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실로 (2)
“그렇지 않아도 뭔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셀의 말에 영현의 포크질의 속도가 느려졌다. 영현이 눈썹을 부드럽게 세우며 궁금증을 표했다. 셀이 말했다.
“제 능력, 언제 발현되었는지 아세요?”
영현은 잠시 포크질을 멈추고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셀에 대한 기억 쯤이야, 영현은 자신이 아는 것 내에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셀의 질문에 좀 더 정확한 대답을 주고자 영현은 자신의 기억을 좀 더 살폈다. 셀의 시선은 움직임을 멈춘 영현의 포크에 가 있었다. 셀은 영현이 이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영현이 자신의 유년기를 다 본 것도 아닌데다, 셀도 그때의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였다. 셀은 그때의 기억이 분절처럼 끊어져 있었다. 다른 일반인들처럼 모든 걸 기억하지는 못했다. 영현이 말했다.
“글쎄다, 정확히는 모르겠구나. 그래도 너네 아버지가 신이 나서 말했던 걸 생각하면…… 네가 5살이나 6살 정도 되던 때였던 거 같은데. 그놈이 네가 네 능력으로 기억을 보여줬다고 엄청 좋아했었지.”
영현은 옛추억에 잠겨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현은 어린 셀과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던 셀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 품에 안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던 어린 셀과 셀의 작은 손을 함께 흔들어주던 그의 친구도 떠올렸다. 셀이 물었다.
“그러면 그 사건 이후인가요?”
“교통사고를 말하는 거니? 아마, 그 전일 거다. 그러면…… 다섯 살 즈음이겠구나."
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현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무래도 발현 시기와 맞물려서 능력이 안정적으로 발현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더러 있었기에 그때의 기억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워낙 어릴 때 발현하기도 했어서 기억 능력이 꾸준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게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어릴 땐 원래 다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능력 발현 시기를 기준으로 잡는 게 아니라, 능력이 안정된 시기를 기준으로 잡아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셀은 자신이 왜 그 시기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지를 알 수 없었다. 남들도 자신의 능력 발현 시기는 꽤나 선명하게 기억하던데, 왜 정작 기억 사이람인 자신은 자신의 기억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셀은 이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영현이 이어서 말했다.
"갑자기 이게 왜 궁금해진 거냐? 어릴 땐 크게 관심도 없었으면서.”
셀은 영현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영현은 셀이 교통사고의 전말을 파헤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이걸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걸. 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영현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셀은 최근에 겪은 일을 영현에게 설명했다. 이내에게 교통사고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고 이내가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영현에게 털어놓았다. 영현의 표정은 사고 이야기를 꺼낼 때만 조금 일그러졌으나, 이후에는 셀의 말을 자르지 않고 찬찬히 들어주었다. 셀은 자신의 기억과 담당형사와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과 누락된 증거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함께 늘어놓았다.
"어릴 때니까, 처음에는 아무래도 능력이 불안정해서 제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속 관련자료를 보고, 확인하고, 찾아보았는데...... 그 분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그래, 그 당시에 네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어릴 때니까 불안정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영현이 나긋하게 셀의 끝말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진술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누가 개입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 나이에 경찰서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으면, 저 같은 사이람이 아니어도, 평범한 사람도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 기억은 남아 있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영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영현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 머리를 조금 식히는 게 어떻겠냐?"
셀은 영현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셀은 영현이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꺼낼 거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이런 거로 말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셀이 입을 열려고 하자, 영현이 멈추라는 듯 손바닥을 들었다. 영현이 이어서 말했다.
"그만 두라는 게 아니야. 생각을 잠시 쉬라는 거지. 너무 생각하면 시야가 좁아져서 제대로 판단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영현이 셀의 말을 자르며 꿋꿋이 말했다.
"그러니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다른 걸 생각하는 게 어떠냐? 주말 동안 머리를 식히고, 다시 생각하는 거야. 대신 내가 네 고민을 해결해 줄 방법을 한 번 찾아보마."
영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영현의 말대로 이 일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정말 시야가 좁아져서 아무 관계도 없는 두 사건을 묶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따금씩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했다. 이를 조심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에 너무 골몰하면 셀은 이따금씩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잊어버리고는 했다. 이제 일할 때는 웬만큼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지만, 아직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셀이 말했다.
"넓게 보라는 말씀이신 거죠?"
셀은 한편으로는 영현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을 내버려두고 저렇게 말을 하는 건 그래도 자신이 이제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보면 영현의 말은 자신은 여기서 그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말을 어른스럽게 돌려 말했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영현은 도와준다고 말을 하긴 했다. 말하기 싫다는 이유로 그 순간을 무마하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셀은 영현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셀이 말했다.
"방법이 생각나시면 뭐든 알려주시겠다고 약속해요."
"그래, 네 일인데 그래야지."
영현이 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영현이 다시 포크를 쥐며 그릇에 담긴 음식을 이어서 먹기 시작했다.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난 뒤에 영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뭐하고 지내는 지는 전혀 물어보지 않았구나.”
셀이 포크에 면을 돌돌 말면서 대답했다.
“여기 오면서 드렸던 이야기 그대로에요. 회사 집, 회사 집의 반복인 거죠. 주말은…… 최근엔 그래도 쉬면서 보냈네요.”
“마음에 드는 사람은 좀 찾았고?”
셀은 포크에 예쁘게 말아놓은 면을 입으로 넣으려다가 멈추며 물었다.
“네?”
영현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영현의 찡그려진 얼굴 표정과는 다르게 눈에는 셀을 아끼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왔다. 영현이 들고 있던 포크의 끝을 그릇의 위에서 세우듯 잡으며 말했다.
“걔는 안 되는 거 알지?”
포크를 쥔 영현의 자세가 조금 심상치 않아보였다. 상대가 누구든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다는 뜻인가 싶기도 했다. 셀도 영현을 따라 미간을 찌푸렸다. 셀이 물었다.
“누구요?”
그러나 영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누군가가 생각났는지, 이미 커진 눈을 더 크게 뜨며 영현을 쳐다보았다. 영현이 턱 끝을 자신의 몸을 향해 살짝 당겼다. 셀의 시선이 다시 영현의 포크로 향했다. 셀이 말했다.
“김서진이요?”
셀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며 말했다.
“저희 그냥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사실인데! 하지만 영현은 셀의 말을 그리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영현은 자세를 꼿꼿이 유지하며 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젠 안 좋아해요! 그걸 왜 아직까지 기억하고 계세요?”
“어쨌든 걔는 안돼, 셀.”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그럴 게 없다니까요? 저 눈 높아요!"
영현의 말에 당황한 셀은 영현의 오해를 풀기 위해 빠르게 말을 뱉어내었다. 하지만 영현의 오해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현은 생각 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아니다, 어차피 인생 긴 데 연애는 괜찮은 사람이랑 기회 있으면 언제든지 해. 걔 정도면......."
그만 말하라는 셀의 독기 어린 시선에 영현은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영현은 이 말을 덧붙이며 말을 마무리했다.
"흠흠, 누구든 생기면 얼굴 보여주는 거 잊지 말고."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셀이 툴툴거렸다.
"헤어질 지도 모르는 사람 얼굴을 제가 왜 보여드려요."
"하긴 내가 봐서 어디다 쓰겠냐. 그냥 뒷조사 필요해지면 그때 알려다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일 거 같구나."
뒷조사? 셀은 그 단어에 유독 더 강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아마 이 뒷조사를 당하고 나면 세상 어느 선량한 사람도 더는 선량한 사람이 되지 못할 거 같았다. 셀은 일부러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그냥 혼자 사는 게 마음 편할 거 같네요."
셀은 그렇게 쏘아붙였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금 더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렇기도 하고요. 아직은 할 때가 아닌 거 같아요."
셀이 남은 면을 포크에 감아내며 말했다.
"다 드셨으면 설거지 제가 할게요."
영현은 셀이 마지막 한 입을 먹는 걸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왔는데, 무슨 집안일이냐. 두고 올라가서 쉬어."
영현은 셀이 움직이기 전에 빠르게 셀이 썼던 그릇과 식기를 챙겨 식탁을 정리했다.
"좀 있다 과일 가져다 줄테니, 올라가면 문도 좀 열어주고."
"열어놓을 거니까, 그냥 노크만 해주세요."
"닫는 게 편하지 않겠니?"
"열려 있는 건 아저씨가 불편하신 거죠?"
"네 마음대로 해."
셀이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셀은 옆에 놓여 있는 물티슈으로 가볍게 식탁 위를 훔쳤다. 셀이 물었다.
"그나저나 엄마는 잘 계시죠?"
"...... 그래. 잘 지내신다. 뵙고 싶니?"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이제는 연락하는 것도 어색해요. 연락도 잘 안해주셨고요. 어쨌든 제가 기억에 제 보호자는 아저씨니까."
셀은 괜히 웃음을 더 크게 지었다.
"제가 엄마 이야기한다고 섭섭하신 건 아니죠?"
"섭섭했음 이미 네 엄마한테 보냈겠지."
"그런데 일도 쉬시면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유례없는 긴 휴식을 취하고 있지. 이렇게까지 쉬어본 적은 처음이라."
영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셀은 영현의 말을 기다렸다. 영현은 종종 말을 멈추고 말을 고를 때가 있었다. 그리고 셀은 영현의 그런 습관을 알고난 후로는 항상 영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영현의 다음 말을 예측하면서 말이다. 영현이 말을 이었다.
"추천해줄 만한 게 있냐?"
셀의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었다. 셀은 영현이 현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영현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글쎄요. 그냥 쉬시는 것도 어떨까 싶네요. 그래도 이런 여유가 생겼다는 게 아저씨 삶이 조금은 편안해졌다는 뜻 아닐까요?"
셀의 말에 영현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조금 부드러워진 영현의 표정을 본 셀이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절 좀 도와주시는 것도?"
"그래, 최대한 방법을 빨리 찾아보마."
셀이 웃으며 답했다.
"고맙습니다. 저는 그만 올라가볼게요."
"필요한 거 있음 언제든지 말하렴."
"그럴게요."
셀은 자기 방으로 올라가 자기가 남기고 간, 그리고 영현이 깨끗이 관리해준 물건들을 다시 눈으로 훑었다. 자신이 여길 떠난 후에 영현이 노트 같은 것들을 훑어본 적이 있었을까? 셀은 손에 집히는 아무 공책을 꺼내 안을 빠르게 훑었다. 노트에는 별의 별 내용들이 다 적혀 있었다. 어릴 때나 할 수 있을 법한 생각이나 고민들, 친구와의 필담, 그리고 문제 풀이가 대부분이었다. 이정도면 봐도 뭔지 모르시지 않았을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셀은 노트를 덮어 제자리에 다시 꽂아두었다. 어차피 이곳에 남겨둔 노트에는 들키지 말아야 할 내용이 없었다. 그 당시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지만 말이다. 갑자기 영현이 저녁을 먹으며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사람 뒷조사가 필요하면 자기한테 말하라던 그 말 말이다. 셀은 영현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것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절대로 이런 걸 도와달라고는 안 할 거야!
서진은 문 앞에서 낯선 인기척을 느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집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서진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문을 열었다. 서진은 누가 들어와 있든 때려눕힐 자신은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집안이 망가질 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다. 서진은 마음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자신이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기척의 변화가 없었다. 도망가려는 의지도, 서진을 공격하려는 의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진은 자기 집 소파에 앉아 있는 외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등을 켜기 전, 어둠 속에서 서진은 그를 마주하기가 무섭게 이 뻔뻔한 외부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서진이 말했다.
"이거 무단 침입인 거 아시죠?"
영현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상사일 때는 매일 같이 마주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불쑥불쑥 서진을 찾아오곤 했었고, 상사이지 않을 때에도 서진을 불쑥 찾아오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영현이 서진을 찾아오는 방법은 영현이 서진의 옛 상사가 된 이후로 더욱 고약해졌다. 서진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옛 상사이자, 선배이기도 했던 사람을 오랫동안 노려보았다. 다시는 이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영현은 한참 뒤에야 서진의 말에 대해 반응했다.
"좀 더 일찍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그러나 서진의 말에 적절한 대응은 아니었다. 서진이 차갑게 대꾸했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오셔서 저는 웬 도둑새끼인 줄 알았거든요."
서진은 집 안으로 들어오며 조명을 켰다. 집 안이 훤히 밝혀지자, 영현이 건성으로 한 손을 들며 서진에게 인사를 했다. 물론, 서진은 영현의 인사를 받아주고 싶은 생각이 크게 없었다. 손님 대접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었다. 서진은 메고 있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물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영현이 사람을 찾아갈 땐 항상 이유가 있었다. 영현은 사사로운 일로 타인을 찾아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진은 매정하게 영현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이렇게 서진을 찾아올 때에는 몇 가지 주제들이 정해져 있었다.
"좀 길어질 거 같은데. 시간은 괜찮냐?"
그 정해진 주제들은 서진이 피할 수 없는 주제들 뿐이었다. 서진이 대답했다.
"없는 시간도 내놓으라고 오신 거 알고 있습니다."
"셀이랑 관련된 이야기면 잠자코 들을 거잖아."
서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한 거 같았는지, 서진은 말을 내뱉듯 빠르게 말했다.
"아니어도 그랬을 겁니다."
영현은 서진의 말을 무시한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가 셀을 좀 감시해주었으면 하는데."
서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서진이 말했다.
"셀을 감시하라고요? 제가요?"
"그래, 네가. 너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저 말고도 부려먹을 사람 수하에 많으시잖아요."
"너만큼 셀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 마음 같아서는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은데, 셀이 그럴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영현은 절대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 서진을 쳐다보았다. 서진은 꽤 괜찮은 직원이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영현의 밑에서 일하기엔 서진의 고집이 너무나도 셌다. 하지만 영현은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고집이야 무슨 수로든 꺾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서진도 그렇게 꺾이는 것처럼 보였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말이다. 영현이 말했다.
"예전에 내가 너에게 셀에 대해 말했던 말들, 얼마나 기억하냐."
"필요한 만큼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셀의 아버지에 대한 사건도 기억하냐?"
그 사건이라면 서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셀이 그렇게 매달리듯 붙잡고 있는 일인데, 서진이 이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셀만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서진이 대답했다.
"네, 그 사고 말하시는 거죠?"
"사고 말고는?"
"그 외는 저에게 전달해주지 않으셨는데요."
영현은 턱을 긁적였다. 손끝에서 까끌까끌한 수염이 만져졌다. 영현은 과거에 서진에게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은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일을 귀찮게 만들 줄이야. 영현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앉지 그러냐, 짧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이다."
서진은 영현의 말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셀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서진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현은 자신과 멀찍이 떨어져 앉은 서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들어. 질문은 다 듣고 해."
"셀에 대한 거라면서요."
"질문은 나중에 하라니까."
영현의 말에 서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영현이 저렇게까지 초장에 밑밥을 던지는 지 서진은 영현이 말할 이야기에 대해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영현이 이야기를 하며 저런 말을 사전에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지금 꺼내려는 이야기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아닐 거라는 생각 정도는 서진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영현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말 없이 자신의 신발 앞코를 보고 있었다. 서진은 영현이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이전에 영현에게서 들었던 사건 이야기를 떠올렸다. 셀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믿는 그 사건에 대해서, 서진은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더듬어보려고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 지 모르겠군. ...... 아니면 그 교통사고부터 다시 시작할까."
서진은 마치 영현의 말을 비꼬기라도 하는 것처럼 버릇없이 영현에게 손을 놀렸다. 그렇게 진행하시라는 뜻으로 손을 살짝 밖으로 뻗듯이 움직였다. 영현의 눈썹이 눈두덩이에 붙을 정도로 낮게 깔렸다가 제자리로 금방 돌아갔다.
"셀이 미련을 못 버리는 그 사고는......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사고가 아닌 거 같은 그 부분이 아마 셀이 더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거겠지. 어쨌든 그 사건으로 셀은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도 잃은 셈이나 다름 없지. 셀의 엄마되는 사람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거든. 성격은 평범하지 않았지만, 셀을 데리고 있기엔 평범한 사람이었어. 셀의 눈동자가 평범한 눈동자는 아니라는 건 알지? 그 눈 색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야."
"셀이 보름인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 보름들만 가지는 벽색을 가지고 있지."
영현은 입을 다물었다. 서진은 갑자기 영현의 시선이 바뀐 것을 느꼈다. 그리고 굳이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서진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었다. 영현이 입을 열었다.
"...... 둘 중에 뭘 먼저 알았냐?"
아니나 다를까, 영현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서진이 대꾸했다.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거에요?"
"셀이 보름이라는 것과 네가 보름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 중에서."
서진은 영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서진은 영현에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영현에게 그 사실을 짚어주는 게 그리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은 오히려 영현에게 확고한 믿음을 줄 것만 같았다. 셀이 보름이고, 서진이 신월이기 때문에 둘은 끌릴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런 감정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그게 진짜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감정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그 사실을 영현의 입으로 듣는 순간, 서진은 자신의 복장이 터지고 말 거라 생각했다. 영현은 꽤나 따갑게 느껴지는 서진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신월이란 것들은 항상 보름을 본능적으로 좇았다. 자신과 정반대에 위치한 보름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월들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달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처럼 구는 신월들은 모두 서진처럼 행동했다. 영현은 그런 사람들을 꽤 보았었다. 모든 게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신월들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자신의 보름이 누군지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신월들이 차고 넘쳤었다. 서진은 어떤 부류인지 영현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지금의 서진이 셀을 보름으로 인식하는 이상, 영현에게는 아주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패인 건 확실했다 . 영현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네가 적합하다는 판단을 한 거지. 맨정신으로는 네가 그들에게 셀을 절대로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맨정신이 아니라면 더욱 더 안 보낼 거고."
"그걸 다 아시면서 셀이랑 더 가까워지지 마라고 하신 거고요."
영현은 서진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셀은 어릴 때 너나 나같은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어. 다른 평범한...... 아니, 인간은 오히려 셀을 보호하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왜 저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은 안 되는 건데요?"
서진은 이건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때도 제대로 된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현은 자신의 말을 어기고 질문을 던진 서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영현은 자신에게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는 서진을 어떻게 다룰 지 고민했다. 지금 영현에게 서진은 꽤나 중요한 패였다. 잘 달래서 자신의 말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영현은 서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쪽에 정신 계열 사이람들이 꽤 있었거든. 지금도 그렇고. 그래서 너나 나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였어. 정신 공격에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사람들. 일반인들은 그런 벌레 같은 것들을 피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셀을 데려가려고 했다는 거잖아요."
"그들에겐 셀이 정말로 필요했거든. 셀은 일종의...... 열쇠 같은 거야, 그들에겐."
영현은 서진에게 그들에 대한 설명을 해야한다는 의무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다할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무슨 말을 한들, 제대로 된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옛 토속 종교를 표현하는 방식이 어쩌면 그들을 표현하기에 제일 걸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형태는 이미 퇴색되어버렸다. 더는 정신적 지주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았다. 제물이라는 것도 이제는 바치지 않았다. 종교적인 색채는 이미 다 지워져나간 이후였다.
"그들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열쇠인거지."
"사이비에요?"
서진의 말에 영현이 마른 세수를 했다. 결국 서진의 귀에는 이게 그렇게 들릴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오래 전부터 내려온 민간신앙이라고 하자. 아니면 뭐, 전설이라고 할까? 증거가 차고 넘치도록 있으니까."
"이럴 거면 제대로 설명해주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글쎄다. 내가 어떻게 설명하든 네 귀엔 정신나간 집단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거 같아서 말이다. 그게 아주 잘못 이해했다고 하기도 어렵고. 어쨌든 이런 사람들이 셀을 노린다는 건 나는 전해주었으니까."
"셀을 데리고 뭘 하려고 하는 건데요."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먼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거 같더군. 정확하게는 사이람들이 지금보다 좀 더 좋은 대우를 받았던 때로 말이야."
"그걸 셀이 해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사실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셀한테 무슨 짓을 시킬 지는 모르지 않냐. 메시아 따위로 셀을 칭송하며 곱게 대해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으니까."
서진은 영현의 답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이 일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일은 거부할 권리조차 서진에게 주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서진이 말했다.
"할게요."
서진의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영현이 빠르게 대답했다.
"별 일 없으면 매주마다 한 번씩 나한테 알려주고,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을 때엔 바로 알려주면 된다. 그때처럼 내내 붙어서 감시하라는 게 아니야. 그냥 네 시선 닿는 곳에 두고 지켜보면 될 거다."
"그렇게 시키실 거면 감시를 왜 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영현은 조금 못마땅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셀이 어느 정도는 자기 일을 너에게 말을 할 거 같거든. 그리고 너무 바짝 감시하면 셀에게도 이 사실을 말해야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영현이 뒷말을 덧붙였다.
"셀이 어떻게 되든 네 탓 할 일은 없어. 내가 그렇게 지시했으니까. ...... 셀의 입지도 있고, 단순한 직장인도 아니고....... 만에 하나 잡혀간다 하더라도 그리 쉽게 해코지 하진 못할 거다. 어찌되었든 셀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어쩌면 네가 셀을 소중히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지도 모르지."
영현이 수염 때문에 까칠까칠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난 그저 그 벌레들한테 뒤통수 맞는 게 싫은 거라서 말이다. 그러면 보고는 전처럼 이걸로 전달해."
영현은 입고 있던 재킷 안주머니에서 더는 쓰지 않을 거 같은 구닥다리 기기를 꺼내 서진에게 건네주었다. 서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 기기를 받아 들었다.
"그럼, 부탁을 하나 더 할까 하는데."
"바로 부려먹으시는 겁니까?"
"내일 셀 좀 데리고 돌아가라. 난 내일 개인적인 일정이 생길 거 같아서 셀을 못 데려다 줄 거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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