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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제 그만할까? (2)

RE: by 세시의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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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은 침대에 누운 채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또 생각 나네! 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셀은 서진과 결국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사귀자고 한 뒤가 더 자기는 더 어색했던 것 같았다. 다행히도 서진은 크게 눈치를 못 챈 거 같았지만 말이다.

"우리 내일도 보는 거지?"

"뭐? 내일? 어, 어…… 내일 봐도 되지."

"어디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집으로 갈까?"

"…… 그건 내일 정해도 되지?"

"네 편한대로 하자."

밖에 있는 게 더 좋을까, 아니면 집에서 만나는 게 더 좋을까? 너무 엉겁결에 고백을 받아주었나? 아냐, 잘 받아주었잖아. …… 젠장! 셀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셀은 아까 있었던 일들이 끊임없이 계속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밤을 홀라당 새버리고 싶지는 않은데. 셀은 다시 자리에 곱게 누웠다. 셀은 오늘 일어난 일이 좀체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정말 서진과 연인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셀은 여태 서진이 했던 행동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서진은 다른 사람에게도 못되게 굴거나, 무심하게 대했던 적이 없어서 정말 자신에게만 유달리 잘해주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사실에 셀이 놀라 이불을 뒤집어 썼다. 셀은 서진에 대한 자신의 감정 때문에 착각했다고 생각했던 서진의 행동들이 그게 아님을 깨닫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이불을 꽉 쥐며 웅얼거렸다.

“으으, 이러면 잠이 더 안 오잖아.”

다시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곱게 자긴 그른 모양이었다. 셀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선반을 뒤적거려 집에 남아 있던 차를 발견했다. 셀은 전기포트에 물을 얹은 뒤, 티백을 하나 꺼내 미리 컵 안에 넣어놓고 물이 끓기만을 기다렸다.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셀은 서진을 생각했다. 서진도 지금 잠을 설치고 있을까? 셀은 연락을 할 지 고민하다가 스마트폰으로 서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기가 무섭게 서진이 읽었다는 표시가 뜨더니,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안 피곤해? 왜 아직 깨어 있어?“

서진의 답에 셀은 차마 서진 때문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셀은 서진이 자신의 머릿속을 완전히 뒤흔들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잠이 안 오네.”

셀은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어딘가 평소답지 않아 보여서 셀은 답을 추가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물이 다 끓자, 셀은 따뜻한 물을 컵에 부어 티가 잘 우러나오게 했다. 그리고 적당히 찬물을 섞어 마시기 편한 온도로 만들어 차를 홀짝였다. 캐모마일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이것만 다 마시면 잘 수 있겠지. 셀은 그렇게 생각했다. 셀은 창문 가까이 다가가 블라인드 사이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이었다. 그리고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하늘이기도 했다. 셀이 다시 휴대폰을 보자, 서진이 커피는 오후 세시 전까지만 마시는 게 좋다며 평소처럼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은 메세지가 보였다.

“으, 잔소리.”

셀은 서진에게 이제 좀 졸린다는 답을 하며 이만 잠에 들겠다고, 잘 자라는 진심이 담긴 거짓말을 남겼다. 하지만 정말 곧 잘 거야. 곧 잘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셀이 따뜻한 차를 홀짝거렸다. 기분 좋은 온도의 차가 부드럽게 목 뒤로 넘어가 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재라는 평소답지 않게 고전영화를 보고 있었다. 재라에게 고전영화는 너무 지루해서 딴 생각을 하기엔 아주 적절한 영화였다. 그냥 안 들어도 아쉽지 않을 소리가 필요할 때, 재라는 고전 영화를 틀어놓고 다른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재라는 어떻게든 동생을 아버지로부터 떼어놓고 싶었다.

재현을 이화로부터 떼어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재현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화가 얼마나 쓰레기같은 사람인지를 깨닫기를 기다리는 거였다. 재라는 재현이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와 붙어 지내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적어도 재라가 이화의 일을 배울 때에는 이화는 재현에게 잘 대해주었으니까. 그러니 재현이 아버지와의 시간을 더 가지고 싶어하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재현의 이야기를 미루어볼 때, 재현은 이미 재라, 자신이 아는 만큼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화가 사람들 뒤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그것으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재라는 하나 뿐인 동생이 크게 다치지 않기를 바랐으나, 재라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려면 재현은 마음을 꽤나 크게 다쳐야만 했다. 아버지란 존재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크나큰 배신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했다. 그 둘을 강제로 떼어놓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는 걸 재라는 잘 알고 있었다.

늦은 시간, 재현은 이화와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웬일로 재라가 거실에 앉아 조용히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재라는 재현이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재현을 쳐다보았다. 재라가 밝게 말했다.

“왔어?”

“웬일로 이 시간에 깨어 있어, 형?”

“근무 일정 바뀌어서, 내일 쉬는 날이거든. 주말에 쉬는 건 오랜만이라 안 하던 짓 좀 해보려고.”

재현이 작게 웃으며 수긍했다. 재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물을 가득 따른 뒤, 재라의 옆에 가 앉았다. 재현이 물에 비친 TV 불빛을 보며 말했다.

“형, 나 아버지한테 말씀드릴까봐. 더는 못하겠다고.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잘 생각했어. 분명 다시 회유하려고 할 텐데 절대 넘어가지마."

역시 재라는 재현의 생각을 지지해주었다. 재현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형한테 다시 가시진 않겠지?"

재현의 말에 재라가 코웃음을 쳤다. 재라가 빈정거렸다.

"나한테 올 바엔 혀 깨물고 죽을 걸."

"형……."

재라가 절대 아니라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너무 걱정하지 마.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알아서 하겠지. 제일 쓸데 없는 걱정이 아버지 걱정하는 거야."

재라의 말에 재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어지러운 재현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재현이 말했다.

"아, 형. 궁금한 게 있는데."

"응."

"형도 아버지한테 신월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신월이라는 단어에 재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재라도 신월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재라는 이화가 말한 것말고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도 있었다. 재현은 아마 당장은 이화가 말한 부분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게 다일 터였다. 보름의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것과 정신계열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로만 말이다. 재라는 자신의 능력을 써서 재현이 뭔가 더 숨기고 있는 게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뭔가를 숨길 때 나타나는 초조함이라던가 불안함 같은 건 재현에게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재라는 자신이 어디까지 알려줘야 할 지 고민했다. 어차피 그만 둘 거라면, 필요 이상의 정보는 재현에게 불필요했다. 재라가 말했다.

“이야기 하신 적 있어. 넌 그만두는 마당에 그런 게 궁금해?”

"궁금할 수도 있잖아."

"네 친구한테 물어봐."

재라의 말에 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친구? 누구 말하는 거야?"

"그, 연화 연구소 다닌다는 친구 말야. 거기가 신월 전문 연구하는 곳이잖아."

유진에 대한 이야기였다. 재라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재현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현이 물었다.

"난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형은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만났을 때 이것저것 물어봤었어."

저번에? 재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라가 말을 이었다.

"저번에 너 따라서 잠시 우리 집 왔었을 때 말야. 그때 쿠키 구웠던 거 좀 준다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하더라. 걔는 그런 거 잘 안 먹어?"

재현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재현은 유진이 딱히 뭘 맛있게 먹는 걸 본 기억도 없는 것 같았다. 재현이 답했다.

"어…… 원체 잘 안 먹지."

"그래? 어쩐지 말랐더라, 사람이."

“그래서 안 받아갔어?”

“안 받아갔어. 다음에 만나면 꼭 줄테니 받아가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요새 통 안 보이네.”

재라의 말에 재현이 쿡쿡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중에 유진을 보면 형에 대해 물어보아야겠다 싶었다. 유진이 재라를 어떻게 표현할 지가 궁금했다. 재현이 대답했다.

“그래, 유진이한테 물어볼게.”

재현은 고전영화를 쭉 보다가 재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 이거 재밌어서 보는 거야?”


"아, 입단속을 철저히도 했나보네."

아니면 본 사람이 없거나. 영현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영현은 이내에게 이화가 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보겠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뭐가 안 나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엄한 사람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영현은 셀이 했던 말이 걸렸다. 그리고 그때 기억을 지울 만한 사람은 이화 밖에 없었다.

영현은 셀과 서열을 찾아갔던 날, 셀을 먼저 보내고 서열과 추가로 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때 서열도 기억조작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었다.

"기억 조작한 사람을 만난다면 알 수 있겠죠."

"못 만나면 평생 모른다는 건가요."

"확률이 적은 거죠. 셀리엇 씨는 일단 자신이 그런 걸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잖아요?"

서열이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꽤 차이가 크답니다. 셀리엇씨가 그 기억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그게 이전처럼 얌전히 그 자리에 있을 거란 보장이 없어요."

"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다시는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버릴 확률도 있고...... 혹은 당사자가 도끼로 깨부숴버릴 수도 있죠. 자기 의지로요. 저도 이런 기억은 잘 모르지만 숨은 기억이라는 전제 하에서는 비슷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야기 감사합니다."

"필요한 일 생기면 나중에 또 찾아오세요."

"사서열씨도 나중에 경호 업무가 필요해지시면 저한테 연락주세요."

"은퇴하셨잖아요?"

"은퇴했다고 해서 괜찮은 회사를 알려드리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네, 감사해요."

영현은 이화가 데리고 있던 아들들이라면 뭔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를 기억할 거 같은 큰 아들은 연락처를 모르고, 작은 아들은 그 일을 기억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들은 게 있을 수는 있지 않을까. 영현은 이화의 작은 아들에게 시간 될 때 연락하라는 통보식의 연락을 남겼다.

이화가 철두철미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영현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의 아들들도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를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영현은 다시 이화와 손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이내도 그렇게까지 하기를 바랄 거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드러내면 드러냈지, 사람 하나를 잡기 위해 남의 손까지 더럽히는 건 원치 않는 사람이었다. 한결에게 사람을 빌릴까? 하지만 한결이 그렇게 쉬이 사람을 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영현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다 업보가 아니면 뭐겠는가. 영현은 한결이 아끼는, 소위 한결이 제자라 일컫던 사람들 일부를 망가트린 전적이 있었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다. 몇 번 그런 일을 겪은 뒤, 한결은 더는 영현에게 사람을 쉽게 내어주려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잘 설명하면 어떻게…… 한결을 잘 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현은 늦은 시간임에도 한결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한결은 답을 안 하지는 않는 사람이니, 자기가 내키는 날 연락을 해올 터였다. 기다리는 것쯤이야. 영현은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렇지 못했지만, 아주 긴 시간이 영현을 그런 사람으로 빚어내었다. 영현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쉰다고 말하기 무섭게 일이 이렇게 터지냐……."

영현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입이 방정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어 낸 건지, 원. 영현은 자신이 은퇴 번복을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애들 몇 명만 어떻게든 빌리는 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사람을 빌리려면 그에 맞는 대가가 있어야만 했다. 영현이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걸 위해서 겨우 긴 휴가를 반납하는 거라면야, 해야하지 않을까. 어차피 제대로 쉬는 법도 모르는데. 영현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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