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명운

 어떤 죄업도 자신의 앞에서는 모두 용서되는 법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명조차도 제 죄업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붙여대기 일쑤였다. 그러니 모순뿐인 이 밤도, 그리 큰 죄가 되지는 않으리라. 명은 감히 상상했다. 제 품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당신의 온기가 따스한 정오의 햇살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만년송 아래 너럭바위에 느긋하니 누워, 가만히 낮잠을 청할 때의 편안함.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드물게 그가 행복을 느끼는 짧은 시간이, 그 찰나의 순간이 어느 때 보다도 길게 늘어졌다.

 과거는 언제나 달콤했다. 달콤했던 과거만을 추억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가 되면 무엇이든 그 달콤함에 절여지게 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명에게 과거란 늘상 아프면서 아름답고, 쓰디 쓰면서도 동시에 어떤 것보다 달콤한 것이었다.

 “... 차마 들어올리지 못하였네. 혹여 자네에게 받은 소중한 접선이 망가지면…”

 … 망가지면 다시 달라 하면 되는 것을. 그 안의 상념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명은 가볍게도 웃으며 말했다. 그저 도술이 조금 묻혀진 접선, 다시 만드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망가진다고 하여 고치지 못 할 것도 아니었고. 명은 떠나지 않는다. 오직 만홍송산에서, 오래도록.

 “망가지면, 안타깝지 않겠나.”

 안타까운 일이었을까. 천천히 떨어지는 당신을 살며시 놓아준다. 밤을 닮은 제 옷가지 속에 빛나는 당신은 명 속의 명, 밤하늘의 달빛과 같았다. 떨어지지 않을 듯, 떨어져가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조금 전까지 제 품에서 온기를 내던 것이 한 자락 꿈처럼 멀어진다.

 “아니, 처음 듣는 말이긴 하네만. 연회 때 내가 입은 옷을 보았나 보아.”

 당신의 말에 또 시끌벅적했던 연회를 잠깐 상기한다. 제법 추워진 날씨에, 썩 잘 어울리기도 했던 당신의 옷. 이전의 그것과는 다르게 퍽 따스해 보이던 그것을. 가을 하늘 아래 떠다니는 구름과도 같던 그 모습을.

 “자네가 잘 어울린다 하니 내 이리 기쁠 수 없군. 다음에 자네를 보러 올 땐 그 옷을 입고 와야 하려나.”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제 손은 다시 붙잡힌다. 짧은 밤이었지만, 이리 자연스럽게 제 손을 잡는 당신이 기꺼웠다. 작게 힘이 실리면, 이내 픽 웃는다.

 “그래준다면 내 환영일세. 부탁 좀 하겠네.”

 “영광이지요.”

 하며 고개를 숙여보인다. 예의 과장된 예법과 같이. 밤의 모래는 꽤나 차가웠다. 낮에 쉬이 따뜻해지는 만큼, 쉬이 그 온기를 빼앗기는 모래사장은 흡사 얼음장 같았으니.

 “허나 자네는- 내게 이 답호를 주어도 괜찮은가. 몸이 안좋아지기라도 하면 걱정인데 말일세.”

 멈추어 선 당신과 눈이 맞으면, 빙글거리며 웃는다. 걱정어린 눈빛이 꽤 기껍다는 듯이.

 “발걸음을 서둘러야겠어.”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명은 당신을 가볍게 끌어당겨 제 품에 담는다. 폭- 하고 닿는 가슴팍도 잠시, 한 덩이 연기로 변하는 명에 당신이 균형을 잃었을까, 휘청거리다 주저앉으면 차디찬 모래사장이 아닌, 폭신하고 부드러운 백색의 털가죽이 당신을 지탱해낸다.

 [ 이리 가면 빨리 갈 수 있지. 자네 발도 시리지 않을 테고. ]

 호랑이의 모습인지라, 소리내어 웃지는 못한다. 다만 올라탄 당신에게도 작은 떨림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쿡쿡대며 웃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꼭 붙잡게. 하는 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들려오면, 당신을 태운 거구의 호랑이는 조금씩 내달리기 시작한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꽤 차가울 테지만, 어째서인지 차갑지 않았다. 바람소리는 들리나, 어쩐지 귓등을 스치는 것은 꽤나 얌전한 훈풍이다.

 [ 요즘 들어 통 누굴 태우고 달릴 일이 많단 말이야. ]

 산군 체면이 말이 아니라며 장난스레 웃는다. 어느새 기와 근처에 도착하면, 천천히 속도를 줄여 당신을 내려준다. 아직 호랑이의 모습으로, 당신을 감싸다 허리께에 제 머리를 비비적대기도 하고, 손등을 두어 번 핥짝인다.

 [ 그럼 어디- ]

 “자네가 머물렀던 기와에라도 가 볼까.”

 금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명은, 빙글거리며 웃는다. 다시금 당신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두 걸음. 명이 옮기는 걸음마다 적막했던 기와마을에 조금씩 빛이 돌아온다. 길가의 초롱등에 불이 붙고, 목적지 쯤의 기와에서는 굴뚝 너머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른다.

 여전히 적막한 기와마을에, 미묘한 온기가 어린다. 그 걸음의 끝에는, 여전하게도 “영운”이라 쓰인 명패가 붙어 있다.

 “아직 정리를 다 못하였네.”

 조금은 곤란하게 웃는다. 누구보다 과거에 머무는 것은 단연 명이었기에. 찰나의 시간이라 할 지라도 쉬이 잊어내기 어려운 것들이었기에. 아직 명패조차 떨어내지 못하였음에 부끄러워 하기도 잠시. 제 집이 아니라는 듯이, 당신을 위해 비켜선다.

 “그러니 아직 자네가 주인이지 않은가. 남의 집 문을 벌컥벌컥 열어제낄 수야 없지.”

 쿡쿡 웃으며, 붙잡았던 손을 끌어 당신을 문앞으로 이끌었다. 문간 안쪽은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당신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약하게 풍겨오는 모란 향기, 침구에 남아 있는 당신의 체취. 마당에는 심어 두었던 풀꽃들이. 이곳에 당신이 머물렀음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다만 하나 다른 것은, 당신의 것이 아닌 발자욱이 몇 개 있다는 사실일까. 썩 최근의 일인 듯이,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은 천천히 마당을 거닌 것 같았다. 마루에는 먼지 한 톨 없고, 웬 다과상 하나가 당신을 기다렸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질 만큼.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