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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는 내가 왜 좋아요? (1)

지게차 운전사 청년 X 구청 공무원 아줌마

철컥.

문이 닫혔다. 희영은 유현에게서 온 편지를 들고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벗어났다. 애들 깨면 안 되는데. 출입문에서부터 안방까지의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아이들이 모두 꿈나라로 여행을 간 것 같았다. 안방까지 다 도착하고 나서야 희영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휴...."

유현이 멋대로 보낸 편지였다. 아이들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집으로 보내왔는지 대담하기도 한 유현의 성정을 알다가도 모르겠는 희영이었다. 손으로 또박또박 쓴 우편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받는 이, 박희영.

칼로 편지를 뜯자 안에서 새로운 봉투가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편을 부치기 위한 정보가 아닌 보낸 사람의 이름만 적혀있었다. 서유현 드림.

풀로 붙이지도 않은 작은 봉투에는 짧은 한 장의 편지지만이 들어있었다. 희영이 숨을 길게 쉬었다. 어떤 내용일지 대략 예상 가는 내용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희영은 속으로 다짐한 듯 편지지를 펼쳐 글을 읽어보았다.

'박희영 씨에게. 나는 이 편지를 쓰기까지...'

희영이 편지지를 홱 덮었다. 눈물이 나왔다. 유현은 결국 전하려던 것이다, 자신의 투명한 마음을. 후회스러웠다. 어쩌자고 이런 애랑 엮여서.

편지지 끝에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는 문장이 비춰보였다. 희영은 차마 이 편지를 다 읽을 자신이 없었다. 회피하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유현은 이미 자신의 집으로 이 편지를 떠나보낸 상태였다. 희영이 고인 눈물을 닦고 다시 편지지를 집어들었다.

"안녕하세요-."

구청 사회복지과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희영은 올해로 근속 년수가 20년이었다. 20년이나 한 직장을 다니는 것은 일반적으로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회복지과 공무직으로서는 더더욱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젊은 시절 실수로 가졌던 딸과 결혼 후 남편과 가졌던 아이들 때문에라도 희영은 버텨야 했다. 

나이에 비해 슬하에 둔 자식이 많은 희영을 비꼬는 시선도 많았지만 그런 상사들은 이젠 모두 은퇴했고, 세월이 흐르며 커가는 딸들만큼 행복과 안정감이 더해졌다. 그 사이에 있었던 안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오래 전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정도. 부부 관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으나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한 애도의 눈물도 이제는 말라가고 있었다. 희영에게는 남편의 죽음이 주는 슬픔보다 딸들을 풍족하게 키워내지 못한 아쉬움이 더 중요했다.

'아, 오늘부터 시작이구나.'

그날은 지자체에서 내려온 저소득층 청년 지원 사업을 위해 주소지 점검을 나가야 하는 날이어었다. 원래는 인터넷이나 대면으로 신청을 받고 적절히 선정대상자를 걸러내 그 이후부터 대상자와 연락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워낙 허위사실로 기재하는 사람이 많아 올해부터는 직접 신청가능자와 만나서 주소지를 확인하고 신청 여부를 듣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었다. 즉 요약하자면 담당 공무원인 희영이 더 귀찮아지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동네는 산이 많아서 차량으로 움직이기가 어렵겠는데....'

외근 준비를 마치고 길을 떠난 희영이 도착한 곳은 언덕이 가파르게 서있는 작은 판자촌이었다. 예상대로 도로가 좁아 차량이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착잡해진 희영이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 동네에서 확인해야 하는 거주자는 총 15명. 퇴근 시간까지 하려면 빠듯했다.

"아니 무슨 이런 달동네에 청년이 이렇게 많이 산다는 거야."

언덕을 오르다 지친 희영이 볼멘소리를 냈다. 점점 해는 떨어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이 높은 곳에서 보아서 그런지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희영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집이었다.

"계세요~"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자 문을 두드려보는 희영이었다. 그제서야 안쪽에서 나오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후줄근한 나시 차림의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네? 누구세요?"

"아 저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나왔는데요~."

"아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아뇨, 선생님 이거는 전부 하셔야 되는 거라서, 금방 확인 도와드릴게요."

"안 사요."

쾅. 문이 닫혔지만 굴하지 않고 희영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성함이랑 질문 하나만 대답해주시면 되시거든요-."

두들기는 소리가 거세지자 못이기는 척 나온 거주민이었다. 29세, 서유현, 독거, 세대주. 개인 정보를 확인하고 그제서야 희영은 청년의 생김새를 훑어보았다. 깡마른 체형에 구릿빛으로 탄 피부, 짧은 스포츠컷 스타일에 젊음이 아름다운, 보기 좋은 청년이었다.

"그래서 뭐 하면 되는데요."

얼떨결에 유현을 넋 놓고 쳐다봤던 희영이 다급하게 종이뭉치를 넘겼다. 다른 지역의 주소자들이 목록으로 있었다. 아 이게 아니지, 허둥대며 희영이 종이를 펼쳐 유현에게 건넸다.

"이게, 작년에 혹시 저소득층 청년 사업 신청하셨으면 아실텐데, 올해부터 거주지 확인 후 신청으로 바뀌었거든요."

"그래서요?"

"그래서 선생님이 신청하시면 좋은데 신청하실거면 여기에 서명이랑 동의 체크, 부탁드릴게요."

"아.... 이거 시에서 하는 거 맞아요?"

"아 네. 지자체 복지 사업입니다."

"음흠. 그럼 이거 신청 통과되면 아줌마 또 볼 수 있는 거예요?"

아줌마? 새파랗게 어린 애가 아줌마? 신경질이 났지만 희영에게는 흔한 대접이었다. 좋게 봐줬는데 이거 영 아니네. 희영은 멋대로 불린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또 호칭이 애매한 상대가 고르기가 어려운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아줌마라고 할 수도 있지. 얘랑 나랑 거의 스무 살 차이 나는데. 참자 참아.

"아 저는 박, 희, 영, 주무관이고요. 이 사업 담당자입니다."

"그럼 또 볼 수 있는 거 맞죠? 아줌마."

"네-."

대답에 강세를 주었지만 알아먹을리가 없는 상대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명을 하고 종이를 돌려받는데 손끼리 꼬여서 손이 붙잡혔다 떨어졌다.

"그럼 저희가 전화 드릴테니까 받아주시고요. 안녕히 계세요."

"잠깐만요."

"네?"

이제 일이 다 끝나 퇴근하려는데 희영의 퇴근길을 유현이 막았다.

"혹시 결혼 하셨어요?"

황당한 질문이었다.

"아니요."

"아, 네."

갑자기 결혼 얘기는 왜 물어봐?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희영이었다.

"가세요."

쾅.

저 놈의 문짝은 닫는 소리가 엄청나네. 궁시렁대며 희영이 퇴근길에 올랐다. 저녁 7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야근 수당 따위는 기대도 안 한다, 퇴근이나 일찍하자며 나온 외근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희영은 예상보다 훨씬 늦게 퇴근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희영이 유현을 포함한 사업대상자에게 연락을 돌린 후였다. 갑자기 일하고 있는데 민원인이 희영을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누구지...?'

"아, 아줌마!"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아줌마라고 불려버린 희영이었다. 낯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지만 흔한 진상 민원인이라고 생각하며 희영이 다가갔다.

"주무관님, 그 청년 사업, 담당자 맞으시죠?"

유현을 상대하고 있던 민원실 공무원이 말했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도착한 희영이 유현을 기억해냈다. 그 때 그 달동네. 그 때 그 문짝. 그 때 그 아줌마!

"아줌마. 제가 동의를 안 하고 싶었는데 동의를 한 것 같아서요."

"어떤 거 말씀이세요?"

"거기에 그 휴대전화번호 연락 오는 게 있던데."

"아 그거 없으면 저희가 선생님한테 연락을 못 하잖아요~. 선택 비동의하시면 저희가 서면이나 대면으로 가야돼서요."

"아줌마가 대면으로 오시면 안돼요?"

정말 귀찮게 하네. 내가 그걸 매번 어떻게 다니냐고. 따지고 싶은 희영이었지만 참아내고 교양 있는 어투로 다시 대답했다.

"저희가 선생님 한 분만 지원하는 게 아니라서요, 저희 업무 상 꼭 필요한 동의인데 비동의 하시겠어요?"

"그럼 제 번호 아줌마가 갖고 있어요?"

"선생님 번호는 사업 끝나고 나면 3개월 있다가 폐기 조치 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저도 아줌마 번호 줘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저희한테 연락하고 싶으시면 구청 홈페이지에 사회복지과 대표 번호 있거든요-."

"아줌마 번호 주면 안 돼요?"

이쯤되니 희영은 주변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겠지. 별의 별 진상이 다 있다 진짜.'

그렇지만 시청의 대응이 그렇듯 이런 비폭력적인(?) 민원인은 경찰을 불러 떼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억지로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는 유현을 어떻게 해야하나 곤란해 하는 희영이었다.

"아니면 저 아줌마 보러 여기 와도 돼요?"

"사업 관련해서 궁금한 거 있으시면 아까 말한 대표 번호로 문의 주시거나 이메일도 있고요-."

"찾아와도 되냐고요."

"제가 자리를 비울 수도 있으니까-."

"찾아올게요."

마음대로 그렇게 말하고 떠나는 유현이었다.

희영은 유현 말고도 상대할 사람이 많았다. 그 놈의 청년 지원 사업 말고도 희영이 처리해야 할 일은 많았고 유현이 그 날 멋대로 왔던 것 치고는 아무런 소식이 없던 것이다. 그렇게 희영은 유현을 잊어가나 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꽤 멀끔하게 입고 온 것 같던데.'

희영은 저도 모르게 유현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날의 옷차림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유현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봤던 후줄근한 매무새와는 달랐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유현의 직업은 개인 정보라 함부로 봐서도 안 됐지만 혹시나 확인해보니 어차피 적힌 내용도 없었다.

'뭐하냐.'

괜한 호기심에 쓸데 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희영이 컴퓨터 창을 껐다. 퇴근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오늘 저녁은 뭘 해먹지. 큰 애가 애들 학원 픽업은 했으려나. 맛있는 거 해줘야겠다. 일을 끝내면서도 집안일 생각에 빠져있는 희영은 전형적인 애 엄마였다.

집에 가서 밀린 집안일을 하고 케이블 채널에서 틀어주는 옛날 드라마나 봐야겠다고 결심한 희영이 빠르게 직장을 벗어났다. 간만에 퇴근 시간에 퇴근을 했더니 차가 꽤 막혔다.

'앞에 사고라도 났나.'

좋아하는 통기타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교통 정체의 지루함을 견디는 희영이었다. 버스 차선으로 도착한 엠뷸런스 차량이 옆에 보였다. 구급차 역시 정체된 도로에 발목을 잡혀 사이렌 소리를 크게 울리며 멈춰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가듯 주행한 차량이 앞을 통과하자 진짜 사고 차량이 나타났다. 아니 이 시간에 교통사고가 난다고? 문득 남편의 기억이 떠올랐다. 차들로 가려 누가 실려가는 건지 어떻게 사고가 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차량의 부서진 잔해와 파손된 차량이 확연한 접촉사고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떡해....'

희영은 남편을 보내던 날을 떠올렸다. 아득바득 상주 자리를 지켰던 그날. 직접 장례식을 치르며 슬픔도 충분히 내보이지 못하고 조문객들을 상대했던 그날. 입관 때 직접 본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했다. 그 정도의 사고는 아니겠지? 걱정스러웠다.

그렇지만 단순히 지나치는 행인에 불과한 희영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고 자리를 빠져나오자 정체가 언제 있었냐는 듯 도로가 뚫렸다. 희영은 얼마 안 돼 집에 도착했다.

"엄마 왔다~."

그 날은 희영의 생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생일이 찾아오는 게 달갑지 않은 희영이었지만 여느 때와 같이 평일이었고 업무의 연속이었다. 희영은 전날 밤 자정이 넘어서까지 아이들에게 시달렸던 걸 생각하며 졸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요즘은 생일 파티를 생일 날 자정이 딱 되면 하는 거라며 애들이 준비한 케이크에 초를 불어주느라 늦게 잔 탓이었다.

"오늘 주무관님 생일이니까 주무관님 먹고 싶은 데로 가죠."

"아이, 전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박 주무관이 올해로 그럼 몇 살이지?"

"요즘은 만 나이니까, 아우 계산이 안 되네. 그냥 모른 척 해요."

희영이 맞이한 마흔 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만 나이로 하면 45세이고 옛 한국 나이로 하면 46세인 셈이었다. 행정에서는 이제 만 나이로 통일되었으니 올해 서른이래도 29세로 나올 것이다. 나이 얘기를 하고 있으니 씁쓸해진 희영이 아무렇게나 메뉴를 불렀다.

"오늘 그럼 잔말 말고 카레 먹으러 가요."

든든히 점심 식사를 마치고 희영이 다시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다음 주까지 저소득층 청년 지원 사업이 보고 마감이었다. 차라리 돈으로 지급하는 거면 좋으련만. 귀찮게 또 물품 별 만족도 조사를 한다고 그러네. 청년 지원 사업은 주소지 확인 후 택배로 물품을 지급하고 그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취지야 좋았지만 담당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귀찮아지는 방식이었다.

'이거 계약처랑 다 해쳐먹는 거 아니야?'

청년 지원 사업의 지원 물품 리스트를 보던 희영이 속으로 이죽거렸다. 새로 취임한 구청장이 의욕이 넘치는 건지 뒷돈을 챙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청년들이 과연 반길만한 물품인 건지 공감할 수 없었다.

뚜루루루-.

희영이 다른 대상자들과 전화를 끝내고 유현의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여보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서유현 선생님 연락처 되시나요?"

"아, 네. 왜요?"

"저번에 구청에서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었는데, 청년 지원 사업이라고 택배 받으신 거 있죠~."

"택배요?"

'하... 이래서 만족도 조사는 그냥 어플이나 인터넷으로 시켜야 하는 건데.'

처음부터 일일이 설명하려니 까마득했다.

"저희 그 집에, 선생님 성함으로 도착한 택배 못 받으셨나요?"

"아 제가 지금 바빠서. 잠시만요."

수화기를 막고 뭐라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도 시끄러웠다. 무슨 소리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이 사람.

"아, 네. 집 가서 확인해 볼게요. 택배 언제 온 거예요?"

"2주 전부터 저희가 순차적으로 보내드려서요, 혹시 확인이 어려우실까요?"

"2주 전이요? 그럼 없는데."

'망했다. 택배가 분실된 건가?'

"선생님 혹시 그럼 수령을 못 하신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저희가 다시 물품을 보내드릴까요?"

택배로 물품을 보내려면 3일은 족히 걸릴 것이었다. 다음 주에 보고 마감인데 어느 세월에 만족도 조사까지 끝내? 다시 통화를 돌릴 생각에 스트레스로 머리가 아파왔다.

"아니면 직접 구청에 오셔서 수령하셔도 되고요."

"언제까지 가야하는데요?"

"최대한 빨리 오시는 게 좋습니다."

"음...."

유현이 고민하는 게 들려왔다. 답답했다. 초조해진 희영이 마지못해 마지막 선택지를 내세웠다.

"아니면 제가 직접 전달해드릴까요?"

희영은 유현만 끝내면 업무가 끝이었다.

"아 네. 근데 주소 아세요?"

"선생님 주소가 바뀌셨나요?"

"아뇨. 계속 같았는데요."

"그럼 저희가 찾아갈 수 있습니다."

계속 통화로 실랑이하려니 답답해진 희영이 대화를 정리했다.

"오늘 저녁에 댁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때 계시죠?"

"아, ... 네."

사업 지원 물품은 다행히 구청 창고에 샘플이 있었다. 원래는 업체에 전화해서 택배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건데, 유현 말고는 분실 사례가 없어서 그냥 희영이 새로 가져다 주는 게 빠를 것 같았다. 하던 일을 모두 마무리짓고 희영이 외근에 나섰다.

"또 이 동네네."

차라리 올 때마다 미리 알았으면 신발이라도 편하게 신고 오는 건데. 주차를 마친 희영의 신발은 평범한 직장인용 구두였다. 데자뷰를 느끼며 언덕을 올라 유현의 집에 도착한 희영은 깜깜한 주변에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길에 가로등도 적고 집에 있는 창문도 작아 근처가 어두컴컴했다.

'빨리 끝내고 가자.'

희영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럼 그렇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희영이 신경질적으로 올라오는 짜증을 잠재우며 문을 두드렸다. 꽤 시끄럽게 문을 두들겼지만 안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와, 나 또 허탕 친거야? 분노가 차올랐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이미 손에는 무거운 지원 물품을 들고 온 상태였다.

'그냥 놓고 갈까.'

마음만으로는 그냥 놓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유현이 택배를 유일하게 분실했다는 점이 걸렸다. 이 동네가 원래 좀 택배 도난이 많나? 지원 물품이 청년들이 좋아할 만한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생활에 도움되는 것들이어서 도난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하...."

괜히 죄책감과 책임감이 드는 희영이었다. 저소득층 지원 받을 정도면 생활이 안정적이지는 않을 텐데. 보통 오래 산 노인이 많은 판자촌에 혼자 청년으로 거주하는 걸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연락해보자. 온 김에 만족도 조사까지 바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가망은 없어보였지만 마지막 희망으로 유현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 희영이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웅-. 웅-. 웅-. 웅-.

"엥?"

안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분명히 이 집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안에서 뭐 하나? 집에 있는 건가? 그럼 왜 안 나왔던 거지? 의문들이 희영의 머리 속을 채웠다. 희영이 대문을 잡았던 손을 돌려보았다. 문이 열려 있었다.

"계세...요?"

얼떨떨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희영이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혔다. 좁은 마당이 집의 안쪽까지 훤히 시야를 밝혔다. 자는 건가?

"저기요. 선생님?"

통화는 이미 소리샘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전화를 붙들고 조심스럽게 집 가까이로 다가갔다. 무서웠지만 궁금증이 더 강했다.

"으윽. 들어오셨어요?"

"엄마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희영이었다. 희영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말을 걸었다.

"서유현 선생님 맞으세요?"

"아, 아줌마?"

아줌마? 맞다. 얘 원래 이랬었지. 자신을 반기는 유현의 목소리에 희영은 그동안 있었던 유현과의 대화를 기억해냈다. 걱정했는데 뭐 멀쩡한가보네. 아까는 왜 안 나왔던거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희영이 밖에 놔둔 물품 상자를 가지러 다시 등을 돌렸을 때였다.

콰장창창그르르르!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스테인리스 용기 같은 것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뭘 쏟았나? 안일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희영이 경악했다.

"헉! 선생님! 괜찮으세요?"

유현이 문을 반쯤 열고 쓰러져 있었다.

"어떡해! 괜찮으세요?"

대답이 없었다.

"아...."

신음하는 목소리였다. 아득해진 희영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줌마."

119에 전화하면 구급차가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도 위급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유현의 낙상으로 당황한 희영이 구급대원과 전화를 끝내고 유현을 들쳐맸다. 구급대원은 몇 가지 응급상황인지를 확인하는 질문을 하더니 희영이 가능하다면 직접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추천한 것이다.

희영은 빠르게 지원 물품을 대문 안으로 옮기고 쓰러진 유현을 데리고 언덕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유현은 열 때문인지 의식이 간당간당 했다. 희영은 중간에 정말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어린 애가 혼자 사는데 그냥은 두고 갈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큰 아이와도 겹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낑낑대며 주차한 차의 뒷자석에 유현을 눕힌 희영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 구급대원에게 안내 받은 근처 종합병원의 응급실로 향한 것이다. 도착해서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유현은 몸이 뜨거웠고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보호자 분이신가요?"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앉아있자 간호사가 말을 걸어왔다.

"네? 네."

"지금 열이 높아서 일단 해열제 투여했고요, 열 안 떨어지면 얘기해 주세요."

"네."

뭐 MRI나 CT 이런 건 안 찍어도 되는 건가? 희영은 느긋해보이는 의료진을 보니 별로 심각한 게 아닌가보다, 한편으론 안심됐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청년이었다. 혼자 살면 아플 때 서럽지. 우리 애들도 어릴 때 많이 데려왔는데. 얼떨결에 보호자 신세가 돼버렸지만 그래도 희영은 본인이 발견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집에 가야되는데. 한참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다보니 희영도 슬슬 잠이 왔다. 잠깐만 눈 붙일까. 큰 애한테 문자 좀 하고. 예원아 엄마 오늘 늦게 가니까 먼저 자... 희영이 겨우 문자를 보내고 꾸벅 잠에 들었다.

유현이 의식을 차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퇴근한 다음에 아줌마가 집에 왔었다. 그때 집에서 넘어지고 그 다음엔... 여기 병원인가? 천장의 무늬와 주변을 두른 커튼, 왼손에 꽂린 링거가 여기가 병실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오늘 무리하긴 했지. 귀가 먹먹한 것도 같았다. 아줌마가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내 폰은 안 가져왔나 보네.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지갑형 폰케이스의 휴대폰 화면을 열어보았다. 새벽 2시였다.

카톡 알림과 네이버 밴드 등의 알림이 쌓여있었다. 배경화면은 어린 여자아이 둘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꽃밭 앞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결혼 안 했다고 하지 않았나? 누가 봐도 자식 딸린 애 엄마 같은 폰이었다.

"으음, 깼어요?"

희영이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희영이 유현이 덮어둔 휴대폰을 가져가 시간을 확인했다. 눈만 붙일려고 했는데. 벌써 새벽 두 시였다. 어떡해. 내일 출근!

당황하는 희영을 보자 유현이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내일 일 가는 계획이 틀어진 건 유현도 마찬가지였지만 유현은 자신을 데려온 희영이 신기한 게 더 컸다.

"아줌마가 저 데리고 여기로 왔어요?"

"아후, 네에."

하품하며 희영이 답했다.

'공무원이면 휴가 막 낼 수 있나?'

"내일 뭐 해요?"

"네?"

"내일. 일 하나?"

그러게. 내일 어떡하지? 그 질문은 희영도 갖고 있던 고민이었다. 그냥 연차 낼까. 일 어디까지 했더라.

"저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이제 괜찮으세요?"

"어...."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고민이 되는 유현이었다.

"갑자기 또 아프셔서 놀랐네. 그래도 제가 있을 때 쓰러지셔서."

하아암 하고 희영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중년의 나이란 새벽에 약해지는 것이다.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아. 그래도 다행이죠? 감기예요? 열 나시던데."

"아.... 음."

유현은 일하면서 찬 바람을 맞아서 감기 기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혹시 머리 다친 건지 알 수도 있나요?"

"아, 머리 아프세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유현이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지셨으면 수납하고 이제 갑시다."

"저 지갑 없는데요?"

급하게 나오느라 희영이 유현의 휴대폰도 지갑도 챙기지 못한 것이다. 머리가 아파왔다.

"하... 그럼 제가 대신 계산할 테니까 나중에 보내주세요."

"네."

감사 인사 한 마디 없는 유현이 못미더웠지만 아파서 그러려니 이해하려는 희영이었다. 요즘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아줌마."

"네?"

수납을 마친 희영에게 유현이 말을 걸었다.

"저 집까지 태워다 주시면 안 돼요?"

"네?"

새벽이라 대중교통이 없기는 했다. 이왕 신세 지는 거 뽕을 뽑자는 건지 자기를 호구로 아는 건지 모를 유현이었지만 이왕 호의를 베푸는 거 제대로 돕자, 희영이 생각했다.

"아, 네. 태워다 드릴게요."

어린 애라 그런지 뻔뻔하네. 요즘 애들이라 그런가. 희영은 조수석에 유현을 태우고 이제는 익숙해질 것 같은 유현의 동네를 네비게이션에 찍었다.

유현의 시선이 희영의 네비게이션에 꽂혔다. 자주 가는 길이라는 목록에는 희영의 집과 회사인 구청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줌마 결혼 안 했다고 했잖아요."

조용하던 차 안을 깨고 유현이 말을 던져왔다.

"결혼, 했었죠."

왠지 모르게 불쾌한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유현이 했던 진상짓들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동정을 했던 거람. 호의는 무슨. 돈이나 빨리 받고 일이나 끝내야겠다. 희영이 말을 끝내고 더 말이 없었다.

"아줌마 딸이죠? 폰 화면에."

"네."

유현은 자꾸만 희영이 가시 돋힌 말투로 대답하자 스스로 실수한 건지 걱정하고 있었다. 불안해진 유현이 급히 말을 돌렸다.

"그... 예쁘더라고요, 아줌마 닮아서."

"아,"

갑자기 들어온 칭찬에 희영의 심기가 누그러졌다.

"제 눈에만 예쁜 줄 알았는데. 하하."

"예뻐요."

"그래요?"

기분이 풀린 희영이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같은 애 딸린 여자가 뭐가 좋다고... 남편도 그랬었죠."

옛날 생각이 난 희영이었다.

"그럴 만 한데요."

남편도 그랬다는 말이 거슬렸지만 유현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인걸.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차량은 유현의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유현이 쓰러졌을 때 희영이 가장 가까운 종합 병원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갈 수 있으세요?"

"...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밤이 깊었다. 집까지 언제 가지. 막막한 희영이었지만 내일 출근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가서 자야했다.

"오늘. 감사합니다."

"아녜요, 들어가세요."

속으로 유현이 요즘 애들이라며 욕했던 게 내심 미안해졌다. 그래도 고맙다고 말은 하네. 얼른 집에 가자.

새벽 도로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세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깜깜한 집 안을 통과해 잘 준비를 마친 희영이 하루를 회고해보았다.

'나 닮아서 예쁘다고? 그것도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네.'

젊을 땐 나름 꽤 괜찮다고 생각한 희영의 외모였지만 이제는 나이 들어 다 지나간 세월이라 생각했다. 주름까지는 아니지만 웃을 때 접히는 눈과 입동굴이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어린 청년들에 비해 비교적 건조하고 나이든 피부가 확실히 희영이 40대 중반임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희영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가지는 않은 것이, 또렷하게 반짝거리는 눈빛과 뚜렷하게 날선 코는 여전히 희영의 얼굴을 빛냈다.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을 키워오며 공무원으로 성실히 일 해온 희영의 영혼도 세월에 녹슬지 않았다. 그렇지만 희영은 본인의 겉 모습에 유현이 첫 눈에 반했다는 사실은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던 것이다. 희영의 선한 마음이 유현을 더욱 사로잡았다는 것도 희영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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