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탐정록 연성2-2

“자네 동생 온다는구만."

"세평이, 아니. 홍주가?"

세평, 녀석은 설홍주 군을 부를 때 그 이름을 썼다. 이름이 홍주인 것을 모르는 게 아니면서도, 자신이 기억하는 건 바뀌기 이전 아명이 먼저인 모양이었다. 하기사, 현재의 모습보다 기억에 각인된 것은 어린모습일테니까. 비록 녀석이 이따금씩 경성으로 들어와 설홍주 군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긴 했다고 해도, 악수하나, 호명한번 제대로 한 일이 없으니까 그 모습이 뚜렷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가장 가까이에서 본 것은 경성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쳐서, 녀석이 인력거꾼으로 위장하여 나타났을 때 설 군이 그 인력거를 탔을 때였다고 하였다. 동생이 혹여나 알아차릴까봐, 그래서 위험에 처할까 싶어 목소리조차 아니 내었다고 했다. 그래서 홍주 군은 아직도 녀석의 지금 목소리를 모른다. 하기야 세월이 흘러도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일테니까 대학생시절 놈의 목소리와 크게 차이는 없지 싶지만.

"오지 말라고 할까?"

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녀석이 조금 머뭇거리는 것이 보였다. 흉한 꼴을 보이기는 싫었던 걸까. 그러나 그러면서도 끝내 그리하란 말은 하지 않았다. 보고싶었다는 건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사, 녀석이 20대 초반에 만주로 건너갔으니까 세월로만 따진다면 못 만난지는 거진 20년이 넘어갔다. 독한 놈. 형무소에서 네가 죽었으면, 설홍주 군은 그럼 네 처참한 시신을 보는 것이 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을 것이 아니냐.

"나를 알아보긴, 하려나."

"자기 형을 못 알아보면 그거야말로 개아들놈이지. 자네 현상수배만 해도 대문짝하게 걸리던 시절이 있었는걸."

"특고에선 나와 백범선생을 혼동한 적도 있지를 않나."

"아픈 델 찌르는군. 하기야, 자네말마따나 특고도 멍청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설마하니 홍주 군이 자네 얼굴을 못 알아볼까."

"그 애가, 나를 반길지도 모르겠고."

"자네가 오라고 한 게 아니라 그쪽에서 온다잖아. 광복하고도 영영 아니 볼 생각이었어? 아니면 자네말마따나, 왜 반쪽짜리 광복밖에 갖고오질 못했느냐고 자네더러 욕을 할까, 그 친구가? 그도 아니면 왜 자길, 왜 자기 가족을 떠났느냐, 그런 소릴 들을까봐서 그래? 걱정 말어, 적어도 내가 아는 설 군은 자네를 원망하기는 커녕 자네를 걱정했고, 자네를 그래도 좋게 생각했어."

그게 더 문제라는 것을, 레이시치 이 친구는 모를 것이다. 그 원망이 마땅한 것임에도, 그 마땅한 비난이 내게로 향하지 않을 일이 나는 우려되었던 것이다.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내게 독립운동의 첫 시작은, 그 불씨는 궁극적으로는 내 아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비록 어린 내 눈이었다고는 하나, 갓 태어나서 강보에 싸인 내 아우는, 내가 안고 있었던 그 아이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여뻤고, 그래서 이 세상이란 것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해사한 웃음이 좋았고, 그 따뜻함이 좋았다. 부끄런 줄도 모르고 이 애가 내 동생이요, 하고 자랑을 하고 싶을만큼 소중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론 그 애가 커서 볼 세상에서만큼은, 내가 겪은 허탈감과 괴리를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아우는 다른 이들 이상으로 영민하였고, 나는 그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애가 살아가기에 녹록치 않으리란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이 싫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서 죄 되는 세상에서, 특히나 더 뛰어난 조선인이 되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청천벽력같은 일인지를 아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 한탄스럽고 죄스러웠다. 네가 내 아우로 태어났기 때문에, 다만 그 이유가 내게는 지울 수 없는 죄의 멍에처럼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가 내게 왜 나를 떠났나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은 차라리 가벼운 일이었다. 그 원망 하나로 네 한스러움을 받아낼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대역죄인이 되어도 좋았고,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 네가 느껴왔던 짐을, 생채기를 내게로 모두 던져버리고 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우는 그러기엔 너무도 인정이 많았고, 나를 좀처럼 미워할 줄도 몰라서, 내겐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언제 온다고 하던가."

"글쎄, 아마 오늘내일중으로 오지 않겠나. 나도 그 친군 오랜만에 보는군. 자네나 그 친구나 내 속썩이긴 매한가지였지만. 하기야 자네에 비하믄 그 친군 약과네."

"그 왕도손이란 친구와는 아직도 같이 산다던가."

"그런가 보이, 그 친군 광복이 되군 중국으로 들어가 살 줄로 알았는데 조선에 아예 남기루 한 모양이야."

"조선에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을텐데."

"거야 모르지, 혹시 아나, 설 군 때문에 남아있는지두."

"친구는 잘 사귀어 둔 모양이군."

"자네처럼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친구는 아닐테니깐. 하기야 설 군과 엮인다면야 그도 아닌 경우가 많을테지."

녀석은 그러곤 말이 없었다. 어찌할까, 하고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이어야 할까. 하기야, 저들 형제들이란 좀처럼 모를 사이니까. 그래도 자기 형 얼굴을 기억할까, 하고 걱정을 해야한다는 건 과치 않은가 싶었다. 물론 때론 남만도 못한 혈육이라는 것이 있으나, 저들의 경우엔 그렇지는 않질 않은가. 단지 오래 만나지를 못했다 뿐이지 그 사이가 문제가 있어 틀어진 건 아니었으니까. 소작료를 못 내어 딸자식을 사창가로 팔아넘긴 아비도 있는 마당에, 그것이 그리 큰 흠은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켕기는 것이 있어서. 게다가 가족을 등졌다 말하기에도 사실은 그 중엔 나은 편이질 않은가. 말이야 어쨌건 녀석은 경성에 들를 기회가 있을적마다 설 군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건 매번 목숨을 줄타기하는 행위와도 같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해서, 만약에 설 군이 서운한 소리라도 할라치면 내 쪽에서 역성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

왕도손 군, 자네 나랑 누구 만나러 좀 가세.

오늘아침, 홍주는 나를 깨우더니 나즈막히 말했다. 왠일로. 하고 나는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는 내가 청하여 홍주를 따라가는 것이었고 요즘들어선 홍주도 사건을 연달아 맡는 일이 적었다. 지금처럼 사건 하나를 끝내놓고는 한동안 유유자적하며 쉬곤 했었는데.

어디든 따라가도 그만이지만 어딜 간다는 거야? 하고 나는 물었다. 평소답지 않아서였다. 평소답지 않게 경찰서로 가는 인력거도 잡아타지 않고, 도보로, 그것도 말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하였다.

내가 일전에 임정에서 일하신다던 우리 형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홍주는 그렇게 운을 뗐다. 그리고,

손 박사님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하네. 병문안이나 가려고. 자네도 줄곧 형님에 대해서 궁금해 했잖아. 하고 덧붙여 말했다.

"입원이라니, 어디 편찮으신가?"

"손 박사님 말씀으룬 폐결핵이라네, 제법 위중하신 모양이야. 그래도 동생이란 놈이, 얼굴은 디밀어봐야질 않겠나."

그냥 자네가 형님을 보고싶었던 건 아니구? 형무소에서 면회가 거절당한 날 그렇게 서러워했잖아. 하고, 나는 짓궂게 말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홍주로서는, 그게 자기 형과 마지막이려니, 생각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 설 비서관이란 사람은 병도 병이지만 사형집행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었으니까.

그 양반은 홍주와 닮았을까. 하긴, 닮았겠지. 얼굴이든 성격이든,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겠지. 형제니깐. 하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실례인 줄은 알지만 나는 설 선생의 얼굴을 보곤 첨에 조금 긴가민가 하였다. 물론 병색이 짙어 그런 것도 있겠으나,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 말고는 글쎄, 비교적 유순한 인상의 홍주와는 영 딴판이었다. 게다가, 나를 보고는 산둥어로 유창하게 말하기에 처음엔 조선인이 아닌가, 하였다.

-미안하군, 자네가 어느지역사람인지 묻는 걸 깜빡하고 입에 익은대로 말했네.

그런 것 치고는 잘 짚었는데.. 나는 어린시절 산둥지방에서 자랐으니까. 어쩌면 설 선생은 홍주처럼 추론의 미학이라나 그런 걸 본능처럼 쓰는지도 몰랐다.

왔느냐.하고, 형은 자리에 앉은 채로 우리를 맞았다. 레이시치 경부님으로부터 들은 말을 생각하면 병상에 누워계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나 괜찮다기에는 안색이 파리하였고, 가슴 중간에 뚫어놓은 호스가 보였다. 처음엔, 형인지도 긴가민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 앉아계셔도 되는가요."

"보이는 것만큼 중병은 아니란다."

저어, 처음 뵙겠습니다. 설 비서관님. 하고 왕도손 군은 옆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형의 눈빛때문이었던 것 같다. 형은 적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상대방을 창으로 꿰듯이 쳐다보곤 하였다. 더군다나 형이 지내온 세월은 그런 습관을 더더욱 강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리 존대할 건 없네."

"그럼, 무어라."

선생님. 정도가 적당하겠군. 하고 형은 말했다. 그거하난 형다웠다. 형은 젊은 시절부터 선생님 소릴 가장 좋아했다. 허영심이 있었단 게 아니라 형은 다 큰 어른들보다 아이들을, 학생들을 참 좋아했다. 내 어린 기억에도 형은 나를 좋아라 했던 것이 남아있다. 어쩌면 젊은시절 세상에 대한 원망의 태반은 형으로부터 기인하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원망할 것을, 형을 많이도 원망하였으니까. 세상을 미워할 걸, 내 곁에 없는 형을 미워하였으며, 세상을 탓할 걸 형을 탓하였다. 결국 그것은 형님 앞에만 서면 철부지 동생일 수가 있는 그 어린시절이 눈 시리도록 그리워서, 그걸 조금이나마 더 연장하고 싶었던 내 이기심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감히 형을 원망한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형을 미워함은, 곧 형을 그리워한다는 길로 이어진 하나의 커다란 원호를 그리는 궤적이었다. 나는 그 위에서 돌고, 또 돌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이 쭉 뻗어있는 다른 길이라고 멋대로 믿고 싶었고, 믿었을 뿐이었지만.

"식사는 잘 하고 다니느냐."

"형님한테서 들을 말이 아닌 것 같은데요."

"단정짓지는 말어라, 이 친구 때문에라도 나는 잘 지낸 편이니까."

그런 사람이 폐병으로 다시 입원을 합디까. 참말 거짓말 한번 못하시오, 형님. 나는 이 말이 목구멍처럼 차올랐다. 그러나 형님 얼굴을 보고서는 그리 매몰차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독자여러분은 어쩌면 내 형님이 그리도 엄격한 사람이었느냐 물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 반대다. 엄격하다기 보다,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내 기억속에는 남아있다. 어쩌면 레이시치 경부는 내 말에 치를 떨지도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 내 형님이란 사람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친절하면서도, 어디인가 우수에 젖어있는, 그런 모습의 사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왜 입원했나, 싶은 모양이구나."

"눈치는 여전하시군요."

눈치보다도, 너를 안다는 게 더 맞을테지. 하고 형은 살풋 웃고는 말했다.

"병세 탓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일이었단다."

"결국 그놈의 고문후유증 탓이기는 하질 않아? 암만 다른 놈이 화를 돋궈서 자네가 피를 토했다곤 하지만."

"자네한테 안 물었네."

쳇, 누가 뭐라나.하곤 레이시치 경부는 입이 비쭉 튀어나왔다. 형 딴에는 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겠지만, 내 눈에는 퍽 정다워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은 여전히 하십니까."

학생 가르치는 일을 할래도, 받아주는 곳이 있어야지. 그나마 내 예전하던 일이 이거 아니니. 하고서 형은 대답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내 주변에도 학교 선생은 더러 있었지마는, 그런 이들이 잘리는 데엔 적지않게 건강을 이유로 꼽았다. 하기야, 건강보다도 다른 이유였으나 둘러대는 말이기는 하였지만. 더군다나 형님은 교편을 잡는단들 실제로도 건강이 그걸 견뎌내지 못할 것이 뻔했다. 차라리 마음은 조금 편하였으려나. 그러나 세상 어디인들 형님이 마음편할 곳이 있을까. 형은 만들어진 세상에서 사는 게 아니라 도리어 세상을 일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어딜 가든, 희생된 사람, 잊혀지고있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고, 매번 그것으로 마음아파할 것이다. 형은 잊어버리는 방법을 몰랐고, 외면하는 방법은 더더욱 모를 사람이 아닌가.

"손 박사님이 자주 혼내신다지요."

"그 친구야 혼내는 게 일 아니냐."

"손 박사님과도 아는 사이십니까?"

왕도손 군은 통방울같은 눈을 크게 뜨고는 말했다.

"손 박사님과 형님은 선후배사이네. 유일하게 친한 편이기도 하였고."

그렇지만, 하고 왕 군은 말을 얼버무렸다. 하기야, 형님과 손 박사님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안 맞을 것 같은 사람이니깐.

"그럼 일전에 독립운동을 하셨다던 자기 백부님 이야길 꺼낸 건.."

"형님이 생각나서이기도 할 거네."

"백청만 사건 말이냐."

"아십니까?"

"당시 경성 소식도 심심찮게 듣고 있었으니까."

심심찮게 들은 정도가 아닐 것이다. 형이라면 이곳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있었을 테니까. 내가 정치적인 사건을 관여치 않겠다 못박은 것도 형이 신경쓰일 일을 만들지 않겠단 이유도 있었다.

"그렇다면 편리한 핑계라느니, 하는 말은 선생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겠군요."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을거네, 그 이야기는 내게도 했었으니 말이야."

그 친구가 아무에게나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하고 형은 덧붙였다. 하기야 아무데서나 떠들고 다녔다면 손 박사님은 진작 불령선인으로 찍혔을 것이다. 손 박사님이 암암리에 형을 돕고있다는 건 얼추 짐작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손 박사께는 의사의 의무라는, 적당히 넘겨버릴 핑계도 갖고있었고, 그가 평소에 보이는 기계같은 모습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을테니까. 어쩌면, 형이 형무소에 들어가게된 그 일은 형이 손 박사님께 관여치 말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형님이란 사람은, 그 자신의 목숨조차도 누군가를 위하여 써야했던 사람 아닌가. 형이 대단한 위인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늘 그런 방식으로 살아오기만 했던 사람이라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위대해지지 않고서도, 그런 종류의 일을 능히 해내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더더욱 두려운 사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퇴원은 언제쯤 가능하시던가요."

"자네두 자네형님하구 같은소릴 하는구먼. 퇴원의 퇴 자도 저 양반 앞에서 꺼내질 말어. 손 박사는 기겁을 하는데 저 인간은 퇴원시켜달라 성화라네. 기실은 중환자실에서 나온지도 얼마 되질 않어."

저 양반에서 저 인간이라. 레이시치 경부는 예나 지금이나 걱정스레 말하는 법을 잘 몰랐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저 사람이 말이 거칠어지면 그건 그만치 형을 염려한다는 거였다. 하하, 하고, 나는 웃었다.

"이 친구가, 웃을 일이 아니라니깐. 더군다나 자네 형님 아닌가."

"형님이 경부님 말씀을 가만히 잘 듣고 계시니깐, 그게 의외라 그랬습니다."

"잘 듣긴 무에 잘 들어, 약 먹기 싫다고 버티는 걸 어르고 달래다가 난 손도 물렸네. 그 뿐인줄 알어? 잠 좀 자라니깐 꺼지란 소리만 들었어."

"꺼지라곤 아니하였네, 나가달라 하였지."

"그게 그 말 아니야?"

"자네가, 조선어를 잘 모르는 모양이야."

자네 형님, 보기보다 세게 나오시는구먼. 하고 왕도손 군은 내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이만 갈까, 하고 나는 왕 군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호전되셨다지만, 아직은 어쨌건 간에 형님은 요양을 하여야한다지를 않은가. 좀 더 재미있는 구경을 놓치기가 아쉬웠으나 어쨌든 문안은 이만하면 된 것 같았다.

-

"잘 넘긴 것 같지?"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상으로 옮겨가는 데에도 힘이 겨워 손을 파르르 떨었다.

"꼭 그렇게까지 연기를 하여야 할 건 또 무어야. 정말 자네가 괜찮은 줄로 알고있다가 어느날 자네가.."

나는 거기까지만 말을 하고 입을 닫았다. 조선 속담에는 입이 보살이라는 말도 있지를 않은가. 어쨌거나, 나는 살아있는 놈에게 욕을 들어도 들었지, 죽은 놈의 침묵은 달갑지 않았다.

"그 정도는 녀석도 알 거네. 어린애가 아니니까, 상심은 할런지 모르겠지만 그걸로 매몰되지는 않겠지."

상심이란 걸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녀석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알고보믄, 자네만치 매몰찬 사람도 없을거야. 내가 그 말을 하자 녀석은 나를 쳐다봤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익이 그 친구가, 화내겠는데.."

"어디가 더 안 좋은가?"

나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그럴테지, 병상에 떡하니 절대안정이라 적힌 팻말을 치우고, 설홍주 군이 오기 전에 그리 부산을 떨어댔으니까.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러나 손 군은 자네에게 내 안부를 물을테고, 타고난 고자질쟁이인 자네는 고대로 고해바치겠지."

"말하면 무에 어때서, 자네가 크게 무리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자리에 앉아서 오래 말했다뿐이질 않아."

"그럼 손 박사는 보나마나 또 진찰을 해보겠다고 달려들테지, 조금만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도 내겐 불호령이 떨어질테고 말이야."

"결국 괜찮지 아니하단 자백이 아닌가. 그러게, 내가 과하다고 하지를 않았어?"

"기왕이면, 잠깐동안 수액 줄을 빼는 게 더 좋았을텐데."

"자네 미쳤나. 지금은 그게 자네 생명줄이네."

생명줄? 하고, 녀석은 비웃듯이 픽 웃었다. 내 생명줄은 도리어 업무지, 하고서.

"손발 다 묶어놓고, 숨통만 트여놓으면 그게 생명줄이다 이 말이야? 확실히 자네는 조선어 공부를 더 해야겠네. 조선에서 오래 산 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란 모양이야."

"성질머리 더러워지는 걸 보니 다시 어디가 안 좋아지긴 했나보군. 이따가 손 박사 오면 말해둬야겠어."

"죄다 한통속이니 이거야 원."

"당연히 한 통속일 밖에. 자네야 다른 데가 직장이지만 나와 손 박사는 직장동료인 셈이니까."

"대개는 그걸 자본가와 노동자라고 하질 않나. 하기야, 손 군 역시도 동시에 노동자이기야 하지."

"자넨 역시나 아나키스튼지 뭔지하는 그거였나?"

"이럴 땐 사회주의자였냐고 묻는 게 맞는 말이네, 레이시치. 굳이 대답을 한다면, 아니. 물론 김원봉 선생과 의열투쟁에서 뜻을 같이하기는 하였으나.."

"그럼 어째서 여기 남아있었어?"

"이 친구야,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들었군. 내게 무슨주의냐 하는 건 별 의미없네. 더 쉽게 말하자면, 상관없어. 세상을 세상답게 만드는 데에 하나로 정해진 손쉬운 답이 존재할 것 같나? 나는 그것부터가 실제 사람들이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생활인의 감각, 그 실질적인 비극으로부터 유리된 하나의 허상이라고 보네. 그 허상이 종국엔 사람들로 하여금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흘리게 만들거라고도 생각하지. 저 멀리 동떨어져서, 동떨어진 말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이네. 그 분명치 않은, 그러나 달콤하기 짝이 없는 신화에 속아서. 처음부터 완벽하게 짜인 방법이란 없네. 직접 부딪혀가면서 끊임없이 확인하고, 서서히 그 간극을 좁혀가야 한다면 또 몰라도. 그건 이름을 붙이지 못할거야. 물론 살아생전에 완성될 순 없겠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계속 접근해갈 순 있을테.."

녀석은 말을 하다 말고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기침을 토해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놈이 말이 많아진다는 건, 어디가 아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걸 숨기려고 재불재불거리는 것이다.

"손 선생 불러오겠네. 자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고자질 좀 해야겠어."

녀석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더 빨랐다. 물론 실려올 때처럼 시트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타액에 피가 비친다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것쯤은 의사가 아닌 나도 잘 알았다.

..아주 잘하십니다. 손 박사는 녀석을 보자마자 말을 내뱉었다. 덩달아 한숨도 내뱉었다. 더 일러바칠까했지만, 그랬다간 말 뿐이 아니라 진짜로 녀석의 손발을 묶어버릴까싶어 잠자코 있었다.

"왜요, 아주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고 싶다고 광고를 하시지요. 내 말 한마디면 그게 아주 쉬운데요. 뭘 그리 어렵게 일을 하십니까."

"자네도 저 친구한테서 과장하는 습관이 옮았나보군."

"과장이라니요, 이건 도리어 축소이올시다. 마음같아선 죽고싶어 환장을 하였느냐고 하고싶지요."

"내가 그렇다한들, 그러게 놔두지도 않을텐데."

"당연한 소릴. 어느 누가 사람 죽인 의원이란 말을 듣고싶겠습니까?"

"자네가 죽인 게 아니니까, 그건 어불성설이네."

"레이시치 경부께서도 곤란하실테고요."

"저 친구 하나 난처해지기가 싫어서, 그 쓸모로 살아있어야한단 뜻이군, 나는. 그나마 그 쓸모라도 있으니 기뻐해야 하나?"

"형님이 쓸모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놈한텐 중요할거요, 그 쓸모때문에, 사람이 죽고 살곤했던 걸 봐온 놈이니까."

"이제와서, 미운정이라도 들었나?"

"앞에 미운이란 말은 빼지, 미워할 사람이 없는데, 미움받을 사람은 있어?"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자네가 미쳤는가보다."

"미친 놈 친구는 어차피 미치긴 매일반, 덜 미쳤느냐 더 미쳤느냐의 차이 아니겠나. 덩달아서 미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아."

"불구덩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불구덩이에 같이 뛰어들잔 소릴 하고있군."

실컷 비웃어, 자네가 그래봐야 내가 평생 들어온 각종 저주스런 말에 비하면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니까. 더군다나 자네는, 그게 자네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위악을 행세하고 있다는 걸 모를 내도 아니지. 독사도 아니면서, 독사로 자네를 몰아가는 상황에 자네는 독사흉내를 아주 잘 내는 것일 뿐이야. 자네를 독사라고 믿는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독사가 되어야만하는 그 빌어먹을 주변세상때문에 말이지.

아니, 사실은 그걸 위악이라 부르는 것조차 웃기군, 오히려 이 상황에서는 자네가 옳고, 자네의 그 비난하는 말들이 옳고, 도리어 내게 인두겁을 쓴 인간말종이란 말이 나오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만 할텐데..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자네에게 진절머리가 나는 일은 없을거네. 그러니 공연히 힘뺄 생각 말어."

"찰거머리같군, 하기야 그러니 내가 작정을 하긴 했어도 자네가 날 가장 먼저 찾아낸 거겠지."

"적어도 나는 무고하다 밝혀진 조선사람은 건드리지 않았어. 자네만큼은 최대한 잡지 않으려고 했네."

"조선사람으로 난 것이 죄였던 세상이었는데, 자네에게 무고한 조선사람이란 무언가. 자네 같은 이들의 발치에 엎드려서 벌벌 떨면 그건 무고한 게 되는건가? 애시당초에 그건 자네가 할 말이 아니네. 그 일시의 굴종, 그 일시의 모면을 만들어내고자하는 그 상황을 만든 것이 그리도 떳떳하던가. 그렇다면 자네 무리에게 죽은 내 제자들은 무고하지 않아서 죽었나? 전혀, 레이시치. 무고한 조선사람을 건드리지 않고 다른 조선사람들을 건드렸다면, 자네는 제일 먼저 나를 죽였어야했네. 죽이지 못했다면 가장 먼저 체포했었어야지. 그래서, 죽지않아도 될 사람들 대신 나를 쏴죽였어야지. 그러지 못한 자네가, 아니, 일부러 그걸 피한 자네가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쯤 해두시지요, 그러다 또 의식을 잃으시겠습니다. 언젠, 저더러 일 만들기 싫다하질 않으셨어요."

손 박사가 중도에 말을 끊었다. 일 만들기 싫다라. 그 말은 위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그 말 때문인지 아니면 기력이 다 빠져서 그런겐지는 몰라도. 하기야, 기력이 빠졌대도 정신을 잃는 그 순간까지 나불거릴 놈이기는 하다.

"스스로 흥분하실 일을 만들지 마십시오. 화가 나신대도 적당히 참으세요. 지금이야 화내다가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까요."

"저놈도, 나이먹더니 다혈질이 된 모양이지요."

"경부님께서도 그리 말씀 마셔요, 연수 형은 평생을 싸워올 일만 겪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걸핏하면 입바른 말을 하여야만 하였고, 그렇지 않고는 고개들고 살아갈 수가 없었고, 그것 자체가 무에 그리 나쁜가요."

"제에기, 자네땜에 나도 혼났네."

녀석은 나를 미친놈 보듯 올려다보았다. 오냐, 너만 미친 줄을 아느냐. 미친 사람이어야 도리어 사람다울 수가 있다면, 나는 이제라도 너를 따라 몇번이고 미치겠다. 그동안 미친 사람이 될 시간이 없었던 것은, 자네는 기분나쁠지 모르나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네는 조금 더 일찍 광인이 되었고, 나도 이제는 광인이 된다한들 누가 무어랄 사람도 없다. 미치광이가 되는 건, 한 사람보다도 한 쌍이 그러한 것이 덜 적적하지를 않겠는구, 하고 나는 생각했다.

-

"자네는, 불면증이라도 있나."

나는 자리에 누운 녀석이 뒤척이는 것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한밤 중에, 잠을 안 자면 무어 어쩌겠다는 건가. 그 뿐만 아니다. 낮밤이 바뀌었으면 차라리 낮에라도 자면 될텐데, 그마저도 하질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손 박사 속을 어지간히 썩힌 환자일 게다.

"병증이라기 보다도, 형무소에서 생겨먹은 못된 습관이지."

"무슨 근심이라도 있나."

"자네가 여기 있는 게 근심이라면 근심일까."

"말하는 뽄새 하곤."

"그러는 자네는."

"나도, 자네처럼 못된 습관이 들었지."

"얼굴에 잠이 어렸는데."

"졸리기는 하여도 막상 누우면 잠은 오질 않지. 글쎄다, 나는 늙어서 그럴까."

"까치 뱃바닥같은 소리."

"건 또 무슨 말장난이야."

"흰소리 집어치우란 소리네."

"문인 납셨군."

"조선사람이라 그렇지."

"퉁명스럽기는, 허지만 자넨 자 두는 게 좋을거네, 난 형무소의 간수들처럼 자넬 보구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기절하진 않을 거거든."

"내가 그러려고 그랬나, 하기야. 그치들이 그러는 게 퍽 익살스럽기야 하였네마는."

"그럼 무어야?"

"말하지를 않았어, 그저 습관이라구."

"임정에서도 그랬나?"

"언제 어디로 다시 유랑을 떠나야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 백범이란 양반은 뭐라 안 하던."

"자주 혼났지. 이따금씩은 선생의 손에 붙들려서 억지로 자러가는 꼴이 되기도 하였네."

"자러가서, 자긴 했나."

"나중엔 약산 김원봉 선생까지도 내 자는 걸 감시하러 들어오는데, 별 수가 있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건 그것대로 고역이었네."

자고, 쉬는 게 고역이라. 그렇담 설홍주 군에게 잠 좀 자자고 투덜댔던 나는 뭐가 되나. 어쩌면, 그래서 형제인가부다.

"손 박사한테 말하지 그랬어, 잠이 잘 안온다구. 아님 내가 이야기할까?"

"날 하다못해 약쟁이로 만들 심산인가?"

"약쟁이는 무슨, 애시당초에 약을 잘 먹지도 않으면서. 자네는, 오히려 약 좀 맞아야 돼."

"미친 소리.."

기연시 기력을 빼 놓아야만 잠이 들곤 한단 말이야. 늘 그렇게 살아온 놈이라 그런가, 나야말로 이건 고역이었다. 귀찮다기 보다도, 이건 내가 애써 괴롭혀야한다는 거 아닌가. 한편으론 손 박사가 일부러 이리하였나 싶기도 하였다. 이 친구를 괴롭히기는 싫으니까, 그러나 재우려면 꼭 하기는 하여야 하고, 이놈에 대해선 그다지 정나미가 없어보이는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나는 놈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간이의자에 툭 걸쳐앉았다. 숙직실이 따로 있기야 하였지만, 한바탕 일을 치른 날이라 혼자두기가 영 찝찝하였다. 물론 이 친구야 병실 바로 앞에 원무과 사람들이 상시대기하고 있고, 실제 병원업무를 보는 사람들이니까 나보다 더 믿음직하겠지마는, 글쎄, 그렇다곤 하여도 도리어 내가 불안해서, 이거야 원.. 이대로 잠들면 나는 아마 다음날 허리가 찌뿌둥해서, 왕 군에게 침이라도 한대 맞으러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간에, 차라리 그것이 내겐 한결 마음이 편했다.

-유랑생활 때문에,

내가 녀석으로부터 들은 태반의 악습관은 대부분 이유가 그거였다. 그러나 그게 진짜 이유일까. 글쎄, 모르긴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녀석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힌 생활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까닭이 아니었을까, 하였다. 조금 마음을 놓을라치면 또 한구석이 무너져내리고, 그것이 한평생 이어져 온, 그거야말로 참말 악습관이었을테다. 지금도 그렇다, 그 비서관이란 작자들이 녀석과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도, 그 탓에 신경이 늘 곤두서있고, 지금조차도 그 때문에 불안감을 누르지를 못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인가. 그러고는, 또다시 그런 상황을 불러온 것 자체가 자신의 탓인 양 죄스러워하고, 그런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또다시 악순환의 굴레로 빠지고야 말았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고, 동의할 마음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에게 또다시 뼈아픈소리를 할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그 제자놈처럼 이젠 당신이 할 수 일이 무어가 있느냐, 혹은, 왜 하필 당신은 당신이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형무소에서 죽어가고 있었느냐, 왜 정작 당신이 필요한 사람들이 당신을 찾을 적에 당신은 죽음의 문턱에 있어야만 했던가, 하고, 그런 말같지도 않은 비난을 할 생각은 없었다. 죽고싶어서 죽음에 가까운 길을 택한 것도 아니고, 그것이 그리 비난조로 말하는 이들일망정 단 한사람이라도 더 살려놓고싶어서 그리하였다는 것을 모를 내도 아니었다. 조선 속담에 있는, 물에 빠진 놈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식의 소리를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러고도, 그 꼴을 보고도, 자네가 구해보아야 별 소용 없는 작자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하러 또 그 작자들을 위하여 이런 꼴을 기꺼이 감수하느냐, 기실은, 네게 있어서 좋은 사람이란, 모두들 죽은 사람들이 아니더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네에게 정말 남은 사람이라곤 손 박사를 제외하곤 나밖에 없을텐데, 그러고도 나를 밀어낼 힘이란, 그러고도 두려움을 이겨낼 기력이란 대체 어디에 남아있느냐 싶기도 하였다. 아니, 어쩌면 그건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일종의 체념일테지. 그 체념으로 너는 여지껏 살아있었고, 그 체념이 자네를 죽음으로 이끌고 있으니까, 너도, 나도. 어디에 장단을 맞추어야할지 모르는 박치들일게다.

나는 손 박사에게 불려가 한참을 혼났다. 다시는 면회를 못하게 만드는 수가 있다면서. 그러나 그건 놈이 답답한게지 내가 아닌데.

"나는 말렸소."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선생도 병원에 같이 갇히고 싶으신가요."

"나야 좋지, 때 되면 밥 주겠다.. 난 오히려 저놈처럼 갇혔으믄, 싶단 말이오."

"그 대신 연수 형이 가만두질 않겠지요."

"그놈이 뭔 소릴 하건 내겐 오히려 애교요. 조선 욕이란 욕은 들을만치 들었으니까."

"연수 형이 어디 욕지거릴 하는 사람입니까, 다른 말로 속을 후벼파지."

그건 맞는 말이다. 욕이라곤 해봐야 순 옹알이 수준(아마 어린애가 해도 놈보다 더 욕을 잘할 것이다.)이면서, 조곤조곤 말하는 그 일상의 대화, 그 말에 짙게 밴 자조의 내음새, 경멸의 색채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있었다.

"어쨌거나, 달리 조치가 필요하진 않읍디까."

"넘지말아야 할 선 위에 걸쳐져있다고나 해야할까요."

"희망적이진 않군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니지요,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까."

"선생께서 낙천적인 면이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면이라도 있어야, 살 수가 있더군요."

그건 의외였다. 내가 아는 손 박사는, 물론 그의 기계적인 면모만을 보아왔기에 그럴지도 몰랐지만, 그라면 희망이란 자질구레한 것 없이도 세상을 잘만 살아갈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설연수. 그 놈이 손 박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인가. 그러나 그도 나로썬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낙관적인 면이라면, 내가 기억하는 그놈은 그런 걸 전혀 가지고있지 않았다. 낙관이라기보다도, 안될 줄을 알면서도 악착스레 발버둥치는 쪽에 가까웠다.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똘똘 뭉친 것에 가까워 보였다. 내가 형무소에서 봤던, 놈의 그 조소, 비아냥거림. 피를 토해가며 말을 제대로 못 이을 지경이 되어서도 그 말 하나만은 또렷하였다. 자네가 끝낸 것이 아니야. 그 한마디. 결국 나는 실패하리하던, 그 의기양양한 표정은 결코 낙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독기가 잔뜩 올라서, 하여 자신조차 그 독기를 담아둘 수가 없어서, 악에 받친 것이 어쩌면 토혈이란 형태로 내어놓은 것이 아니더냐,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사실은 그 희망이란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얼마나 덧없는 것이냐, 싶은 것이다. 놈도 자신이 그 형무소에서 살아나올 줄을 몰랐을 것인데, 그런 순간조차도 그런 생각을 하였고, 그리 말하였다면, 나는 녀석의 심중을 잘못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이 순간까지도 녀석을 배배 꼬아서 봐온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래도 총명한 놈이라, 총명하게 살 줄을 알았는데, 사실은 그 총명함으로, 미련을 떨고 살아온 것이니까, 총명하게 사는 법을 알면서도 애써 그것을 피해온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치 허망한 것이 또 있을텐가.

"우스운 일이지요, 나와 그리 비슷하다던 연수 형은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이 조선에서 자포자기를 배울 적에, 연수 형은 만주에서 포기하는 방법을 잊었소."

포기라, 포기하는 법은 연수 형도, 나도 조선인으로 태어난 죄로 가장 먼저 배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수 형은 그걸 잊었고, 적어도 잊으려 노력하였고, 나는 그러지를 못하였다. 어쩌면 나는 일부분이나마 내 백부님을 죽이는 데에 일조하였단 생각에 그런 쪽으로는 넘겨다보지도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연수 형도 비슷한 일을 겪기야 하였지만, 연수형에겐 혈육이 아니라 생판 남이니까, 나보다는 그런 생각을 밟고 다시 올라서기가 쉬웠을 거란 생각을 하였지만, 알고는 있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연수 형이 옳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샘이 났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걸 인정하지 않다가, 연수 형이 거의 다 죽어갈 때 즈음이 되어서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수 형은 내게 고마운 사람이라 하였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내 앞에 있는 레이시치 경부보다도 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레이시치 선생은 조선인이 아니기라도 하였지, 나는 조선인이었고, 상황을 알면서도 외면한 몹쓸 놈이었으니까.

"녀석과는 어떻게 다시 만났던가요."

"우연이라면 우연이지요. 본정통 거리에서, 가장 좋지 않을 때에 연수 형은 나를 만났으니까."

그래. 참말 우연이다. 하필 그때 나는 늦게 퇴근을 하였고, 평소같으면 눈여겨보지도 않고 지나갔을 것인데 하필 그 때 연수 형을 발견하였고, 평소같으면 괜히 일에 휘말리는 것이 싫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면 총상환자를 받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인가.

"선생이 없었으면 김상옥인지, 김영진인지하는 그 양반 꼴이 될 뻔 하였군요."

"연수 형 앞에서 그 말은 마십시오, 형은 아직도 김상옥 선생을 도통 잊질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놈이 잊지 못하는 사람이야 쌔고 쌔었겠지요. 아니면 녀석도 의열단원이었던가요?"

"반쯤은."

연수 형이 흔히 받는 오해였다. 연수 형의 성품도 임정의 주류적인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꽤나 자주 그런 오해를 받곤 하였다. 더군다나 김상옥 선생도, 김원봉 선생도 임정 사람과는 약간의 꺼끄러운 면이 있기는 하여도, 연수 형에게만큼은 스스럼이 없었다. 그이들의 말로는, 그래도 임정에서 봐줄 만한 사람이 연수 형이라나 뭐라나. 농인지는 몰라도 의열단에 가입하라는 소리도 여러차례 하였다. 나이대가 비슷하기도 하였겠거니와, 생각이란 것으론 연수 형도 임정에서 고립되어있는 처지였으니까 자연스레 그리로 마음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여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은 없어서, 임정에서도 의열단에서도 그다지 불만은 없었던 것이겠지. 나는 어쩌면 거기에서도 연수 형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곡예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어쩌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떠한 주의를 맹신하기에, 연수 형은 그 병통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서 이도 저도 섞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잊지를 못하니까, 죽은 사람이 되고싶어할지도 모르겠군요."

레이시치 경부는 대뜸 말했다. 적어도 죽은 이는 누굴 해치지를 못하니까, 그 자신도 누굴 해치기 전에 그리 되고싶은 것이 아니냐.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해치긴 누굴 해친단 말인가, 연수 형은 누굴 해치기보다도 싸움을 말리는 편에 가까운 사람인데. 물론 연수 형이 그렇다고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야 아니지만, 다른 임정 요인들에 비하여서는 그러한 성품이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흘리지 말아야할 피가 있다는 것은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희생과 명예라는 번드르르한 이름의 포장지로 감싸지 않는 것도 연수 형이었다. 도리어 그건 그런 상황을 만든 자신들의 죄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임정 요인 가운데에는 나이가 젊기도 젊었겠거니와 그런 성품 탓에 종종 구설에 오르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수 형은 단지, 단 한사람이라도 더 살아있는 목숨으로, 이후 되찾을 멀쩡한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선생이 보시기에, 연수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레이시치 경부의 입에서 이놈 저놈이 아니라 이름이 나온 것은 흔치않은 일이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지금같은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차라리 다행이군요, 그걸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니까."

"선생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되는가요."

"나는 녀석을 싫어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항상 좋아했지요."

"그런 사람이.."

..총구를 겨누었던가요, 그리 죽어가게 놔두었던가요.

그 뒷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 박사는 말을 하다 말았지만, 나를 질책하듯 쳐다보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에 대해서 할 말은 없지만, 당시 왜경들 가운데에서도 나와 그 엇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는 있었다. 불령선인으로 찍힐까 싶어 말을 않았던 게지.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변명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녀석을 좋아했다는 것만큼은 일말의 거짓도 없다. 도리어, 내가 형무소에 놈을 그리 자주 찾아갔던 것은 조금이라도, 녀석을 빼줄 건덕지가 있을까 싶어 그랬던 것이다. 하기야 그렇다고는 하여도 일개 경부에 불과한 내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그놈을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기껏해야 조금 편의를 봐준다든지, 어줍잖은 돌팔이 의사말고 손 박사를 붙여준다든지 하는 게 전부이기는 하였다.

"선생도, 나도 입장이란 게 있지를 않았습니까."

"우리 둘 다, 그게 핑계였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지요."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나는 그 편리한 명분을 싫어했소. 하고, 손 박사는 불편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렇지, 그래서 당신은 나보다 조금이나마 설연수, 그놈과 비슷한 사람이지. 나처럼 비겁해지는 것을 당신은 싫어할 줄을 아니까. 조선사람이라 그럴 수가 있는 것일까. 그놈도, 당신도 조선사람이라서. 내가 이러쿵 저러쿵한대도 결국 나는 이방인에 불과할 수 밖에 없지만, 당신은 원래 조선사람이니까.

-

"많이 혼났나?"

"때리진 않았지만 눈으로 협박하던데."

내가 병실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늘어놓자 놈은 낄낄 웃었다. 너무 크게 웃으면 숨쉬기가 어려우니까, 그것도 자제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웃지도 못한다라, 그것도 기가 찬 노릇이다.

"내 혼날 몫까지 자네가 혼난 모양이군."

"자네한테 화풀이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게."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건가?"

"흔친 않지만, 쥐 생각해주는 고양이가 있는 것도 든든하지 않겠나?"

자네처럼 고양이 잡아먹는 쥐라면 또 모르지만, 하고 나는 덧붙였다.

"과장은."

"과장이 아닌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어, 자네가 내 목을 날릴 뻔 했던 게 몇번인가?"

"그게 불만이라면 자네가 내 목을 날리면 되겠군. 그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어."

"또 헛소리 지껄이는구만, 자네는 나한테 일부러 욕을 먹고싶은게지? 하기야, 욕 많이 먹으면 장수한다더라."

"그건 싫은데."

"왜 싫어?"

"적당히 살만치 살다가 가야지, 안 그럼 민폐네."

"자네가 그러믄 난 벌써 관짝에 들어갔겠네. 나이도 한참 어린 게 버릇없이.."

"자네 그런 쪽으론 조선사람 다 되었구만."

"언젠 조선 말 좀 배우라더니?"

"그런 말에 자네가 기분상할 줄 몰랐네."

"설홍주 군이 자네가 이런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하는 건데. 어디까지나 좋은 형님인 줄로만 알고있으니.."

"모른다고 해도 내가 좋은 형님이 아니란 건 알테지."

"자네가 뭐 어린시절에 괴롭히기라도 했어?"

"꼭 그런 게 있어야 나쁜 사람이 되나."

"제에기, 그럼 이 세상에 좋은 사람 몇이나 되겠어. 그리구 사람이 꼭 좋은 사람 나쁜 사람만 있나, 이도 저도 아닌 사람도 있는게지."

"자네는 그럼 어느 쪽인가."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도 모르는데 내가 그걸 알까."

"언젠 나더러 어리석다하질 않았나."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뒤끝 길구먼, 그 소리 한 것이 언젠데.."

"자네 생각보다 훨씬 속이 좁을거네."

"어련하시겠나."

"손 선생이 뭐라던가."

"자네 말마따나 내가 과민하게 군 모양이네. 큰 이상이 더 있다거나 하진 않는다는구만. 그렇지만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자넬 안 내보내주는 건 물론이고 나도 가둬버린대."

"자네야 편하겠군."

"아닐 걸? 난 그럼 내내 자네 성질머릴 받아줘야하는 거잖나."

"자네가 순순히 받아줄 사람인가?"

"그럼 내가 자네같은 폐병쟁이랑 싸워야겠어? 뭣보다도, 그만치 자존심 상할 일이 어디 있나?"

"자네한테 자존심이란 게 있었군."

"말을 해도.."

"그렇담 자네 말은 비단결같다 이 말인가?"

"자네처럼 칡넝쿨마냥 꺼칠하진 않아."

"이해하게, 사람이란 사는 곳을 닮아간다질 않나."

"만주에서 살았다고 다 그런가."

"경성을 떠나본 일이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엄연히 말하문 자넨 만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질 않나. 상해에, 충칭에, 그리고 유랑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나다녔다면서?"

"그러나 내게 고향같은 곳은 오히려 만주였다네."

"하기사, 젊은시절 경성을 뜨고, 첨 발붙인 게 만주였을테지. 그러나 자네 부모님이 들으시면 서운하시겠네."

그럴테지, 하고 녀석은 쑥뜸 내음새마냥 쓰게 웃었다. 제에기, 웃어도 좀 멀쩡하게 웃으면 어디가 덧나나. 놈은 웃는 법도 잊어버려서 어설프게 웃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자네한텐 서운해할 부모님도 이젠 없으시겠네만."

녀석이 형무소에 갇힌지 며칠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원래 노쇠하기도 하셨겠거니와, 녀석이 수감되었단 소식을 들은 그 날이, 바로 기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오늘내일 하는 분들이었고, 꼭 녀석 때문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놈의 표정을 보아서는 내심 그것으로 마음에는 죄책감을 가진 듯 하였다. 형무소에 곧바로 그 소식이 전해졌을까, 그도 아니면 한참만에 전해졌을까.. 그걸 들은 녀석은 어떤 반응이었나. 울었을까, 아니면 무덤덤하였을까. 그도 아니면..

손 박사의 말로는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녀석은 또 토혈을 하여서 자기가 불려갔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형무소에서의 첫 발작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녀석은 통곡 끝에, 끝끝내는 토혈을 하고 말았던 것인가. 내가 알 방도는 없다. 그런 것을 이야기 할 녀석도 아니고, 구태여 그 썩어문드러진 거죽같은 속내를 찢어발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이 녀석에게 심상치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실망하셨을테지. 단 한순간도 자랑스럽질 못했을 것이고."

"그 반대일 줄을 누가 알겠는가. 자네 아우가 자네를 자랑스러워했듯이 자네 부모님도 그러셨을거네."

"광복이 되기 전이라면 과연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의기있는 행동이라는 말은, 말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생활인의 감각으로서는 그 뒤에 있었을 일제의 감시와, 행동의 제한과, 언제 잡힐지 모르는 꼬투리 속에서, 그런 자식을 마냥 자랑스러이 여기기보단 도리어 너는 왜 하필 그런 길로 나섰느냐, 왜 다른사람이 아닌 네가 나섰느냐, 하는 생각을 더 하기 쉬운 법이다. 도리어 내 아우처럼 나를 원망않기가 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그날만큼은 내 아우도 나를 원망하였겠지. 옳은 일을 한답시고 멋대로 형무소에 틀어박힌 꼬락서니를 하고, 부모님의 임종은 커녕 자신이 장성할 때까지 얼굴한번 아니 비치는 형을 두고서 그걸 고깝게 여기기만 할 수가 있었겠는가. 다만 말을 않을 뿐이다. 내색을 않을 뿐이다. 더군다나, 갑작스런 광복이란 것이 없었더라면 남겨줄 것이라곤 시신뿐이었을 사람이니까, 이런 게 형이냐.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오히려 아주 죽어나왔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였더래도 나는 그런소릴 들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죽었으면, 순국이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말이라도 있었겠지만 구차히 살아있으니 그만도 못한 놈일테지. 살아나온 것이 죽어나오느니만 못하였을테니까. 죽었다면 겉치레로나마 애도라도 하겠으나, 살아나왔으니 지긋지긋할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내가 살아있었던 것을 반길 사람이나 있었겠나. 단 한사람, 백범선생이라면 그리 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그 분도 없다. 임시정부를 그대로 주권자들의 손에, 주권이란 걸 제대로 갖추게 된 조선에서 버둥대며 살아온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겠단 계획도 무산되었다. 내가 그들 틈에 끼어서 무엇하나 제대로 해낸 적이 있기나 하였나.

"그 몹쓸생각, 그만하게."

나는 레이시치를 올려다보았다. 내 말이 불쾌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간을 잔뜩 좁히고 짜증이 가득 섞여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유쾌한 생각일 리 없는 것 정도는 알아.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자네 잘못은 아니고, 자네의 죄도 아니네."

"누가 무어라 하였나."

"뻔하지, 자네는 옛날부터 줄곧 쓸데없는 생각이 많았어. 공연한 일을 자네 잘못으로 돌리고, 자네 잘못이 아닌 것도 자네 책임으로 몰았네. 지금도, 무엇인지는 모를테지만 자네는 그러고 있을테지."

"내 잘못이 맞는지 아닌지 정도는 판가름할 줄 아네."

"자네가 그런 걸 할 줄을 알았다면 이런 꼴은 되질 않았을거야. 자네가 야학을 운영할 때에도 엄연히 말하면 자네까지 종로경찰서에 잡혀들어갈 필요는 없었어. 그저 그럴 사람은 자네 동창 뿐이었지."

"처음부터 야학을 열 생각이 없었다고는 하나, 어쨌거나 같이 야학을 운영한 것은 사실이고, 가르친 것도 나였네. 이제와서 그게 아니란 말인가? 자네는 내가 공연한 짓을 하였다 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건 내가 당했어야 할 일이었네. 그에 대해선 아무런 후회도 없어. 내가 후회하는 일이란, 왜경이 들이닥치기 전에 왜 진작 아이들을 대피시키지 못했는가, 그것 뿐이야."

녀석은 숨을 씨근거리며 말했다. 화가 난다기보다도, 말을 많이 한 탓일테지. 어쩌면, 내가 녀석을 만주까지 따라갔더라도, 우리는 끝내 찢어질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우리는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니까.

"자네는 적어도 그 때에 후회란 걸 할 줄을 알았지만.."

"무지하였다거나,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려거든 집어치우게. 나서지 않은 것은 자네일세. 조선사람이든 일인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질 않나. 차라리 그런 면에선 손 박사가 자네보다 더 솔직하겠군."

몰랐다, 라는 말도 녀석에겐 통하지 않았다. 하긴 그건 내게나 쓰는 변명이지, 사실은 변명의 값어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서 있었다.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질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레이시치, 내 말 너무 고깝게 듣지 말게. 그러나 흘려듣지도 말아."

"누가 뭐라나. 자네는 늘 옳은소리만 할테지."

"그런 뜻이 아니야. 자네는 자네가 조선사람이 아니란 생각에 둘러싸여서 곁눈질로 일을 쳐다보고 있지.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네."

"그런다고 내가 조선사람이 되는가? 이러나 저러나 나는 이방인에 불과하네."

"조선사람으로 태어나야 조선사람인 것은 아니니까."

"자네의 그런 생각을 퍽이나 다들 이해하겠군."

"이해할 필요 없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관건이지."

"내게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한대야, 뭐가 어쨌단 말이야?"

"내게는 시간이 없지만, 자네에겐 생각할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그런 시간이 남아있다고 한들, 그리고 자네 말마따나 내 생각이 변한다 한들, 그때는 자네가 없을 것이 아닌가. 자네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아네. 그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자네 주변에는 사람이 나 밖에 없나?"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은 자네 뿐이지. 하고 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그리고 나를 골치아프게 할 사람도 자네 뿐이고."

"앞으로는 내 말보다도 골치아플 일이 더 많을거네. 물론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자네는 그때까지도 살아있겠지."

"무슨 말을 하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군."

"나중에 알게 될 거네."

"너무 장담하지는 말어."

나는 불만스레 말했다. 말을 못 알아들어서도 있지만, 녀석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데에는 언제고 이유가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짜증이 치밀었다. 개떡같은 소리 말구, 잠이나 자. 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답했다. 왜 마지막이냐고? 왠일로 놈은 그날 밤 아주 곤하게 잠들었다. 별다른 불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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