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죽으면 무엇이 남나
제노리나드렌(에 기반한 제노+드렌)
정말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던 사람이 있었다.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그 이를 향한 시선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애정이라 단언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간 사람들은, 그리고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모자람이 하나 없이 사랑이라 말하는 종류의 애정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다지만 단 한가지만으로 정의하기도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느끼고, 닿고, 마음 깊이 전해진 모든 종류의 애정이 그 이에게서 왔고, 거울에 투영된 물체처럼, 천천히 스며드는 가랑비처럼, 빛에 반사되는 유리처럼 자연스레 그를 통해 배운 감정이 내면에 스며들었으니 그 모든 사랑을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이들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랑이 넘치던, 사랑스러운…이 세상의 온갖 사랑을 갖다 붙혀도 모자른 사람이었다. 매번 저는 하는 일 없이 살아갔을 뿐이라고 멋쩍게 웃으며 속삭이는 그 미소는 얼마나 아름답던지. 스쳐 지나갈 법한 작은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 손을 내미는 그 다정은 얼마나 따스하던지. 스스로 마저도 신뢰하지 못해 부정하고 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다가와 잡아주던 양 손은 얼마나 다정하던지…
세상을 원망하던 사람이 있었다. 세상에 공허하던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세상의 모진 삶, 거친 풍파가 거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제가 가진 것이 본인 밖에 없어 육신을 아끼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벼르는 불꽃이 되어 칼날을 한번 꽂고 나면 산화할 삶을 남기고 흩어질 사람이었다. 인생의 목표가 그것 뿐이라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곧은 길을 걸었다.
한 명은 세상의 부드러운 낯, 나아가려 해도 더 막히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제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 목표를 이루려 해도 상실이 더 큰 이었고, 썩어가거나 죽어갈 일 없으나 켜켜이 쌓인 상념 하에 말라갈 사람이었다. 인생의 목표란 정해진 것 위에만 있어 돌아보려 해도 할 수 없이 앞만 보고 살아갔다.
이 필연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이들은 원래 운명의 여신이 짜둔 굴레 안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이였으리라. 그러나 여신의 어떠한 변덕의 결과인건지, 이 둘의 인생의 얼마 되지 않는 목표이자 변혁이 하필이면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게 같은 존재였다. 하나는 원수이자 주군이며 하나는 영혼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랑이었다.
어쩌면 극과 극에 위치해 있으나 어쩌면 거울처럼 닮아있던 둘이었다. 와중에 사랑도, 목표도 같으니 서로를 이해함에 어려움이 없지도 않았고 겉으로는 악연, 내면으로는 친우라 여기기에 충분한 사이였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며 어쩌면 이 관계가 영원성에 가까운 것을 띌지도 모른다, 라는 그런 낙천적인 생각도 갖게 되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잘라내기보다 공평한지, 사람은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지, 희망과 절망은 한 끗 차이인지를 망각하고서.
이스테리나 슈트리온이 죽었다.
정말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던,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모두가 사랑하는 그 이가 죽었다. 가장 많은 것을 주어 사랑으로 내면을 채워주던 이가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무력하게 죽어버렸다. 정말 절망스럽게도 그 이처럼 죽었다. 사랑이었다. 계속 함께하고프고, 살아가고프고, 더 나아가고픈 길을 걷게 한 이가, 복수의 칼날도 무력의 교만도 흐려지게 한 이가, 꽃보다 아름답고 보석보다 찬란하게 빛나던 이가 정말 답게 죽어버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망설임은 저 멀리 미뤄두고서.
너를 사랑하는 우리를 두고서.
“제노 브라이트.”
“…기어코 나왔냐? 근데 뭔 어울리지도 않는 폼을 잡고 있어.”
사랑이 깨졌다. 목표만 남았다.
그러자 그토록 공고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존속되리라 생각한 오만도 깨어졌다. 우리의 사랑은 온통 너에게서 배웠으니 너를 잃은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는 법을 알 수 없었다. 네가 없는 우리는 그만큼 가까워질 수 없었다. 친애의 흔적이 남아 미약한 연결이 존재는 하나 그 뿐이었다. 너라는 세상의 구심점을 상실하게된 우리는 이제 영원히 멀어지는 반동의 길을 걷는다. 아마 황혼의 시간이 찾아오더라도 돌이킬 수는 없으리라.
너를 상실하고 나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고통과 증오와 원망과 비애다. 그러니 그 감정이 더 좋은 것을 부수어 영영 너와 함께 했던 시간마저 망치기 전에 하늘 아래 같이 할 수 없던 운명의 굴레로 스스로 굴러가는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은, 먼저 네가 주었던 사랑을 잊어버렸던 쪽에서 내리기로 했다. 되찾은 지금은 사랑을 품고서 다른 너를, 수많이 네가 들려주었던 너를 찾아 헤매이는 날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더 돌이키고 싶지는 않았다. 과거의 잔재는 품 안에 묻어두기로 했다. 남은 것은 네가 없는 미래를 살아갈 여행자의 현실이다. 분에 넘치게 과한 사랑을 받았으나 그 사랑을 소화해내지는 못 해 언제나처럼 퉁명스럽고 정이 없는 상대만 할 수 밖에. 이것이 제노 브라이트가 늘 사람을 대해온 것이었기에.
“…미안하다.”
하지만 이어 들려온 말에 같이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이러니 저러니 해도…사람은 한번 경험한 순간부터 바뀔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제노와 드렌이 함께 겪은 것은 어떤 의미로든 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 비참한 공유자의 입장으로서 날 세운 것을 거두고 침잠된 마음으로 그를 대하는 것이다.
'“…네 놈이 미안할 건 없어. 내가 누누히 말하는데, 가장 잘못한건 그새끼다.”
“주군께 불충하다, 그리고…”
“헹, 이제 다 때려치우고 꺼져주는데 불충은 무슨. 이번에 봐줬다고 내가 평생 감사해야 하냐? 내 평생은 오히려 증오해도 모자라. 그리고…나도 알아. 그 빌어먹을 거.”
제노가 머리를 벅벅 헤집으며 웃음을 터트리듯이 말했다. 이 영광스러운 제국의 빛 창 아래에 사는 이들이라면 그 누가 모를까. 천 년, 수 많은 것들이 피고 지어나는 사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의 시발점에 있던 성스러운 이와 영광스러운 이가 어떠한 사이였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던지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금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삶을 누르듯, 그들도 사랑에 무관하지 않았다. 다만 어쩌면 일방적으로, 동시에 절박하게 남았다.
이 시점에서 제법 우스워 터진 웃음이다. 그 높디 높은, 자기가 평생 시궁창 쥐만도 못하게 기어가는 동안 고고히 빛날 것 같은 제국의 근간도 결국 사랑 하나 때문에 좌지우지 되지 않던가. 그리고…그 사랑, 잘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그 끔찍한 것을 만들지 않았던가. 초대 성녀가 어떤 것을 두려워 했는지는 알것 같았다. 지금 상실을 맛본 상황에서 그 상실이 시시각각 눈에 보일 성녀에게는 먼 미래의 종말에 눈물지을 제 사랑이 가엾기 짝이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살아가는 이가 보기에는 정말 끔찍했다. 예언, 불확실을 확실의 영역으로 이끄는 희망. 그 희망 하나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역사 아래에 사그라들었을지. 그저 신성의 영역이라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비정한 것이다.
제노는 자신이 얼마나 힘겹게 제 의지와 상관 없는 삶을 살아왔는지 알았다. 그래서, 이제 진심으로 아서 G. 그라이덴을 증오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운명에게는 또 다시 굴러온 제물이, 그들에게는 세상보다 더 귀중한 이가 운명의 이름 하에 처단되는 걸 바라보기만 하는 감각은 이제 제발 다시는 일어나게 하지 말라고 일침이라도 놓고 싶은 심정 뿐이다. 죄인의 입장으로 문 밖을 나서는 지금은 하지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래, 알고 있으면 됐다. 이스테리나는-”
“다 알아, 네 놈이 알려줬잖아. 그리고…하, 또 구역질이 나오려 하는군. 그딴 표정은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 분께서도 어쩔 수 없었을테니까. 상실은…모두에게 찾아왔지.”
“안다고, 가르치려고 하지 마. 이젠 정신 차렸어. 어디서 뭘 해야 할지도 알았으니까. 그래서, 너는 왜 여기까지 온건데?”
드렌이 고개를 들어 제노를 곧게 보았다. 잠시 눈 안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지나가더니 한숨을 섞은 말을 내었다. 들려온 것은 제노가 그다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제노 브라이트, 우리가 그간 보지 못한 것이 많아 깊이 미안하다. 그리고 너에게 또 같은 행적을 시켜야 한다는 것도.”
“…뭐.”
“그리고 고맙다. 기억하고 멈춰줘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어서. 이건 그분의 명령이나 무엇이 아니라…”
말을 꺼내는 것에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안에 깊이 꺼낸 것을 쑤욱 들쳐내는 듯 주저함이 깊었다. 그러나 뜻에 다름은 없는 듯 잠시 끊긴 말에 단단함을 실어 확실하게 이었다.
“온전히 내가 친우를 걱정하는 말이다. 너는 꼭 그 분께 할 말이 있겠지. 네가 할 일을 다 끝낸다면 그 때, 돌아와서 그 말을 다 해라. 복수도, 원망도 마음껏 해. 그 때는 막지 않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렌 라이라크의 입에서, 누구보다 정도를 따르는 올곧은 기사이자 황제의 개라는 평을 듣는 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허나, 그 것이 누구에게 다를까. 제노 브라이트는 비로소 웃었다. 바뀐 것은 그 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제노 브라이트는 이스테리나 슈트리온이 남긴 유언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후련해진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뜬 제노는 드렌에게 핀잔 어린 농조를 뱉었다.
“하이고, 제국의 나이트 오브 원께서 그런 농담을 하실 줄도 몰랐네? 이러다가 내가 바로 돌아가서 너희 황제 모가지를 똑, 따버리면 어떠나?”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은 막아야지.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이니까.”
“와하학, 이런 농담도 받아칠 줄 아냐? 뭐 그 깡통같던 샌님 모습은 하나도 안 보이네? 왜, 이제는 좀 다르게 길들여졌냐?”
“…네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었을 뿐이다…”
“그래그래, 네가 그~렇게 빌어주니까 나도 어쩔 수 없지! 황제 모가지 딸 날까지 내가 버텨야겠다~!”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던 제노는 입가에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러운 눈으로 드렌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닿은 드렌도 약간은 골치 아픈 듯, 그리고 제 뜻의 전함에 만족한 듯 마주하여 웃었다. 그 사이에 침묵이 일었으나 완전히 침묵이라 여긴 것은 둘중 누구도 없었다. 시선으로 대화가 오고가고, 해가 천천히 땅을 비추기 시작할 때, 제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먼 지평선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너도 몸 조심하고 있어라, 내가 베어내야할 건 그 놈만이 아니야. 목 잘 닦고 기다리고 있어. 언젠가…내가 리나를 만나러 올 때, 네가 안내 해줘야 하니까.”
말을 하며 돌아보지는 않았다. 끊임 없이 발을 내딛을 뿐이었다. 태양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는 과거이자 미래가 될 이에게 가볍게 산책이라도 나서듯 손을 흔들어줄 뿐이다. 뒤에 남아 미래이자 과거를 지킬 이는 그 뜻을 알아 더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이에게 축복을 담아 손을 마주 흔들 뿐이었다.
제노의 모습이 수평선 너머로 멀어지고 해가 완전히 모습을 보였을 때, 그 곳에 남아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제노 브라이트가 또 다른 사랑을 지키다가 후련히 산화하였을 때. 드렌 라이라크가 자신의 목표보다 사랑을 우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주 오랜 시간을 돌고 돈 후에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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