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호코즈】 악몽
오몽(午夢) : 낮잠을 자면서 꾸는 꿈
기분 좋을 정도의 나른함을 느끼며 눈꺼풀을 살포시 덮고 있자니 어깨 위로 살짝 무게감이 느껴진다.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가 올라와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보랏빛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코즈에 선배? 분명 부실엔 나 혼자였던 것 같은데. 잠들었던 사이 들어오신 걸까... 그렇다고 해도 의외다. 이렇게 먼저 머리를 올릴 사람이 아니니까. 많이 피곤하셨나? 아니면 코즈에 선배도 나처럼 자기도 모르게 잠드신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코즈에 선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가뜩이나 조용한 부실이 더욱 조용하게 느껴진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반쯤 열린 창문에 가끔 부딪히는 바람 소리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코즈에 선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뿐. 자는 모습도 정말 근사하구나, 코즈에 선배는. 아름답고... 귀여워. 아, 지금이라면 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팔 뻗어 머리 한두 번 쓰다듬는다. 부드러워서 기분 좋아. 동생들한테 해주는 거랑은 뭔가 감각이 다르네. 뭐가 다른 걸까... 하는 고민과 함께 멍하니 쓰다듬고 있자니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코즈에 선배."
"응... 카호 씨?"
어깨가 가벼워지자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든다. 눈가 몇 번 부빗거리더니 등받이에 등 기대고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듯한 몽롱한 목소리로 코즈에 선배가 말을 건다.
"혹시, 지금 몇 시니?"
"5시 조금 넘었어요. 슬슬 돌아가야 한다구요, 코즈에 선배."
"살짝 눈만 붙이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그렇네, 일어나야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코즈에 선배였지만, 아직도 잠에 취해있는지 조금씩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코즈에 선배여도 이 시간대의 꿀 같은 단잠에서 벗어나는 건 힘든가보다. 옆으로 나란히 서 손 잡아 이끌어주면 멋쩍은 웃음 지어 보이며 고맙다고 말해준다.
밖으로 나가자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요 며칠간 날씨가 많이 쌀쌀해진 탓에 아직 하복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나 또한 코즈에 선배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나란히 걷기는 커녕 간병만 받고 있었을 거다. 처음엔 '지금 춘추복으로 갈아입으면 분명 더울 거라구요~'라던가, '하복을 입은 코즈에 선배의 모습을 더 이상 못 보게 된다구요!' 라던가 온갖 핑계를 대며 불평하기 바빴지만, 바로 다음 날 아침 연습을 끝내고 나니 춘추복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코즈에 선배의 하복 차림을 못 보게 되어 아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뭐, 코즈에 선배는 어떤 옷이든 잘 소화해내니까 별 상관 없으려나. 그런 생각과 함께 시선을 살짝 옮겨 상상 속 모델을 바라본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옆모습. 당사자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이 소소한 행복을 조금 더 누려봐도 괜찮겠지.
시선이 느껴진다. 모를 리가 없다. 매일같이 항상 곁에서 봐왔던 미소니까. 평소 같았다면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고 먼저 말을 건넸을 것이다. 그러면 카호 씨는 '그냥, 코즈에 선배가 좋아서요!' 라며 활짝 웃으며 답해주겠지. 나 또한 가볍게 미소로 받아주고. 매번 그래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일부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겠다. 카호 씨가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할까, 너무 신경 쓰여서 미칠 것만 같다. 잡고 있으면 따뜻해서 기분 좋았던 조그마한 손보다 그 손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더 뜨겁게 느껴지고, 서로의 발걸음마저 의식하고 있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분명 카호 씨가 위화감을 느껴 괜찮냐고 말을 걸어올 텐데 침착하게 대처할 자신도 없다. 결국 살짝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카호 씨, 미안하지만 먼저 들어가 봐도 괜찮을까?"
"에, 왜요? 혹시 몸 상태라도 안 좋으세요?"
"그런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렴. 그냥... 조금 피곤해서. 왜, 아까도 잠들었잖니?"
카호 씨의 눈썹이 눈에 띄게 아래로 휜다. 분명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거짓말까지 해가며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주는 카호 씨를 뒤로 하고 사부작사부작 낙엽을 밟으며 기숙사로 향한다. 복도를 걷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직접 말을 걸어 걱정해주는 학생도 있다.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애써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답해주곤 방으로 들어가 고개를 돌려 현관의 거울을 보자, 복도에서 왜 그런 시선이 쏟아졌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얼굴이 붉어졌던 적이 있던가? 아마 걱정의 말을 건넨 학생은 이 얼굴을 보고 감기에 걸린 건 아닌가 싶어 그랬던 거겠지. 그나마 오는 길에 메구미나 츠즈리와 마주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가볍게 한숨을 쉬고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홍차를 우리기 시작한다.
"...혹시 카호 씨 앞에서도 계속."
그런 생각을 시작하니 진정되긴 커녕 머릿속에 자꾸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곁에서 매번 지어주는 화사한 미소,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높고 어여쁜 목소리. 요즘엔 아침 연습도 꼬박꼬박 나와서 땀 흘리는 모습도 매일같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엔 고작 카호 씨의 모습을 생각한다고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거나 하지 않았는데... 의자에 걸터앉아 눈 감은 채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발걸음을 옮겨 미리 예열해놓은 티컵에 홍차를 따르고, 테이블 위로 가져와 입술을 가볍게 적시면서 그저 오늘 상태가 조금 좋지 않을 뿐이라는 핑계로 휘몰아치는 머릿속 이미지를 지우려 시도한다.
"꿈은 꿈일 뿐일 텐데."
린도제에서의 라이브가 끝난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준비하는 동안 이런저런 일이 많아 걱정되기도 했지만 결과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워서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메구미에게 듣기론 러브라이브 예선을 위해 업로드했던 영상 또한 반응이 뜨거워서 이 정도면 예선 정도는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너무 자만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이번만은 넘어가 줄까. 나름 도움도 받았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진 탓인지 마시고 있던 홍차도 금세 미지근해졌다. 얼마 남지 않은 홍차를 마저 마시고 자리를 정리하려고 하자, 현관에서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늦은 시간에 누굴까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저렇게 빠른 템포로 두드리는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한 명밖에 없으니 아마 그 사람이겠지.
"카호 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아, 코즈에 선배! 다행이다,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이제 곧 잠자리에 들 참이었단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그게. 괜찮으시다면 지금부터 같이 산책... 하실래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이렇게 어두운데 산책을? 카호 씨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자기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나가는 건 상관 없지만 이대로 나가면 추울 것 같은데.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곤 옷장으로 향해 카디건을 꺼내려 하다가 힐끗 카호 씨 쪽으로 눈길을 돌려 옷차림을 확인한다. 겉옷까지 착실히 입고 왔네. 밖으로 나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듯 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머릿속에 이런저런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둔 채 카디건을 걸친 뒤 기다리고 있던 카호 씨의 손을 맞잡아 현관을 나선다.
"미안, 기다리게 만들었지."
"으응, 괜찮아요. 요즘 쌀쌀하니까요. 겉옷은 중요하죠!"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복 차림이었으면서... 정말 변덕이 심한 아이라니까. 확실히 해가 떨어지기도 했고 밖이 쌀쌀해서 그런지 기숙사 복도에는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1층 정문으로 내려오자 닫힌 문 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살짝 몸을 떨었지만 금세 카호 씨가 팔짱을 껴오더니 붙어있으면 따뜻할 거라면서 그 상태로 정문을 나섰다. 너는 그런 말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이렇게 붙어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옆에서 들려오는 콧노래와 함께 계속 걷고 또 걷는다. 학교로 향하는가 했더니 옆길로 새어서 숲 속으로... 조금 겁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카호 씨가 무언가 이상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닐테니 조용히 따라간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마음도 나름 안정되기 시작해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도착한 곳은 마냥 낯선 곳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카호 씨가 수달에 쫓겨 도착했던 그 공터라는 걸 깨달았다.
"카호 씨... 여기는?"
"기억 나세요? 저희가 처음 만났던 곳이에요. 스리즈부케가 시작된 곳이자... 제 꽃봉오리의 첫 물방울이 떨어진 장소."
"잊을 리가 없잖니. 카호 씨가 학교에서 도망치려다 수달에게 쫓겨왔던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단다."
"그, 그런 건 굳이 말 안해도 되니까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가다보니 서로의 얼굴에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진다. 그냥 여기가 오고 싶었던 걸까? 카호 씨라면 그게 이유라고 해도 별 이상하진 않다. 팔짱을 풀고 공터 중앙으로 힘차게 달려나간 그녀는 양 팔을 힘껏 벌린 채 아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나온 게 아니려나. 아까보다 표정도 한 층 더 밝아진 것 같고. 다행이다,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카호 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똑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무수... 하진 않지만 적당히 많은 별들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다. 망원경으로 보는 천체관측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직접 바라보는 것도 나쁘진 않네. 적당히 거리감도 느껴져서 비교하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듯 별을 수세고 있자니 옆에서 나를 부르는 카호 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냐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여태까지 보고 있었던 달빛이나 별빛과는 색채가 달라도 많이 다른, 온기 가득한 붉은 빛들이 시야를 감싼다. 이건... 양초? 땅바닥부터 시작해 공터에 들쭉날쭉하게 박혀 있는 바위들 위에서도 몇 개의 양초가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고 있다. 영문 모를 풍경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카호 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등 뒤에 숨겨놓았던 흰색 안개꽃 다발을 힘차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코즈에 선배, 좋아해요! 제... 운명의 사람이 되어 주세요!"
"뭐...?"
이게 무슨 상황이지? 고백? 지금 카호 씨가 나에게 고백하고 있는 건가? 눈을 마주치자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심히 흔들린다. 라이브 직전에도 이렇게까지 떠는 모습은 못 본 것 같은데. 2초, 아니... 1초? 그보다 더 짧은 시간. 그 찰나의 시간동안 머릿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 고백을 받아줘도 괜찮을까? 물론 나도 카호 씨를 정말 좋아하고 아끼지만... 어디까지나 소중한 후배이자 같은 유닛의 멤버로서 좋아했던 거지 스스로 연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괜히 서로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스쿨 아이돌 활동도 제대로 못 하게 되면 어쩌지? 다른 아이들에겐 어떻게 말하고...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 카호 씨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전에 제대로 답을 주어야 한다. 나는, 나는...
휘날리는 안개꽃 사이로 눈물 한 가닥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대답해야 한다. 그녀를 울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연심이라는 건 뭐지? 사랑한다는 건? ...그래, 조금 시간을 달라고 하자. 나도 아직 내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데 어찌 카호 씨의 솔직한 마음에 답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카호 씨라면 분명 기다려 줄 거다. 그런 다짐과 함께 안개꽃 사이로 떨리는 손을 뻗는다. 카호 씨의 작고 따뜻한 손이... 없다. 아무것도 없다. 울고 있는 카호 씨도, 공터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던 양초도 전부 사라졌다. 남아 있는 건 내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안개꽃들 뿐이다. 이마저도 바람에 날리고, 땅바닥에 떨어져서... 아무것도 쥐지 못했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꾼 걸까? 정말 내 마음 속의 카호 씨를 향한 연심이 꿈으로 나타난 걸까? 홍차는 이미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다 식어 있었지만 진정시키겠다던 머리는 되려 더 뜨거워지고 있다. 슬 두통까지 느껴지기 시작하는 걸 보아 나는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아직 내 마음에 솔직해지지 못 한 것 같다. 당장 내일도 아침 연습이 있는데 카호 씨를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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