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명운
이마에 닿는 입술에는 짐승으로의 본능이 자연히 꼬리를 세운다.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오는 것 또한 그것이리라.
여전하게도 과거에 머무르는 흰 호랑이는 연회의 시끌벅적함을 잊지 못한다. 피워내는 불꽃은 색색의 종이 뒤로 화려하게 빛나고, 금방이라도 골목에서 장난스런 아이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른 것은 그곳에 명과 당신만이 있다는 것일까.
현재는 과거가 쌓여 만들어지는 것. 설탕에 절인 듯 달콤한 추억들은 비로소 현재에 이르러 그 아릿한 단 맛을 혀끝에 감돌게 한다. 당신의 맑은 웃음에도 자연히 명의 세상은 밝아졌다. 즐거워하는 모양에는 그마저 덩달아 기분을 들뜨게 하였고.
당신의 흔적 위로, 제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썩 부끄러웠으리라. 다만 언젠가 제게 찾아올 당신을 위함이었으니. 걸릴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야…”
당신의 눈이 살며시 감기고, 사위를 휘감는 신비로운 기운에 조금 놀란 채 시선을 옮긴다. 시들었던 풀꽃이 다시금 생을 담아내고,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는 곱디 고운 당신을 닮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구름이 기와를 감싸안으면 또한 당신을 닮은 모란의 향이 피어난다. 일전의 술자리, 혹은 찻잔을 나누었던 날들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달콤한 꽃향이 콧가를 스치면, 자연히 코 끝을 찡긋거리며 기분 좋게 웃는다. 꿈같은 풍경에서 눈을 뜨는 당신을 마주하며. 달빛 아래서 반짝이는 한 송이 모란을 마주하며.
“환영하네, 만홍송산의 주인이여.”
익숙한,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는 위엄이 어려 있다. 당연하게도 명은 그 위엄에 가볍게 고개숙인다. 당신의 손길에 문간을 넘어 걸음을 옮기면, 당신의 작은 발자국 위로 다시금 명의 것이 덮여진다.
“나나 자네나, 짖궂기는 매한가지구만.”
쿡쿡 웃으며 다과상 앞에 걸터앉는다. 제 답호가 돌아오는 것에 가만히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나, 당신의 색으로 변하였던 답호가 다시금 제 색으로 변하고- 그 끝에 당신이 새겨지는 것을 바라본다. 명은 여전히 冥이나, 그 안에 구름을 품어낸다. 함께 바라보았던 밤하늘처럼. 제 머리를 쓰다듬는 당신의 손길에는 슬며시 눈을 감고 그 감촉을 즐기었다. 부드러이 스치는 손끝은 또한 다정히도 명을 스치었다.
“이것은 답호를 빌려준 선물일세.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자네이니.”
늘상 저를 빛난다 말해주는 당신이야말로, 명에게 누구보다 빛나는 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볼가에 닿는 손길에 살며시 눈을 접어 웃으며 구태여 답하진 않는다. 이 감정이나 감상이야 명의 것이니. 암청색의 하늘에 또한 떠다니는 구름과도 같은 당신이니. 달빛을 받아 빛나는 것은 구름이지, 밤하늘이 아니었다.
“우렁총각이 누군지는 모르겠네만, 퍽 감이 좋은 자로구만.”
클클 웃으며 당신의 농담에 마주 농담으로 대꾸했다. 다과상이야 당연히 명이 준비한 것이었다. 일전의 백호은침을 그대로 준비했으니, 당신의 색이 변할 일도 없었고.
“주인 없는 집이라니, 앞에 명패 못 보았나? 자네가 이 집 주인인데 말야.”
쿡쿡 웃는다. 여전하게도 장난기가 많은 명이었다.
능숙한 손길로 차가 우려지면 당신이 건네는 잔을 감사히 받아든다. 여전히 주변에 흩날리는 꽃잎은 제 흰 머리칼에 한두 잎이 달라붙었다. 흰 배경인지라 그것이 그리 티가 나지는 않았으리라. 다만 연홍색의 당신에게는 꼭 눈이 내린 듯, 금방이라도 소복이 쌓일 것만 같았다.
“이 밤에 다도라니, 내 술상은 자주 가졌네만. 어쩐지 자네와 함께 있으면 술상보다는 다도를 자주 하는 듯 해.”
당신의 말에는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입가로 가져간 찻잔은 아직 따뜻했고, 그날과 같은 향의 차는 여전히 향긋했다.
“이런. 술상을 차려 두었어야 했나 보군. 우렁총각 이 녀석, 썩 감이 좋은 친구는 아닌 듯도 싶구만.”
하며 클클 웃는 것이다. 우렁총각은 제가 아니라는 양 뚝 잡아떼는 것이 능청스러웠다. 여전히 하늘에서 나리는 꽃잎이 어느샌가 명의 콧등에 떨어져 달라붙는다. 반사적으로 코를 찡긋거리지만, 꽃잎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결국에 손을 들어 꽃잎을 떼어낸다. 꽃잎에서도 향긋한 꽃내음이 풍기는 것이, 당신의 도술다웠다. 온 천지가 당신의 꽃비로 가득한 것이, 그야말로-
“화우동산이로다.”
말하며 사위를 훑는다. 밤하늘 아래, 새하얀 꽃비가 내리는 것이 꼭 눈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뒤로는 어둑하게 만홍송산의 모습이 엿보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했으리라.
그러다 다시 당신을 바라본다.
“화락연불소월명애무면(*花落憐不掃月明愛無眠) 이라.”
익살스레 웃으며 말을 잇는다.
“내 자네 탓에 오늘 잠을 이루질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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