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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림자 (2)

RE: by 세시의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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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

"왜?"

"부모님, 별거 끝내셨더라."

재라가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현은 그 순간동안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차라리 내일 말하는 게 나았을까? 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머니가?"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라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재라가 물었다.

"뵙고 온 거야? 언제?"

"오늘 보고 왔어. 잘 계시더라."

"하아, 계시기야 잘 계시겠지.......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어?"

"괜찮아보였어."

"알겠어, 말해줘서 고마워."

재라는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재현아, 너 아버지 일정 알고 있지?"

"대충은 알아."

"그 일정 좀 나한테 알려줘. 폰으로 알려줘."


재현은 혼돈을 만난 이후 며칠 간 동일한 꿈을 계속 꾸었다.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어린 아이는 재현을 어린 아이 취급하듯 말을 하며 재현을 챙기는 듯한 시늉들을 했다. 그걸 따라가다보면, 재현은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 그 아이를 누나라고 말하며 이리저리 따라다녔다. 모든 꿈은 문이 열리면서 끝났다. 마치 시간에 갇혀버린 사람처럼 말이다. 각각의 꿈 속에서 동일한 사람과 동일한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던 사람은 문이 열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고 꿈에서 한참을 울고 나서야 재현은 꿈에서 깰 수 있었다.


푸른 색의 눈동자는 보름의 상징과도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보름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보름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신월을 찾아내는 건 더 막막했다. 그들은 보름보다 더 이렇다할 특징이 없어보였다. 이화가 이후에 추가로 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재현은 우리에게 까다로운 존재라고 말했던 이화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신월들에게는 정신계열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현은 이화에게 집중치료에 서명한 아이들의 명단을 받았다. 명단에 붙은 사진들을 보며, 재현은 이전에 보았던 아이의 얼굴을 찾았다. 그 과정을, 혼돈의 강림을 버티기만 하면 능력 발현이 안 되는 상황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게, 재현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사실 재현에겐 혼돈의 존재조차 거짓으로 느껴졌다. 재현이 물었다.

"아버지, 정말로 혼돈께서 능력 개화를 도와주세요?"

"그래, 선례들이 있었어. 옛기록에도 나와 있고. 그분들의 본질은 혼돈이니까, 혼돈만이 그 안의 질서를 알아보는 법이지."

"병동에 있던 애들 중에서 퇴원한 아이들도 있나요?"

이화는 기억을 더듬는 사람처럼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이화가 대답했다.

"궁금하면 명단에서 찾아주마."

"......아뇨, 그러시진 않아도 돼요."

재현은 마치 불경한 짓이라도 저지른 것마냥, 이화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종이로 얼굴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네가 아직 그 분들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뵌 건 몇 번 안 되잖니. 그리고 그들도 아직 힘을 쓰는 데에 제약이 많아."

이화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도와드리는 것이고."

"도와드리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겠지. 우리가 지금과는 다르게 더욱 더 대접 받는 세상 말이다."


재현은 다시 혼돈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혼돈은 어린 아이들의 몸을 빌려 이화와 말을 하고 있었다. 혼돈이 재현이 온 걸 눈치 채고 살갑게 인사해왔다.

"안녕, 이화 아들."

혼돈이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이제는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하나?"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더 좋겠지요."

"안녕하세요, 혼돈님."

"좋은 소식 있어?"

"죄송하지만...... 아직 없습니다."

"괜찮아, 난 기다리는 거 잘해. 그러니까...... 인간의 기준으로 말이야."

혼돈은 재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너도 마냥 평범하진 않구나."

"네?"

"아직은 내 차례가 아니어서 자세히는 말해줄 수가 없네."

혼돈은 갑자기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의자에서 바닥으로, 풀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옅었다. 재현이 아이를 안고 내달렸다. 재현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정신은 혼란스러웠고,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그게 내달린 탓인지, 아니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이의 약해져 가는 숨을 느껴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 이화는 사이람들이 좀 더 대접받는 세상을 원했다. 그건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사이람을 사람이 아닌 괴물로 보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재현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애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렇게 해야할까?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숨은 다행히 끊어지지 않았다. 재현은 안도를 느꼈지만, 손은 계속 떨려왔다. 재현이 주먹을 쥐었다.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길 바랐다. 재현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거울이 벽에 붙어 있었다. 왜 이런 곳에 거울이 있을까. 재현이 주먹을 쥔 채 거울 가까이 다가갔다. 재현은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이 거울 반대편에서 자신을 보는 것을 느꼈다. 재현의 시선을 따라 거울 속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재현은 한참동안 거울을 바라보았다. 간호사가 재현을 부르기 전까지 말이다. 간호사가 본 재현은 아까보단 한결 편안해 보였다.

재현은 그제야 명단에 써져 있던 말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는 혼돈을 버틸 수 없어서 당장의 강림을 유예한 애들은 어쩌면 운이 좋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인 이화 앞에서 내내 무표정했던 재현의 얼굴은 집에 도착하자, 점차 일그러져 갔다. 정확히는 무너져 내렸다가 맞을 터였다. 재현은 오늘만큼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짓을 하는지 명확하게 안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그 일부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형인 재라도 이걸 봤을까? 재라는 자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그러니, 아마도 보지 않았을까?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재현은 샤워를 하는 내내 그 모습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재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 모습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린 생명이 천천히 꺼져가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던 아버지의 모습도.

꽃이 그냥 피겠냐, 다 자기 살을 깎아가며 피어나는 거지. 얘네도 마찬가지고. 개화가 되어 더는 아프지도 않고, 능력도 생기면 서로 좋은 거 아니겠니?

대체 그게 왜 중요한 건데요? 재현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보름을 찾는 거야. 볕거미를 위해 준비된 몸이니까. 보름만 우리와 함께 해준다면 걔네가 이렇게 힘들어할 이유도 없지.

달이 햇빛을 받아 빛을 내는 것처럼 보름은 볕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었다. 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그랬다. 그릇은 원하는 걸 담고도 깨지지도, 모양이 변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것이 부합하는 건 오로지 보름 뿐이었다.

재라는 오랜만에 해가 뜬 시각에 퇴근했다. 해가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해가 길어진다는 건 좋은 의미였다. 더워지는 건 그닥 반길 수 없었지만 말이다. 재라는 기분 좋게 자기가 일하는 카페에서 만드는 케이크 두 조각을 포장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오페라 케이크와 동생인 재현이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를 들고, 기분 좋게 퇴근 인사를 나누며 재라는 근무지에서 퇴근했다.

오랜만에 노을을 맞으며 퇴근하는 기분은 꽤나 좋았다. 집에 들어가서 죽상이 된 동생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재현은 재라가 오길 기다린 것마냥 현관 앞에 서서 재라를 불렀다.

"형."

재라가 재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화가 집에 있는 거 같지는 않았다. 재라가 안에서 이야기하자 손짓했다. 재현이 재라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형은...... 어릴 때 어떻게 아버지 밑에서 있을 수 있었어?"

재라가 움직이던 걸 멈추고 재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재라의 눈동자만 재현의 표정을 읽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라가 입을 열었다.

"너 여태 아버지랑 있었어?"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라는 이런 자신을 이해해줄 것 같았다. 재현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

"이해하고 싶은데, 이해할 수가 없어......."

아버지가 그리는 미래에는 아픈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거 같았다.이화에겐 그 아이들이 운이 좋으면 그 미래에 함께할 테고, 아니면 딱히 아쉬울 것도 없는 아이들인 거 같았다. 재현은 그 지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망에 가까운 재현의 감정은 재라가 능력을 굳이 쓰지 않고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재라가 재현을 나무라는 투가 나지 않도록, 말과 목소리를 조심하며 물었다.

"아버지가 뭘 보여줬어?"

재현은 죄가 없었다. 재라는 그걸 알고 있었다. 죄라고 하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아버지 뒤를 따라간 게 다였다. 그걸 뭐라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하다는 걸 재라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라는 그걸 가지고 혼내는 순간은 지금이 아니라 다음을 택했다. 재라가 다시 말했다.

"재현아, 아버지가......."

재현이 재라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혼돈."

재현의 대답에 재라의 표정이 굳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 동안 재현은 재라 역시 자신과 같은 걸 보았을 거라 확신했다. 재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당장 그만둔다고 해."

"어린 아이들이 혼돈을 못 버티고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것도 봤어."

재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화는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게 없는데도, 재현은 아버지를 쫓아갔고, 어머니도 결국 이화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체 왜?

"너......."

재현이 두 손 아래로 숨었던 얼굴을 드러내었다. 재현은 지쳐보였다.

"나도 그렇게 될까?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말하는 대의를 따르다보면 나도 아버지처럼 될까?"

재라가 재현을 달래듯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거 알잖아."

재현이 어떻게 듣든, 재라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만을 말했다. 재라가 말을 이었다.

"너 그 일, 당장 그만 둬. 알겠지?"


셀, 별 일 없냐? 네 고민을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았다.

셀은 영현의 문자를 보고 바로 영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현이 전화를 받자, 셀이 반갑게 영현을 불렀다.

"아저씨!"

"그래, 셀."

못해도 한참은 더 걸릴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큰 성과가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영현이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했기에 셀은 더더욱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낼 수가 있었을까? 셀이 웃으면서 말했다.

"금방 찾으셨네요? 어떻게 찾으셨어요?"

"운이 좋았다. 아는 사람 중에 너랑 비슷한 능력을 구사하는 사람과 연이 있는 사람이 있었어."

"감사해요! 그러면 약속은 언제로 잡을까요?"

"너만 괜찮으면 네 퇴근 시간 후에 보는 게 어떻겠냐. 그 사람 사무실이 네 집에서 별로 먼 곳에 있진 않더라."

셀이 옆에 놓인 탁상 달력을 보며 영현과 날짜를 잡았다. 퇴근 시간이면 많이 막힐 거 같은데, 영현은 계속 여기까지 올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워댔다. 셀에겐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셀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마지막으로 영현에게 물었다.

"정말 올라오시는 거 괜찮으시겠어요?"

"네 일인데, 당연히 올라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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