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호코즈】 잔향

저는 스리즈부케가 앞으로도 쭉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화원 by 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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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석양빛 조명 아래에서 천천히 잔을 기울인다.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잊을 만하면 생각나는 그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선 이만한 수단이 없다. 이 바에 온 횟수도 어느새 두 자리가 다 되었는데 이 뜨거운 목 넘김은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어 마스터에게 다른 위스키를 부탁하니, 방금 마신 것보다 살짝 연한 색감의 위스키가 눈앞에 놓인다. 양주에는 꽤 무지한 편이지만... 홍차를 워낙 오랫동안 마셔와서 그런지 어느 정도 향의 차이는 느껴진다. 확실히 이전 잔보다 스모키한 향이 적고, 과일 향이 짙은 듯한 느낌. 이거라면 확실히 제대로 음미하며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날의 기억을 억지로 되새기며 한 번 더 잔을 기울였다.

바틀을 바꾼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목 넘김 덕분에 술의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건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바를 찾은 건 술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를 잊기 위함이었으니까. 평소엔 독한 술을 취할 때까지 마셔 고통을 덧씌우곤 했는데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마셔도 마셔도 어지럽긴 커녕 머릿속이 맑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침까지 계속 마실 수는 없으니 슬슬 일어나야겠지. 계산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이 휘청거렸다. 정신은 이렇게 멀쩡한데 몸은 왜... 망가질 거면 둘 다 같이 망가져 달란 말이야. 마스터의 도움으로 겨우 중심을 잡고 계산까지 어찌저찌 마친 뒤 가게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분명 아침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터인데 밖으로 나오니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왠지 평소보다 영수증이 길다 싶더라니... 술기운 때문에 착각한 게 아니라 그냥 많이 마신 거였구나. 귀가하기 위해 심야버스도 아니고 첫차를 기다리는 상황이 올 줄이야. 아직 40분이나 남았으니 술도 깰 겸 조금 걸을까. 방금까지 신세를 지고 있던 바는 해안도로 길목에 위치해 있다. 창가 좌석에 앉으면 바다는 물론 일출, 일몰도 아주 예쁘게 볼 수 있어 외진 곳에 있는 가게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물론 나 또한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 케이스지만... 나는 다른 손님들과 다르게 해가 진 후에 찾아오는 편이다. 사람이 적어 분위기를 즐기기 좋다는 이유도 있지만 해안가의 일몰을 애써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일몰이 아니라 일출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어이가 없어 웃음이 흘러나온다.

도로를 건너 부드러운 모래 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심상에 빠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듯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제 걸을 수는 있구나.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무섭게 느껴졌는데. 이미 몇 년이나 지난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해안가를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다. 그녀의 그 표정을, 차가워진 그 손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서, 지워버리고 싶어도 지워지질 않아서 하루하루가 괴롭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수긍하고 받아들여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모래사장에 디딘 첫걸음이 그 과정의 첫걸음이 되길 바라며 나는 아무도 없는 해변가를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떠올리기 싫지만... 그랬다간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 뻔하니 이겨내야만 한다.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는 없었을 거다. 언젠간 떨어져야 할 사이였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새어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애써 훔쳐 가며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자니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분명 아무도 없었을 텐데...? 빠르게 눈가를 마저 닦아내고 뒤를 돌아보려 하자 익숙한 향이 코 끝을 간지럽힌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대체 어디서 나는 거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향이 날 만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다. 그럼 그렇지. 역시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흥분한 감정을 진정시키고 있던 도중 갑자기 따뜻한 온기와 함께 허리춤에 누군가 팔을 둘러왔다. 조금 전에 느꼈던 인기척의 정체인가...? 만약 그렇다고 해도 왜 갑자기 끌어안는 거지? 아무리 이 시간에 취한 여성이 혼자 거닐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함부로 끌어안는 건 엄연한 범죄 행위다. 따끔한 말을 쏘아주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청아하고 화사한, 활짝 핀 꽃과도 같은 목소리. 머릿속을 꽉 채운 목소리에 겨우 닦아냈던 눈물이 다시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팔다리도 점점 떨려온다. 그녀가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나는 해야만 한다. 울먹거림을 꾹 참은 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겨우 짜내 그녀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며 몸을 돌려 등 뒤의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품에 들어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눈앞에 들어온 건 허공을 감싸고 있는 양 팔 뿐이다. 너무 힘껏 끌어안으려 한 탓인지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그대로 모래사장에 풀썩 엎어지기까지 했다. 그제야 참아왔던 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붙잡지 못한 채 떠나보내 버린 그 이름을 서글프게 외친다. 아직 그녀의 향이 남아 있는 목도리를 더듬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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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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