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림자 (1)
재현은 아버지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버지, 이화는 지금 그곳에 있었다. 재현은 자신이 입은 재킷을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심호흡을 했다. 올 때 몸을 단정히 하고 오라는 이화의 말이 있었기에, 재현은 조금 더 자신의 몸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재현은 이곳에 올 때마다 병원에 이런 곳을 숨겨놓은 이화의 의도가 신기했다. 그리고 왜 병원이 이런 곳을 병원 안에 만들어두는 것을 허락했는지도 신기했다. 물론, 단순히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기도를 올린다는 측면에서 생각을 해보면, 별 다를 게 없었다. 요즘엔 모든 종교를 위해 병원에서 기도실을 만들어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유명한 종교도 아니고…… 사실, 종교라 보기도 애매한데 말이다. 재현은 이곳을 들락날락 거릴 때마다 드는 이 의문을 좀체 지워낼 수가 없었다.
재현은 익숙한 듯, 재현은 병원의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 적힌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재현을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났다. 병원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리 길 것 같지 않은 복도는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복도의 끝에는 오래된 철제문이 재현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래된 철제문 앞에서 재현은 위압적인 기운을 느꼈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위압감. 평소와는 다른 감각에 재현은 심호흡을 한 번 더 했다. 재현은 자신의 앞에 있는 오래된 철제문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금방 왔구나."
"급하다고 하셔서 바로 왔어요."
재현의 말에 이화가 조용히 웃었다. 이화는 재현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재현이 이화의 옆으로 가서 서자, 이화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어린 아이가 이화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표정이며 자세는 어린이보다는 어른에 더 가까워보였다.
"네가 그 때 그 이화 아들이구나? 많이 컸네."
아이의 말에 재현은 먼저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신재현입니다."
하지만 재현은 상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재현은 자신이 기억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앞에 있는 어린 외형의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재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혹시 누구실까요? 제가 너무 어릴 때 뵈어서 기억이 안 나서요."
재현의 말에 아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재현은 앞에 있는 사람이 나이를 먹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어린 외형을 한 채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자신을 속일 만한 이유도 없었다.
"아마 기억을 못하는 게 맞을 거야. 그렇지, 이화?"
"네, 그렇죠. 제대로 만난 적은 없으니까요. 재현아, 이 분이 볕거미 중에 한 분이신 혼돈이시다. 네가 어릴 때 종종 강림하셨었다."
아, 이화가 항상 말을 전해줬던 그 존재였다. 재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괜찮아. 그나저나 이화를 쏙 빼닮은 게 마음에 들어. 어릴 땐 엄마인 소영을 더 닮은 것 같았는데......."
재현이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혼돈을 담은 아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혼돈이 말했다.
"보름을 찾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맞니?"
재현 대신 이화가 대답했다.
"네, 찾는 중인데...... 아무래도 세 명을 전부 찾는 게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신월을 먼저 찾아 봐, 웬만하면 보름들 옆에 있어. 어디 숨어서 지내는 애들 말고, 사람들 틈에 섞여서 지내는 애들 중에서 찾아야 해."
재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현이 말했다.
"신월…… 이요?"
신월이라면, 초중고 국어 시간에 전설에서나 나오던 존재였다. 재현은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달에게 충성을 맹세한 개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기억했다. 얼빠진 듯한 재현의 질문에 혼돈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 성질 더러운 애들 있어. 혹시 모르나?"
혼돈의 시선이 이화에게로 넘어갔다. 이화가 대답했다.
"이제는 전설처럼 내려와서요."
"여전히 존재는 하지?"
"네, 존재합니다."
"그래, 그렇게 찾아봐. 그러면 좀 더 누가 보름인지 특정하기 쉬울 거야."
"말씀 감사합니다."
"네가 빨리 찾아야, 나도 고생을 덜 할 수 있어서."
혼돈은 잠시 눈을 감았다. 혼돈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 몸은 더는 못 버틸 거 같네. 이화, 찾아온다고 고생했어. 이화 아들은 나중에 또 봐."
그 말을 끝으로 어린 아이는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혼돈과 가까이 있던 재현이 아이를 받아 들었다. 재현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화를 쳐다보았다. 이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가자, 아이를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줘야지."
"어디서 온 아이인데요?"
"사이람 소아병동에 있던 아이야. 치료를 빌미로 여기까지 데려왔지."
"... 치료를 빌미로요?"
재현의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아까와 같은 표정을 아이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재현은 왜 이화가 강림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왜, 기프트들 중 능력 발현이 막혀 아프기만 아프고 제대로 발현은 못하는 아이들이 있지않니. 그런 아이란다."
이화가 말을 덧붙였다.
"운이 좋으면 더는 아프지 않겠지. 바쁘지 않다면 같이 가자구나. 좀 더 설명해줄 것도 있고."
재현은 아이를 데리고 이화를 얌전히 따라갔다.
"혼돈이 강림하면 때때로 문이 열릴 때가 있단다. 그걸 우리는 개화라고 표현하는데, 그로 인해 능력 발현이 막혀 있던 사람이 능력이 발현되며 통증이 사라지곤 해. "
재현은 이화의 뒤를 따라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화는 재현이 들어왔던 곳과는 다른 통로를 통해 이동했다. 그 뒤에는 어린 아이들의 병실이 줄지어 있었다. 병실에는 한 명에서 두 명 정도의 아이들만이 있었고, 대개는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화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아이들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우리는 혼돈과의 접촉을 위해 아이들을 데려오는 거지."
"여기 있는 애들 중에 일부가 선택되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부모가 집중치료에 동의한다고 한 애들 중에서 혼돈님과 반응률이 높은 애들만 데려간단다. 네 품에 있는 아이가 그 중 한 명이었고."
이화가 마지막에 나타난 병실의 문을 열어 재현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안에서는 간호사가 대기 중이었다. 간호사는 이 일이 익숙한 듯, 질문 하나 없이 재현에게서 아이를 받아 침대에 눕힌 뒤, 기계처럼 자신이 할 일을 했다. 간호사가 말했다.
"문제 생기면 알려드릴게요."
이화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재현을 이끌고 병실 밖으로 나가, 바로 옆에 있는 코너를 돌았다. 재현이 이화를 따라가며 물었다.
"문제가 생길 때도 있어요?"
"많지는 않지만…… 가끔 버티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어서. 이번 친구는 어떨지 모르겠구나."
이화의 말에 재현은 다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알아봤자, 좋을 게 없을 거 같았다. 재현은 이화와 발을 맞춰 걸어가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왜 보름을 찾는지 정확하게 설명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아버지."
"아, 그건 다른 곳에서 이야기 하자. "
이화는 재현과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내내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재현도 더는 딱히 질문하지 않았다. 이화가 밖에서는 혼돈과 관련된 주제를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게 역력히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화가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집으로 가자. 생각해보니, 신월에 대한 것도 말해줘야 하니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거든."
재현이 운전석에 올라타, 이동할 준비를 하며 대답했다.
"그건 차에서도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 김에 소영이도...그러니까, 엄마도 보고 가."
이화의 말에 재현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다시 합치신 거에요?"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소영이한테는 자주 보러 갔다며?"
"그야......."
재현은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느라 말을 흐렸다. 재현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까이 계셨잖아요. 그러라고 그 근처 아파트 잡아주신 거 아니었어요?"
이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현은 가만히 있다가 운을 띄웠다.
"저 그래도 이제 운전 좀 잘하지 않아요?"
"많이 늘었네."
재현은 이화의 대답이 그리 마음이 담긴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만,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재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조용했다. 재라는 아직 아르바이트가 끝나지 않았는지, 집에 온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재현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았다. 재현은 아버지가 평소와는 다르게 왜 혼돈을 자신에게 보여주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보름을 찾는 게 더뎌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가장 강하게 들었지만, 정말 그런 거였다면 평소처럼 이화가 혼돈의 말을 전달해도 괜찮았을 터였다. 아니면 일부러 신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식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재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이화가 했던 이야기와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들어온 정보가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화는 볕거미들의 그릇으로는 보름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재현에게 일러주었다. 그래서 보름을 찾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어린 사이람들인데, 이들은 몸을 빌려주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아까와 같은 일이 있었던 거고, 이 때문에 혼돈, 그러니까 볕거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조금의 어려움이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혼돈이 보름을 빨리 찾아야 자기도 편하다고 한 것이었고……. 그리고 신월. 재현은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월은 그저 전설로만 내려오는 이야기 아니었던가? 분명 어느 산에 있는 개, 혹은 늑대로 보이는 석상에 대한 이야기가 내려왔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월이라는 존재가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게다가 보름의 옆에 있다면, 어쩌면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신월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돈도 이화도 어떻게 신월을 알아볼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그저 성가시고, 까다로우며, 성질이 더럽다는 험담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정확하게는 이화는 재현에게 신월은 우리에게 까다로운 존재라고만 언급했다.
재현은 이를 재라에게도 물어보고 싶었다. 재라도 이런 존재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지 궁금했지만, 재현은 재라에게 아버지와 함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재라는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험악해졌고, 남보다 못한 사람처럼 이화를 대했다. 저번에도 우연히 마주쳤을 때, 재현은 그 둘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재현은 이화에 대한 재라의 생각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재라가 누누히 재현에게 그와 가까이 지내지 마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재현으로서는 재라의 그 말만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를 이해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재현은 재라의 충고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저, 재라가 아버지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도어락이 삑삑 하고 눌리는 소리가 현관으로부터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재현의 방쪽으로 발소리가 나더니 노크 소리가 두어 번 난 뒤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자, 재현이 눈이 부신 지 눈살을 찌푸렸다. 문이 더 열리자, 그곳엔 재라가 서 있었다. 재라가 말했다.
"너 불도 안 켜고 뭐하고 있냐?"
"아...... 깜빡했어. 그나저나 늦게 왔네?"
"오늘 대타까지 뛰어주느라 좀, 늦었어. 밥은?"
"난 먹었어."
재라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래? 나만 먹음 되겠네. 알겠어."
재라의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가려는 재라를 재현이 불러세웠다.
"아, 형."
"왜?"
"부모님, 별거 끝내셨더라."
재라가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현은 그 순간동안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차라리 내일 말하는 게 나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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