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포(엔딩못냄. 낼 생각도 없음)

오셀롯을 등지고 선 이아고의 수다

Demand me nothing: what you know, you know

보존용 by Bulb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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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상아탑에 스스로 감금되기를 원한 늙은 은둔자와, 저 홀로 탑을 수호하는 검은 원탁의 기사라.

한편, 스파이는 어깨 너머로 담배를 피우는 데모를 흘겨보면서 생각했음. 고루한 비유지만 신선한 구도군.

처음에는 술에 취한 데모의 상태를 보고 일이 잘 풀리리라고 기대했음. 취해서 기분이 좋은 데모는 수다쟁이였고,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몇 번 찔러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쓸만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거든. 스파이는 아직 메딕과 헤비와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고 있었지. 평소 행동을 봐서 데모와 메딕의 관계가 그다지 가까운 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데모가 메딕을 갑자기 감싸고 나서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음. 스파이는 화약 냄새만큼이나 매캐한 담배 연기를 훅, 하고 가볍게 뿜어내며 생각했음. 흠.

스파이는 전문가임. 당연히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 하늘을 찌를만큼 높은 자부심임. 자부심이 너무 높다보니 주변 사람들까지 푹푹 찌르고 다녀서 문제긴 했지만. 어쨌든 스파이의 직업관에 따르자면, 자고로, 유능한 스파이는 적은 물론이고 아군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했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하리라. 지피지기, 백전백승. 손자의 병법에서 나오는 말이지. 그래, 그 과대 망상증 걸린 병역 면제자가 즐겨 언급하는 병법서지. 안타깝게도 그걸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지적 수준은 겸비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애석할 따름이네만. 어쨌든, 그래서 스파이는 될 수 있으면 팀원 모두의 정보를 입수해 두려고 하고 있었음. 일종의 취미생활 같은 거지. 다들 한 번쯤은 남의 생각하지도 못했던 약점을 캐내면서 즐거워 해 본 적이 있잖나? 아니야? 오, 점잖은 척 할 필요 없어, 내 작은 말리꽃. 마음을 열고 솔직해지는 게 어때? 어차피 듣는 건 나 혼자뿐이잖아. 난 고양이처럼 얌전한 아가씨도 좋아하지만, 솔직한 말괄량이 아가씨도 취향이거든. 그러고보니 우리 귀염둥이 아가씨께서는 어떤 남성이 취향이신가?

…어쨌든. 그렇다보니 블루 팀의 클래스 전원의 성격은 대충 분석을 해 두고 있었음. 파이로나 메딕같이 과거가 모호한 클래스라면 모를까, 당연히 데모의 성격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음. 아니,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음.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는 문장이지만, 사실은 각각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실례, 갑자기 끼어들어서 혹시 놀라지는 않았나? 만약 놀라게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지. 아름다운 여성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 그 귀여운 표정을 감상하는 건 물론 즐거운 일이지만, 방금은 그럴 의도가 없었거든. 내 사랑스러운 숙녀. 스카웃은 데리고 놀기엔 괜찮은 상대지. 하지만 언어 유희를 즐길 수 있을 만한 지성은 없다는 게 문제야. 전혀. 한 치의 여지도 없이. 항상 일방적인 괴롭힘으로 끝나다 보니,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새는 좀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해. 우리 아가씨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나? 이제까지는 다정하고 매력적이었던 연인이, 하루아침만에 지루하고 답답한 고집쟁이처럼 변해버린 적은 없냐는 말일세. 슬픈 일이지.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아, 딱히 내가 꼬마 스카웃한테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소리는 아니고. 메딕은 박식하긴 하지만 위트가 부족하고. 혹시 절골톱에 대한 그의 재치있는 말장난을 들어본 적 있나? 저런. 불쌍하게도. 다른 팀원들? 오, 세상에. 지금 다른 팀원들이라고 했나? 품위있는 신사의 교양을 나타내는 은은한 향수 냄새 대신 피비린내와 암모니아 악취를 풍기고 다니는 오스트레일리안 건맨? 혓바닥 끝까지 지방이 가득 차올라 간단한 영어조차 제대로 발음 못 하는 비만 불곰? 그만하지. 이 이상 말했다간 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서 말이야. 아, 혹시나 해서 말인데, 내가 슬퍼한다고 해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나의 상냥한 베아트리체.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건 무능한 팀 메이트들로 인한 무료함이 아니고, 내 작은 말리꽃이 그 고운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는 거야. 우울한 표정은 미용에 좋지 않아. 즐겁게, 즐겁게. 환하게 웃어보게. 그렇지…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음. 11개의 박사 학위를 자랑하는 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따지고 보면 데모도 팀에서 손에 꼽는 상식인의 반열에 들어갔음. 귀족 집안 출신이라 기본적인 교육도 받았고. 두 번째로 언급하는 거지만, 알콜 파워로 구축한 친목질 덕분에 웬만한 수준의 잡학 지식도 있고. 그러니까 좋은 말상대였다는 말임. 단, 술을 너무 마셔서 맛이 가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피카부. 자, 놀랐나? 이번엔 정말 놀라게 하려고 그런 거 맞아. 내 짖궂은 장난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줬으면 좋겠군. 놀란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거든. 역시 귀여운 아가씨는 놀란 표정조차 귀여워. 여성에게는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지.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과소 평가가 아닐까 하네만. 자네처럼 사랑스러운 여성은 아마 어떤 표정을 지어도 다 귀엽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저런, 이것 보게나. 수줍어하는 얼굴조차 귀엽잖아? 설마 내 몰가치한 한담을 흘려듣지 않고 친절하게 응답해준 건가? 우리 귀여운 말리꽃은 이제보니 얼굴만 고운 게 아니고 마음씨도 곱군 그래. 아, 만약 내가 넘겨짚은 거라면 용서하게. 이런, 이러려고 끼어든 게 아닌데.

우리 공주님께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구분하는 데에 있어서 특별한 기준이 있나? 혹시 흥미가 없는 화제라도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해. 중요한 이야기니 말이지. 우리 상냥한 마드모아젤은 기꺼이 내 보잘 것 없는 의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주리라 믿네. 그렇지? 그럼 계속하겠네. 내 기준은 이렇다네. 미친 놈과, 덜 미친 놈. 아, 이런, 혹시 조야한 단어 선택이라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나 모르겠군. 구름보다도 폭신하고 설탕보다도 더 달콤한 마드모아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라. 만약 그랬다면 내 사과하지. 평소에 상대하는 인물들 수준이 수준이다보니 가끔씩 이렇게 말실수를 하게 되는군. 이해해 주게. 사실 말이야, 마땅히 표현할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래. 광기. 광기라. 예술적인 의미를 내한 단어이긴 하지만, 까딱 사용할 시기와 장소를 잘못 선택하게 되면 이처럼 유치찬란하게 들릴 단어도 없지. 우리 친애하는 어린 스카웃이 좋아할만한 수준으로 추락하게 된단 말일세. 광기와 진정한 자연의 힘… 풉. 아, 계속하지. 그렇지. 좀 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그래. 열정이라고 하면 좋겠군. 자신의 일을 향한 열정. 열정에 가득 차서 일하는 사람은 보기 좋은 법이지. 사랑 또한 열정의 한 종류 아니겠나? 지금 그대를 향하고 있는 내 열정처럼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사실 광기와 열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둘은 참 비슷한 점이 많아. 마치 열병처럼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근거모를 힘이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 쉼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도 마찬가지지. 예를 들어, 저 레드 팀을 보게. 마치 모녀 단 둘이 살아가는 방에 느닷없이 뛰어든 보르네오산 오랑우탄마냥, 정신병동에 수감되어야 마땅할 환자들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종자들 말일세. 특히 그 미치광이 레드 메… 오… merde… 실례.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이 추운 밤에 난방 하나 없는 거실에 나와있어서 그런 모양이야. 방금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담배 탓인가? 속까지 메슥거리는 게 이거 영… 아차. 어, 에헴. 정말이지. 갑자기 왜 이러나 모르겠군. 아, 걱정할 필요는 없네. 상냥하고도 감미로운 나의 말리꽃이여. 방에 들어가서 좀 휴식을 취하면 나아지겠지. 이거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군. 부디 잊어줬으면 좋겠네. 친절한 나의 쁘띠 마드모아젤. 그렇지… 아가씨는 방금 내 약점을 보고 만 셈이야. 아가씨는 그 귀여운 용모만큼이나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겸비한 것처럼 보여. 그러니까, 나의 말리꽃은 점잖은 신사의 민망한 소문을 아무 데에서나 퍼뜨리고 다니진 않으리라 믿겠어. 이건 그대와 나, 둘만의 비밀인 거야. 둘만의 비밀. 아, 이거 가슴 설레는 울림이군 그래. 그렇지, 자기?… 험.

인정하기는 싫지만… 전문가의 입장에서, 솔직하고 정확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 작자들 또한 상당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네. 자신 내면의 광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니. 열정이란, 마치 어느 외눈박이 몰로토프 칵테일 애호가가 가지고 다니는 고물 지포라이터가 내뿜는 불꽃처럼 겉잡을 수 없지.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목표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 태워버리고 말 불꽃 말일세.

이 전에는 단순하게 둘로 나눠서 설명을 했네만, 세상 일이란 뭐든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법이지. 우리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전에 그대를 이전에서 순진하다 말한 것 같은데, 믿어주게. 내 사전에서 순진하다는 단어와 멍청하다는 단어는 같은 의미가 아니야.아, 뭐… 가끔은 그렇게 쓰기도 하지만. 여하간 흑요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두 눈을 가진 아가씨를, 내가 주제넘게도 멍청하다고 평가할만한 신세는 못 되지. 암, 그렇고 말고. 혹시 내가 쓸모없는 말을 주절주절 너무 많이 늘어놓아 거슬리는 건 아니겠지? 아가씨처럼 매력 만점인 여성을 보게 되면 자꾸 이런 식으로 잡담을 하고 싶어져서 곤란하단 말이야. 아무래도 둘만의 시간을 더 길게 끌고 싶은 내 졸렬한 이기심 때문이겠지. 하지만 우아한 마드모아젤을 지루하게 만드는 건 교양있는 신사의 도리가 아니니까.

지금 이 전장에 참여하고 있는 작자들은 하나같이 미쳐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테지. 나 또한 마찬가지고. 혹시 내가 미친 개처럼 그대를 물어뜯지는 않을까 염려해도 좋아. 난 아가씨를 물어뜯는 짓보다는 조금 더 대담한 짓을 벌이고 싶어하는 중이니까. 하하… 짖궂은 농담이라 미안해, 내 순진한 말리꽃의 요정. 미친 놈들에게도 구분은 있는 법이지. 자신 내면의 광기를 스스로도 주체를 못 하는 인간이 있지. 이런 경우는 대부분 전문가가 되기도 전에 자멸하고 마네. 딱한 일이지. 아예 광기 그 자체가 되는 인간도 있고. 우리의 친애하는 병역 면제자 선생이 좋은 본보기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기를 길들여서 자신 아래 놓는 자가 있네. 나나, 헤비웨폰 가이, 스나이퍼, 메딕… 그리고 엔지니어와 데모맨. 뭐, 전문가라면 당연한 일이긴 하네. 저 전쟁광과 우리의 겁쟁이 토끼는 논외로 치세. 굳이 꼽자면 이 정도겠군. 우리가 논해야 할 인물들은 엔지니어 선생과 데모맨, 이 둘이겠지. ‘전문가’ 중에서 가장 위험한 부류이기도 하고. 가장 무서운 자가 어떤 자인지 아나? 자기가 미쳤다는 걸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자라네. 자신 내면의 광기에 뚜렷한 윤곽을 그리고 있는 자. 자기가 미쳤다는 걸 부정하는 자와 인정하는 자. 이 차이는 굉장히 크지. 음? 다들 비슷하지 않냐고? non, non… 어쩌면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존재인 그대에게는 조금 설명하기 힘들 개념일 수도 있겠어. 어둠을 들여다보라. 어둠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라는 말도 있잖나. 이 광기라는 괴물도 마찬가지라네. 없는 것처럼 다루면, 마치 연인에게서 외면당한 가련한 소녀처럼 마음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작아진다네. 그런데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으면 점점 더 크게 자라나거든. 동화 속 이야기같나? 사실일세. 언제나,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묘한 법이지. 돈 주앙에서 나오는 대사일세. 바이런이라는 시인을 알고 계신가?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양반이지. 여성과 대화를 주고받을 때에도… 어이쿠. 이런. 또 내 사소한 약점을 하나 발견했군? 우리 호기심 왕성한 새끼 고양이. 어쨌든, 좋아하는 대사야. 아가씨는 연애를 한다면 카사노바와 하고 싶으신가, 아니면 키다리 아저씨와 하고 싶으신가? 이런, 또 쓸데없는 소리를… 저 둘도 그런 괴물을 키우고 있는 작자들이란 말일세. 스스로가 선을 긋고 있는 만큼, 함부로 자극했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이제 문제는, 저 바카디처럼 다루기 까다로운 사내에게서 어떤 방법을 가지고 진실을 캐내느냐인데…

이상 스파이 파트 끝. 이제 끝. 여기서 끝. 끝에 엔드. 끝에 엔드에 종말에 오시마이. 아니, 처음에 구상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쓰고 나서 보니 왜 스파이 독무대요? 이거 데모메딕썰인데!??!!??!?!?!게다가 오글거려! 오글거려 미칠 것 같아!!!!!! 씨발 내 손발!!!!!!!!!! 누구 내 손발 못 보셨어요!?!??!?!?!?!!! 버터를 병째로 드링킹하는 기분이야!!!!!!!!!!!!!!!!!! 드링킹한 버터가 위장을 코팅하면서 한 바퀴 돌아서 도로 식도를 타고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야!!!!!!!!!!!! 말리꽃 드립으로 할애한 게 몇 줄이야!!!!!!!!!!!!!!!!!!!!! 분량은 또 더럽게 길어!!!!!!!!!!!!!!!!!!!!!!!!!

이런, 아쉽지만 이제 슬슬 작별을 고할 시간이군. 아마도 피도 눈물도 없는 아무개 선생이 우리 둘 사이를 강제로 갈라놓으려고 작정한 모양이야. 보아하니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 해본 인간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 봤자 저 매정한 선생은 도통 이해하지 못할 테니. 사랑을 모르는 인간에게 사랑에 대해 논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격이지. 아, 물론, 완전한 이별은 아니라네. 내 작고 귀여운 말리꽃은 계속해서 거기 피어있을 테니 말이야. 단지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될 뿐이지. 찰나의 풋풋한 첫 데이트는 느닷없이 끝나버리고, 갑작스레 일방적인 원거리 연애가 시작되는군. 일방적인, 너무나 일방적인. 그래. 통속적인 표현으로는 짝사랑이라고 하던가. 짝사랑이라.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비탄과 애끓는 감정들을 온전히 담아 속삭이기엔 너무도 단순하고, 평면적인, 무자비한 단어 아닌가? 하지만 부디 잊지 말기를 당부하고자 하네, 나만의 마드모아젤. 만남은 순간이지만, 사랑은 영원하리라는 말이 있지. 말리꽃처럼 청초한 우리 숙녀와 난 이렇게 만났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실된 것 아니겠나. 글쎄, 어쩌면 이 순간조차도 실제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감정이란 것은 허깨비와도 같아서, 사진이나 그림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남길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보게, 보이지 않는 것에 증거를 요구할 필요가 있나? 간단한 예시로, 저 여러가지 의미로 콧대 높은 매드 닥터가 애용하는 장엄 서원상을 보게. 그 흉상이 만들어진 이유와, 지금 그것이 사용되고 있는 용도를 떠올려 보게. 그런 거지.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야, 지금 여기 있는 사실만이 중요한 거라네. 나와 그대가 서로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는 사실만이. 그렇지? 하얀 말리꽃의 꽃잎보다 더 순수한 우리 아가씨는 사랑에까지 증거를 내놓으라며 닦달하는 삭막한 인간이 아니지. 그럼. 난잡한 설명 탓에 이해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총명한 머리를 가진 내 공주님은 이해했으리라 믿겠네. 나를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를 떠올려 주게. 그 때는 나도 그대를 떠올리고 있을 테니까. 나를 믿어, 내가 그대를 믿는 것처럼. 설마 아직도 내 이야기를 못 믿는 건 아니겠지? 아, 물론 그대를 의심하는 건 아냐. 드넓은 초원에서 발랄하게 뛰노는 망아지처럼 솔직한 우리 아가씨. 그저…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남성이라 말일세. 아가씨가 못 미더워할까봐 걱정이 돼서 그래. 웃어도 좋아, 그대의 웃는 얼굴은 그대가 어떤 심정으로 웃고 있더라도, 언제 보더라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적실 것 같으니까.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이여. 이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세.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여인들을 기억하고 있듯이, 그대도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있을 거라 약속하네. ma amour.

아,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느냐? 역시 우리 달콤한 카페 오 레는 총명해. 총명한 아가씨는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법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좋아. 뭐, 간단한 일일세. 난 전문가거든. 길거리에서 책을 팔며 떠돌아다니는 변사가 즐겨 읽는 싸구려 삼류 로맨스같은 이 무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지. 게다가 내가 주인공이 아니잖아? 무려 탄닌 과다가 의심되는 잉글리시 블랙퍼스트가 주인공이라니? 내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는 어려운 노릇이란 건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저 럼주에 라임을 갈아넣어 퍼마시는 해적 선장 나부랭이가 주인공?! 말도 안 돼. 저런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면 극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나? 소란이 일어난다네. 내가 파리에서 어떤 아가씨랑 같이 오페라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아차. 험. 그러니까, 묵은 사과주 냄새만 풍기는 이 치졸한 촌극에, 간소하나마 내가 나서서 흥을 더해야겠다, 이런 취지였단 말이지. 음. 뭐라고? 아, 그 이야기?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니…

자. 그럼 이제, 이 뭇 여인들의 마음과 그에 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을 수집하는 점잖은 괴도, 항구를 떠도는 정처없는 네덜란드 유령과 같이 무대 위를 떠도는 이 외로운 광대는, 이만 난폭한 스코틀랜드산 시한 폭탄 해체 전문가가 되기 위해 퇴장하도록 하지.

애정어린 키스를 보내며. adieu, 내 작은 말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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