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탐정록 연성 2-3
“...손님 온다는 말은 아니 하였잖은가."
"자네 불편하면 자리 피해있게."
"미쳤나? 그랬다간 손 박사한테 맞아죽네!"
"자네 간병하는 이 치곤 너무 꽥꽥거리는 거 아닌가?"
왠일로 일반적인 손님이 온다고 했다. 이름은 이청천이라 하였는데, 굵은 돋보기 안경을 쓰고, 바짝 깎은 머리에, 나이대에 비하여 건장한 체구인 것을 보니 군인인가 싶었는데, 언제보았다고 날 못마땅히 쳐다보는 것을 보니... 잠깐. 이청천? 빌어먹을! 내가 아는 그 이청천이 맞다면 날 쏘아죽이거나, 그도 아니면 목을 졸라 죽일텐데. 물론 그럴 마음은 없어보이지만..
"자네도 구면이지?"
놈은 재밌는 구경을 한다는 듯이 실실 웃었다. 이 교활한 놈, 그래서 일언반구 없었군!
"이제야 알아보다니, 자네 친구가 머리가 썩 좋지는 않은가 보이. 아니지, 자네한테 총을 겨눴으니 친구는 아닌가?"
"왜?!"
"나야말로 묻고싶네. 왜 손 박사는 저런 이를 간병인으로 붙인게지?"
"간병인이라기 보다, 말동무지요."
"말하는 뽄새를 보니 말동무로도 별로일 것 같은데."
"그런 걸룬 선생도 만만찮소!"
"총은 두고 오셨습니까?"
"들고오고 싶었는데, 병원에 들고올 물건은 아니다 싶어서. 그러나 가져오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
"말은 저렇게 하여도, 그다지 폭력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내 눈에는 썩 차질 않아."
"이보, 선생. 저 양반 성질머릴 알긴 아시오?"
"설 선생이 성질을 부려봐야 얼마나 부리겠나. 그 정도로 화를 낸다면야 자네가 잘못을 했겠지. 내가 알기로 설 선생이 그만치 화를 내는 건 이승만이 개짓거리를 했을 때 외엔 없었네만. 하기야 화를 내기보단 자넨 주머니에서 총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
이청천 선생은 껄껄 웃었다. 무어가 그리 우스운가.
"그러면 정말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선생은 내 말을 듣자마자 혀를 끌끌 찼다.
"모르긴 몰라도 누설이 제법 된 모양이야. 그래, 내부에서 분란이 있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이네, 그리고 그 사람 가운데에는 저기에 있는 설 선생도 있었지. 하기야, 설 선생도 명사수 축에 들었으니깐 의외는 아니지."
명사수? 이 양반이 장난하나. 그냥 명사수 정도가 아니었다. 경성 피스톨은 하나인 줄로 알았는데, 실은 하나가 더 있더라, 하던 소문이 특고에서 나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의 정체는 저놈이었다. 당시만 하여도 오싹하기가 그지 없었는데, 그걸 그저 명사수 축에 드는사람. 정도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디서 무얼 보았기에..
"난 가끔 자네가 내 제자였다면 약산 선생과 경쟁이 붙었을 수도 있지 않겠나, 싶다네."
"글쎄요, 약산 선생과 경쟁이나 되는가요. 현상금에서도 제가 밀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 약산 선생이야 의열투쟁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것이고, 자네는 그런 것도 아닌데 현상금으론 백범 선생을 제치질 않았나. 그리구 말이지, 약산 선생보다도 자네가 더 빨리 뛰어든 편 아닌가."
"김 형이 들으면 서운타 하겠습니다."
형? 형이라고?! 나한테는 늘상 자네, 라고만 하면서.. 이런 괘씸한 놈을 보았나. 가만. 그러고보니 이청천 선생은 신흥무관학교에 있질 않았나. 그럼 어지간한 명사수는 보았을테니까 예사로 저런 소릴 할테지만, 그렇다고는 하여도..
"오해는 말게, 설 선생 솜씨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치켜올리면 설 선생은 싫어하더군."
그런데, 표정이 변하는 걸 보니 자네도 설 선생에게 혼쭐난 적이 있는 모양이지? 하고, 이청천 선생은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빌어먹을!
"그나저나, 생각보다 안색이 더 나쁘군. 입원해 있는 동안 쉬지 않았나?"
"저놈 성격에 그러겠습니까? 밥 먹어라, 잠 좀 자라. 하여도 말을 통 들어야.."
"임정 때 습관이 짙게 배어서 설 선생도 어쩔 수 없었을 거네."
"편을 들 게 있지요, 그러면 그 습관 때문에 죽으란 말이요?"
"그거야.. 그래, 그건 할 말 없군. 하지만 백범선생도 바꾸질 못하셨는데, 하루이틀만에 바뀔 건 아니지."
"저 친구가 과민하게 구는게지요."
"웃기지 말게, 그럼 내 눈앞에서 피 토하고 숨 넘어가는 꼴을 봤는데 이게 예민해? 그리고 엄연히 말하면 이게 한두번이라야지!"
"백범선생께서 자넬 쉬게하신 까닭이 있었군."
"그때야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아니긴!"
"그나저나, 박 선생은 만나보셨습니까."
어쭈, 이제 아주 난 없는 사람 취급한다 이거지, 이번에는 이청천 선생 쪽에서 나와 저놈을 보고는 낄낄 웃고있었다.
"말도 말게, 골방에 처박혀 있는 걸 겨우 끌고나왔네."
"그 친구도, 너무 어려서.."
"그렇다고 애 취급은 말아, 그 친구 나이에 자네가 뭘 했는지 생각해보면, 적은 나인 아니지."
저놈이랑 비교를 해도 되려나. 재수없긴 해도, 녀석은 워낙 난 놈이 아니었던가. 그건 그렇고, 쌤통이다. 스승을 길바닥에서 거꾸러지게 한 놈이 마음편히 지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계속 자릴 비웠던가요."
"그렇지는 않아. 박 선생이 그리 생각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어찌보믄, 그래도 그 셋중엔 그나마 자넬 닮지 않았나."
"셋이라니요?"
"아, 몰랐나? 설 선생의 후임은 엄항섭 선생을 제하곤 세 명이었네. 그 셋중에 이 선생은 너무 괄괄하였고, 정 선생은 너무 강단이 없었고, 박 선생은 너무 어렸지. 그래서 다들 걱정을 했네만.."
"이 선생이라면 그 이상원이란 양반일게고, 박 선생은 박원일이란 친구일게고, 정 선생은 누구요?"
"있네. 그런 사람이. 사실은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회계일은 곧잘 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나마 그놈이 나았다니,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사람이 없었다기보다도, 쓸만한 사람이 일찍들 죽어서였지. 그나마 백범 선생께서 말렸기에 망정이지 안 그럼 이 친구도 요절했을게야."
"예상은 했지만 여러모로 골때리는 놈이었군요."
"자네만 할까."
"내가 뭐 어때서!"
"자네는 여기있는 내내 골때리게 만들고 있지를 않은가."
"그건 자네가 먼저-"
"환자 상대로 이겨먹으려 들면 안되는 게지, 아암, 그렇구 말구."
"선생은 좀 빠지쇼."
"버르장머리 하곤."
"그래서 골머리를 썩히지요."
어쭈. 억울한 척을 하시겠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정말로 교활하고 잔악한 건 내가 아니라 저놈이었다.
"어쨌거나 나머지 친구들은 걱정하지 말아, 언제까지 이 땅에 붙어있을진 모르겠지만 자네 퇴원할 때까진 내가 봐주겠네."
"어린애들이나 다름없다더니, 참말인 모양이지요."
"설 선생 눈에야 그럴테지."
"예나 지금이나 알아서 일을 만드는 건 여전하외다."
"자넨 아닌 것 같나?"
"자네처럼은 아니야."
"글쎄."
"그나저나, 저 바구닌 뭡니까?"
"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 능금일세, 대구서 가져온 거라 아주 달어, 병문안 오는데 빈손으로 오기가 뭣하여 가져왔네. 자네두 능금 좋아하지?"
선생은 자기 외투에 능금을 문질러 닦고는 녀석에게 쓱 들이밀었다.
"이따가 씻어다 껍질깎아줄테니까 자넨 그거 먹어. 가뜩이나 소화도 안되는데 껍질까지 먹었다가 탈 날라."
이청천 선생은 의외라는 듯이 눈썹 한쪽을 치켜들었다. 아주 간병을 못하지는 않는가 보군, 하고 중얼거렸다.
"고작 능금하나로 평이 좋아지는군요."
"말로 부아가 치밀게하는 것만 아니면 괜찮은 간병인이겠군, 설 선생."
"그런 셈이지요."
"조용히 능금이나 드시고 가시지요, 그나저나 참 달구먼, 자넨 왜 찔끔찔끔 먹어?"
"입맛이 없을거네, 설 선생은 예전에도 한번 토혈을 심하게 하면 미각을 한동안 잃곤 했으니까. 하긴, 그때는 독살시도였네만.."
"임정 내부에서? 밀정이었소?"
"그랬으면 차라리 덜 부끄러울까."
"아니란 말요?"
"아니지. 아니고 말고, 탄핵당한 대통령이란 위인이 설 비서관 하날 어쩌질 못하여 몸이 달아있었으니까. 솔직한 말루, 설 선생이 저런 몸상태가 된 건 고문후유증도 그렇지만 그 탓도 있을테지. 백범 선생이 그리 노발대발했으면서도 끝내 이승만을 죽이질 않았으니 사람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가관이군."
"분열을 원치 않으셨으니까요."
"자네 한사람때문에 분열될 임정이라면, 분열되는 게 나았어. 요즘들어선 그런 생각이 더 드는군."
물론, 국민대표회의 꼴을 눈앞에서 본 자네야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하고, 이청천 선생은 덧붙여 말했다.
"하기사, 자네도 백범선생께 그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억지로 임정을 하나로 합칠 이유가 그렇게 거대한 것이냐 하였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더라지. 어쩌면 그건 자네의 뜻이라기보다 백범선생의 뜻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으이."
어쩌면. 하기사 녀석도, 자기가 그걸 원했다고 말한 적은 없지를 않았나. 더군다나 녀석의 성품으로는 백범보다야, 단재 선생에 더 가까울테다. 그 양반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하지만, 녀석은 임정과는 맞지 않았다. 맞지 않을 뿐더러, 손 박사 말로는 자기와 결만 다르다 뿐이지 주변에 사람은 있어도 겉도는거나 매양 한가지였노라 하였다.
"이러니 저러니 하여도 결국은 동의를 하였으니 그 자리에 남아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자네가 그렇게 원치는 않았단 말이겠지. 그건."
"백범 선생께선 이미 돌아가셨는데, 이제와서 제가 원하고 말고가 그리 중합니까."
"자네가 죽은 것은 아니지를 않은가."
죽은 것은 아니다, 라. 녀석은 그 말을 어찌 생각할까. 그래봤자, 죽은 거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할까. 그동안 내게 해온 언동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아니면, 그나마 이청천 선생이니까 위안을 느끼기라도 할까. 그도 아니면 그런 척이라도 해줄까.
"그래서 더 애석한 일이지요."
빌어먹을 놈, 아니, 차라리 저 대답은 그나마 양반인가.
"자네더러 백범 선생이 되라는 말이 아니야."
"되지 말라는 말도 아닐테지요. 어쨌거나 선생님께서도 돌아가는 상황은 아시질 않습니까. 하는 짓으로 봐선 또 시국이 거꾸러져도 이상하질 않아요. 그러나 그걸 제지할 사람은 없고, 저만 하여도 사지가 묶였지요. 제가 죽는가 사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 사후에든 언제든 밀고 당길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밀 사람은 있어도 당길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할 수가 없으면, 사람없이도 움직일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지요."
차라리 형무소에서 나왔을때, 죽었더래도 일이나마 매듭지었으면 나았을 것을, 하고 녀석은 말했다.
"제 일신 편하자고 물러나 앉은 것이, 결국은 일을 자초한 것일테지요."
미친 놈, 일신 편하자고 한 일이 아니란 것은 누구든 알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랬다 한들 욕할 수도 없다. 단지 편하게 살고싶어서가 아니라, 숨이라도 붙어있으려 요양차 물러났고, 그 마저도 백범이란 양반이 강요한 일이다. 혼자서는 거동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불면과, 차라리 죽음이 달콤할 것 같은 몸뚱이, 한발 재겨 딛을 때마다 누군가 날이 잘 드는 낫으로 몸통을 버혀내는 듯한 통증 앞에서 그 누가 무력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상황에서도 놈은 무력해지지 않으려 뻗대고 서 있었고, 그래서 지금 같은 꼴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일신 하나 편하자고'라는 이유였다고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보게 설 선생, 홍 장군께선 자네가 이리 될까봐 임정에 보내실 적에 염려를 하신거네."
홍 장군이라면 아마 홍범도를 일컫는 것일 게다. 녀석이 그 휘하에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당시 봉오동에 나가있었던 이들 말로는 왠 젊은 포수 하나가 끼어있었다고 하였는데, 아마 그게 저녀석이었겠지.
"내가 개죽음을 할까봐서, 홍 장군께서도 걱정이 많은 분이었지요."
그러나 지금 죽는 것이 도리어 개죽음이 아닙니까, 죽음을 늦춘 것이, 도리어 후회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녀석은 그런 말을 하고싶은 것 같았다.
"살아계시다면 지금도 그러셨을테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고 그게 저놈한테 도움이 됩니까?"
"자네는 또 무엇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하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자네는 그래도 살아있는 채로 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사람인데, 찾는 거라곤 죽은 사람 뿐이니, 그래서 자네가.."
자네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도 싫고, 그걸 당연히 여기는 것이 싫네, 제 아무리 죽음속에서 살아왔다지만 그걸 떨쳐낼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손만 뻗으면 금방 잡힐 죽음 곁에서 사는 것이 싫어. 자네때문에 '단 한번이라도 자네를 돌려세웠더라면' 같은 가정을 해야하는 것이 죽도록 싫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한다 하여도, 녀석은 '우리네야 곧 땅에 묻힐 사람이 아닌가, 자네는 모르겠지만.' 따위의 말을 해서 공연히 서로의 심사만 뒤틀릴 뿐일 테다.
"이보게, 인생은 걸음마 같은 것이라는 말, 들은 적이 있는가?"
"건 또 뭔 소리야."
"자네가 말하는 삶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겪지 못한 것이라, 당사자가 누가 되었든 간에 늘 그것을 배워야만 하네."
갈수록 태산이다, 나는 도통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약에 환각제라도 섞여있는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우선은 지껄이는 대로 놓아두었다.
"나도 마찬가지지, 내가 임정에 있을 적에, 행적이 묘연하였을 적에. 내 아우는 내 기일을 따로 챙기었다고 하였네. 이미 그때도 죽은 이로 사는 방식에 익숙했던 것이고. 그러니 내가 산 사람으로 기어이 발을 옮겨놓아야한다면 서투를 수 밖에 없지를 않겠나. 내게 아무리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하다 하여도 자네 말마따나 내가 딛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주 체념을 한 것은 아니야."
"그럼 왜 툭하면 기왕지사 죽을 목숨이라느니 그런 소릴 해대는 건가?"
"미련을 갖고싶지가 않아서네."
"체념은 하지 않았다면서 미련을 갖지는 않는다는 건 앞뒤가 안 맞질 않은가?"
"미련을 갖게 되면 판단이 흐려지게 되고, 그러자면 일을 망치기 일쑤이네. 여지껏 일을 망쳐왔어도, 할 수 있는 한 더이상 그러고싶지 않네."
일을 망쳐왔다라, 진담인 것인가, 아니면 정작 실제로 일을 망친 이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하는 말인가. 녀석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전자가 맞는 것 같았다.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일부러 명줄 깎아먹는 일은 관두지 그래."
"일부러 그런 적은 없네."
웃기는 소리,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면 왜 이런 꼴을 기꺼이 감내한단 말이냐, 의무라 하여도 그렇다, 그깟 사정 쯤이야 내던져버리면 그만이다. 그렇다하여도 네게 무어랄 사람이 있겠느냐, 또, 네게 무어라 한대도 귀를 막아버리면 그만이다. 도리어, 네게 무어라하는 그 작자에게, 여지껏 뒷짐만 지고 있었던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비웃어버리면 고만인 것이다. 그런 방법들이 있는데도 네가 그러지 않는 것은, 도리어 그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내 눈에 일부러라고밖에 보이질 않았다. 언젠가 내게 말했듯, '이제는 삶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는 네가 적어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것만 같았다.
"도리어 지금 이러는 것이 일부러 하는 행동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어. 삼도천 건널 뻔 한 놈이 손 박사 손에 이끌려서 강제로 여기에 있는 주제에."
"나가려면 언제든 나갈 수 있었을 거네. 꼭 손 선생의 허락을 받지 않더라도."
그러고보니 손 박사도 그 엇비슷한 말을 했었다. 탈출을 하려면, 진작 했을 사람이라고.
"그렇담 자넨 죽었겠지."
"이보게, 난 굳이 이런 게 아니어도 산 송장소릴 듣는 사람이네. 사는 것도 어렵겠으나, 죽는 것도 쉽지는 않지."
녀석은 자기 몸에 연결된 수액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 말해놓고는, 무어가 우스운지는 몰라도 작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를 놀려먹고 싶었던 것인가, 이를테면 '자네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구나'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잘 모른다기에는 나는 녀석이 죽음에 가까워졌던 것을 꽤나 자주 보았고, 이번에는 구태여 총칼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걸어다니다가 까딱하면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코앞에서 목도하지를 않았느냐. 그런데도 내가 모르긴 무얼 몰라.
"이보게 설 군, 자네가 그리 말하여도 설득력이 전혀 없네. 자네 안색부터 고치고 그리 말하게."
우리가 말하는 양을 보던 이청천 선생은 왠일로 내 편을 들었다. 거 보게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질 않겠습니까."
"약산 선생이 자네가 이러고 있는 꼴을 봐야 할텐데."
"아서시지요."
"약산 선생 성격은 겁이 나는 모양이지?"
"그보다야, 그 뒤에 일어날 일이 염려스러운 게지요."
"하기사, 약산 선생은 자네한테야 껌뻑죽곤 했으니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친하겠거니 싶긴 하였으나 저런 말이 나올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애시당초에 자주 만날 사람들도 아니질 않았나.
"이보, 설 군. 자네 친구 표정한번 볼만 허이."
그래서 어쩌란 말이요, 하고 나는 양 팔을 팔짱을 낀 채로 불퉁스레 내쏘았다.
"그래서 자네가 저 친굴 내치지를 않는 게로군, 말하는 재미가 있어서."
조선에는 기가 막히면 말도 안 나온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 딱 그 꼬락서니였다. 안 내치긴 뭘 안 내쳐. 꺼지란 말만 하질 않았지 나더러 제발 나가라는 시늉을 하던 놈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은 내가 놈을 손 박사 부탁으로 같이 있어주는 것에 더 가까운데. 착각을 하여도 유분수지, 저 양반이 내가 아는 이청천이 맞는지도 아리까리하였다.
"성질긁는 재미야 있지요."
어쭈, 환자라고 봐 주니까.. 녀석은 한술을 더 떴다. 내가 도끼눈을 떠 봐야 놈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창경궁을 드나드는 다람쥐를 관찰하는 사람마냥 웃고만 있었다. 이청천 선생은 놈의 말을 듣곤 껄껄 웃었다.
"자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누구 하날 데불고 올까 하였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구만."
"주변에 사람이 없기는요, 그짝이 말한 약산선생인지 뭔지도 있고, 저눔한텐 제자가 한 추럭인데."
"아니지, 아니야. 그건 설 선생이 보호하는 사람들이지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닐뿐더러, 약산 선생은 지금 한참을 떨어져있으니까 설 선생에겐 사람이 좀처럼 없는 것이 맞지."
"뭐.. 듣고보면 그런 것 같기야 합니다만."
"하필 설 선생에게 있는 사람이 왜 자네뿐인가 싶기야하지만 없는 것보다야 나을테지."
"저 친구 말고도 손 선생이 있질 않습니까."
"그렇긴하지만 그 친군 자네한테 무르니깐. 자네의 제자들보다는 비교적 강단이 있으려니 싶지만 아주 안심할 사람이야 아니지."
저 양반한테야 그럼 안심할만한 사람이 있기야 하나. 내가 이리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동시에 이청천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들었다.
"가십니까?"
"가야지. 이 박사에게 말해둘 것도 있고. 조만간 또 들르겠네. 담번엔 병원말구 자네 집에서 봤음 좋겠구만. 그땐 저 친구도 없겠지?"
"글쎄요, 워낙 찰거머리라."
"농일세, 아, 그렇지. 자네 비서관들에게 안부 좀 전해주게."
저 양반이 끝까지. 이청천 선생은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혀를 쏙 내밀곤 얼굴을 치웠다. 내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알았으나, 아니, 도리어 총으로 날 위협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자네만 성격이 더러운 줄 알았는데,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이 있다싶은 사람은 죄다 성격이 더럽구만."
"그 성질머리 없었으면 진작 죽었네. 더군다나 이청천 선생께선 그런대로 괜찮으신 성격이지."
"자네한테만 그렇겠지."
"아니라니까."
내 말이 맞는데, 하고, 레이시치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먹은건가. 이 친구는 학생시절부터 자기 말이 안 먹힌다 싶으면 저런 행동을 했다. 물론 그것 말고도, 화가 잔뜩나면 베개를 잘근잘근 씹는다든지, 팩 토라져서 이불을 껴안고 구석에 콕 박힌다든지 하곤 하였다. 그건 아직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훨 많으면서, 어째 세월을 거꾸로 먹는구, 싶었다. 하기야, 일찍 늙어버리는 것보다야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괄괄하고 날뛸 줄 아는 힘이 레이시치에게는 남아있으니까. 그건 어쩌면 앞으로를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의 특권같은 것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약산선생인지 뭐시기도 조선에 들어와 있어?"
"글쎄, 그랬다면 자네가 무사하였을까?"
"아니란 소리구먼. 하기야, 그랬다면 자네가 이 꼬락서니인 걸 보고만 있지도 않겠지."
"그래서 조금은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왜?"
"그 양반이 죽임당하는 꼴까지 보진 않아도 될테니까."
그럼 자네는 그 양반은 죽어선 아니되고, 자네 자신은 죽임을 당하여도 그저 그만이라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돌아올 대답은 뻔하여서, 나는 끝내 내 입을 닫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는 또다시 말싸움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도통 녀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지껏 바닥을 굴러다녔으면서, 절망의 늪에서 파득거리고 살았으면서, 아직도 다른 누군가에 대하여 다행이란 말을 쓸 수 있더란 말인가. 그 절망이란 것 속에서, 평소에는 더없이 비관적인 자네가, 행동은 어찌해서든 희망을 찾아나서는 이처럼 굴고 있으니 나는 그러면 자네의 행위들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할까. 어줍잖은 희망이라하여 자네의 비관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나, 그도 아니면 아직 완전히 자네가 죽은 것은 아니라 하여 자네에게 희망을 속삭여야 할까. 그러나 어느쪽이건 끝내 내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녀석의 조소뿐일 것이다. 나는 자네에게 희망도 절망도 될 수가 없었다. 광복이전에라면 녀석이 살아있을 이유라도 될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불가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이라곤 녀석의 조소를 그저 받아내는 것이나, 지겹도록 옆에 앉아있는 것 뿐이었다. 기껏하여야, 녀석의 자살행위와도 다름없는 짓을 뜯어말리는 게 다였다. 물론 손 박사는 그것이나마 큰 일이라 하겠으나, 나는 퍽 허전한 기분이었다. 녀석이 살 이유를 잃은 것처럼 말하듯이, 나는 그것까지는 아니지만 내게 종착지같았던 녀석에게 도움을 주건, 위해를 가하건, 어떤형태로든 녀석에게 자극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섭섭하였던 것이다. 놈을 살리지도, 죽이지도 못한 채로 그저 절벽 끝으로 다가가는 것을 다시 뒤통수를 붙들고 잡아끄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어줍잖은 놈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이보게, 레이시치."
날더러 생각말라더니, 자네가 생각을 하네 그려. 하고, 놈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지, 나두 자넬 닮아가는가."
"그럼 안될텐데."
"왜?"
"자네말마따나 유쾌하지 못할테니까."
"까짓거, 언젠 유쾌한 인생이었나."
나는 아니어도, 자네는 유쾌해야지. 하고, 녀석은 말했다. 제에기, 이제와서 걱정이라도 하겠단건지.
"자네가 유쾌하지 못한데 왜 난 유쾌해야한단 말이야?"
"자네는 살 날이 많으니까. 자네야말로 앞날을 살아갈 사람 아닌가."
"웃기시네, 죽어두 내가 먼저 죽어야지. 내가 나이가 몇인데.."
"자넨 아주 못쓰게 된 사람은 아니지 않나."
못 쓰게되었다라. 하기야 손 박사는 그런 말을 했다. 녀석의 왼쪽 폐는 걸레짝이나 다를 바가 없게되어서, 기구를 쑤셔넣어서 억지로 펴 놓은 상태라고. 놈은, 그걸 말하는 걸까.
"그런 말 말어, 살아있으믄. 누군들 못 쓰는 사람이겠나."
놈은 대답 없이 그저 억지로 웃었다. 억지로 웃는겐지 아니면 웃는 법을 잊어버려서 어색한 것인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그리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참말 좋겠으이."
생각이야 자네 맘대루 할 수 있지. 내가 이리 말하자 놈은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리 멋대로 생각할 수 있을만큼 똑똑하진 못하다니까. 하고 말했다. 미련하다 욕을 할까, 아니면 도리어, 있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는 자네가 영민한 것이라 말을 해야할까.
"오늘 더 올사람은 없는게지?"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병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물었다. 아, 그러고보니.
"뭔가?"
"예전에 자네 후임이 왔을 적에 정 선생인지 나발인지 말하질 않았나. 그치도 자넬 싫어하나?"
"관보, 그 친구 말이군. 싫어한다기보다, 낯가림이 많다고 해야겠지."
"낯가림은 개뿔, 자네랑 오래 일했을 거 아닌가."
"그렇기는 하였으되, 나를 곧잘 무서워하곤 하였네. 내가 무장투쟁을 하였기 때문이겠지. 여차하면 단재선생과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단 걸 알았겠고.. 더군다나 그 친군 원랜 이승만 박사의 휘하에 있다가 팽 당하는 통에 내무장관실로 흘러들어왔으니까."
"유약하고, 줏대없단 말을 돌려서 하는군."
"유약하다는 말은 맞으나, 줏대없는지는 모르겠어. 그도 그럴 것이, 이 박사 몰래 일을 반대하다 미운털이 박힌 거니까."
"겁쟁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군. 그게 아니면 자네처럼 정면에 서서 맞섰겠지."
"언제나 정면승부가 답인 건 아니네. 때론 게릴라전도 필요하지. 나는 그저, 정면승부를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을 뿐이네."
"그럼 그 친군 게릴라다 이거야?"
"구태여 말한다면 그렇지. 그리고 자네가 말한 그 유약한 모습탓에, 얕보기도 쉽지."
"자네랑 작전에 나간 적은 있었어?"
"딱 두번. 내가 자기대신 총을맞는 꼴을 보고는 그 담부턴 지레 겁을 먹어 사무만 보려고 하였지만, 형무소에선 나와 함께 있었네."
"자네랑 죽겠다고 작정을 한 걸 보믄, 그렇게까지 악인은 또 아닌 모양이야."
악인이라, 어디까지가 악인일까. 조선인을 팔아먹는 지경은 아녀도, 일시의 욕을 면하기 위하여 달콤한 말을 지껄이고, 허여멀거니 얼빠진 상판들을 하고서 서 있는, 그러고는 자기 차롄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고 마는, 그것도 악인이라고 해야할까. 그도 아니면, 의욕만 앞서서, 결국 일을 말아먹은, 나 같은 작자들도 종래에는 악인이 아닌가.. 분명 정 선생은 이렇다 할 색깔이 없기는 하였다. 그건 광복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승만도 정 선생은 살려두었을 것이다, 죽일 가치도 없다 비웃으면서. 그러나 참말 정 선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 그건 아녔다. 백범 선생께 귀띔을 몰래 하기도 하였고, 임정에 있었을 땐 행동력이 좋은 이상원 선생에게 부족한 꼼꼼함이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보면, 눈에 차지는 않아도 제 나름으로는 애쓴 것이었다. 능력이야 부족할 수 있다. 됨됨이야 유약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걸 외면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한발짝이라도 더 나아질 사람이라는 데에 있었다. 나는 한때 그것이 박 선생이라 여겼었는데, 정작은 나도, 헛짚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길러온 사람이라는 데에, 내가 옆에서 줄곧 가르친 사람이라는 데에 눈이 어두워서.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모를 리 없다고 자만을 하였던 탓이다. 그러는 사이 일은 이렇게 흘러갔다. 그렇다고 내 휘하의 사람들을 모른척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그저 귀애하였던 자식. 더 이상은 쓸모도 없는 아비, 그게 끝일지도 몰랐다.
"그래두 괘씸하긴 하여, 자넬 도운 게 있대도 얼굴 한번을 안 비치나."
조선 속담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 정 뭐시긴가하는 친군 담날 저녁때 즈음에 병실에 들어와 앉아있었다.
-자넨 말 함부로 하면 안되겠네.
그날 나는 형식뿐일 원무과 일을 마치고 병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왠, 나이는 서른후반즈음 되었을까, 살집이 조금 붙고, 쳐진 눈매를 하고서, 닳아빠진 서류가방을 든 사내가 들어와 앉아있었다. 나를 보곤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아마 그건 이상원인지 하는 양반과 같은 까닭이었겠지. 첨엔 일거리를 주려고 들어왔나싶어 쫓아내려고 했는데, 그런 것치곤 병상에 서류는 커녕 필기구하나 없었다.
"앉게, 정 군. 저 친군 해코질 할 건 아니니까 마음놓고."
"그러나, 형무소에서.."
그놈의 빌어먹을 형무소. 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는데, 그게 들린 모양이었다.
"목청한번 크군."
"저 친구는 또 뭐야?"
"자네가 어제 욕하던 사람."
사람은 순한 모양이군. 그러나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쭈뼛거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연수처럼 성질이 더러운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 서류가방은 또 뭐요?"
"설 선생님이 무료하시겠다 싶어서.."
정 선생이란 이는 불룩한 서류가방에서 두꺼운 책을 꺼냈다. 아니, 표지를 엉성하게 싼 걸 보니 책이라기엔 원고다발에 가까워보였지만.
"고맙네."
"고맙긴 뭐가 고마워? 손 박사가 자네 쉬라고 했네."
"업무는 아니네, 일전에 박은식선생께서 집필하시던 걸 내가 검토를 맡았어.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보던 것이니까.."
시간이 날 때라, 시간이 나는 게 아니라 잠을 쪼갠 것이겠지. 이미 죽은 이라, 중도에 관둬도 그만일테지만 뭣보다 녀석이 그럴 성격이 아니고, 어쩌면 유족들의 면목이라거나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놈은 내 눈치를 슬쩍 보는 투였다. 아예 나만 있다면 아무 관련없는 자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바락 대들었을테지만, 저기있는 정 선생이라는 제자일지 후임일지 모를 작자 탓에 조금은 성질을 누그러뜨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여도, 손 선생의 지시를 어기고 과로를 하게 내버려 둘 내도 아니었다.
"안 돼."
"자네는 또 어린애처럼 왜 장난질을 하는가."
"어린애처럼 구는 건 자네네. 병실에서 이게 할 행동인가? 자네 후임이 무안해할까봐서 더 심하게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게. 자네 상태를 저 친구가 알기는 하는가? 얼마 전엔 실명할 뻔도 하였으면서 애당초 이게.."
정 선생이라는 이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럼 그렇지. 당연히 말을 아니하였을테지.
"그건 그때고 지금은 아니네. 지금이야 많이 호전되었질 않은가."
"자네가 글러먹은 게 무언지 아는가? 아무말 않는다는거네. 자네가 어디 혼자 죽어나자빠져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일세. 그러면 자네가 없어지는 그날에 저기있는 이는 물론이고 모두들 혼란에 빠져서 우왕좌왕하게 될테지. 자네는 그걸 원하는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만큼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야."
아니, 모두들 무능한 사람이다. 자네가 쓰러진 그 날에도 그 박원일이란 놈은 그러질 않았느냐, 이젠 자네 뿐이라고. 그 말이 그럼 무슨 뜻이냐, 자네 없이는 자기 목숨하나 건사 못한다는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자네가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자네는, 그 망할 희망사항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아무 희망도 없이, 이 조선은 혼란속에만 존재해버리고야 마니까. 더군다나 제아무리 사람이 변변찮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너는 그런 이들에게서조차 개선을, 전진을, 그리고 한줄기 희망을 엿보던 사람이니까, 그렇기때문에 네게 사람을 포기한단 말은 죽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그야말로 모순의 극치다. 너는 이 꼬락서니를 보고서도 아직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쯤되면 나는 네가 답답하기보다도 차라리 가엾다. 그러나 나는 이 말까지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러면 녀석은 또다시 피를 토하고, 끝내는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 대신 나는 원고 꾸러미를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가버렸다. 녀석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거야 내 알 바가 아니다.
"흥."
"이보게."
"싫어."
"아직 용건도 말 안했네."
"뭐든 싫어. 오늘은 자네 말은 뭐래도 안 들을거네."
녀석의 표정은 더 가관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대치를 하고 있을 때, 정 선생이란 이는 저어, 설 선생님. 하고 녀석을 불렀다.
"오늘은 저 양반 말대루 허지요, 그리구 전 손 박사님께 칼침맞고싶지 않습니다."
저 양반? 어쭈. 나이도 나보다 어린게. 하지만 어쨌든 내 편을 들어주었으니까 넘어가주지.
"그 친구가 자네도 협박하던가?"
"협박이구 뭐구 할 필요도 없지요, 손 박사님은 저만보믄 살기가 등등하신데요."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수 접어두기로 한 모양이다. 아니지, 또 모른다. 밤에 슬쩍 서랍을 열어서 밤새 일을 할지도 모르니까. 아주 포승줄로 꽁꽁 묶어두어야 하나.
"자네가 정 그러면, 내가 대신 봐주지."
"자네가?"
"왜, 경부놈이라서 못 미더워? 자네들 정보를 다 볼까봐? 이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네들은 이겼고, 나는 졌는데."
이겼다라. 과연 이걸 이겼다 할 수가 있는가. 미처 싸워보지도 못하고 남이 대신 안겨준 승리가 승리라고 할 수가 있는가.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레이시치, 자네야 그 졌다는 축에 들런지도 모르지만, 대다수는 그렇지가 않다. 표면적인 싸움이 없어졌을 뿐, 전쟁은 여전하다. 따라서 나는 승자라기보다는 패배자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주 패배로 정해진 거야 아니기는 하지만.
"아니네, 넣어두게. 퇴원하거들랑 보겠네. 아니면 손 박사가 허락해주거든 그때 보든지.."
"진담으로 하는 말이야?"
"자네는 내가 허언만 하는 줄로 아는가."
물론 그거야 아니지만 자네 입에서 쉬겠단 말이 나올 리가 없으니깐. 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진짜지? 얌전히 있는게지?"
"자네는 속고만.. 하기야, 내게서야 속고만 살았겠군."
갓난쟁이가 손윗사람에게 다짐을 받듯 레이시치는 계속 물었다. 나는 그것이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파에 구멍뚫린 사람같이-물론 액면 그대로야 그것도 사실이기는 하다-숨넘어 갈 듯이 웃어젖혔다. 레이시치는 어쩌면, 나를 보곤 드디어 미쳤는가부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언제는 저 친구가 나를 제정신으로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주로 건너간 그 날 이래로 저 이가 날 제정신으로 본 횟수란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형무소에서조차 내가 토혈을 하며 말을 토막토막 끊어내었을 때도 나를 미친 사람쳐다보듯이 보질 않았던가. 그것도 한편으론 참으로 재미난 광경이었다. 하기야, 그 당시에 저 친구와 있던 나날들은 재미가 없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죽으려 하고 마음먹었는데, 놈들은 나를 사형시키기 위하여 살려두려하고 있었다. 죽이기 위하여 살려둔다, 이 얼마나 익살맞은가. 죽이기 전에, 한마디라도 더 뽑아내려고 끝내 끊어지려는 숨을 붙여두려 애쓰고, 안달이 나고, 그것으로 애간장이 타 했었다. 살려두자니 죽어야 할 목숨이고, 죽이자하자니 살아있어야 하고, 언제나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작자들이 나를 못 살려두어 안달나 하는 건 혼자보기 아까운 가관이었다.
-
하도 사람없다 사람없다하여도 문병을 오는 이가 있는 것을 보믄 자네두 아주 헛살지는 않았나보다. 나는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비 맞은 중마냥 중얼거렸다.
도움될 놈일랑 하나 없지만, 그러나 네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테지. 정 선생이라 했나, 이제야 제대로 기억이 난다. 그 작자는 형무소에서 첨 만났다. 그것도, 연수가 감방 안에서 피를 토하고 널부러진 것을 붙들고는..
-설 비서관님은 폐병을 앓고 계십니다.
일은 이랬다. 내가 무슨 일이냐며 감방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원이란 양반은 내게 꺼지라며 소릴 질렀고, 그래도 내가 안 나가고선 도리어 무슨 일이냐고 같이 소릴 지르자 그 옆에서 나즈막히 말했던 것이다. 내가 놈을 들쳐업을 때 부축을 하였던 것도 그 양반이었다. 내게 적개심이라기보단 두려움이 더 커보였는데, 도리어 그건 영리하였다고 볼 수 있었겠다. 어쨌건 그리 고분고분하게 군 덕택에 지금 이놈은 목숨을 건진 게 아니냐.
-저 자를 죽게 놔두면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나도 미쳤지. 고작해야 나는 경부였다. 그런데도 하시모토 대좌 앞에서 녀석을 살려둬야한다고, 치료를 받게 해야한다고 뻗대었으니까. 그러나 정말 폭동이 일어날 기세였다. 녀석이 간수 등에 업혀 나가자 죄수들은 아우성을 쳤으니까. 설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다음은 네놈들 차례다, 하는 것을 합창처럼 질러대는 것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게 무섭진 않았으나, 정말 무서운 것은 녀석이 끝내 형무소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죽으면, 그래.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녀석이 상태가 조금 안정되었을 때 대좌는 곧장 병실에서 끌어내 형무소로 데려가자고 했다. 그걸 막은 것은 나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녀석의 상태를 보곤 폭동이 일어날텐데,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나는 그렇게 대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놈을 측은히 여겼느냐, 글쎄. 모르겠다. 물론 피골이 상접한 것을 보곤 조금은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첨엔 그러게 내 말 듣지, 꼴 좋다, 이런 개죽음을 할 걸, 무엇하자고 이랬느냐, 이런 마음이 앞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심란하기도 하였는데, 그거야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주변에서 녀석을 볶아대는 걸 보곤 한편으론 측은하고, 한편으론 분하기도 하니까. 나도 그러고보면 많이 변한 모양이었다. 나는 서랍장을 열어 원고꾸러미를 보았다. 몇군데는 피얼룩이 묻어있었는데, 아마 그건 객혈을 한 흔적일 것이다. 기침과함께 피가 튀고, 녀석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가면서 생애 마지막인 것마냥 교정을 보았겠지. 그런 녀석이 잠깐이라도 쉬겠다고 한 건,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편으론 다행이겠거니, 하였으나,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질 않는가. 하기야, 내일 당장 죽어도 사실상 이상하지 않기는 하다. 녀석이 농담처럼 말하였듯이, 놈은 시체가 살아서 걸어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장 거꾸러져 죽을 줄을 알면서도, 아니, 사실은 이미 죽어 육신이 썩어 문드러져 살점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면서도, 주변에선 그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매달리고 있다. 이미 총알은 심장을 꿰뚫어 유혈이 낭자하게 죽은 지가 오래이면서도, 그 위에 거적을 덮어 그렇지 않은 척 하고들 있을 뿐이다. 그 광대짓이 언제야 끝이 날런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관속에 누운 녀석을 필요한 때면 언제든 그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끌어내 이용해먹을 것이다. 놈이 살아있든, 죽었든,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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