꼽만큼도. 취미라곤 비둘기에, 시체 해부에, 책 읽는 게 다인 벽창호같은 양반이고. 기대를 하는 게 잘못이지. 그러니까…무슨 기대?어쨌든. 데모는 소파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생각했음. 자꾸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자기가 멍청하게 느껴짐. 그만 생각하고 싶어도 뭔가 자꾸…신경쓰임. 괘씸함. 이게 다 술 탓이지 뭐.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맹하니, 사과주나 홀짝이기로 함. 독은 독으로 다스려야 제맛이지.
사각, 하고 책장이 넘어갔음. 꼴딱, 하고 사과주도 한 모금씩 넘어갔음.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음. 그냥,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을 뿐이었음. 사각, 꼴딱. 사각, 꼴딱. 사각…술이랑 책의 차이점이 뭐게요? 책은 안 취하고, 술은 취한다는 거지. 그게 뭐냐구여? 넌센스 퀴즈임. 데헷-☆…여튼. 그래서, 사과주에 머리 꼭대기까지 푹 절은 데모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멈춘 것도 몰랐음. 그냥 관성의 법칙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사과주를 들이켰음. 꼴딱, 꼴딱, 꼴딱.
미안해.
메딕이 말했음.
그제서야 데모는 기계적으로 술병을 들이키던 걸 멈췄음. 병 밑바닥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사과주가 경쾌하게 찰랑, 하고 요동을 쳤음. 메딕은 책에서 눈을 떼고 데모를 보고 있었음. 만약에 데모가 메딕을 보고 누워있었다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임. 그리고, 거나하게 취해있지만 않았다면.
뭐가.
…음.
…그러니까, 뭐가.
화 나게 만들었잖아. 내가…
누가 화냈다고?
그러지 마, 유치해.
…그게 사과하는 놈이 할 말이냐?
아.
아, 는 무슨…
미안해, 진심으로…
…한 대 친다?
…데모. 진정해. 아무리 다혈질이라지만 설마, 이렇게 인사 한 번 거스른 것 정도로 화를 낼 줄은…
어이, 의사양반.
음? 뭘?
스스로 알고는 있냐? 남 성질 돋구는 말만 골라서 지껄이는 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니면…
왜? 자네도 잘 알잖아, 내 성격.
…그래, 잘 알지. 존나게 잘 알지. 그러니까 닥쳐.
…싫은데?
앙? 지금 뭐라고…
모포.
뭐?…모포가, 뭐?
그렇게 지독했나? 냄새가.
엉? 어어…몰라. 기억 안 나.
…놀랄 줄 알았는데.
뭐야, 놀랬으면 했냐? 지랄, 날 놀래키려면 네스 호의 괴물 정도는 끌고 와야지. 쌤쌤으로 치자고? 내가 취해서 뻗은 댁을 챙겨주고, 댁은 나한테 모포 덮어주고. 맞아?
…아니야. 전혀 아닌 건 아니지만.
전혀 아닌 게 아닌 건 아니면, 네미랄. 뭔데?
데모, 제발. 비꼬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코트. 자네가 놓아뒀지? 수술대에.
지랄, 먼저 시비건 건 댁이잖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고, 저렇고, 그러저러하고…글쎄? 맞을걸? 몰라. 알아서 생각하셔.
자네는…아니, 됐어. 안경도? 넥타이도, 자네가?
그을쎄다아. 따로 놔둔 놈 없음, 내가 냅뒀겠지. 그게 그렇게 궁금해?
아니, 별로.
그럼 왜 물어봐? 남이 기분좋게 취해있는데…
비둘기 밥도 주고 가지 그랬나. 하루 종일 굶어서 화가 잔뜩…
…야이, 노린내나는 독일놈아. 뭐 그렇게 바라는 게 많어?!
뺀질뺀질한 메딕의 마지막 망언에, 데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뽈칵 일어나서 돌아봤음. 그리고, 굳었음.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음. 메딕은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나서, 엉거주춤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 데모는 엉거주춤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덤벼들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음. 진심으로 열받아서 벌떡 인난 건 좋은데,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은 메딕의 표정을 보니까 뭔가…음. 기세가 팍 죽어버렸음. 뭐야. 잔뜩 약을 올려놓고, 자기가 당황하면 어떡해?
당황한 건 메딕도 마찬가지였음. 메딕은 사과를 하려고 나온 거였음. 레알 ㅇㅇ 근데 왜 책을 들고 나왔냐고? 그러니까, 그거임. 그…러니까. 평생동안 진심으로 해 본 적이 없단 말이지. 그…사과를. 미안하다고. 그러니까…쑥스럽잖아. 그 놈 눈을 어떻게 똑바로 마주보고 사과를 하냐고?…아니, 그. 어차피 눈이 한 쪽밖에 없으니까. 똑바로 마주보고 싶어도 마주볼 수는 없지. 어쨌든…그, 고맙다는 말도 해야 하고. 고맙다는 말이야, 뭐, 맨날 스쳐지나가면서 하는 말이잖아. 그거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단 말야. 그거 자체는. 응. 근데…
그 난리를 피워댔잖아. 그리고…깜짝 고백도. 음. 저질렀고. 저질러 버렸고, 저지르고 말았고.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고도 싶고. 어, 뭐, 별로 알고싶지는 않지만…일단 알아둬야 하긴 할 거 아냐, 궁금하니까. 눈 딱 감고 물어봐야지. 어쩌겠어? 자기도 기억이 안 나서 죽을 노릇인데. 필름이 끊겨서…그러니까, 음, 미친 놈처럼 낄낄대고, 음…음….술병을 입에 물고 모둠발로 뛰면서 식당을 한 바퀴…음, 숨바꼭질…안경을…음.
좌우간. 그래서, 나와봤음. 데모는 꽐라가 되어갖고 소파에 나뒹굴고 있었음. 그거야 뭐, 늘상 있는 일이지. 거기까진 예상대로야. 시크하게 쓱 지나가서, 시크하게 턱 하고 식탁에 앉았음. 일단, 소파는 데모가 점령하고 있고, 그리고…음.
사실, 애초에 생각했던 건 이거임. 유들유들하게 등장해서, 유들유들하게 대화를 시작하는 거임. 뭐…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시작하는 거임. 평소대로. 간단하잖아? 근데 데모가 소파에 길게 늘어져서, 또 눈은 팅팅 부어갖고 게슴츠레 쳐다보니까, 음. 뭔가, 음. 꼬릿꼬릿한 기분이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거였음. 저런 놈한테 머릴 숙여야 하다니, 뭔가…
하찮음. 뭔가 비참하고. 저런 부랑부랑한 공원 노숙자같은 놈한테 무릎 끓고 빌어야 한다구? 얼굴은 또 시커매가지구, 도둑놈처럼 생겨먹어서는…그런데 자기가 저런 놈 앞에서 그런…짓거리를 벌였다는 게, 또, 쪽팔려 죽을 노릇이고. 그러니까, 넥타이를…구두를 머리에다…까르륵꺌꺌낄낄 웃으면서…요런저런 고민이 마구마구 샘솟는 거임. 그러자니,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또 뻘쭘해지고. 계속 서 있으면 더 뻘쭘해질 것 같고.그래서…음. 그렇게 된 거임. 머리가 하얗게 되어갖고 움직이다 보니, 어느 새 식탁에 앉아있었음. 망했어요…
차마 데모 쪽은 돌아볼 수가 없었음. 돌아봤다가 눈 마주치면 어떡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음, 상상하기 싫고. 태연한 모습을 애써 가장하면서, 속으로는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지. 당장의 상황을 모면한 건 좋은데, 얼떨결에 쌍콤하게 데모를 무시해 버렸단 말이지. 뻘하게 들어와서, 뻘하게 앉아서, 뻘하게, 아, 오늘 날씨 참 좋넹 ㅎㅎ, 하고…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냐? 바보냐? 그러자니, 가만히 앉아서 책만 읽다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뭔가 그럴 듯하게 말 꺼내는 법 없나? 그, 자존심을 최대한 지키면서, 한 마디만 톡, 하고 내뱉어도 데모의 관심을 확, 하고 끌어당길 그런 쌍콤한 뭐시기가…음…
근데 데모가 뽈칵 성을 내면서 시비를 걸어옴. 옳다구나, 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마침 잘 됐다. 이걸 구실삼아서 슬쩍슬쩍 대화의 방향을 사과와, 감사 인사와,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이라던가…뭐 그런 걸로 돌려보면 되겠구나! 근데 메딕도 성질이 곱상한 양반이 아니잖아. 또…아직 생각도 복닥복닥하니 정리가 안 된 상태고. 그래서 사과를 하러 나온 건데 얼떨결에 욱, 하고 딴지를 걸고 말았음. 또 뽈칵, 하고 시비를 걸고 말았음. 안 그래도 당황하고 있었는데…당황은 당황을 낳고, 당황의 당황은 당황의 당황의 당황을 낳고. 오오, 그것은 무수한 당황의 연쇄 반응. 결국 패망은 그렇게 찾아오고 말았던 것이었음.
…뭐?!
버럭, 하고 데모가 괜시레 고함을 질렀음. 엉거주춤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보려는 취지였음. 그 통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메딕이 또 옴찔, 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뺐음. 고 심장마비 걸려서 죽은 말뼈다귀같은 꼬락서니를 보니까 또, 괜시레 죄책감이 드는 것이었음. 아니, 겁을 주려던 게 아니고 그…뭐시다냐, 그. 허우대도 멀쩡한 영감태기가 왜 쫄고 야단이야? 댁 용병 아녀? 애초에…어, 왜 화가 났더라? 데모는 사과주에 푹 졸아든 전두엽을 열심히 굴려가면서 생각을 하려고 했음. 거시기, 비둘기가 배가 고파서 화가 난 건…아니고. 왜 비둘기 밥을 안 주냐고 하니까 화가 난 거고? 맞나? 그러니까 저 놈의 의사양반이 속을 살살 긁어대서…거기까지 생각하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뻘하게 데모를 쳐다보고 있는 메딕이 눈에 띄었음. 그래, 애초에 저 인간이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거 아냐? 사과주나 퍼마시고…
…댁은 왜 이 시간에 나와있고 지랄야?!
안 될 건 없잖아!? 그리고 일일이 소리지를 필요 없잖아? 한밤중인데, 부끄럽지도 않나? 이 주정뱅이야!
되려 기지배같은 목소리로 빽빽 고함을 질러대는 메딕을 보니까, 또 속에서 뭐가 뽈칵하고 치밀어오름. 하지만 여기서 대인배 데모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끌어모으기로 했음. 맞는 말이긴 하잖어. 그러니까…한밤중이라는 거. 괜히 소란 피웠다가 누가 나와보면 어쩔 거냐고. 어떻게 설명할 거야? 솔직하게 실토해? 시꺼먼 사내새끼 둘이서 기집애들처럼 빽빽 고함을 지르면서 싸웠다고. 게다가 그 원인이라는 게 글쎄, 뒤늦게 성 정체성을 깨닫고서 의사양반이…
…그제서야 스파이와의 일이 떠올랐음. 푹푹 달아오른 머리통이 순식간에 팍, 하고 식어버리는 걸 느꼈음. 그렇게 오도방정을 떨지 않으려고 애를 써 놓고, 술김에 무슨 짓이냔 말야, 이게. 이미 한 번 스파이한테 고자질을 해 놓고…대놓고 떠든 건 아닌데, 술김에 주책맞은 짓을 벌인 건 사실이잖어. 고자질이나 다름없지, 뭐. 뻔뻔한 쪽이 누구냔 말야.
어…음. 그러네. 안 그럴게…소리 안 지른다고. 그러니까, 말해 봐.
혼자 뽈칵 성내다 이번엔 침울해진 데모를 보고, 한 박스짜리 분량의 진단서가 메딕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음. 알콜 중독으로 인한 조울증, 고혈압, 심근경색 합병증…그런데 이걸 입 밖에 냈다간 또 데모가 성을 낼 것 같음. 그래서 소인배 메딕은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해서 망청하게 되물었음.
…뭘?
엉?…그, 말할 거 아녔냐? 뭘.
뭘?
…얌마.
…음. 음음…그.
…어.
…책, 읽으러 나왔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호오오. 근데 댁, 원래 여기서 책 안 읽잖어?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음? 음, 아까 말 했잖아? 내가 맨날 의무실 안에 쳐박혀 있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자네야말로 안 하던 짓을 하고…
무슨, 뭐!? 안 하던 짓이 뭔데?
최근 며칠간 통 거실에 나오질 않았잖아! 왜 또 소릴 지르고 난리야? 목소리 좀 낮추라고 했잖아!
뭣, 뭐 임마, 누가 당황했다고 그래!? 댁이야말로 기생오라비 같은 소리로 비명 좀 고만 질러대! 그딴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어?
…어? 근데, 진짜 댁이 어떻게…
아냐! 아니고, 그…스나이퍼가 그랬어! 진통제 받으러 왔을 때, 저번에. 맞아, 음. 그 때.
…그 자식, 밤엔 여기 얼씬도 안 하잖어?
어?…아니, 그…그게.
호오오오오오. 설마, 매일 밤마다 요러고 있었어? 나 찾으려고?
…책 읽으러 나왔다고 했잖아! 술 좀 작작 마셔, 이 주정뱅이야!
어엉. 그래, 그래. 책 읽으러 나오셨다구요? 암요. 근데, 뭐 할 말 있어? 있으면 미션 때나 뭐, 점심 때나 와갖고 말을 하던가…
이 주정뱅이가,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네놈 간을 뜯어내고 대신 인도 물소 간을 쳐넣을 테다! 난 그런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싫어! 그것 뿐이야! 그리고 내가 먼저 찾아가면 네놈이 이렇게, 착각을 하니까…
쉿, 의사양반. 쉿쉿, 다들 깬다? 이러다.
이…음. 험…그, 어쨌든. 자네 음주습관은, 뭐, 의사로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로서 하는 소리인데, 상관은 없어. 취해서 마룻바닥을 구르다 얼어죽건, 간경변으로 온 몸이 불어터져 죽건, 내 상관할 바는 아니란 말이야. 다만 취해서 날 보고 쓸데없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아, 저기요, 선생님. 질문요. 손요. 선생니임?
이 버릇없는 주정뱅이가? 남이 선심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해 주고 있는데, 잠자코…
…뭐, 진짜 할 말 없어?
뭘?! 하고 있잖아!
아니, 고거 말고. 따로 할 말 없냐고, 뭐. 진심으로.
…
…없어? 없음…
…모포를 덮어줬으면 덮어준 것 만으로 감지덕지 하란 말이야! 냄새니 뭐니 불평하지 말고!
아, 왜 또 혼자 흥분을 하고 그러시나…쉿, 메딕, 쉿.
음…음.
…더는 없수?
…음.
…뭐냐.
음?
담엔 모이 줄게. 뭐시냐, 댁이 또 술마시고 뻗으면.
아.
응?
…안 마셔!
…아, 예.
그리고 줄 필요 없어! 어디서 감히 남의 비둘기 모이를 준다만다 난리야? 내 비둘기 모이는 내가 줘! 네놈 도움따윈 필요 없어!
알았으니까, 메딕. 쉬잇.
음음…음.
댁은 왜, 건드리기만 하면 빽빽 지랄을 떨어대고 난리야. 내 참, 술도 안 마셔놓고…
…데.
데?
…데그룻.
…고건 건너편 베이스 사는 놈이고요.
자넨 그럼, 뭐야?
엥? 내 이름 가르쳐 달라고? 지금 작업거냐? 에이, 참. 나 호모 아니라니깐 그러네?
그 꼬락서니로 굴러다니는데, 자당께서는 가만 계신단 말인가? 응?
이 새끼가 또, 뭔 소릴 하나 했더니…애먼 남 부모님은 왜 들먹이고 지랄야? 당연히 집에서는 안 이러고 다니지, 떫냐?
꼴사나웠나? 응?
이번엔 또 뭐래…댁 술마셨어? 또?
취해서 이상한 소리 하고, 이상한 짓 하고, 꼴사나웠냐고 묻잖아! 자네도 꼴사나운 줄은 안다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 뒷처리 하면서, 응?! 한심하다고 생각했지?! 주책맞은 중늙은이가, 그것도….
아, 또. 뭔…일단 닥쳐봐. 그리고 머리 좀 식혀.
닥쳐, Schweinhund! 서 푼어치 건달같은 자식이, 내 머린…
썩은 호박같겠지, 새꺄. 입 좀 다물어라, 엉? 지금 광고하냐? 여러분, 부디 침대에서 빨딱 일어나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제 성적 취향은 좀 특이한 편에 속하거든요…차라리 내가 지금 빨딱 인나갖고 깨우고 돌아다니는 게 낫겠네. 그래줬으면 좋겠어? 엉? 단상 놓고, 마이크 놓고, 연미복도 다려줘?
재미있는 변화였음. 데모는 가만히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늘어진 채로 감상을 했음. 뾰족한 귀끝까지 온통 새빨갛게 물든 메딕의 피부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시는 거였음. 거창하게 들먹이던 어깨도 움직임이 차차 잦아들었음. 마침내는 도로 밀랍인형처럼 새하얀 피부로 돌아갔음. 여전히 뺨 언저리는 발그레하니 물이 들어있었음. 마냥 흡혈귀처럼 피도 눈물도 없을 줄 알았는데. 데모는 술에 쩔어 게슴츠레하니 팅팅 부은 눈으로 쳐다보며 생각했음. 부끄러워 할 줄도 알고 말야. 게다가 눈가도 촉촉하니 어째 눈물까지 맺혀있는 것 같았음. 이건 좀 부끄러워해도 될 만한 꼬락서니인 것 같음. 메딕은 잠깐동안 그렇게 뻣뻣하게 서서 데모를 노려보다, 시선을 비끼고서 도로 앉아버렸음. 털썩,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강경한 동작이었음. 과연 독일놈답다. 데모는 부랑하게 늘어져서는 그렇게 생각했음. 혼자 스코틀랜드 체면을 다 잡아먹으면서.
…냉수 떠 주랴?
…됐어.
아직도 속이 안 풀렸냐? 그 난리를 떨어놓고.
…닥쳐, 주정뱅이.
뭔, 도와줘도 욕질이야. 물에 빠진 새끼 봇짐 건져줬더니, 뭐시기. 내가 딱 그 짝이네.
…데모.
…뭐, 새꺄.
…그.
말해.
…기분이, 좋지는 않지?…지금.
그럼, 새꺄. 지금 지저스 크라이스트께서 가라사대, 싸대기를 후려맞았으면 반대편 싸대기도 알아서 갖다 바치거라. 그래, 반대편 싸대기까지 디밀었더니, 좋다고 후라이팬까지 들고와선 냅다 후려갈기는 격인데, 이게 기분이 구려지지 않고 배길 상황이냐? 생각을 좀 해 봐라, 임마.
메딕은 가만히 고개를 모로 꼬고 앉아있었음. 비틀린 비둘기 모가지마냥 기운이 없어보이는 모습이었음. 방금 전까지는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마냥 고함을 질러대더니. 참 온도차도 심한 양반이라고, 데모는 멍뎅하니 엎드려갖고 생각했음. 어쩌면 속내는 자기보다도 더 정신없는 양반인 거 아닌가, 싶기도 했음. 의사양반이 저렇게 사정없이 망가지는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까, 되려 머리가 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데모라도 정신줄을 바짝 잡고 있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기분이 붕 뜨려고 할 때마다 말실수한 기억이 떠올라서 다잡아 주는 걸 지도 모름, 무게추처럼. 졸려 죽겠는데 오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야. 데모는 알콜에 푹 절어서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맹하니 메딕을 쳐다보고 있었음.
…데모?
왜, 임마.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라, 고추달린 자식이.
그…계속, 그, 유치하게…
음냐…메딕.
음?
취했걸랑? 나.
음?…음.
졸립거든?
…아, 그래. 그렇다면…
잤다 깨면 홀랑 까먹을 거라고.
…뭐?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걍 말을 하라고. 똥폼 잡고 허세부리지 말고.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냐.
그렇게 쉬운 게…
쉬워, 새꺄. 안 그럼 내가 술을 왜 마시겠냐, 엉? 댁은 술 왜 마셨어? 알았으면 지껄여. 뭔 소릴 지껄이든,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니까, 그렇게만 알아놔.
…주정뱅이.
음냐.
멀리서도 메딕의 파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게 보였음. 힐끔힐끔 자빠져 있는 데모 쪽을 쳐다보기도 했음. 건어물전에 쪼로록 엮여있는 동태 눈깔같은 데모의 눈을 보니까, 정말 아무 소리나 지껄여도 상관 없을 것 같기도 함. 동태보다는 생선 튀김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함. 쭈욱 늘어져서 엎어져 있는 꼬락서니가. 그러니까, 재탕에 삼탕을 거듭한 기름에다 튀긴 것 같은 꾀죄죄한 생선 튀김. 하도 하찮아보이는 몰골이 뭔가 용기를 주는 것 같기도 함.
그.
옹야.
…그러니까, 그 거만한 태도는 뭐야? 구질구질한 주정뱅이 주제에. 잠자코 있겠다고 했잖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챙겨준 건 고맙지만.
…그 말 하는게 그렇게 힘드냐?
이…잠자코, 있으라고, 그렇게!
쉿, 메딕, 쉬잇.
…도대체, 안경 같은 건 어떻게 챙길 생각을 한 건지. 그렇게 주변머리가 없어서야. 툭하면 트림이나 해 대면서…
아니, 뭐…어쩔 수가 없잖어. 생리현상인 걸. 의사양반이라면 알 거 아녀? 참으면 병 된다고…
…잠자코 있으라고 했잖아. 그리고…자네는 조금 자제를 할 필요가 있어. 비둘기들이 놀라지는 않던가?
뭐어…가만 있던데? 처음엔 봉제 인형인 줄 알았지.
음…다행이군.
뭐야, 비둘기들이 그렇게 걱정스럽냐?
아니, 자네가. 함부로 자극하면 위험하니까.
…아, 비둘기가? 엉.
어둡지는 않던가? 스위치를 찾기 힘들었을 텐데.
아, 그거? 댁이 가르쳐줬는데. 기억 안 나?
…아니. 거실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이 나는데…
술병 들고 술래잡기 한 건 기억나냐? 나잡아봐아라아, 호홍! 하고.
…아니.
구두 갖고 인형놀이 한 건 기억나냐? 얘는 무좀이구요, 얘는 다지증이구요, 하고.
…아니…그만. 그런 게 아니라, 데모. 내가, 혹시.
음? 뭐?
…이상한…불쾌한 짓은.
이상한 짓?…아. 아아니? 뭐냐, 업히라니까 후장 따 먹는다는 소린 했지. 푸헤. 댁도 그런 소릴 다 할 줄 아네, 싶더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음. 사실이잖아? 웃기기도 하고. 그러니까…메딕도 그렇게 받아들일 줄 알았지. 그런데 메딕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싸악 가시는 거였음. 안 그래도 희끄무레죽죽한 얼굴인데, 락스를 병째로 들이부은 것마냥 온통 시퍼렇게 변하는 거였음. 데모의 창자 구비구비마다 찐득하니 박혀있던 알콜 덩어리가 훅, 하고 단숨에 날아가는 게 느껴졌음. 아차.
아, 저. 그게 다야. 진짜. 난 별 생각 없었어. 술김에 지껄인 거니깐, 진심 아니잖어? 그지?
난…미안해.
에이, 이거 왜 이래? 갑자기, 무섭잖어?
빚, 지는 것 같아서.
음냐, 무슨 빚? 사과주 이야기냐?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그냥…모르는 척 할까, 생각도 해 봤지. 기억을 못 하는 것처럼. 자네와…나만 알고 있는 일이니까, 그 일은. 그렇지?
스파이도 알고 있는데요. 데모는 대답하는 대신 입만 꾹 다물었음. 내리 삼일 밤낮동안 안주도 없이 술만 진탕 퍼마시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음. 분위기도 우중충한데, 바른대로 이실직고 했다간 얄짤없이 갈린 사과 꼴이 될 것 같았음. 그래서…그냥, 모르는 척 하기로 했음. 다행히 메딕은 갑자기 조용해진 데모를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음. 열심히 생각을 하느라 그런 것 같음. 메딕의 말은 두서없이 계속해서 이어졌음.
자네가 누군가에게 말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했었지. 하지만…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야. 그래도…그 이유 때문에, 자네와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아마도…그래서 아마, 빚…을 지는 것처럼 느꼈던 건지도 모르고. 그런데…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만 하게 되는군. 이래서야…아니, 처음부터 이런 식이었지. 그래, 내 잘못이지. 자존심만 앞세우는 바람에…난…아니. 자네가 화 낼 만도 해. 그러니까…음…
음냐.
…고마워.
옹야.
…데모? 자나?
음냐?
…아, 됐어. 어차피…
들었어, 임마. 두…는, 아니고. 외눈깔 똑바루 뜨고 있는 인간 산송장 취급하지 말어.
…그래. 그럼…이제 끝내도 되겠나?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지?
음…댁도 참, 말주변이 없네.
…들어가 보도록 하지. 여기서 잘 생각인가?
그을쎄다아…
…음.
…뭐?
…아니. 소파는 침대가 아니야, 데모.
어디서 자던 내 맘이지, 짜샤. 왜 자꾸 시비야?
시비가 아니야, 사실이지. 의사의 입장으로서도, 그다지 바람직한 습관이라고는 평할 수 없네. 주정뱅이. 그럼.
얌마, 메딕.
음?
술 먹고 하는 짓거리는, 걍 잊는 거야. 기분 좋으려고 먹는 거잖어. 그니깐 기분 좋았으면, 땡이지. 알겠냐?
…주정뱅이.
술 먹으면 다 머저리가 되는 법이야. 하느님이건, 여왕님이건…여왕폐하 만세, 네미. 취한 놈 치고 바보 아닌 놈 없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댁도 마찬가지구.
…알아.
그리구 말야, 내가 정말 화난 게 뭔 줄 아냐? 댁이 술마시고 난리 피운 것도 아니고, 댁이 빽빽거려서 빡빡 신경줄을 긁어놓아서도 아냐. 뭐겠냐?
몰라.
인사 좀 하고 살아라. 만났으면 반갑다고 빵끗, 헤어질 때도 빵끗. 기본 아니냐? 지금도 말야, 그럼이 뭐냐? 정 떨어지게스리. 잘 주무시라던가, 좋은 꿈 꾸시라던가. 좀 그래봐라, 자식아.
…침대에서 자.
땡, 50점. 글러먹었어. 친절함이 부족해, 친절함이.
메딕은 대답하지 않았음. 대신 미간만 팍삭 찡그려 보였을 뿐이었음. 데모는 그걸 보고서도 꾸덕꾸덕 마른 동태같은 눈을 조금 치켜뜨기만 하고 말았음. 그리고 메딕은 성큼성큼 일어나서 걸어가 버렸음.
방으로 돌아가려는 거겠지. 망할 영감태기, 끝까지 재수없게 굴어요. 데모는 여전히 어물전의 꼴뚜기마냥 늘어져서 투덜거렸음. 속으로만. 딱히 누가 들을까봐서 그런 건 아니고, 입을 놀리는 것도 귀찮기 때문일 뿐임. 그래도 마지막에 한 소리는 제법 새겨들을 만한 것 같음. 평소 메딕의 행동거지를 생각해 보면, 그 영감태기 나름대로 최대한 선심을 쓴 것일 지도 모름. 성질머리도 고약해 쳐먹은 중늙은이. 데모는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음. 까짓거, 들어주지 뭐.
그래서 데모는 침대에서 자기로 마음을 먹었음. 딱히 곰팡내나는 모포를 덮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음. 하긴, 데모가 어떻게 예상을 했겠어? 메딕이 모포를 가지고 돌아올 거라고 말이지. 그리곤 비어있는 소파를 보고 도로 들어갈 거라고. 고시랑대면서.
망할 주정뱅이, 들어갈 거면 미리 말을 하던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