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잤던 여자들

[외전] 룸메이트 (3)

가람은 주말에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제 시즌이라 평일에는 서로 만나기가 힘들었고, 또다시 돌아온 금요일이었다.

"혜림아."

"어?"

침대에 누워있던 혜림이 답했다.

"안 바쁘면 잠깐 얘기 좀 할래?"

"어 그래."

의아한 표정을 지은 혜림이 가람을 따라갔다. 책상에 앉은 가람은 맞은 편의 등진 의자를 돌려 자기 쪽을 바라보게 하더니 혜림을 앉혔다.

"내가 진짜 고민하다가 얘기하는 건데...."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혜림에게는 너무 크게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거지?

"너 외박하면 어디서 자고 오는 거야?"

"어? 어...."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할까. 고민이되는 혜림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뭐라고 답변하는 게 현명할지 따지기도 전에 뭘 묻고 싶은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밖에서, 자고 오지?"

의미 없는 대답을 뱉어버린 혜림은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밖이 어딘데?"

"클럽이나... 모텔."

혜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모텔?"

"응."

"남자랑?"

"아니."

왠지 모르게 자기가 혼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혜림은 왜 이 질문들에 대답해야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주인의 생각을 알지 못한 입은 사실을 술술 불어댔다.

"여자랑... 자고 오는데?"

'이거 거의 커밍아웃인데.'

"여자랑 자고 온다고?"

"어...."

가람은 툭하면 외박하는 혜림이 은근 신경쓰였던 것이다. 처음엔 사생활이라 생각해 간섭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번 통화에서 들려온 의문의 목소리는 가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는 이 친구의 비행을 가람은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혜림은 혼나는 와중에도 가람의 짧게 손질한 맨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이 와중에 손톱이나 보다니. 미친 년.'

"하아.... 그런 데 위험하지 않아?"

안 위험해, 남자가 없어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혜림은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걱정 돼. 저번에 통화도 그렇고."

'비명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괜찮아. 난 안전한 데만 다니고... 또,"

"그 얘기가 아니잖아."

'왜 이렇게 신경 쓰지?'

"너가 신경 쓸 바가 아닌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말이 날서게 나간 혜림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

'에이. 진짜.'

해명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것 같은 표정의 가람에게 말했다.

"레즈비언이야. 그니까 동성애자."

"......?"

"여자, 좋아한다고. 남자 말고."

계획에 없던 커밍아웃을 한 혜림이 말이 빨라졌다.

"그니까. 여자랑 막 자고 다니고! 여자 만나려고 클럽도 가고! 그래. 너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 안 해도 되고."

혹시라도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까 싶어 덧붙인 뒷말이었다.

"......."

혜림이 가람의 눈치를 봤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그 순간,

"나도... 레즈야."

충격적인 답이 돌아왔다.

"흐어어어어어엉. 어어어어엉."

"뭐야. 왜 이래."

통화가 연결되자 기숙사 밖에 있던 혜림이 울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혜림이 취했는지 신고해야하는 건 아닌지 쑥덕댔지만 그건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혜림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게 짝사랑을 망하게 한 사람이었으니까.

"걔도, 이쪽이래애애. 어어 근데 내가 걔 안 좋아한다고."

"뭔 소리야, 알아듣게 좀 얘기해봐."

"내가, 끕, 나 이쪽이라고, 얘기했는데, 끕. 걔도 이쪽인거야."

"그래? 커밍아웃 했어?"

사안이 사안이다보니 기숙사 밖에서도 안에서도 편히 설명할 수 없는 혜림이었다.

"어 근데 걔가 나 싫어할까봐, 으응, 끕, 내가 걔 안 좋아한다고 그랬어."

"헐~."

"근데 걔도 이쪽이래. 다 망했어어어어엉."

"이야... 너 진짜 좆 됐구나?"

"야! 허어어어엉."

위로는 커녕 놀리기만 하는 지인이었다.

"너는, 흑, 그런 말이, 나와? 끕."

"아핫! 큭큭큭. 어떡해, 그럼."

"도움도 안 되는 새끼...."

혜림은 이성이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이제 앞으로 어떻데 해야할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답이 없어. 답이. 그냥 노답이야."

"그냥 친구로 남아."

"하...."

끊었던 담배가 다시 생각났다. 정말 친구로만 남아야 하나? 내 이상형인데? 누구라도 붙잡고 이 상황을 원망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 하나 없었다.

"아무튼 일단 걔도 가능성 있는 거네. 여친 있는지는 확인해봤어?"

"아니이."

"그것부터 했어야지, 멍청이."

아, 왜 몰랐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꽤 티가 났던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 룸메들은 다 남미새였는데, 가람은 한 번도 남자 얘기를 먼저 꺼낸 적이 없었다.

"와... 진짜 미친 년."

"닥쳐. 혼자 자책하지 말고."

다소 과격하게 위로를 받은 혜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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