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의 끝에서

애니리나

by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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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났다.

그 말은 수많은 죽음이 이제 더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뜻했지만, 아주 많은 죽음이 이미 이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과 사의 경계는 언제나 함께랴, 시작과 끝도 함께였다. 모든 것이 폐허로 남은 제국의 끝을, 이미 옛적에 예언한 성녀와 황제의 비는 제법 오래전부터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이들만이 남아있는 공간에서.

둘의 관계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는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친우, 그리고 끝을 명명하기를 죽음을 함께한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전승된 성녀가 비를 죽였으며 비는 절명하였다. 역사서에 기록될 한 줄짜리 줄 글에는 딱 그 정도로 알려지는 사이였다. 허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퍽 다르다. 도대체 어떤 죽음을 맞이한 이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자 곁에서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수 있는지, 어떤 살인자가 자신이 죽인 이에게 이토록 애정하여 의지할 수 있는가.

세상 모든 일은 감춰져 있는 이면이 있다. 이스테리나의 이면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생각보다 많은 감정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애니의 이면은 그런 다정을 알고, 사실을 알고, 사랑을 알며...스스로가 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비밀이 애니가 사람으로서 살아가도록 했다. 잠시 거대한 사랑이 눈을 가리어 제 사랑이 집어삼켜진 것에 절망한 날이 길었으나 지금 이곳에 온 애니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아마 어떻게든 실현되었을 것이며 자신이 뒤늦게라도 뜻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사랑 덕이었으니. 그 사랑의 가려짐에 절망하기보다 오래도록 간직하는 것이 옳았다.

"리나, 보고 있어?"

사실을 되새기며 주어없는 말을 건냈다. 잠시 그것에 의문을 가진 표정이 이스테리나의 얼굴에 떠올랐으나, 이내 애니가 그토록 사랑하여 지키고 싶어했던 미소로 답하며 속삭였다.

"응. 보고 있어.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아주 적은 기쁨과 상당한 슬픔이 낯에 스쳤다. 여름 날 아래에 반짝이는 태양빛처럼. 그 감정의 이름을 애니는 알고 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남기고 왔을 때 짓는 표정이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애니는 슬픔이 제 안으로 퍼지기를 바라며 이스테리나를 꽉 껴안았다.

"걱정하지마, 리나. 이별은 잠깐이고 고통도 잠깐이며 결국 모두 다시 만나게 될테니까."

"...응. 맞아. 우리가 이곳에서 만난 것처럼."

"맞아, 이곳에서 만난 것처럼."

등을 붙잡은 손에서 심장고동이 울려퍼진다. 슬픔이 천천히 가라 앉아 퍼진다. 애니는 이곳에서, 이스테리나의 슬픔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느끼고 있다. 눈을 감았다. 모든 감정이 이스테리나에게 전해지도록, 함께함을 잊지 않도록.

"그러니까 웃는 얼굴로 맞아줘. 너도 네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에릭스도 마찬가지일거야. 사랑하는 만큼, 아프지 않고 오는 걸 기다리도록 하자. 다시 만나는 것에 불과하니까."

품에 안긴 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 애니는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생 너머에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 너머에서도 이뤄나갈 목표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애니는 아마 자신의 이야기가 끝을 내린다면 이곳이 가장 적절하리라 여겼다. 제가 가진 목표가, 생이, 삶이 모조리 충족되는 완벽한 시간. 끝이 매겨진다면 이것보다 더 완벽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애니가 끝내지 않는 것은, 이 긴 생활이 이어지는 곳에서 마저 보고픈 욕심이 아주 조금은 남아서 이스테리나의 미소를 보지 못한만큼 담고 싶어서다.

그러니 언젠가 올 끝을 계속해서 유예하며 이 행복을 길게 유지하기로 애니는 그 마음을 삼켰다.

햇살이 적당히 내리쬐는 어느 좋은 멸망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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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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