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의사양반의 슬픔

The sorrows of old doktor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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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는 TV 켜놓고 소파에서 뒹굴뒹굴 술마시면서 보다가 곯아떨어져 있었음.

그러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내려가니까, 추워질 거 아냐? 술병 껴안고 드르렁 드르렁 자다가 으슬으슬해져서 눈을 뜸. 대낮부터 신나게 병나발을 불어댔으니 당연히 천하의 술고래라도 쩔어주는 숙취를 느낌. 손가락 하나 까딱할 만한 기분이 아니겠지… 일단 드러누운 상태로 더듬더듬 리모콘을 찾아서 쥠. 그리고 시끄러워서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TV부터 끔. 그리고 도저히 일어날 만한 상태가 아니니까, 일단 속이 좀 진정될 때 까지 천장이랑 눈씨름을 하고 있기로 결심함. 한참을 누워서 천장에 생긴 얼룩을 헤아리면서 저기 나 있는 얼룩이 정말 두 개의 얼룩인가, 혹시 숙취로 동공이 풀려서 두 개로 보이는 것은 아닌가,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라, 자세히 보니까 세 개 같은데? 어라?…이러고 앉아있다 배가 고파졌음. 그럼 이제 부시시 인나서 밥먹을 준비해야지? 이상 자취하는_복학생의_하루.txt 였습니다.

일단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질 것 같음. 이럴 때 데모의 해결법은 뭐다? 술. 냉장고에서 사과주 병 하나 꺼내서 시원하게 드링킹부터 함. 사알짝 머리가 몽롱해지는 게 참 좋음. 아이 조아. 근데 빈 속에 술을 들이키니까, 속이 안 좋잖아? 가뜩이나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중인데. 대충 속도 안 좋은 거 스크램블 햄에그나 만들어 먹어야지, 하고 후라이팬을 달구고 있는데 문득 인기척이 나서 현관쪽을 봄. 보니까 메딕이 외출이라도 할 모양인지 코트 차림으로 현관을 향하고 있는 거임. 이제 보니 베이스에 스나랑 자기만 남아있는 게 아니고 메딕도 있었던 거임. 기척조차 없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거지. 저도 모르게 뭐야, 있었네? 하고 얼빠진 목소리로 말해버림. 그 소리에 메딕은 나가려다 말고 주방 쪽을 돌아봄. 어…주방이랑 현관이랑 대충 훤히 보이는 구조라고 해 두지 뭐 ´_`메딕이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데모는 바로 당황해서 아 시발, 내가 왜 그랬지? 하고 조금 후회했음. 저 성질 더러운 양반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기를 불러세웠다고 하면 가만 있지 않을 것 같았거든. 뭐 어차피 먼저 말을 꺼낸 건 자기 쪽이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어디 갈 셈이냐고 물어봄. 설마 이 시간에 집으로 가게? 메딕은 무뚝뚝하게 대답함.

아니.

아, 하긴 짐이 없네. 그럼 어디 가는데?

시내에, 식사하러.

혼자?

그래.

아, 그래.

표정이나 말을 틱틱 받아치는 투가 아무래도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았음. 그럼 식사 잘 하고 오라구. 하고 뻘쭘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데, 막상 데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정반대였지.

그럼 같이 밥 먹을래?

아, 이런 미친. 이놈의 술. 빌어먹을 사과주. 아무래도 혓바닥이 알콜에 쩔어서 카와이하게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스텝을 밟아댄 모양임. 무슨 씨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왜 갑자기 튀어나와? 안 그래도 숙취에 쩔어서 며칠은 어디 길바닥에서 구르다 온 노숙자 꼴로 후라이팬을 잡고 있는 자기 꼬라지는 얼마나 우스울까. 이제 저 소갈머리 배배 꼬인 인간이 잔뜩 윗입술을 비틀어 올리면서 내 병신같은 행동을 비웃겠지. 하고 데모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변명을 늘어놓음.

어, 나도 밥을 안 먹었걸랑? 근데 뭐, 혼자 먹긴 좀 그렇잖아, lad. 그러니까, 딱히 내가 혼자서는 숟가락도 못 드는 마마보이란 소리는 아니고. 마침 식사 준비중이기도 하고. 아니, 별 거 없긴 한데, 뭐, 그렇다고. 음.

그런데 메딕은 잠깐 생각하는 눈치더니 덤덤하게 말하는 거였음.

그럴까.

…그 한 마디에 데모는 좌절했음. 거절하고 그냥 쌩하니 나가버릴 줄 알았는데…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수습을 해야지 뭐.

햄도 굽고, 달걀도 지지고 볶고. 좌우간 사나이의 음식이 완성되었음. 사나이의 음식. 중요한 문장이라 두 번 적었습니다. 마초돋는 데모맨의 성격상 요리 솜씨가 좋을 것 같진 않고, 거기다 영국인이니까…응… 거친 스코틀랜드의 기상이 외양부터 풀풀 풍겨나오는 스크램블 햄에그였다고 해 두자.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메딕도 요리의 꼬락서니를 보곤 살짝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임.

한 편 데모는 죽을 맛임. 아니, 밥은 그냥 배나 채워주면 장땡이라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니까 당연히 요리 때문은 아니고. 어쩌다 한 실수로 의사양반이랑, 그것도 기분이 심하게 저조한 의사양반이랑 밥을 먹게 됐거든. 그것도 단 둘이서. 9명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넓은 식당에서. 팀원들 다 돌아가고 조용한 베이스에서… 꼭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임. 다시 한 번 나는 왜 말실수를 했는가, 하고 후회했지만 어쨌든 자아비판보다는 이 초상집 같은 분위기부터 어떻게 해야 할 판임. 그러려면 뭔가 말을 꺼내야 할 텐데, 메딕이 관심가질 만한 게 뭔지 모르니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이러고 데모가 끙끙 앓고 있는데 메딕이 먼저 말문을 열었음.

…대단하군.

앙? 뭐가?

별 일 아니야. 지독하게 형편없는 요리 솜씨에 감탄한 것 뿐이지.

…그게 기껏 밥 차려준 놈 코앞에서 내뱉을 소리야? 니미, 쳐먹기 싫으면 그냥 먹지 말던가.

먼저 식사하자고 제안한 건 자네 쪽이잖아.

아, 뭐… 그래. 젠장. 그래도 전투식량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아니.

…아, 그래.

맛없다는 소리에 데모는 좀 충격먹음. 음, 사실 생각보다 좀 더 많이 충격먹었음. 어쨌든 자기가 만든 요리에 나름 자부심은 있었는데… ´_`좌우간 데모는 삐져서 홱 고개를 돌려버렸고, 식당은 잠시동안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음.

그렇게 삐져있다가 어차피 기분도 잡쳤고, 숙취도 덜 깼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술이나 더 마시고 아예 다시 취해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일어남. 말없이 달걀 부스러기를 깨작대고 있던 메딕이 어디 가? 하고 심드렁하게 물어봄. 데모가 비록 다혈질에 좀 무신경한 구석이 있긴 해도 일단 배려심은 있는 남자임. 걍 씹어버릴까, 하다가 순순히 대답해줌.

기지배도 아니고, 그거갖고 배가 차겠냐? 술 꺼내러 간다, 왜?

…나도 계집애는 아닌데.

알아, 썅. 맥주?

음?

맥주, 마실 거냐고. 아님 우유라도 부어줘?

…음.

아오, 씨발. 자꾸 그렇게 젖도 못 뗀 애새끼처럼 굴 거야? 사나이라면 확실하게 대답을 해!

그래.

진작에 그럴 것이지.

데모는 투덜투덜대면서 냉장고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음. 대충 훑어보니까 자기가 늘상 퍼마시는 사과주 병은 두어 개 정도 들어있는데 맥주병은 안 보임. 냉장고에서 고개를 빼고 크게 소리쳤음.

맥주 없는데? 물이라도 줘?

이 말에 메딕은 음. 하고 대답하려다 데모가 짜증내던 걸 기억해내고는 그래. 라고 대답함.

데모가 돌아와서 메딕 앞에다 물이 든 컵을 턱, 하고 내려놓고는 자기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사과주 병마개를 돌리기 시작했지. 일단 술병을 보니 화난 것도 사르르 풀리고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함. 누가 알콜 중독자 아니랄까봐…´_`그 모양을 물끄러미 쳐다보고있던 메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음.

마실 만 해?

엉? 뭐, 이거?

그래.

그 대답에 데모가 무심코 픽, 웃으면서 Aye, 이건 댁같은 샌님한테는 힘들걸? 하고 말해줌.

그런데 이게, 사실 아까부터 데모가 내뱉는 어떤 키워드가 메딕의 자존심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있었음. 요즘 들어 메딕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던 어떤 사건이랑 관련된 것이기도 했고.

참다참다 데모가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에 결국 메딕의 인내심이 툭, 하고 끊김.

마셔보지도 않았잖아.

엉?…아니, 이거 진짜 쎄다니까 그러네. 댁이라면 아마 한 잔 들이키자마자 뻗어버릴 걸?

데모는 나름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한답시고 그런 건데, 그만 한 층 더 메딕의 신경을 긁어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음. 갑자기 메딕이 자기 앞에 놓인 컵을 집어들더니 냅다 바닥에다 물을 버려버렸음. 그리고는 컵을 쓱 데모의 앞에다 내밀었음. 데모가 입을 딱 벌리고 메딕을 쳐다봤음.

메딕은 그냥 가만히 눈썹만 까딱, 하고 치켜올리기만 함.

…후회한다.

데모가 마지막으로 경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 말 그대로…

잠깐 고민한 끝에 데모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사과주를 컵에다 들이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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