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탐정록 연성 2-1

“징징거리긴 누가 징징거렸나."

"그럼 응석이라고 해 두지."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나. 만약 아니라면 한 발 꽂아넣었으면 싶네 그려."

"아쉽게도 나는 청산당한 놈이고, 지금은 광복이 된 조선이라서."

"그런 것으로 따진다면야 임정 10개 강령과는 별개로 왜 이 박사를 그리 죽이고들 싶었을까."

"나는 그런 건 몰라."

아니. 실은 알고있다. 백범선생과 약산선생이 공동으로 발표한 10개 강령. 이를테면 그게 임정에서의 헌법인 셈인데.. 그러니까, 이놈은 내 헛소리를 막고싶단 말 하나를 하려고 헌법까지 끌어오는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놈은 전혀 변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겐 꽤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렇고 쉬는 게 지겹단 말은 아주 난센스야, 자네가 언제 쉬어본 일이 있어야지. 혹시 알아, 자네가 쉬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어색할지."

"멀쩡한 조선말 놔 두고 그렇게까지 강조할 것 없어, 그리고 그런 건 배울 수도 없고 배울 의향도 없네."

"그렇담 내가 억지로 가르쳐주지."

"허튼소리."

"너무 그러지 말어, 퇴원시켜달라고 악쓸 것도 없고."

"내가 언제 악을 썼나."

"말로 해야 아나. 자네 눈빛이 잔뜩 독이 오른 독사인데 뭘."

"그런 일 없네."

얼마나 독을 품고 살았으면 자기가 독이 오른 꼴로 살고있단 사실도 모르는건지,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가줄까. 그럼 쉬겠어?"

그럴 필요 없네. 놈은 툭 내뱉었다.

"자네 하나때문에 내가 쉬고 못 쉬고를 결정할만치 자네가 내게, 내가 자네에게, 중요한 사람인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놈은 나를 매섭게 찔러왔다. 이건 제법 아픈 공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원망도 뭣도 아닌, 아무 감정도 없어보이는 어투가 나를 연이어서 쑤셔왔다.

"오늘은 내가 여기 있겠네."

"마음대로 하게. 내가 가란다고 갈 자네도 아니지."

비웃은 것일까, 그러기엔 나를 도리어 안쓰럽게 쳐다보는 표정이었다. 네가 그리 해보아야, 너와 나 사이의 해묵은 감정이란 매듭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선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아프거나 몸이 이상하면 말하게. 손 박사 불러오겠네."

"아프지는 않아."

거짓부렁. 아프지 않으면 손 박사가 입원시킬 리 만무하지. 그것도 끊임없이 진통제를 투여해 가면서. 난 첨에 저러다 약쟁이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놈이 통증에 발작을 일으키는 꼴을 보면서 그 생각은 깨끗히 접어두었다. 말이 좋아 고문후유증이지-물론 그 단어조차 그리 즐거운 어감은 아니지만-한번 도지면 말기 암환자 저리갈 정도의 통증이란 말도 들었다. 그런 때면 진통제를 한움큼 삼켜도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기껏해야 할 수 있는건 고통이 한바탕 벼훑이를 하듯이 쓸고 지나가길 기다리며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녀석이 말해준 것은 아니고, 손 박사가 놈을 지켜보고 추측한 바를 내게 말한 것이다.

"눈 좀 감고 있게."

"어차피 오래는 못 뜨고 있네."

"잘 아는군. 그러니까 쉴 때 제대로 쉬어야지."

자네는 성질긁는 법만 배워왔군. 그러는 자네는 주둥이 놀리는 법만 배워왔군, 내가 알던 그 순한 설 선생은 어딜 가고 말이야. 놈은 묵묵부답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번엔 참으로 눈을 감았다. 어지간히 골때리는 놈이겠거니 했을테다. 아니면 약기운이 돌아 그럴지도 모른다. 녀석이 눈을 감자마자 몸뚱이도 덩달아 축 내려앉았으니까. 숨은 쉬고 있었다.

"..잘 참아주셨습니다."

"저놈이야 참는 게 일이었으니까."

"선생 말하는 겁니다."

내가요, 참긴 뭘 참아요. 재수없긴 해도 놈이 맞는 말을 한 건데.

"연수 형이 악의가 있는 건 아닙니다. 폭언을 하시는 건.."

저건 폭언 축에도 못 들텐데. 나는 불만스레 대꾸했다. 이봐요,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난 경부였소. 조선인들과 자주 부대끼는 처지였기에 여기저기서 욕 얻어먹을만치 다 얻어먹었지. 이유없는 욕과 사실대로 따지는 말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단 말이오. 나는 그저-

"당신 말마따나, 저놈이 아직은 죽지 않길 바랄 뿐이오. 이 빌어먹을 나라가 정리될 때까진. 그래서 저놈이 마음편히 죽을 수 있을 때가 되기까진.."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요. 연수 형님은 고사하고 선생이나 내 살아생전에 그런 날이 올까요.

"비관적이시군요."

"현실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 저놈은 헛수고를 하는거군."

"연수 형이 살아서 그 세상을 못 본단 게 헛수고는 아니지요. 그건 연수 형도 알았어요. 임정에서부터.. 연수 형이 꿈꾼 건 그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이었습니다. 그걸 보장받을 수 있다면 기쁘게 죽을 자신이 있다, 그리 말하곤 했지요."

"빌어먹을 이상주의자다운 발상이군."

"때로는 그 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줄을 알면서도 그에 도전하기때문에 아름답지요. 그것이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닐 경우에는 더.."

"위험하기도 하지, 이상을 위한 이상이란 사람을 괴물로 만들고, 모두를 파멸하게 만드니까."

"조선인이란 이유로 죽지도 않고, 어떤 특정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죄 되지 않을 세상이란 게 그리도 잘못되었을까요. 모두가 걱정없이 교육을 받고, 모두가 직업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누구도 천시받지 않을 세상이 그리도.."

"선생도 말하질 않았던가요, 살아생전에, 그런 세상은 못 올 거라고. 우리는 끝내 그것을 못볼 것이라고. 당신 입으로 말하질 않았소."

"못 보는 세상이라고 해서 불가능한 세상은 아닐테니까요."

"저 놈이, 저 친구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이유없이 버텨낼 생활이 아니니까."

"단 한순간이라도, 저 친굴 말릴 생각은 않았나요."

"의사로서는 수백번을 말렸지요."

"동료로서는 아니었겠지요."

차마.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간, 정말로 죽어버릴까봐. 그런 말도 할 줄을 압니까.

"내가 아는 당신은, 흠집없는 수술용 칼이고, 빈틈없는 톱니바퀴인데."

백청만 사건도 그러하지를 않았던가요. 내게 거짓말을 하기엔 의사로서 당신의 양심이 걸려서. 저놈에겐 그 의사의 양심이 거리낌이 없던가요, 아니. 도리어 그 반대였겠지. 저놈이 죄 없는 줄을, 잘 아니까..

"나도 알고 있습니다. 연수 형에 관해선 내가 공정치 못하다는 것 쯤은."

"부당한 취급을 당해온 놈을 위해서 한번쯤 특혜를 베풀어주는 거야 나쁠 것 없지, 저놈이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더군다나 목숨줄이라면, 공정이고 자시고 누구든 매달리고 싶을테지. 내 그건 장담하리다.

"형님은 매달리지 않았어요. 도리어 숨통을 끊어달랬지요.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온 건 순전히 내 고집이었습니다."

"잘 한거요. 제정신 아닌 놈이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같은 세상에, 누가 제정신이기나 할까요. 손 박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저놈도 마찬가지란 거 아니오."

-나 정도면 곱게 미친거네.

나는 언젠가 놈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곱게 미쳤다고, 아니. 너는 곱게 미친 것이 아니다. 옳은 방향으로 미친 것이다. 옳게 미치는 사람도 있느냐, 하면 할 말은 없었지만 적어도 놈은 그랬다. 미치는 게 편하니까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게 옳으니까 놈은 미친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옳은 일을 하기가 어려우니까. 맞는 말을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기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상태가 어떤가요."

"병보다도, 체력문제지요."

"그건 무슨 소리요."

"치료도, 몸이 이겨낼 수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나마 경부님이 잘 단도리를 하신 편이라 곧, 가능은 하겠습니다만.."

"완치는 안되겠지요."

하는 수 없습니다. 손 박사는 그리 답했다. 그리 매정한 말도 있을까. 허나 손 박사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해는 갔다. 불가한 것을 가능하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걸어다닐 수는 있나요. 매번 악화되기만한다 하질 않았소."

"전혀 호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 물론 고문후유증은 연수 형을 죽는 순간까지 괴롭히겠지만, 그렇다고 나빠지기만 한 건 아니지요."

"숨통을 끊어달란 이유가 있었군."

나는 나즈막하게 말했다. 그날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

놈은 한동안 열에 들떠 병상에서 헛소리를 해댔다. 아니, 어쩌면 놈은 평생을 병에 걸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피를 토했고, 시대에 대하여 열병을 앓았다. 지금 이것은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죽여서, 자신을 치료하고 있었다. 놈은 의식이 없는 중에도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 사람들인 줄을 어찌 아느냐고?

독자여러분은, 내 이전 직업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는 모양이다.

"좀 더 눈붙이게."

"자네는, 아직도 여기있나."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민족 배반자라고 불렀대도, 곱게 죽지도 못할 놈이라 했대도, 그건 별 일이 아니었다.

"눈이 벌겋네. 피곤하거들랑 좀더 자. 지금은 자네가 병가를 냈으니까 업무 걱정은 잠시 묻어두어도 되질 않아."

"안 피곤하네."

퍽이나. 놈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깼다 잠들었다를 수차례 반복했다. 제대로 잠이란 걸 잔 지는 얼마되질 않았다.

"자네 자야하네. 잠들기 어렵거들랑 손 박사한테 말해서 약이라도 좀 주라고 하겠네."

"바쁜 사람을 뭣하러 부르나."

"이런 일 하라고 있는 사람이네. 아니면 손 박사 말마따나 외과의라 못 미더워서 그러나. 여긴 내과의도 있으니까.."

"설마하니 그럴까. 그게 아니네, 약 같은 데에는 의존하고싶지 않아."

"의존하라는 것이 아니야. 필요하면 기대어야지. 밥도 잘 먹어야 하고. 무작정 혹사시키는 것도 다 젊은시절 말이네."

말이야 쉽지, 녀석은 그리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자는 동안에 찾아온 사람은 없던가."

"없었어. 사람이라곤 회진 돌러온 의사선생들 뿐이지. 제자구 뭐구 다 필요없는 모양이대, 어째 병문안 한번을 안 와."

거짓말이었다. 병문안을 온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손 박사가 이놈 직장에서 온 사람은 죄다 면회를 거부하였고 그걸 뚫고도 온 사람은 내가 후들겨 쫓아내었다. 놈은 날 믿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못 믿자니 마땅한 수도 없었을 것이다. 놈은 나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튼 짓거리 할 생각 말고 누가 오거든 똑바로 말하게."

"선생노릇도 말짱 헛 거구만. 입이 저리 험해서야."

"언젠 나더러 변변찮은 선생이라 하지 않았나."

하여간 기억력은 좋은 놈이다, 내가 저놈 야학운영하던 시절 했던 말을 여지껏 기억하고 있었나.

"..맞는 말이지."

"건 또 왠 엉뚱한 소리야."

"변변찮은 선생이니까, 제자들을 그리도 죽음으로 내몰았겠지."

"자네가 그걸 원치않았다는 것쯤은 잘 알아."

그저 위로한답시고 하는 소리가 아녔다. 그걸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야학을 열었다는 일로, 그게 자신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동창의 권유로 공동으로 운영했대도 반일혐의로 종로경찰서에서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두들겨 맞곤 방면-그걸 방면이라 봐야 할 지는 모르겠다-된 뒤에 나는 녀석을 찾아갔었다. 아주 폐인이 되어있을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도 병석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누워는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만치 어리석은 선생이 또 있을까, 그 어린 것마저 내 어리석음에 속아넘어가고, 나는 그게 어리석은 줄도 몰랐네. 기왕지사 모르고 죽을 값이라면 내가 대신 당하는 게 맞는 일인데..

대신 당한다라, 그럼 네가 당한 것은 당한 게 아니더란 말이냐. 하고 나는 물었다. 분하기보다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서 녀석이 가르치던 학생이 사지가 문드러져 죽은 것이 아무 느낌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장 내 눈앞에서 처참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은 설연수, 그놈이었으니까.

-조선인에게 산 목숨이 죄가 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어찌되었든 목숨이 붙어있으니까 나는 억울할 일이 없어. 도리어 제자를 앞세워 죽인 꼴이니 억울한 게 무어야.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지. 분명 놈은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걸 에둘러 말하고 있다는 걸 모를만치 내가 천치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도 연수는 한참을 앓았다. 하도 죽고싶어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저러다 참말 일어나지 못하고 죽진 않을까, 하는 염려도 더러 하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목숨줄도 사람마다 여러 질이라, 요행히 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녀석이 걸어다닐 수는 있을 때 즈음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한편으론 술을 잘 하지도 못하는 놈이고, 몸도 아직은 시원찮은 게 왠 술이냐 하였지마는 결국 나는 그놈을 부른 술자리에 나갔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공연한 짓을 말 것을 그랬다.

그 빌어먹을 무화과 이야기가 나온 것이, 바로 그날이었다.

-술도 못하는 게 퍼마실 때 알아봤다.

놈은 수챗구멍에 한차례 토악질을 하곤 으흐흐, 하고 웃었다. 우는 게 아니라 웃었다. 그래서 나는 놈이 실성을 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조금은 섬짓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어가 그리 우스워, 하고 나는 말을 던졌었다.

-무화과가 우스워서.

그 다음이야기는.. 아마 기억력이 좋은 독자분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꽃 시절 없이 열매맺는 것이 무화과더라. 하던 그 이야기.

자네가 그렇더라, 이 말이냐고 묻던 내 말에 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열매가 있어야 무화과지. 열매도 없는데 무슨놈의 무화과야.

그러면서, 죽은 자기 학생을 들먹이면서 무화과라면 그 애가 무화과지. 하고 말했다. 그때 나는 알 수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열매없긴 그 애도 매한가지일 것이라고.. 그저 연수가 술주정을 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넘겼을 뿐이다. 어쩌면, 놈은 그때 이미 내게 항일운동을 할 뜻을 내비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녀석이 나를 배은망덕하게 여길 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지금와서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녀석이 배반감을 느낄만 하기는 하였다. 그렇담 그게 무슨 일이냐..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게 녀석이 만주로 건너간 날과 거의 같을 것인데,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에는 눈치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럼 그게 연락을 했니마니했던 그 말인구 허고 짐작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맞다. 그러나 그 일인즉 이러하다. 놈은 내게 만주로 같이 넘어가잔 이야길 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작별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내게 한번 보자고 편지로 전별을 하여왔다. 그러나 나는 그 때에 집에 없었고, 그 편지는 하숙집 여주인의 손에 넘어가곤 그만 그 이가 깜빡하는 통에 내게는 전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마음 편하자고 너스레를 떨었느냐... 부끄러운 소리인 줄을 알지만, 그렇다. 이제와서 사실을 말한대도 녀석이 믿지도 않을 줄을 알고, 그리고 연락을 받았다 해도 나는 녀석과는 달리 꽁무니 빼는 법부터 배워온 놈이라, 같이 만주로 갔대도 그것은 청춘의 야반도주같은 꼴이 되었을 뿐이지 결과는 장담치 못할 줄로 안다. 과연 그때도 이같은 모양이 되었겠느냐 되뇌어 보았지만, 어쩌면 끝내 나는 연수를 팔아치울 종자였을지. 또 모를 일이 아니냐.. 하고 끝나버렸다.

"원했건 원치않았건 매한가지네."

"그래서 박원일인지 뭔지 하는 젊은 놈한테 그 말 한마디에 피를 토하고 거꾸러졌던 거구만."

"그 애가 또 왔었나?"

"염치가 있으면 안 왔겠지. 양심은 있는 모양이더만."

"내가 그렇게 말했으면 안 되었네. 부질없이 희망을 쥐어주고, 다시 그걸 앗아간 건.."

"자네는 부질없는 행동을 한 게 아니야."

이건 내가 할 말이 아니다. 그 정도는 알고있었다. 진즉에 조선은 글렀다며 죄다 부질없는 짓이라 비아냥거리고, 부질없는 짓을 하다 송장치울 놈이라 하여 녀석을 조소하던 내가 이런말을 하는 것이 녀석의 눈에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

"고마운 말이네마는 애써 위로할 것 없네."

어줍잖은 소리 말라며 욕지거리를 들을 줄로 알았는데, 놈의 말은 퍽 의외였다.

"위로가 아냐, 나는 자네를 위로할 생각도 없고 위로를 한대도 자네는 날 당장 쏴죽일 걸."

"내가 방아쇠를 잡아당기지 못하는 게 자네에게는 행운이군."

"방아쇠를 잡아당기지 못한다니? 아."

그러고보니 녀석은 입원한 후로 몸을 잘 가누지를 못했다. 처음엔 비척거리며 걷는 것만 그런 줄을 알았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갈 잘 쥐지를 못했다. 그저 기력이 떨어져서,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 줄로 알았는데.

"그리 볼 것 없어. 이따금씩 토혈을 하면 일시적으로 겪는 증상이네. 며칠 쉬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자네가 의사야?"

"손 박사에게 확인해보게. 그 친구도 똑같이 말했으니까."

"그렇담 자네는 그 며칠 쉬는 것도 아니하고 살았단 말이 되겠군."

"자네가 보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생활을 한 건 아냐."

"터무니없다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지?"

"하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지를 않은가."

하는 수 없다라. 어째 그게 내겐 죽기위한 핑계로 들릴까. 나도 알 만치는 알았다. 손 선생에게 조금 더 소상히 들었던 것은 가관이었다. 손 박사가 좀처럼 병원에 오지 않는 녀석을 개인적으로 찾아갔을 적에도 피거품을 입에 물고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할 적이 많았다 한다, 그놈은 괜시리 병원비로 신세를 지기가 싫어 버틸 만큼 버티면서 종잇장 위에 그대로 객혈을 해 가며 끊임없이 일을 했다고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일까지 쉬게 되면 약값은 고사하고 그 외의 생활비나마 나올 곳이 없으니까. 이 같은 육신으로 과로를 하면 얼마 못 가서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하루라도 자력으로 벌어보겠답시고 토혈을 하면 수건으로 억지로 입을 틀어막고 어금니를 깨문 채로 손을 바삐 놀렸던 것이다. 심지어는 일거리를 더 부탁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 피가 꾸역꾸역 올라오는데도. 그렇다면 놈이 이렇게까지라도 처참히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놈을 보면 그렇게 살고싶어하는 것 같지도 않다. 되려 죽지못해 살아있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겪는 무수한 능욕과 고통을 감내해가면서도 끝끝내 살아있으려 든다는 것은, 그건 모순이었다. 혹여나 복수같은 것이었을까. 이승만인지 뭔지하는 작자가 백범을 죽였으니 그 자신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서 두다리 쭉 뻗고 잠들지 못하게 만들겠다, 이런 심보였을까. 그러나 그도 석연치 못하였다. 오히려 놈은 누군가에게 복수하느니 차라리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게 더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백범도, 제대로 된 광복도-그놈 말마따나-지키지 못하였다는 죄목이라면 그나마 말이 되었다.

"하는 수 없는 게 아니라 안한 거네, 자네는. 주변에 도와주겠단 사람이 즐비한데 자네가 스스로 손을 뻗지를 않았어. 그깟 자존심이 그리.."

여기서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자존심, 그 자존심이 그리도 대단했을까. 나야 굴종의 세월로 살아온 사람이지만 이녀석은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그건 자존심이라 이름붙일 수 없는 종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신념이란 껍질이 목숨 앞에서도 그리 중한 것일까.

"염치가 없어서."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염치가 없다면 세상사람 누군들 염치가 있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누가 염치가 있더란 말이냐. 죽은 사람들만이 염치가 있는 것일까. 언제인가 설홍주 군이 말하였던 미국속담마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다.. 너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염치가 없는 내게 지독한 조롱을 하고 있는 것이더란 말이냐.

"아픈 구석만 골라서 찔러대는 습관은 여전하군."

"알아서 찔리는 건 언제나 자네였지."

그래서 기쁘네. 하고 놈은 덧붙여 말했다.

"뭐가 기쁜가?"

"자네에게 아픈 소리라는 것이 남아있을 줄 뉘 알았겠나."

"언젠가 죗값을 받아야한다 생각했네만 이런 식으로는 바란 적 없어."

"그러나 그 방식도 자네의 선택이 아닌가. 여지껏.."

"여지껏 무얼 어쨌단 말이야?"

"나는 자네를 끌어당긴 적도, 내버린 적도 없었네. 자네가 순사가 된 것도 나는 자네를 그러라 강요하지 않았고 하지말란 말도 하지 않았지. 내가 자네를 어딘가 매어놓지 않았는데도 자네가 그런 기분을 느낀다면.."

그건 자네가 선택한 거겠지. 그래서 나는 기쁘네, 하고 놈은 말했다.

"나랑 화해할 생각, 없다면서.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내 대답에 변함은 없네."

"그렇담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이제와서 내가 자네와 비슷해진다고 해서, 그러려고 든다고 해서, 자네와 내 사이가 변하는 게 아닐텐데."

자네에 관한 게 아니라면, 기실은 별 의미도 없는 일이 아닌가.

"선생은 좀처럼 변하지 않지만, 학생은 시시각각 변하는 법이지. 그게 좋을수도, 나쁠수도 있는 일이고. 적어도 변할 수 있는 사람이 변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거네."

선생이 어쩌고, 학생이 어쩌고. 선생질 하던 놈이라 잘도 그런 말을 해댔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창 밖을 넌지시 넘겨다보곤 하는 말이었다. 오늘이 휴일이라 그런가, 길거리에는 아해들이 도로 위에서 겁 없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놈들, 아해들이란 그저 그런 것인가 하다, 아직까지는 세상을 바라볼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것을 이유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들은 저이들이 아닌가 싶다.

"..참 걱정없어 좋겠다."

"걱정이 없기는 무어가 없어, 내일이문 다시 학교나갈 걱정, 그도 아닌 애들이면 자기네들 부모 한숨들을 걱정, 어떤 것이든 당장 닥쳐올 내일을 걱정할텐데. 그래도.."

"그래도?"

"길 지나가다 조선인이라 총 맞아죽을 걱정은 않아도 좋겠지."

그 당연한 게, 당연해지기까지가 되기까지는 적어도 일종의 변혁이라거나 하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지 않았겠느냐-하고서 놈은 말했다.

"그래서 그게 무어 어쨌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불쑥 퉁명스레 말이 나왔다. 넨장할, 순사로 평생을 살아온 놈이라, 좀처럼 이건 고쳐지지 않았다.

"세상도 변하고, 자네도 변하는 것이 보기좋다. 이 말을 하려던 차였네."

"그래봤자.."

자네는 살아서 보질 못할 세상이질 않은가. 자네가 원하는 세상은. 자네가 원하는 세상은 국적이든 무어든 개개인이 그러한 당연해야할 일을 당연히 누리고 살아야 할 세상, 애초에 국가란 그러한 권익들을 보장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수단이라고 말하던 네가 아니었느냐.(그래서 녀석은 임정출신 중에서도 아나키스트가 아니냐, 실제론 의열단원이 아니냐 하던 소문이 나돌았다) 그렇기때문에 억압적인 지배보다는 권리의 보장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말해오던 너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권력의 단 맛보다는 책임의 쓴 맛을 일차적으로 지워야하는 것이 그 국가라는 것이라고. 그래야, 참으로, 단지 희생양으로 팔아넘겨질 개인이기보다 인간이길 보장할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노라 하였다. 나는 잘 모르는 말이지만 개개인 인간의 평화마저도 보장할 수 있는 세상이 네가 참으로 꿈꾸는 세상이라 말하곤 했었지. 조선사람이, 조선사람된 죄를 입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그 뿐만 아니라 조선사람이란 이유로 말미암아 경멸을 당할 필요도, 인간이 아니랄 처참한 지경에 이르지도 않을 세상이 네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렇기때문에 네가 살아서 그런 세상을 볼 순 없질 않겠느냐..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끝내 삼키어버렸다. 하지만 놈이 내 의중을 파악한 듯이 살풋 웃을 때에는 간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네는 내가 그날 그 애한테 왜 그리 화를 냈는지 궁금할테지. 내 아들같은 이에게, 어찌하여 토혈을 할만치 노하였는가.. 나는 그 애가 스스로를 바뀔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싫었네. 그러나 어째 그 아이만 탓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나였네, 내 입으로 희망을 말해놓고, 정작 그 애에게 안겨준 것은 절망뿐이었으니, 레이시치. 나는 선생 노릇도, 상관노릇도, 아비노릇도 어줍잖은 행동밖에 이룬 것이 없네 그려."

어줍잖은 행동이라, 그러나 너는 적어도 해보지 않은 것에서 오는 후회란 없질 않으냐. 적어도 애써 모른척 고개를 돌린 일은 없질 않으냐. 나는 그런 너를, 너로 표방되는 이들의 피를 손에 묻히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던 이유 뒤에 숨어서 살지는 않은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어째 그리도 후회할 일이 많더란 말인가. 고개를 빳빳히 들고 세상 속에서 활개치며 살아도 모자랄 네가..

"내게 충분한 시간이 더 남아있다면, 속죄라는 걸 하고서 죽을 수도 있으련만 내겐 그 시간마저도 없으이. 돌아가신 백범 선생이나 이동휘 선생께 면목이나 있으려나."

따귀나 맞지나 않을텐가, 흐흐- 하고서 놈은 웃었다. 놈이 웃는 것이, 내게는 꼭 '너, 이담에 죽을 염치는 있을라니.' 하구선 비웃는 것으로만 들려서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스운 일이지. 놈이 내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마음도 십분 이해가 갔다. 그렇게 염치라곤 동떨어져서, 놈이 말하던 짐승만도 못한 인간상이 되어 여지껏 살아왔으면서, 유일하게 저놈의 말에만 수치심을 느끼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여도 우스웠다. 어디 우습기만 할텐가. 그것마저도 거짓부렁으로 여겨져서, 역겹기도 할 것이다.

"그리 서 있으면 다리 안 아프나, 어디 근처에 앉기라도 하게."

"나는 자네처럼 몸뚱이가 망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겠지."

그렇겠지는 무슨 놈의 그렇겠지야. 놈이 침울해지는 것이 보였다. 하기야 내게 썩 밝은 모습은 보이지 않던 놈이니까 그게 그거이긴 할 것이다.

몸뚱이 망가진 사람이라, 맞는 말이다. 평소에도 이따금씩 하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그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핏하면 찢어진 걸레짝이 되는 나의 폐부나, 나라는 시한폭탄에 목숨을 의탁하는 비서관들이나.. 광복이 되면 끝이 날 줄로 알았다. 하여 내 죽음만 정리를 하면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상황은 나빠지기만 하였다. 내 목줄만 조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놓여날 줄로만 알고, 나는 기꺼이 그리하였다. 그러나 그건 그만둔 것이 아니라 기한이 연장된 것에 불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형무소에서 살아나오지 말 것을. 내가 내 손으로 일을 더 그르치기 전에 스스로 혀를 깨물어 죽을 것을 그랬나, 하였다. 그랬다면 적어도 희망일지언정 품고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개운하게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살기도 글렀고, 죽기는 더더욱 그른 일이었다. 나는 만주에서 총을 들었던 그 순간부터 죽는 법을 배웠을 뿐이지 살아나가는 방법은 영영 잊어버렸다. 죽음속에서 사는 것에 익숙한 내가, 삶 속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렇게 낯선 길이고, 모르는 길이니까 나로서는 온통 서툰 것 투성이였다. 살아있는 것이 서툴렀고, 살아숨쉬는 것이 서툴렀다. 그렇다고 내 등 위에 올라탄 다른 이들의 삶을 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옮겨갈 데가 없었다. 나는 살아도 죄, 죽어도 죄인 것이다. 방정식은 답이라도 있지만, 의열투쟁은 결과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바닥이 차더군."

"무슨 말인가."

"자네 집 말이야. 식자재도 없고, 비상 약은 내가 사다놨네. 도통 사람 사는 집 같아야지. 자네 퇴원하기 전에 장이라도 미리 봐둘까봐."

"쓸데없이 애 썼구만."

"공연히 퇴원시켜달라느니 뭐라느니 할까봐서 미리 선수친 거지. 모르겠나, 자네는 환자면서 일종의 수감자같은 거라고."

"그런다고 내가 못 나갈 것 같은가. 지금은 손 박사 체면봐서 조용히 있는거네."

그렇겠지, 자네는 내게도 잡힌 것이 아니라 잡혀주었던 사람이니까. 하고 말하자 놈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나."

내가 그걸 어찌 잊을까. 기어이 잡힐 걸 무어 그리 버둥대었느냐는 내 말에, 자네는 나를 형형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자네가 나를 붙잡음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잡히어 준 것이네.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나, 나를 그리도 내어놓지 않으려던 백범선생께서 왜 나를 기꺼이, 자네말마따나 자살행위같은 이 작전에 내어놓았겠는가. 처음부터, 나는 이럴 작정이었네..

그리 말했더란다. 그때만 하여도 나는 녀석이 허세를 부리는 줄로 알았다, 워낙에 신출귀몰하던 놈이었으니까, 자기가 잡혔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말, 자신은 이제 잡힐 때가 되어서 잡힌 것에 불과하다는 말, 자신이 죽어나자빠진대도 임정에선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그 말을 하고, 일제에게 넘겨줄 것이란 일체의 것도 남지 않은 빈 몸뚱아리라면서,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내 눈앞에서 피를 토하였던 그 모습을 어째 잊을래야 잊을 수가 있겠나. 그러면서도 토막토막내어 나오는 그 비웃음 소리, 내게 그것만큼 두렵고 스산한 것도 없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악몽하나 꾸지 않았던 내가, 그날은 녀석의 그 유혈낭자한 모습이 나오는 처참한 꿈을 며칠동안이나 꾸어야 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자네 말이 맞았네."

"무슨 뜻인가."

"내가 자넬 잡은 게 아니라 도리어 자네가 나를 잡은 꼴이었지."

그때 이후로, 그래. 참말 그때 이후로 나는 녀석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기가 어려웠다. 광복이 된 연후에나 그 여파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차라리 녀석이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살아있는 이가 남긴 흔적은 비교적 잊기가 쉽지만, 죽은 이가 남긴 흔적이란 좀처럼 사라지지가 않는 법이 아닌가. 지금조차도 나는 좀처럼 녀석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자네 스스로 잡혀들어온 거나 진배없지.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말이네."

"내가 자초했다 이 말이야? 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내가 놓아준대도 자네가 놓여날 생각이 없다면 그도 그른 일이겠지."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자네 생각이 가장 중요하네."

"여기서까지 선생질 할 생각일랑 말어, 난 자네 학생이 되고싶지도 않고, 자네와 머리아픈 싸움 할 생각도 없네. 자네나 나나 변하기엔 너무도 멀리 왔지, 누구 말마따나 짝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 한쌍이라고."

"자네도 소설을 읽는 줄은 몰랐네."

"무시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자네는 그럴 시간이 나지 않을거라 생각했으니까. 일전에 듣자하니 내 아우에게도 바쁜사람 불러내었노라고 역정을 내질 않았어."

"제에기, 건 또 누가 고자질을 하였나."

"자네가 나를 감시하였듯 내게도 눈이 있었으니까."

드러내놓고 형 노릇은 못하였지만 말이네. 하고서 놈은 쓰게 말했다. 뻔뻔하기는, 그러는 자네야말로 자네의 선택으로 자네의 육신을 포함해서 모든 걸 잃은 게 아닌가, 자네는 만주로 떠난 그 순간부터 자네의 가족을 포기한 거 아닌가.하고 나는 내쏘았다.

"그렇겠지. 그것은 신념이라는 이유로도 대의명분이라는 이름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겠지. 용서를 바라지도 않네. 그 편리한 이름을 써먹을 마음도 없어. 팔매질을 한다면 기꺼이 맞아줄 생각이네. 되려, 내 아우가 나를 이해하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도 있어. 그러나 그 애는 그렇게 모질지를 못하여. 그게 늘 아쉽네."

"후회할 줄을 알고있었으면서. 후회할 일을 왜 만들어내나."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지."

"몸뚱이가 그렇게 되었으면, 그 어리석음을 고쳐볼 만도 하질 않아. 손 박사에게 듣자하니 하는 짓은 여전하다면서, 그 탓에 자네는 수명을 더 단축하고 있는 거라 들었네."

"이제와서는 그 어리석음을 그만둘 염치가 없어."

그걸 멈춰야 했다면, 백범선생 돌아가시기 전에 멈췄어야 했네. 지금은 너무 늦었어. 하고 놈은 말했다. 그 어투에는 회한이랄것도, 원망도 없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설 군이, 보고싶지는 않았어? 자네 동생 말이야."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리웠지. 매 순간 그리웠네. 형무소에선 그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고 면회에 나갈 뻔도 하였어. 마지막이라는 게, 그게 뭐라고."

"왜 만나질 않았나."

"나야 죽을 사람이지만, 그 애는 앞으로를 살아야 할 사람이니까. 죽은 놈 하나 때문에 발목잡히게 하고싶지 않았어."

"원망이 무섭지는 않았나?"

"차라리 그건 내가 원하던 바였지. 녀석에게는 나와 소원해지는 게, 나와 멀어지는 게 안전할 테니까."

자네라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나, 자네라고 하여, 쏟아질 원망에 대비인들 되어있었겠느냐.. 하고 내 멋대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결국은 너도 사람일 테니까, 사람이라서, 나를 그것으로는 꾸짖지 못할테니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싶었던 것일테지. 그러나 녀석을 그것마저도 내게 허용하지 않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것이 퍽 섭섭하였다. 개인적인 유감일지도 몰랐다. 자네는, 이런 것마저도 나와 맞서는 사람일 수 밖에 없느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넨 참말 이런 데에서 독한 사람이네."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나는 평생을 독으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그러니, 마지막 마무리를 독으로 맺음하는 것이 썩 의외의 것은 아니겠지."

"하기사 죽을 마음 먹는 것도, 독해야 하는 법이지."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벽에 붙은 시계를 쳐다보니 회진시간이었다. 손 박사는 우리가 대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준 모양이었다.

"대화는, 가급적 줄이라고 말씀드리질 않았던가요."

"병실 못 나가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내 입도 틀어막을 생각인가."

"누가 들으면 형님을 아주 구속하고 억압하는 줄로 알겠군요."

"반쯤은 맞지 않나."

"보통은 그걸 치료와 관리라고 하지요. 환자가 저 죽을 일을 하는데, 그걸 두고볼 의사가 어디 제정신인가요."

저 사람이 저리 나긋나긋하게 말할 줄도 알았나. 하기야, 시신을 다룰 땐 구태여 인사차릴 필요 없을테니까. 하지만 내게 손 박사가 녀석에게 보이는 너그러운 미소는 제법 낯선 것이어서, 나는 뒷걸음질을 칠 뻔도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기분이 제법 괜찮으신 모양이지요."

"퇴원까지 시켜준다면 더할나위 없겠네."

저, 저 성질머리. 나는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퇴원소리 하지 말랬는데.

"병원신세를 더 지고 싶으시다면요."

"그럴 줄 알았네."

"경부님은 여기서 흡연하신 일 없지요?"

"내가 미쳤습니까, 공기가 조금만 탁해도 숨 헐떡이는 놈 앞에서 설마하니 그리할까요."

게다가 난 담배끊은 지 오래 되었수다, 선생이 더 잘 알지를 않소. 하고 나는 투덜거렸다.

"바깥소식은 아직도 막고있는가."

"형님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다니까 공연히 알려드릴 일이야 없지요."

"무슨 일이 있기야 있군."

"별 일이야 아닙니다, 박 군이 형님 상태를 좀 알려달라는 걸 제가 일언반구 없었으니까요. 속 좀 타보라고 냅뒀습니다. 아마 여태 형님 깨어나신 줄도 모를테지요."

"그래서 잠잠했군."

그러나 정말 별 일이 없는것이 맞는가. 하고 놈은 물었다. 망할 놈, 보통사람은 아프면 판단력이 흐려지기라도 한다는데, 저놈은 도리어 그 반대로 가는 모양이었다. 원체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놈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유독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형님께서 저를 못 믿으시는 이유는 알기야 합니다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손 박사를 못 믿는다?

"자네를 못 믿는다기보다, 확실히 해두자는 거네."

"저도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지난 번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정 선생이 형님께 공연한 말을 하여서 고대로 병원을 뛰쳐나가시곤 이 박사와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다시 그 자리에서 도로 거꾸러지시질 않았던가요."

"생각보다 훨씬 가관이었군 그래."

녀석은 내 쪽을 째려보았다. 왜, 내가 못할 말 했나.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툴툴대었다.

"그나저나 이 박사라믄, 이상원이란 그 친구요?"

"이승만 박사 말하는 거네."

"아."

레이시치 경부는 상황을 잘 모르니까, 간략히 말하기야 하였지마는 당시에는 제법 위험한 상태였다. 그것은 비단 연수 형의 몸상태만이 아니었다. 그날 연수 형이 입원해 있으면서 들은 소식은 이러하였다. 이 박사가 아예 자신의 독주를 위해서 연수 형은 제외하고서라도 나머지 백범 선생의 휘하와, 연수 형의 휘하에 있던 비서관들을 모조리 물갈이를 하고, 업무에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느정도의 독주는 가능하였을 텐데 싶었지만, 하기야 그러기에는 연수 형이 눈엣가시였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었다. 내가 뒤늦게 쫓아갔을 때에는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연수 형은 이승만의 멱살을 붙들고는,

-태어나서 본 세상이라고는 풍진세상밖에 없는 이들을, 그것도 그 세월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겠답시고 몰려나온 이들을 치워서 무얼 어쩌겠다는 말인가. 백범 선생의 피를 묻히고, 이회영 선생의 머리를 내려치고, 그 꼴을 그저 몰라서 내버려 둔 줄로 알았다면 오산이네, 내게는 아직도 미처 수행하지 못한 명령이 남아있으니까. 더군다나 저이들은 내게 부관일 뿐 아니라 동생이고, 자식이고, 조카이네. 그런 이들이 이런 꼴을 당하는데 그걸 어찌 보고만 있어..

이리 말하였다. 그러곤 멱살을 붙든 채로 쓰러지면서도 손아귀는 놓지를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피를 토하는 연수 형보다도 이승만이 더욱 퍼렇게 질려있었다. 아마 공포였겠지. 연수 형이 말하는 '아직 수행하지 못한 명령' 이란, 이 박사의 허튼 짓을 저지할 최후의 수단. 암살을 해서라도 임정의 신념에 반하는 짓을 하게 놔두지 말라는 백범선생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 탓에 이승만은 연수 형에게 '죽은 백범의 마지막 남은 사냥개'라는 별명을 붙이었지만 그건 사실 틀린 말이었다. 연수 형은 누군가의 사냥개가 아니었고, 오히려 연수 형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들이야말로 사냥개였다. 지금은 연수 형이 살아있으니까 다들 그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연수 형이 죽는다면 이승만 그 자의 목도 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걸 아니까, 연수 형을 아주 멀리 두지는 못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지금 형님의 상황으로는 수술도 하지를 못하니까 당분간만 참아주시지요."

"수술도 못한다니요?"

"폐를 건드리는 게 어디 간단한 수술인가요. 수술은 그렇다치더라도 환부가 아물어야하는데, 지금 형님은 환부가 아물만치 회복력이 좋지도 못하니까요."

"그래서.."

"저 다음 단계 치료가 있기는 합니다만, 썩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어째섭니까?"

"약물로 폐 조직을 녹여서 새로 아물게 하는건데, 것도 회복이 되어야 말이지 안 그럼 구멍만 더 내는 셈이지요. 고통스럽기도 하고요. 쉽게 말하믄 폐에다 칼질을 하는거나 매한가질테요."

"이거야 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구먼."

"움직일 수만 있으면 되네."

"그럼 지금은 얌전히 있어야겠군. 자넨 목발같은 보조기구없인 잘 걷지도 못하잖아?"

손 박사는 어쩌면 내가 놈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려고 그리 말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잠깐의 모욕, 그 일말의 수치가 놈을 죽음으로부터 멀찍이 밀어놓을 수 있다면 그깟 양심쯤이야 얼마든지 깔아뭉갤 수 있었다. 그러나 놈은 나를 흘긋 쳐다볼 뿐 무미건조한 표정은 여전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도 있겠지."

"미친 놈."

"왠일로 그 소리 안하나 했네."

"언젠, 손 박사 체면 생각해서 가만 있는다더니?"

손 박사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잖아도 몰래 수면제를 섞어놨어요. 하고 작게 말했다. 어쩐지, 놈은 금방 알아챈 것 같았지만 우리를 노려보던 그 찰나에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선생도 야만적인 구석이 있으시군."

"야만이라기 보다, 연수 형님을 다루다 생긴 지혜지요."

"맹수는 따로 잡는 법이 있다. 이건가요."

"맹수도 맹수 나름일테지요."

"언제까지나 저리 붙잡아 둘 수도 없지를 않소."

"연수 형은 자기 말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걷지도 못하는데 다짜고짜 퇴원시켜달라 할 사람도 아니지요."

"지금껏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디까."

탈출하려면 진작 했을거요, 연수 형이라면 충분히 가능할테니까. 하고 손 박사는 대꾸했다.

"언젠 병원에서 몇발짝 나가지도 못할 상태라면서요."

"그거야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연수 형님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셔야한다는 거지요."

"저놈도 자기 상탠 알던데."

"알지만, 쉬어야 한다는 건 모르시지요."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 너스레를 떠는 거겠지. 나는 그리 툴툴거렸다.

"연수 형은 그 이유로 스스로를 적당히 속여넘겨오셨지요, 이 정도는 아직 버틸만 하다. 늘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건 우리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테요."

-장관님, 아직 버틸 수 있습니다. 손 놓고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징하다, 그때 나는 그리 생각했었다. 연수 형이 폐병으로 끝내 병석에 억지로 눕혀졌을 때, 연수 형은 백범선생의 발치 아래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며 말했었다. 아직 일할 수 있노라고, 죽어도, 임정에서 죽게 해달라고. 아무것도 못하는 채로 무기력하게 죽긴 싫다면서.. 차라리 임정 내에서 암살당해 죽어도 좋으니 그리 해달라 간절히 빌었었다. 그러나.

-하긴 무얼 한단 말인가. 자네도 자네 현실을 알지를 않아, 지금 자네는 일할 상황도 아니고, 더더욱이 지금 자네를 필요로 할 수도 없네. 내가, 그리고 임정이 필요한 건 멀쩡한 '설 비서관'이네.

백범 선생은 모질다 싶을 정도로 말을 내뱉었다. 하기야, 그만치 해 두어야 연수 형이 쉴 수가 있었을테니까. 그래야, '설 비서관' 이 사니까.. 그 이유였을 것이다. 백범선생이 귀애한 것은 설 비서관이지 사람 설연수가 아니었을 것이란 짐작도 어느정도 갔다. 백범선생이 죽은 지금은, 그 '설 비서관' 조차 알아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물론 연수 형은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을테지만, 그를 정말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일을 하게 내버려둘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게 연수 형이 입버릇처럼 말하고, 그리고 싫어하던 개죽음일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개죽음의 빌미는 내가 만들고야 말았다. 단지 연수 형이 광복도 못 누리고 죽는 게 싫어서,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이 싫어서.. 그 알량한 의사로서의 자존심때문에. 여지껏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숨을 붙여둔 것은 나였다.

"저놈은 과연 살고싶을까요."

손 박사는 대답이 없었다. 모른다, 그게 답일 것이다. 하긴 내가 아는 손다익은 그저 자기가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저 환자를 고치는 사람입니다, 하고서는 두꺼운 안경알을 쓱 올릴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무엇이 그리도 다른 사람과 다를까. 설연수라는 이가 무엇이 그리 다를까. 하기야, 그리 생각하는 나조차도 저놈을 끝내 떠나지는 못하고 있지를 않은가. 그게 서양에서 말하는 리더십이라나 뭐라나 하는 것이 저놈에게 있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녀석이 맡고 있는 저 자리는 일은 잘할지 몰라도 정작 자기 성품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녀석이 원하지도 않았다.

살고 싶을까, 그건 문득 튀어나온 말이었다. 웃긴 말이었다. 누군들 정작 눈앞에 죽음이 닥치면 실제론 죽음보단 삶을 갈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에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삶 자체를 원하기보다 죽음이란 것의 두려움이 사람을 그리 내몬다는 걸 나는 그동안 봐 왔다. 그래서, 한편으론 놈을 형무소에서 만났을 적에, 제 아무리 의연하게 굴어도 너 역시 죽음이란 두려운 것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고 비웃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아도 정말 죽음의 순간이 닥치면 너 역시도 죽기 싫다고 추잡스레 발악을 할 것이 아니냐, 하는 자신감이 내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놈이 내 앞에서 피를 토해가면서도 나를 향하여 조소하고, 자신의 죽음에 의기양양하였고, 자신있게 나를,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의 패배를 예견하면서, 정작 자신의 죽음따위는 상관없이 그 패배가 눈앞에 뻔히 보인다는 식으로 이야기 할 적에 내가 내세워왔던 전제는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네게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니었더란 말이냐.

-연수 형은 그리 말했지요, 죽음 사이를 걸어다니는 것이, 생기있는 삶을 사는 것보다도 쉬운 법이라고 말이오.

손 박사는 언젠가 내게 그리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녀석에게 죽음이란 반길 것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그저 그런 것이다. 무언갈 두려워하거나, 무언갈 애착을 가진 이는 을러대기도 쉬운 법이지만, 놈에게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당장 삶을 끊어낸대도 고만인 것이다. 오히려 그런 놈을 억지로 이 세상에 잡아두는 건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 때문이었다. 놈에게 억지로 선지덩이를 쏟아내게 만드는 사람이란 모두가 그를 아낀다던 사람이었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삶을 연장하게 만들어주면서도, 그 대신 그에게서 살점을 버혀내고, 피를 말리는 사람들이었다. 손 박사는 그에서 예외인 것 같았지만 그럼 나는 무엇인가. 나는 차라리 놈에게서 사랑받지 못할 놈이고 따라서 그런 몹쓸 짓을 하진 않아도 될테니까 차라리 한편으론 다행인 것인가. 이게 다행이라면, 놈의 삶이란 얼마만치 비틀려왔던 겐가.

-

"자네는 일도 없나."

"여기가 내 직장이네."

"자네가 간병인은 아닐텐데."

"겸업하는거지. 보수도 안 받고 일해주니까 좀 좋아?"

"그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네가 유일할 걸."

임정 건국강령이라도 읊어줄까, 하고 녀석은 중얼거렸다. 그럴 필요 없을 걸, 말해봐야 나는 모르니까.

"자네한테 그리도 노동 개념이 없을 줄은 몰랐네."

"자네나 나나 매일반이야. 뭐, 나는 그래도 자네처럼 몸뚱이 허물어질 정도로 일하지도 않았고 아파서 일 못하는 걸 불안해 할 정도도 아니여. 알아?"

"일 때문에 아픈 건 아니네."

"일 때문에 악화된 거야 맞지. 자네 자고있을 때 손 박사가 다 일러바쳤네. 아주 개판이더만."

나는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지만 개판이란 말로는 부족했다. 내가 그 앞에 있었더라면 죽으려 환장을 하였느냐, 하곤 드잡이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개판,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광복이란 녀석에게 도리어 혼란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다 죽어가는 몸으로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다가, 광복이란 소리에 밖으로 업혀나왔더니 막상 되찾은 나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못한 것이다. 정작 그 사태를 정리해야했을 사람들은 귀국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놈은 병고가 깃든 몸으로 그 일을 혼자 모조리 떠안았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다는 이유로. 하루가 다르게 휘몰아치는 일더미에 그렇잖아도 정상적이지 못한 몸이 버틸 리가 만무하였다.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으면서도 치료보다도 일처리가 우선이었다고, 손 박사는 말했다. 그러다보니 치료시간을 넘기는 일이 빈번하였고, 정작 치료다운 치료는 해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그렇게 녀석이 거의 다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임정 요인이란 이들은 개인자격으로 1군 2군을 나누어 고개를 디밀었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되는 동안에는 그 이승만이란 작자의 농간도 한 몫 했으리라, 하고서 손 박사는 덧붙였다. 임정을 차라리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면 속수무책은 아니었을텐데, 그도 아니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맨땅에 머리박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제헌 헌법이니 무어니 하는 것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정작 임정에서 내세웠던 그 강령들은 거의 지켜지지가 않았다. 첨부터 망가진 나라로 시작한 꼴이다. 그러는 새에 놈은 그걸 고치려고 이곳 저곳을 뛰어다녔지만 하나를 고쳐놓으면 다른 데에서 헛짓거리를 하는 형국이었으니까 한 사람이 그걸 해내기엔 시간도, 몸도 따라주지를 않았을 것이다.

나는 손 박사에게 물었다, 그럼 그 이승만이란 작자는 뭣하러 그리하였겠습니까, 같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습니까, 하고서. 대답은 간단하였다. 임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간 어차피 퇴출이 멀지 않았을테니까 한마디로 저 하나 살겠답시고 대신 설연수, 저 친구가 죽어나자빠지길 기다렸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저놈이 잘 버티니까, 일 정리도 곧잘하고 있으니까, 이승만 저로서는 똥줄이 타서 그냥 들어오는 수 밖엔 없었을 것이라고, 손 박사는 말했다. 물론 이것이 참말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잘 모르니까.

"손 군은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을거네."

손 군이라. 녀석은 무심결에 그리 말했다. 아무도 손 박사를 그리 부르지 않았는데. 아마 저것은 내가 모르는 세월의 단면이겠지.

"같이 임정에 있었다하질 않았어?"

"그렇지만 손 박사가 합류한 건 조금 뒤였네."

게다가 다익이는 출신 배경 탓에 임정에서도 겉도는 처지였으니까.. 하고 놈은 덧붙였다.

"그럼 그치들이 죽어가던 자네에게 공연히 일을 다 떠넘긴 게 아니란 말이야?"

"적어도 백범 선생님은 아니었네."

백범. 그 이름이 다시 나왔다. 그러고보니 녀석이 발작처럼 반응한 말도 역시 그 이름이었지. 대체 무슨 사이였길래. 하기야, 녀석의 젊은시절 대부분을 동고동락한 사람이니까 보통사인 아닐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 백범을 위하여 목숨을 내던질 마음도 먹었던 것이겠지.

-국민 대표회의때, 자네까지 박차고 나가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네. 자네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내게는 최고의 행운이었어.

언젠가 백범 선생은 내게 그리 말했다. 그 상황에 나까지 뛰쳐나갈 순 없어서, 누군가는 버티고 있어야 하니까.. 단지 그게 이유였을 뿐인데도 백범 선생은 내게 빚을 진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자네가 죽는 자리는 자네 혼자 결정하게 놔둘 수 없네. 그건 자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나를 기필코 살려두겠다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처음엔 내가 필요할 뿐이니까. 그 정도로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보, 이러다 설 선생까지 죽일 작정인가!

그러나 광복 후의 그 말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그때도 사람이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남아있다면 일은 훨씬 더 수월하였을텐데, 백범선생은 오히려 그 상황에 이승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그 자리에서 놓아주셨더랬다. 나는 그 날 백범선생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한다. 물론 내가 그때 선생의 눈 앞에서 토혈을 하여 더 그리하였던 것은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서류 앞에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고는 '광복 하나때문에 설 비서관을 사지로 내몬 것은 이미 충분한데, 또다시 그런 짓을 하란 말이냐.'고 이승만에게 고개를 돌려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내 손에 들린 필기구를 빼앗아 내던지고, 나를 일으켜 세워 문 밖으로 등을 떠밀었다. 완치판정 받기 전에는 사무실에 얼씬도 할 생각을 말라, 그 말과 함께. 어쩌면 이미 한번 형무소에서 죽음과도 같은 선고를 받았던 나이니까 백범선생은 나를 잃는 데에 일종의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많이 잃어봤다고 해서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그렇다고 선생께서 매번 옳았다 생각지는 않는다. 그 탓에 나와 언쟁도 여러차례 벌인 일이 있었다. 한번은 성급한 암살이었던 탓에 내가 그것을 문제삼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승만과 선생을 동일선 상에 놓을 수는 없었다. 손 박사는 일전에 내가 곤란에 처한 일을 두고 백범선생이 나를 배신하였다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게 그건 배신이라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일이 있었던 연후에 나의 무고가 밝혀지곤 선생은 죄인처럼 한동안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으니까. 융통성 탓에 일에 초를 친 경우도 적잖았으나 적어도 그에게는 성찰이라는 것이 있었다. 내가 일말의 희망을 거는 것은 그러한 성찰, 조금씩이라도 존재하는 개선에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흠결없는 위대한 영웅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한 인간을 원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단상 위에 서 있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단상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이들의 삶에서, 그이들과 같이 개선해 나가는 것을 원했다. 그러니까 단상이란,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 그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나와 백범선생이 일치를 본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승만과의 지대한 차이이기도 했다.

"이승만이란 작자가, 자네를 백범의 충직한 개라고 부른다던데. 어쩌면 그건 부러워서였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인가."

"자네의 태도말이야."

"손 박사 입장에서야 백범선생이 탐탁지 않았을 거네."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야. 자네가 애써 그분의 역할을 자처한 것이, 누군가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이, 그 작자에겐 부러웠을거란 말이네. 자네도 백범선생도 그걸 능히 해내니까. 자긴 못할테고. 어쩌면 그래서 자네 후임들도 자넬 백범선생으로 생각하고 따르는지도 모르지.."

"나는 백범선생이라기엔,"

"그래서 그게 글러먹었다는 거네."

"뭐?"

"백범선생이든, 자네든, 누구 한 사람에게 그리도 의지하여야만 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버팀목인 자네가 사라지고 나면, 그 뒤엔 아무것도 못할 오합지졸이라면 애초에 왜 거기서 자리차지를 하고 있는거냐, 이 말이네."

"내가 부족하게 가르친 탓이지."

"그러는 자넨 누구에게 배워서 그런 것들을 할 수가 있었나? 내 눈엔 그저 응석받이야. 자네는 그이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줄로 모르겠지마는, 그렇담 자네는 자식들을 오냐오냐 하다 망친 아비인 거네."

놈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내게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며 화를 낼 줄로 알았는데, 녀석은 그저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너무도 맞는 말이라, 대거리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네 그려."

맞기는 무어가 맞아. 자네가 그럼 그 상황에 무얼 할 수가 있었겠어. 그렇게 유화책이라도 펴질 않았다면 그이들은 임정에서 나가떨어졌을 것이고, 이런 반쪽짜리 광복이나마 이루어지지 않았겠지.

"풀죽을 것도 없네, 자네 처지가 답답하여 한번 해 본 소리니깐."

"알고있네."

알고있는 것과, 내 말을 받아들이는 건 천지차이일 게다. 내가 한소리 더 하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무과장이었다. 치료비 납부에 문제가 생겼나, 그건 손 박사 소관이라고 들었는데. 그도 아니면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소리일 거다.

"나 부르는구먼."

"자넬 부를 일이 있나."

"손 박사가, 날 원무실 직원으로 쓰겠단 소릴 이전부터 했다고 하질 않았어?"

"허언인 줄로만 알았지."

하여간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니까. 나는 툴툴거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앞에서 보고있을테니까 병실 밖으로 나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말라는 협박과 함께 말이다.

-

"무슨 일이요?"

손 박사가 나를 원무과 직원으로 쓴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그건 형식상의 말일 뿐이고, 내게는 설연수 저놈의 건강상태를 보고하는 일종의 밀정과도 같은 일이 맡겨졌을 뿐이지만.

"별 일이야 아닙니다마는.."

별 일이 아니면 부르지를 말든지. 나는 속으로 툴툴댔다.

"그러면 무슨 일이던가요."

"설 선생님 가족분이 찾아오신대서.."

가족? 내가 알기로 저녀석의 부모되는 이는 진작 세상을 떴다. 그러면 가족은..

"설홍주 군 말입니까? 찾아오면 찾아오는게지, 내가 왜요?"

"저희는 그 분 얼굴을 모르니까요."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신원? 아. 그거로구나. 그러나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된다면, 안전상의 문제밖에는 없을텐데.. 혹여,

"누군가가 설 군을 사칭하여서 문제라도 일으킨 적이 있다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나더러 문지기 역할을 하라는 거군요."

"선생께서 불쾌하실 수야 있겠습니다마는,"

"불쾌하지는 않소, 그러나 그렇게까지 깐깐하게 굴 이유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선생께선 최근에 오셔서 그리 말씀하시겠습니다마는, 설 선생님을 살해하려는 행위는 예전부터 있어왔으니까요."

"예를 들면?"

"병문객으로 위장하여서는 설 선생님께 투여되는 약을 바꿔치기를 한다든지, 의식이 없으신 틈을 타 코와 입을 막곤 질식사를 시키려 들었다든지.."

농이 지나치시오, 하고 나는 웃었다. 그러나 원무과장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박음질을 단단히 한 천주름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면 녀석은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요행이지요. 요행이랄밖엔 없습니다, 간호부가 용케 발견을 하거나, 손 박사님이 회진을 도시다가 그 꼴을 보셨거나.. 저도 몇차례 발견하기야 했습니다마는."

가관이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손 박사가 내게 저놈 옆에 붙어있으라고 했던 것인가. 한편으론 우습기도, 애처롭기도 한 노릇이었다. 자길 죽이려 했던 사람의 손에 자기 목숨을 의탁해야한다니,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그런 상황이니까, 되려 살고싶은 마음도 없겠다, 싶었다. 손 박사는 녀석의 그 꼬락서니를 보고서는 땅 밑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사람을 억지로 끄집어 내어서는 중력을 거슬러 땅 위에 세워놓은 노릇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이겠나. 녀석이 서 있는 땅 위의 세상이란 녀석에게 봉욕밖에 안겨줄 것이 없었다. 봉욕과 수모로 뒤범벅 된 세월과, 그걸 살아내고도 좋아질 거란 말조차 쉽사리 할 수가 없는 세상은, 고요한 죽음보다도 못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죽었으면 반쪽짜리 명예라도 찾았을 것을, 물론 녀석에겐 그것도 뜻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녀석이 만일 죽음을 원한다면, 그건 그저 조용한 안식. 그것을 원할 뿐일 것이다. 꼭 죽음을 통하여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질 않으냐 할지도 모르겠으나, 녀석은 그걸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러니, 저리 살다가 거꾸러지는 그 끝이, 녀석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최상도 아닌 최악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원무과장은 그것 말고도 주저리 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요지는, 적어도 이 병원 내에 있는 동안에는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거였다. 나는 알았다고 짤막하게 답을 하고는 도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녀석은 그나마 링거 줄을 잡아뜯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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