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잤던 여자들

[외전] 룸메이트 (4)

가람에게도 혜림의 커밍아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혜림은 소위 전형적인 레즈비언 스타일링이 아니었고 옆에서 봐왔던 취향도 딱히 '티나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자 아이돌 정도는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나?'

곰곰히 혜림의 평소 행동들을 떠올려보던 가람이었다.

가람이 스스로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된 때는 중학교 때였다. 중학교는 여중이었는데 그때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던 짧은 머리의 친구가 있었다. 가람도 짧은 머리였기 때문에 그 친구처럼 인기가 꽤 있었는데,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처럼 그 친구를 흠모했던 가람은 쏟아지는 애정을 귀찮아하던 친구의 태도에 차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그저 그 애처럼 인기 많은 게 피곤한 척, 귀찮음을 공감하는 척 하면서 그 친구 옆에 붙어만 있었다.

고등학교는 거지 같은 성비 극악의 자사고를 가는 바람에, 성인 되고 나서는 재수를 하고 1학년을 적응을 못 하는 바람에 가람은 애인을 만들 새가 없었고 어느새 모태솔로로 23살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혜림이라는 거의 첫 레즈비언인 친구가 생기게 된 것이다. 비록 그 사실을 눈치채게 된 계기는 혜림의 실수 때문이었지만 가람은 본인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했다: 혜림은 여자랑 자다 들켰다. 그리고 최대한 아닌 척 물어봤고 고기가 미끼를 물었다.

​가람은 혜림이 좀 문란한 것 같은 게 흠이긴 하지만 오히려 연애 고수일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가람에게 든든한 연애 지원군이 생길 기회였던 것이다. 간접 경험으로 들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한편 혜림 쪽의 작전은 쭉 친구로 지내다가 썸으로 만들기였다. 이를테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인 것이다. 혜림은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지인들의 조언을 토대로 가람과 최대한 친밀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의도는 어느정도 유효하게 적용되었다. 물론 유흥을 즐기고 여자 관계가 꽤 복잡하다는 결점이 밝혀져 그걸 감수해야했지만 혜림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가람과 가까워지는 쪽이 더 좋았으니까.

​결국 양쪽의 수요가 맞아떨어져 가람과 혜림은 둘도 없는 절친이 된 것이다. 휴학으로 적당한 친구가 없던 가람이나 학교 친구여도 헤테로 밖에 없던 혜림이나 둘의 상황은 그닥 다를 게 없었다. 결정적으로 둘은 룸메로서도 잘 맞는 사이였다.

그렇게 1년 반이 흘렀다.

2학년 말 ​중도 휴학을 해서 한 학기가 휴학 처리된 혜림은 졸업이 꼬여 골치가 아픈 참이었다. 실제로 다닌 건 8학기 째지만 인정되는 건 7학기 뿐이라니. 원래대로라면 이번 학기가 끝나고 졸업이었지만 한 학기를 더 다녀야하는 상황이었다.

'등록금 아깝다...'

혜림의 본가는 애매한 지역에 있어 통학은 불가능하고 기숙사 거리점수는 받지 못하는 곳이었다. 취업이 될 때까지 무조건 기숙사에서 버텨야 한다-이게 혜림의 각오였다.

"안녕하세요, 그 기숙사 신청 관련해서 문의드리려고 하는데요."

방 안에서 통화 내용을 듣던 가람이 통화를 마친 혜림에게 말했다.

"너 졸업 해?"

"아, 아니 나 저번학기가 3학년이었대. 그래서 지금 코스모스 졸업하게 생겼는데,"

​듣자하니 시스템 상 기숙사는 1년씩 신청이라 내년에 기숙사 입소가 되는지 안되는지 물어본 것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너랑 또 있을 수 있어."

였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 나 근데 기숙사 내년에 안 살 수도 있어."

"아 그래?"

왜? 기껏 친해져놨더니 갑자기 기숙사를 나가겠다는 가람이었다. 설마 또 휴학인가?

"나... 썸 타는 것 같아."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썸?"

'내가 아는 그 썸?'

혜림의 말에서 황당함이 묻어나왔다.

"응. 고백 받음."

'미친 그럼 썸도 아니잖아.'

"누군데?"

"아, 그건 사귀면 알려줄게. 크크."

​어쩌다 고백 받았는데? 왜 안 사귀는데? 기숙사는 왜 나가는 건데? 물어볼 게 수백 가지가 떠오른 혜림이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와, 24년 모태솔로가 이제 드디어 연애하는구나."

가람은 그 뒤로 혜림에게 연애상담 비스무리한 걸 종종 했다. 얘가 이렇다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카톡 답장을 어떻게 해야할까, 선물 받은 게 부담스럽다 등등. 최대한 상대의 의도를 부정적으로 해석해준 혜림이었지만 가람은 오히려 그게 더 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곤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나 사귀기로 했어."

가람을 만나고 1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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