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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바람이 부는 강변에서 사이람 1팀은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만, 다들 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게 단순히 강한 강바람과 따가운 햇살 때문은 아닌 거 같았다. 간만의 현장 업무에 들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얼굴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서진은 먼저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시켰다. 지역 축제 전에 문제를 일으킬 요인이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 넓은 부지를 어떻게 확인할 지에 대해 이들은 각자 서로의 의견을 제시했다. 의견들을 쭉 듣던 서진이 모두의 주의를 끌어모으기 위해 손뼉을 두 번 쳤다. 서진이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말했다.
“자자, 이렇게 하자. 셀이랑 정원이랑 한 팀이고, 솔이랑 혜정이가 한 팀이야. 내가 따로 움직일게.”
서진이 만든 팀이 불만이었던 정원이 말했다.
“그렇게 나눈 이유는 뭔데요?”
“셀이랑 혜정이 붙이면 다른 데 한 눈 팔 거 같다는 게 하나고.”
셀이 서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날 그렇게 생각한다고?”
서진은 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솔직히 없었다. 셀과 솔을 이어도 괜찮은 조합이었지만, 워낙 셀과 정원이 붙어서 투닥거리는 일이 많았던지라 서진은 무의식 중에도 그 둘을 연결시켜버리고 말았다. 서진은 셀의 따가운 눈총 덕분에 그럴싸한 이유를 하나 더 생각해내었다. 서진이 말을 이었다.
“그냥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사람들끼리 다니면서 회사 욕 좀 하라고 붙여준 거야. 그러면 너네는 동쪽 구역으로 가고, 혜정이랑 솔은 서쪽 구역으로 가. 내가 축제 인접 구역으로 갈게. 이상한 거 발견하면 절대 만지지 말고, 서로에게 알려줘야해.”
셀이 말했다.
“인접 구역은 그냥 강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본다는 거지. 어서 시작해, 생각보다 넓어서 정시 퇴근하고 싶으면 빨리빨리 움직여야할 걸?”
그러고 서진은 필요한 장비를 챙겨 가볍게 발돋움을 하더니, 위로 가볍게 날아올라 자신의 맡은 구역으로 향했다. 육지에 남은 사람들은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을 한 뒤 장비를 챙겨 자신의 구역으로 흩어졌다.
셀은 정원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주변을 살폈다. 정원은 말없이 셀의 보조를 맞춰주며 기계를 조종하고 있었다. 기계를 설렁설렁 움직이는 폼이 딱 봐도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움직임이었기에 셀은 그냥 정원에게 대놓고 물어보았다.
“넌 그냥 나온 게 싫지?”
“당연하지. 몇 번째로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사무 일 하려고 온 거라니까. 이런 일이 아니라.”
“이젠 네가 무슨 능력 갖고 있는지 대충은 다 아는데 그냥 받아들이는 게 어때?”
“돈이라도 더 받아야 입 다물 수 있을 거 같네.”
“이 기계 측정 범위는 어느 정도야?”
“반경 2미터.”
“내가 해봐도 돼?”
호기심 가득한 셀의 질문에, 평소와는 달리 정원이 순순히 물건을 건네주었다. 정원이 말했다.
“생각보다 무거워.”
오, 그러네. 셀은 물건을 받아든 뒤, 정원이 했던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돼?”
“조금 더 넓게 흔들어.”
“이렇게?”
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네.”
셀은 정원의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떠넘겨줄 때 던지는 그런 말들 있지 않은가. 남을 칭찬해서 그 사람을 골수까지 빨아먹을 수 있는 그런 말들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은 이렇게 측정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셀이 조금 신이 나서 말했다.
“저 둘은 잘하고 있겠지?”
“뭘 걱정을 하냐?”
“역시 뭔가 이상한 건 없네요.”
혜정은 아쉽다고 말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혜정은 종종 자신의 감정을 이런 식으로 토로했는데, 그게 꼭 싫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솔은 오히려 그렇게 감정을 풀어내는 혜정이 가끔은 부러웠다. 특히 그 순간을 오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특히 부러웠다. 솔이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
“뭔가 있길 바라요?”
혜정이 솔을 한 번 쳐다보았다. 마치 간식을 바라는 귀여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혜정이 들고 있던 모니터로 시선을 다시 옮기며 대답했다.
“아뇨, 그건 아닌데…… 그래도 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대로 발견 못 하면 뭔가 허탕친 느낌이긴 할 거에요, 그쵸?”
“어…… 뭔가 발견한 거 같은데요?”
혜정이 들고 있던 모니터를 솔에게 보여주었다. 미약하게나마 신호 수치가 올라가 있었다. 혜정과 솔은 서로에게 눈을 반짝이고는 신호를 따라 움직였다. 신호는 신호가 가장 강하게 잡히는 곳에는 작은 석상 같은 게 있었다. 미확인물체는 만지지 않고 먼저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하였기에, 일단 솔은 무전으로 모두에게 해당 물체의 존재와 위치를 알렸다. 서진은 자신이 먼저 가보겠다고 답하며, 셀과 정원에게는 일단 수색을 계속하라고 전했다. 얼마 안 있어 솔과 혜정이 있는 위치로 서진이 넘어왔다. 서진이 말했다.
“만지거나 하지는 않았지?”
“저희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서진이 무전으로 셀과 정원에게 그쪽 수색을 마치고 돌아오라고 전했다.
“선배가 맡은 구역은 끝나신 거에요?”
“응, 기기 설치는 끝냈어. 이쪽은 그냥 수색만 하는 거였지?”
“네, 여기는 따로 다른 부서가 와서 설치한다고 그랬어요.”
일을 두 배로 하네. 서진이 중얼거렸다. 마침 셀과 정원으로부터 소식이 들어왔다.
-여기도 뭔가 이상한 게 있어요. 작은 석상 같이 보이네요.
그 말에 석상 앞으로 세 명이 모두 모여들었다. 두 팀은 서로가 찾은 석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이를 보면 두 곳에 놓여 있는 석상은 생김새가 거의 동일한 거 같았다. 생김새는 어딘가 개구리처럼 생겼는데,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그 형체를 개구리라고 확신하기엔 조금 어려워보였다. 확실한 건, 커다란 동물의 형상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걸 그냥 접근을 못하게 막아야 할까요?”
-갑자기 뭔가 생기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이쪽이 사람 왕래가 아예 없던 곳도 아니고.
-뭔가 확인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냥 만져보면 안 돼요?”
혜정의 말에 모두가 혜정을 쳐다보았다. 혜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져서 신호의 세기가 변하는 지를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계속 말해봐.
“그러니까…… 저희도 능력을 쓸 때 일어나는 파장? 신호? 그런 거로 능력을 쓰는 지 안 쓰는 지를 확인하잖아요. 그래서 이 석상한테도 그런 걸 적용해보면 어떨까 싶었는데…….”
“난 괜찮은 거 같은데.”
-저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 셀, 네가 만져볼래? 여기서는 혜정이가 만지는 거로 하고.”
-왜 나야?
“무슨 일 생기면, 일이 커지기 전에 진압해야하는데 네 능력보다는 정원이 능력이 적절할 거 같아서.”
“그리고 혜정이 넌, 지금은 낮이니까 주변에 큰 영향을 줄 거 같지는 않아서.”
서진의 설명에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정은 약간 겁을 먹은 거 같았지만, 불편한 의사를 내비치지는 않았다. 혜정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나가 석상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그러면 저 먼저 만져볼게요.”
-선배가…….
-아, 내가 등 떠민 것도 아니잖아! 혜정아, 내가 먼저 해도 괜찮아.
“아니요, 제가 먼저 해볼게요! 게다가 무슨 일이 생겨도 여긴 진압할 사람이 두 명이니까 제가 먼저 하는 게 맞을 거 같아요.”
혜정은 긴장감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뒤, 손을 뻗어 석상을 만졌다. 혜정이 석상 위에 손을 얹으며 얹었다는 말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쓰다듬기까지 했지만, 혜정은 별 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솔은 줄곧 석상에서 흘러 나오는 신호를 모니터링 하고 있었다. 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면 내 차롄가.
무전 너머로 셀과 정원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셀이 손을 뻗어 석상에 손을 얹었다.
-나도 얹었어.
“별 문제 없지?”
그 순간 신호가 말도 안 되는 수치로 증가하더니 석상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입에서 기다란 혀가 나타나 그들을 모두 휘감아 모두를 삼켜버렸다.
***
“일어나, 이제.”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셀이 잠에서 깼다.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셀은 주변을 천천히 인지하기 시작했다. 대형 강의실에서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셀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입가에 침이 고였던 모양인지,셀이 입가를 옷 소매로 가리듯 닦아내었다. 앞에서 정원이 한심하다는 듯 셀을 쳐다보고 있었다. 셀이 물었다.
“우리가 왜 여기있어?”
“꾸벅꾸벅 졸면서 오더니, 너 진짜 자면서 여기까지 온 거냐?”
“…… 나 언제부터 잤어?”
“출석 끝나고 수업 시작하자마자 자던데.”
사실 셀은 여전히 피곤했다. 어제 뭐했더라. 하지만 생각나는 건 없었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셀이 좀처럼 정신을 못차리자, 정원의 시선은 점차 셀을 안쓰러워하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정원이 셀의 팔뚝을 가볍게 손등으로 치며 말했다.
“커피 사줄게, 가자.”
셀이 짐을 챙기며 물었다.
“너는 수업 들었어? 필기 보여줄 수 있어?”
“…… 사실 나도 앞부분은 다 놓쳤어. 볼래?”
정원은 개발새발로 필기한 노트를 보여주었다. 별로 얻어갈 게 없는 필기였다. 셀이 얼굴을 찌푸리고 정원을 쳐다보았다.
“나한테 잔소리할 자격이 없네, 너도 마찬가지구만.”
“나는 그래도 볼펜을 움직일 정신 정도는 있었다고. 이 그림, 꽤 잘 그리지 않았어?”
셀은 정원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뒷말을 잘못 들었은 거 같아서였다.
“하, 미대로 갔었어야 했는데.”
그 말에 셀이 눈을 크게 뜨고 정원을 쳐다보았다. 정원이 이런 말을 하던 사람이던가? 셀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든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정원은 자신의 노트를 다시 쳐다본 뒤, 농담삼아 셀에게 물었다.
“그래도 이정도면 자면서 그린 것치곤 꽤 잘 그렸지?”
그 말에 셀은 정원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정원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
서진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주변 환경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혹시 몰라서 어린 애 두명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갑자기 물속에 빠지거나, 공중에 던져지거나 하는 건 아닌 거 같았기에 서진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확실한 건 그 돌개구리가 자신들을 집어삼킨 것과 나눠 가진 무전은 더 이상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혜정과 솔은 정신을 잃은 채 자신의 품에 늘어져 있었다. 정신을 공격하는 건가? 서진은 주변을 살폈지만, 계속해서 바뀌는 환경에서 이렇다할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혜정과 솔이 곧 깨어날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자, 주변 환경이 변하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느려진 속도에 적응을 못한 몸이 메스꺼움을 느끼자, 서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느 정도 어지럼증이 가라앉았다는 생각이 든 서진은 눈을 떴다. 눈을 뜬 곳은 웬 차 안이었다. 차 안에서 서진은 의자를 한껏 젖힌 채 품에는 자기 마음대로 생긴 인형 두 개가 품 안에 있었다. 서진이 상황 파악을 위해 차안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 차 안에는 자기 혼자 뿐이었다. 서진은 자신의 품에 있던 두 인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솔과 혜정을 형상화하기라도 한 듯, 하나는 가늘고 긴 인형에 이렇다할 특징이 별로 없었고, 다른 인형은 이 인형을 납작하게 누른 것처럼 생긴 데다, 뭔가 반짝거리는 것을 묘사한 자수가 놓여 있었다. 서진은 두 인형을 가만히 쳐다보며 그 두 명이 인형이 되었을 확률을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누가 운전석의 창문을 우악스럽게 두들겼다. 서진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다행스럽게도 솔이 있었다. 서진이 창문을 내리자, 솔이 말했다.
“왜 차 안에 있어? 인형은 뭐고.”
솔의 말투에서 살짝 짜증이 묻어나왔다. 자신을 잘 드러내는 솔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서진이 되물었다.
“뭐?”
“인형.”
솔의 친근한 말투에 서진은 서진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솔은 손가락으로 인형을 가리키더니, 곧 서진의 품에서 자신과 닮은 인형 하나를 빼내었다. 서진은 인형을 뺏긴 채, 이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의 솔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솔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나 가져도 돼요?”
“어…… . 그래, 가지고 싶음 가져가.”
“그런데 진짜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요?”
서진은 할 말이 없어서 대충 둘러대었다.
“…… 그냥 있었어.”
“저희한테 밥 사주시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뭐?”
“혜정아, 네 말대로 서진 선배가 약속을 까먹었던 거 같다.”
“뭐, 사실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혜정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혜정이 말한 사실은 서진의 평소 행실과는 많이 달랐기에, 서진은 차 안에서 몸을 밖으로 빼다가 그만 차제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너무 아파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은 서진은 얼굴을 확 구겼다. 서진이 말했다.
“내가 그랬다고?”
“틀린 말도 아닌데 그렇게 험악한 얼굴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요?”
솔은 옆에서 계속 시비 아닌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에 비해 혜정은 조용하게 서진을 쳐다보았다. 혜정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솔에게 뒤로 조금만 물러나라고 손짓한 뒤 차에서 겨우 빠져나와 혜정과 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에게서는 어떤 거짓도, 장난도 보이지 않았다. 서진이 물었다.
“너네 어디서 오는 길이야?”
“그야, 수업 끝나고 오는 길이죠. 저희 수업 끝나고 점심 같이 먹은 다음에 동아리방 가기로 했었잖아요.”
솔의 말에 이제서야 서진은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웬 대학캠퍼스 같은 풍경이었다. 넓은 부지를 소유한 대학교라면 대부분은 이런 풍경일 것이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건물들과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녹지들, 그리고 그 사이를 잇듯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걸어다니고 있었고, 차들도 적당한 속도로 캠퍼스 안을 돌아다녔다. 서진은 조금 얼이 빠진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가 다시 혜정과 솔을 쳐다보았다. 서진은 자신의 손에 여전히 쥐어져 있던 남은 인형 하나를 혜정의 품에 쑤시듯이 건네주었다.
“그래, 일단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셀은 정원과 구내식당으로 걸어오는 동안 꽤나 많은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다. 정원은 어떻게 이런 걸 다 물어볼 수 있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잠이 덜 깬 게 틀림이 없다며 밥 먹고 커피까지 먹자며 셀에게 커피가 아니라 밥을 먼저 먹자고 했다. 셀은 전혀 모르는 길을 정원은 잘도 앞장 서서 걸어갔다. 그래도, 뭐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니까. 정원은 원래 셀은 자신이 여기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른 일이 있지 않았나? 셀은 정원을 따라 일단 점심을 주문하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계속 느껴지는 이 이질감에 대해 생각하려면 충분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평소에 먹던……. 셀은 주변 사람들이 들고가는 식판을 보았다. 분명히 배식구에서 식판을 받아가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식판에는 맛있어 보이는 밥 대신 다른 게 올려져 있었다. 셀이 말했다.
“난 오늘 그냥 패스할게.”
“우리 오늘 계속 수업인데 괜찮겠어?”
“필요하면 쉬는 시간 때 사먹을게.”
셀은 그 말을 내뱉자마자, 아차 싶었는지 막 주문하려던 정원의 어깨를 붙잡으며 정원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너 진짜 점심 먹을 거야?”
“굶어죽기 싫어, 난.”
“그럼 난 자리 먼저 잡을게.”
“주문만 하면 되는데 같이 가자, 그냥.”
정원은 오늘따라 유달리 타인에게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분명 한 번쯤은 놀렸을 거 같은데, 오늘은 딱히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런 식으로 장난하는 사람은…….
정원이 멍하니 걸어가던 셀의 팔을 잡아 끌며 말했다.
“저기 자리 있다.”
정원은 셀을 끌고 빈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가까이 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말고 다른 데 올 걸 그랬나 싶었는데, 그래도 어떻게 자리를 잡았네.”
“원래는 더 심해?”
“…… 응, 오늘은 진짜 운 좋은 거야.”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정원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셀은 정원의 얼굴에 이렇게 깊은 수심이 드리울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얼굴을 다양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셀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 또 있는 건가 싶어서 정원을 보며 말했다.
“왜 그래?”
셀의 말에 정원이 얼굴을 확 구겼다. 셀은 자신이 못할 말을 했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세 음절에 기분이 나빠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기는 그저 물어본 게 다인데 말이다. 맥락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정원을 놀리는 듯한 말투도 아니었다. 평이한 말이었는데 왜 정원은 저렇게 행동한 걸까? 정원은 대답 대신, 주문한 음식을 가지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이 자리를 뜨자, 셀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정확히는 주변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살폈다.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사람들은 음식이랍시고 입에 잘 넣고 있었다. 그게 딱히 징그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셀은 굳이 그것들을 자신의 입에 자진해서 넣고 싶지는 않았다. 저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면 사정이 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굳이 저들의 정체를 알고 싶지도 않았던 셀은 시선을 돌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여기는 셀이 잘 아는 곳이 아니었다. 여기에 섞여 있음에도 그랬다. 계속 자신의 옆에 있어주는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정말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 정원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정말로……. 정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전화까지 한 건지. 셀은 정원의 전화를 받았다.
“왜?”
-그 사람 있어, 그 사람.
“그 사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셀의 평온한 말투에 정원은 울화통이 터지는지 짧은 숨을 강하게 뱉어내었다. 정원은 바로 옆에 그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롭게 속닥거렸다.
-아니, 왜 알려줘도 못 알아들어! 키다리 왔다니까?
정원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급할 게 없는 셀은 정원이 왜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자신에게 전화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키다리? 셀이 정원이 말한 키다리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다른 사람들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딱 봐도 저 사람이 키다리였다. 키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잘도 헤치며 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키다리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셀이 중얼거렸다.
“김서진?”
“셀, 혼자야?”
전화기 너머로 정원의 궁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들고 있는 휴대폰을 손으로 가리켰다. 셀이 서진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원이랑 같이 있었어.”
“정원이는 괜찮아?”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그걸 다 말해?
정원의 말에 셀이 서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셀이 말했다.
“우리 이 사람이랑 친한 사이가 아니야?”
여기서라면 정원의 말을 듣는 게 맞았다. 어쨌든 지금 당장 셀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원의 말을 듣고 서진을 무시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서진을 그냥 보내자니, 셀은 서진의 저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정원의 말대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하기엔 저 얼굴은 너무나도 진심이 묻어나오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자신과 정원을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돌아가면 설명해줄게.
“알겠어. 그럼 이 사람 쫓아내면 되는 거지?”
서진이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셀에게 다가가려하자, 셀이 서진의 앞으로 손을 뻗으며 다가오지 마라는 신호를 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듯, 셀의 손은 허공에 가만히 있었다. 셀은 정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서진에겐 지금이 자신의 상황을, 사이람 1팀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최적의 순간에 서진은 고민에 빠졌다. 무작정 설명한다고 셀이 알아들을까? 지금 자신에게 뾰족한 수 같은 건 없었다. 이런 상황을 겪게된 이유도 추측일 뿐이고,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더더욱 몰랐다. 그런데 붙잡고 이곳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 그걸 받아들여줄까?
“정원이는 5분 정도 더 기다려야 올 거 같은데.”
셀이 식탁에 턱을 괴고 서진을 쳐다보았다.
서진은 어쩌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혼자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서진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해보였다. 서진의 그 표정에 셀은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아까 그 부드러워 보이던 사람이 딱딱하게 느껴질까? 그리고 그 호기심이 동한 그 순간에, 셀은 그게 가장 자신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셀이 말했다.
“할 말 있음 해봐요. 지금은 5분 밖에 못 주지만, 또 모르잖아요. 하는 말이 괜찮으면 내가 시간을 더 쓸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진은 셀에게 다르게 대하는 법을 몰랐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셀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셀이 자신에게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정원의 말을 믿고 자신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셀은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5분은 너무 짧지 않나. 서진이 말했다.
“음모론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안 그래도 내 인생에 의문이 들던 참인데 한 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셀이 일부러 자신의 손목시계를 톡톡 치며 말했다.
“이제 4분 남았어요.”
셀은 서진이 말했던 이야기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에 정원이 서진에 대해 말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했다. 어차피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셀은 정말 자신이 이 수업을 듣고 다닌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었음에도, 셀은 이 강의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집중이 안 되는 탓인가? 그 사이, 셀의 머릿속에서 서진과 정원이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하기 시작하자, 셀은 옆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는 정원에게 필담을 시도했다.
나 뭐 물어봐도 돼?
정원은 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셀은 자신이 알고 싶은 것들을 몇 가지 적어 정원에게 전달했다. 목록이 길었던 탓인지, 정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셀은 가장 위에 적어놓은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냥 O/X로 대답해.
정원은 손가락으로 알겠다는 신호를 보낸 뒤, 얼마 안 가 깔끔하게 질문에 답을 한 목록이 셀의 눈앞에 도착했다. 셀은 정원의 답들을 보며 서진을 만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셀이 정원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나 그 사람 만나볼까봐.”
셀의 말에 정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시 만난다고?”
셀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정원이 셀을 못볼 걸 본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그냥 가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거였는데, 왜 이런 반응인가 싶었던 셀은 자신의 표현이 다소 이중적이었음을 깨달았다. 셀이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다고. 관계를 이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아아, 난 또 네가 미쳤나 했네.”
“그렇게 이해한 네가 문제 아니냐?”
“이건 네가 잘못한 거지.”
마침 강의가 끝났다. 정원이 자신의 짐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그 새끼를 왜 보러 가냐?”
이미 짐을 다 싼 셀이 아직도 짐을 싸고 있는 정원을 기다리며 말했다.
“그 5분 사이에 거짓말을 했던 거 같진 않아서.”
그 말에 정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정원의 반응이 어떻든, 셀은 그렇게 느꼈다. 실로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셀은 정원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원이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가진 게 없으니, 무엇이 확실한지도 알 수 없었다. 짐을 다 싼 정원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냥 버린 거 아냐?”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도 나랑 비슷한 거 같던데.”
“뭐가?”
“네가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날 보면 피하거나 무릎이라도 꿇었어야할 거 같은데 진짜 반가운 사람 만난 것처럼 오는 거 있지?”
셀의 말을 들은 정원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탄식했다. 정원이 말했다.
“너 진짜 속고 있는 거라니까?”
정원은 갑자기 이렇게 행동하는 셀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런 일을 겪고나서도 덤덤해보여서 그래도 잘 헤쳐나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리고는 그 쓰레기랑 이야기를 다시 한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원은 셀이 너무 힘들어서 일시적 기억상실이라도 겪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 상실을 겪는 와중에도 제 고집만은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셀의 고집은 여전했다. 정원은 결국 셀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정원이 말했다.
“보러 갈 때 같이 가줘?”
“혼자 가도 될 거 같은데.”
셀의 말에 정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원이 말했다.
“무슨 일 생길지 모르잖아.”
“나 못 믿어?”
그 말에 정원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리고는 정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이런 일을 한 두번 본 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셀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농담이야. 그냥 아까 이야기했을 땐 진짜 멀쩡한 사람이었어. 네가 말한 그런 사람처럼 안 보였다고.”
셀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셀은 서진에 대해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셀은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진이 자신에게 절대 해코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했다. 그리고 할 사람이라 하더라도……. 셀은 별 걱정이 없었다. 정원이 반론했다.
“원래 사기 치기 전엔 제일 좋은 사람인 척 행동해. 말도 그럴 듯하게 하고.”
“그런 느낌이 아니었어.”
“아휴, 내가 널 어떻게 말리냐. 무슨 일 생길 거 같으면 연락해. 바로 신고할게.”
셀이 정원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서진은 솔과 혜정과 함께 동아리실에 있었다. 하루가 흘러가는 걸 보며, 서진은 여기서 밤을 지내야하면 여기서 지내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쉴 집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슨 동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곳이라도 있는 게 지금은 감지덕지였다. 차에서 밤을 지새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은 자신의 휴대폰-주머니에 있었으니까-을 확인하며 셀에게서 연락이 오는 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사이사이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서진은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말도 안 되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고, 지금의 서진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서진은 점심 시간에 말했던 자신의 이야기가 셀에게 잘 전달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셀이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욕은 들어먹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오히려 번호를 달라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오빠, 아까 갑자기 왜 사라지셨어요?”
“응?”
서진은 좀처럼 활발한 솔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서진이 몸을 돌려 솔을 쳐다보았다. 솔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서진이 말했다.
“미안해, 못 들었어.”
“점심 때 갑자기 사라졌었잖아요?”
서진은 솔의 질문에 대충 둘러대었다.
“아, 아는 사람한테 인사 좀 한다고 갔다왔어.”
“아아.”
서진은 불현듯 생각 난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해 혜정과 솔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우리 밖에 안 써? 동아리방이라며.”
점심시간도 지나고 그래서 사람들이 제법 들락날락할 줄 알았던 동아리방은 여태 이들을 제외하고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이상하게 혜정과 솔은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재잘거렸을 혜정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었고, 이곳에서 말이 많았던 솔도 말이 없었다. 순간적인 정적이 음산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서진이 이런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오빠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솔의 말에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이 이어서 말했다.
“왜 평소처럼 굴지 않는 건데요?”
“여기는 형이 찾았다고 저희에게 알려준 곳이잖아요. 들어올 사람 없어요. 괜히 남들에게 들켜서 좋을 거 없으니까 동아리방이라고 말하자고 저희한테 이야기했잖아요.”
서진이 얼굴에서 어색함을 지워내지 않으며 말했다.
“아, 미안. 그랬었지, 참.”
물론 거짓말이었다. 서진은 그런 걸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없었던 일이니까. 서진의 말에 솔은 서진을 째려보다가, 되었다며 아프면 그냥 집에 가서 쉬라는 타박만 들었다. 그 말에 서진은 약속이 있다며 받아넘겼다. 그러고 다시 서진은 자신의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메신저며 갤러리며 기록을 볼 수 있는 모든 어플리케이션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서 서진은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씩이나 보안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대체 무슨 숫자를 쓴 건지 지금의 서진으로서는 보안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도 지친 채, 서진은 휴대폰 안에 든 것을 확인하는 것을 포기했다.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셀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마침 동아리방에는 서진 혼자 남아 있었다.
-언제 볼까요.
-너만 괜찮으면 지금 당장도 괜찮아.
-저 곧 수업 끝나니까 30분 뒤에 25번 건물 뒤쪽에서 볼까요?
서진은 걸어오면서 보았던 건물들을 생각했다. 25번 건물을 보았던 거 같아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서진은 셀을 일단 먼저 깨우면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뭔지는 몰라도 솔과 혜정을 보면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그러니 셀을 깨워서 덮어져 있는 기억을 깨우면 금방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셀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서진을 확인했다.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아서 셀은 일단 안심하고 서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셀을 멀리서 본 서진이 셀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셀은 짧게 숨을 고른 뒤 서진에게 조금 더 빨리 걸어갔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냐, 얼마 안 기다렸어.”
“먼저 몇 가지 질문해도 괜찮아요?”
서진이 주변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저는 서 있고 싶은데.”
“다리 아프잖아.”
셀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셀의 입장에서는 굳이 앉을 필요가 없었다. 서진이 자신에게 얼마나 진실된 모습을 보였든, 정원의 말을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정원의 말대로라면, 서진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일어나 있는 게 몸을 움직이기도 더 편할 것이고 말이다. 셀이 물었다.
“내 연락 기다리면서 뭐했어요?”
“그냥 기다렸어.”
서진은 의자에 앉았다. 셀이 팔짱을 끼고 서진을 비딱하게 쳐다봤다.
“날 설득시킬 생각을 한 게 아니고?”
그 말에 서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셀은 그 변화를 가만히 관찰하기만 했다. 서진이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내 말을 믿어주었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연락을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네.”
서진이 하늘을 쳐다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 말에 100% 설득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정말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서진이 중얼거렸다.
“아,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지.”
“네 말 맞아. 믿어서 온 거야.”
팔짱을 끼고 있던 셀의 팔이 어느 새 허리춤에 가 있었다. 정원에게 별의 별 소리를 다 들으면서까지 약속을 잡고 온 건데, 여기서 이렇게 김 빠지는 소리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셀은 자신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서진에게 말을 쏟아내었다.
“네 말대로 너 안 믿었으면 연락도 안 했어. 가뜩이나 친구가 당신 보러 가지 말라고 얼마나 끈질기게 말렸는지 알아요? 원래 사기칠 땐 다들 사람 좋은 척 한다면서 어찌나 그러던지.”
“나는…….”
하지만 셀은 서진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 평판이 바닥을……. 하긴, 당신도 이전 기억이 별로 없다고 그랬지.”
“기억이 있을 수가 없는 거지. 우린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걸 저한테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어야죠. 내가 여기서 흥미 떨어져서 등돌리면, 솔직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않아요?”
셀의 입에서 잔소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서진은 셀이 언제 이렇게 잔소리를 길게한 적이 있었던가. 서진은 좀처럼 지금 앞의 있는 셀에게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분명 셀이 맞는데, 어딘가 자신이 아는 셀과는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여태 셀은 투정은 부려도 서진의 말에 강한 의심을 내비치거나 부연 설명을 강하게 요구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건 다른 사람이 하던 행동이었던 거 같은데. 서진은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렸다.
셀은 서진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한눈을 팔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셀이 눈썹을 낮게 깔며 서진을 노려보듯이 내려다보았다. 셀은 서진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가 서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안 그래요, 김서진 씨?”
셀이 인기척을 내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서진의 시선이 셀에게 꽂혔다. 셀에게 꽂혀 있던 서진의 시선은 금새 길을 잃은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셀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서진의 시선을 눈동자로 집요하게 좇았다. 결국 셀과 눈이 마주친 서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서진이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어서 셀은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진에게서 떨어졌다. 대부분 이렇게 가까이 붙으면 엄청 놀라던데, 이 사람은 좀 다른가? 셀은 서진과의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서진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맞아요, 그렇죠.”
서진은 바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진은 자신의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하마터면 이전에 생각했던 걸 모조리 잊어버릴 뻔했다. 셀의 손뼉 소리에 서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셀이 말했다.
“점심 때 나한테 말했던 거 기억해요? 우리가 이상한 일에 휘말렸다며 빨리 돌아가야 했던 거요.”
서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그랬죠.”
“그때도 우리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방금도 그랬잖아요.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난 너랑 학교를 같이 다닌 적이 없어. 겹쳐봐야…….”
지금 상황에서는 굳이 불필요한 사실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일을 하다가 이 사고에 휘말린 것만 말하자. 서진이 말을 이었다.
“직장생활 정도? 그러니까 대학 캠퍼스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애초에 정신을 차리기 전에 우리는 대학 캠퍼스에 있지도 않았어. 갑자기 이곳으로 떨어진 거지. 그래서 이전의 기억이 없는 거야.”
셀이 입에 손을 가져다 대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기억이 없다는 게 그다지 실없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가 이곳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왜 자신만 이런 망망대해에 떠도는 사람처럼 모든 걸 잊어버렸단 말인가. 셀이 물었다.
“그러면 나는 왜 정원이랑 당신 이름은 기억하고 있던 건데?”
“우리는 여기 오기 전까지 팀으로 함께 일하고 있었어.”
“우리?”
셀의 물음에 서진이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는 우리 팀 전체. 정원이도 우리랑 같이 돌아가야해. 다른 애들 둘도 마찬가지고.”
“다른 애들은 누구예요?”
“기솔이랑 혜정이. 걔네들도 아마 정원이랑 비슷할 거야. …… 나랑 만나는 거 막은 사람이 정원이지?”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다. 심지어 기솔이라는 이름이 그리 흔하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서진은 약속의 방해꾼이 정원임을 정확하게 짚었다. 셀은 서진의 날카로움에 감탄했다. 셀이 물었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여기서 우리는 우리끼리만 교류하는 거 같아서. 무엇 때문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단순히 생각하면 거기에 우리만 있었어서 그런 거 같은데…….”
서진은 말을 흐렸다. 이렇게 줄줄 설명할 시간이 충분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안 풀고 무작정 셀을 끌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고, 서진의 손에 정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그래도 셀이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는 믿어주고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서진은 큰 고민 없이 현 상황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생각엔 여기서 진짜 의식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은 우리 뿐인 거 같아. 구내 식당에서 봤던 장면들, 평범하게 느껴졌어?”
셀은 점심 때의 일들을 기억하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음식은 진짜……. 난 다른 사람들처럼 못 먹겠더라.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평범했잖아. 거기서 네가 젤 이상하게 굴었어.”
“그런 걸 보면 여기는 우리를 가둬놓기 위해 만든 공간인 거 같아. 나머지는 다 허상이고, 셀 네가 짚어준 것처럼 최소한의 동작만 하는 사람들을 넣어놓은 거 같네. 이질감과 의심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면 정원이랑 나의 차이점은 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정원이는 여기서 내내 살아온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내 추측엔…… 정신계열 능력에 영향을 얼마나 받냐에 따라 다른 거 같아. 나는 원래 영향을 거의 안 받고…….”
“오, 그래? 신기하네. 너도 그쪽 계열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셀은 천연덕스럽게 서진의 능력을 물었다. 셀이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사람인 건 틀림 없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은 건 역시 아니었다. 서진은 조금 씁쓸하게 말했다.
“난 그냥 운 좋게 체질을 타고 난 거지. 그리고 너도 그런 계열이니까 영향을 덜 받은 게 아닌가 싶어.”
“나?”
“그래, 셀. 너…… 설마 여기엔 그런 거 없어?”
방금 셀이 그렇게 놀라지 않았던 걸 생각하며 서진은 말을 고쳤다.
“아니, 능력이 없거나 다른 거야?”
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의 대답에 서진은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셀은 덤덤하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러면 서진의 정지한 사고가 좀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셀은 서진에게 총을 겨누며 말했다.
“난 이런 거 할 줄 알아.”
서진은 자신에게 겨누어진 총구를 보고는 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단순히 보여주는 건가 싶었지만, 셀은 서진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서진은 셀의 손에 원래 총이 있었는지에 대한 건 신경쓰지 못했다. 대신 서진은 자신의 능력도 셀처럼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머리를 스쳤다. 만약 그렇다면 서진은 여기서의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서진은 자신이 여기서 신월이긴 한건지도 갑자기 의심스러웠다. 평범한 사람이면 총 잘못 맞으면 그대로 끝일 텐데. 그러면 괜히 문제를 더 크게 일으킬 필요는 없지않나. 서진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셀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자신은 무장하고 있지 않으며,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그럼에도 총구가 땅을 향하지 않자 서진이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여기서 뭐 잘못한 게 있어?”
“잘못?”
잘못이라는 말에 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서진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생각까지 해야하는 건데! 셀은 서진의 얼굴을 겨누고 있던 총구를 서진의 손바닥으로 옮긴 뒤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모터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나오며 총구에서는 빠르게 비눗방울들이 나오고 있었다. 어떤 건 서진의 손바닥을 피해 주변을 배회하기도 했고, 어떤 건 서진의 손바닥에 부딪혀 금방 터져버렸다. 서진이 자신의 눈 앞에서 지나가는 비눗방울을 눈으로 좇다가 시선을 셀에게 옮겼다. 셀이 말했다.
“잘못할 게 뭐 있어, 오늘 여기가 처음이라며? 그냥 내 능력 보여준거야.”
서진이 두 손을 내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이런 긴장은 서진에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서진이 굳은 몸을 풀며 말했다.
“하아, 죽다 살았네 진짜.”
“다른 것도 보여줄까?”
“다른 거?”
“응. 다른 거.”
셀은 어느 새 손에 쥐고 있던 실제 총처럼 생긴 비눗방울총을 없앤 뒤, 보이지도 않던 귀여운 볼펜을 꺼내 들었다. 셀은 서진에게 손 한쪽을 달라며 손을 뻗었다. 서진은 순순히 셀에게 손을 내어주었다. 손바닥에 차가운 잉크가 닿았다. 셀이 서진의 손에 글자를 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이상하게 네가 편하네.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것도 없는데 네 이름은 기억했던 것도 그렇고.”
“셀, 여기 왔을 땐 총이며 지금 쓰고 있는 볼펜이며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었지?”
“응, 머릿속에서 생각한대로 물건을 구현하는 게 내 능력이야. 그런데 정신 놓고 있으면 물건들이 금방 사라져서 그냥 필기구 놓고 왔을 때 급하게 만들어 쓰거나 하는 게 다야. 아니면 아까처럼 남한테 장난 칠 때라던가…….”
셀이 서진의 손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잉크가 닿는 느낌이 계속 나서 서진은 셀이 뭔가를 길게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물었다.
“그런데 뭐 쓰는 거야?”
“다 쓰면 봐. 나 원래 이런 거 잘 안 했던 사람 같은데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
말을 마친 셀이 하하, 하고 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 웃음에 서진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보니 셀이랑 이런 적이 전혀 없었던 거 같은데 말이다. 서진은 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먼 곳을 쳐다보았다. 찬 바람이 불어왔다. 서진에겐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셀은 서진의 손에 계속 뭔가를 쓰고 지웠다가 이제서야 겨우 두 자를 썼다. 이런 장난 잘 안 치는데 왜 이 사람한테는 괜히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네. 셀은 다 되었다고 말하며 서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진은 자신의 손바닥에 적힌 글을 보았다. 손바닥에는 바보라는 글과 함께 그를 놀리는 듯한 표정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서진이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서진이 말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나 했더니, 겨우 이거야?”
“딱히 쓸 말이 없었거든.”
서진은 손바닥에 그려진 낙서를 보며 오래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셀과 셀의 친구이자 자신의 동생인 현아가 자신의 손에 매니큐어를 발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로 손가락 하나씩 맡아서 매니큐어를 바른 다음에, 그 손톱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 셀이 그렸던 그림이 이것과 비슷해보였다. 이런 기억이 떠오르자, 서진은 더욱 더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셀의 능력이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이 아니라면, 서진은 앞서 세웠던 작전을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셀은 생각에 잠겨 있는 서진을 쳐다보았다. 분명 정원이 말한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사람인데, 정원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서진의 이야기가 맞다면, 그건 단순히 그 김서진과 이곳의 김서진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아까도 충분히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상황에도 서진은 가만히 있었다. 정원의 말대로라면 그렇게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셀은 서진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다. 자신이 여기서 저지른 짓 중 하나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했다. 셀은 머리를 굴리느라 바쁜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아, 나 재밌는 거 들었는데 알려줄까?”
서진이 평소처럼 고개를 돌려 셀을 쳐다보았다. 서진을 쳐다보는 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셀이 저렇게 눈을 반짝거릴 땐, 정말 셀 자신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서진도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셀이 말했다.
“당신이 나 두고 바람 피웠다던데?”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여기서의 당신이 그랬다더라고. 하지만 서진에겐 이 말이 들리지 않았다. 서진은 마치 호기심 때문에 금기를 깨트린 사람 마냥 그대로 셀 앞에서 굳어버렸다. 서진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여기서의 당신이 날-.”
“아니, 그 전에.”
“바람피웠다는 거?”
“그래!”
“내가 여기서, 여기서 널 두고 바람을 피웠다고?”
“그랬다던데.”
“바람? 내가? 내가 널 두고?”
“그렇게 들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서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뒤, 벌개진 얼굴로 셀을 쳐다보았다. 셀은 붉어진 서진의 얼굴이 고함 때문인지, 아니면 억울해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셀은 서진의 큰 목소리가 꽤나 위협적임을 깨달았다. 흉통이 큰 데다가 울림도 좋아서 정말 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서진의 말을 똑똑히 들었을 거 같았다. 셀은 서진과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방금 생각난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목소리 진짜 크다. 캠퍼스에 있는 사람 모두가 들었겠는데?”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지 깨달은 서진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서진이 말했다.
“소리쳐서 미안해, 셀.”
서진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돌처럼 굳어있었다. 셀은 서진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이 김서진은 정말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서진은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손에 묻은 채로 말했다.
“내가…… 진짜 여기서 그랬다고? 내가 널 두고?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난 너 하나면 충분한데 내가 왜?”
서진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듯이 들렸다. 셀은 딱히 해줄 말이 없었기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서진의 행동을 통해 ‘진짜’라고 생각되어지는 자신의 삶을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었다.
서진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쭉 생각했다. 몇 개 되진 않았지만,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 이곳의 김서진은 그렇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중받을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은 거 같았다. 또 점심 약속 잡고 튀려고 했다는 이야기라던가, 빈 공간을 허가도 없이 마음대로 쓰고 있다는 것이나, 그리고…… 서진은 셀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입에도, 머릿속에도 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밀려왔다. 서진은 얼굴에서 손을 떼다가, 아까 셀이 적어주었던 글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바보라고 적힌 두 글자가 서진을 놀리듯 반듯하게 써져 있었다. 누구는 셀에게 상처 줄 동안 누구는……. 서진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보…… 바보 새끼 맞네…….”
서진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지만, 셀은 서진이 한탄을 하며 욕을 내뱉고 있다고 생각했다. 간간히 억센 발음의 단어들이 귀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셀은 그 이야기가 꽤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서진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셀이 말했다.
“저기, 나 계속 물어봐도 돼?”
셀은 서진을 그렇게 부른 것을 후회했다. 이 이야기에 왜 자기가 더 상처 받은 얼굴을 하는 건데? 김서진의 얼굴은 처연해보였다. 이 상황을 되돌리지 못할 거 같다는 그런 절망감도 조금 보였다. 서진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런 이야기 하고 그렇게 거리 두듯이 날 부르는 거야? 나도 그런 머저리 새끼처럼 보여?”
“아니, 그렇게 생각했으면 너한테 연락 안 했지. 내가 말했잖아, 여기서의 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그리고 넌 여기 사람 아니라며. 우리 모두 아니라며. 그러면 여기에서 그짓을 했거나 당한 사람은 없잖아, 안 그래?”
셀은 언짢다는 표정으로 서진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어봤자 좋을 게 없는데. 셀이 앞으로 살짝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나는 네 말 믿었다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마.”
그리고 이 말을 붙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똑같은 말하게 하면 네 키를 반으로 줄여버릴 줄 알아, 알았어?”
평소보다 훨씬 더 과격한 언사를 사용하는 셀에게 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셀은 이렇게까지는 말 안 했던 거 같은데. 게다가 셀은 서진이 말했던 이야기를 믿어주고 있었다. 셀을 더 이상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서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셀이 아주 틀린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셀이 주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다시 앞에서 말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우리가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 우리는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웬 개구리 석상 같은 걸 만졌어.”
“그걸 좀 자세히 말해봐.”
서진은 이곳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의 일을 셀에게 설명했다. 셀은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주의깊게 들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직업과 왜 아까 서진에게 총을 겨눴을 때 서진이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셀이 말했다.
“그러면 뭐야, 개구리 같이 생긴 석상을 양쪽에서 만져서 이 문제가 일어났다는 거 아냐.”
서진은 셀의 말을 딱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셀이 말했다.
“다시 만져서 돌아가면 안 돼?”
“그러고 싶었는데, 일단 사람도 다 못 모았잖아. 그리고 걔네 설득하려면-.”
셀이 서진의 말을 잘랐다.
“모으는 데에는 설득이 필요없잖아. 원래는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널 찾아서 다른 팀원들의 기억을 되돌린 다음, 석상을 찾아서 돌아가려고 했지. 그런데 너는 기억이 없다고 하지, 그 능력도 아니라고 하지. 하아, 일단 석상이라도 찾아볼까 싶네.”
“정원이 불러볼까요?”
“말해줄 게 없잖아.”
“걔가 말해줄 건 있겠죠. 여기로 오라고 할게요.”
셀이 휴대폰을 만졌다. 서진이 물었다.
“정원이가 이 말들을 믿을 거 같아?”
셀은 잠시 고민하는 듯, 입을 비쭉 내민 뒤 입을 열었다.
“제 말은 믿겠죠.”
잠시 후, 정원이 셀과 서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정원은 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서진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서진은 정원의 눈을 피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정원의 그 눈초리에는 인간말종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도 묘하게 섞여 있었다. 다른 거면 몰라도 셀을 두고 바람을 폈다는 이유로 그런 시선을 받는 건, 서진도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
정원은 정원대로 심각했다. 서진이 어떻게 이야기를 했기에 셀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자신에게 늘어놓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원은 셀을 보고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듣는 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원이 속삭이듯이 물었다.
“너 진짜 그 말들을 믿어?”
“믿으니까 널 불렀지. 여기서 개구리 같이 생긴 조각상 본 적 있어?”
정원은 불만스러운 태도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셀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했다.
“여기 근처에 두 개 있어. 저 건물 뒤에 연못 하나 있잖아, 왜 물고기도 안 사는 연못.”
“아, 그런 게 있었어?”
셀의 대답에 정원은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정원이 말했다.
“진짜 믿는 거냐니까?”
“믿으니까 널 불렀지. 네 말대로 갑자기 내가 이상해졌다는 것도 말이 되잖아.”
“그럼 나는?”
“네가 아직도 꿈속이라는 거지.”
서진은 멀리서 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두 명이서 속닥거리는 걸 들으며 서진은 자신의 상황이 아주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좀 더 일찍 확인했어야 했을 것들을 서진은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감각이 예민하게 잘 작동하고 있는 게 맞는지, 자신의 능력도 셀처럼 다른 것으로 바뀐 건 아닌지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은 그런 문제를 겪진 않은 거 같았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다가 멈췄다. 서진이 고개를 돌리자, 셀과 정원이 조금 거리를 두고 함께 서 있었다. 정원이 말했다.
“셀한테 다 들었어요.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죠?”
“얼마든지.”
“당신 말이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면 여기가 진짜라는 건 어떻게 아는데? 정원아, 여기서의 네 삶을 다 기억해?”
그 말에 기분이 더 나빠진 정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정원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가 못할 거 같아요?”
정원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서진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일단 반말하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서진이 눈썹을 내리 깔며 정원의 얼굴을 살폈다. 정원의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정원은 감정을 숨기고는 했는데, 여기서는 되려 감정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셀과 투닥거릴 때도 저런 표정까지는 짓지 않았는데. 서진이 대답 없이 자신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게 불쾌했던 정원이 서진을 도발하듯이 말했다.
“왜, 어린 사람한테 말 높이려니까 기분 나빠요?”
“아뇨, 기분 나쁠 이유가 어딨어요.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정원은 서진이 자신의 말에 넘어가지 않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서진은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정원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높여서 다시 말해줄까요?”
“그렇게까지 하란 말은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정원이 바락 소리를 지르고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그리고는 서진에게 빨리 질문하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뭐라도 물어봐요. 다 대답해줄테니까.”
“셀이랑은 언제부터 친했어요?”
서진의 질문에 정원은 코웃음을 쳤다. 셀도 정원의 답이 궁금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원을 쳐다보았다.
“그거야 당연히…….”
정원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기억이 비어 있었다. 정원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아무리 자신의 기억을 훑었지만, 그런 기억은 정원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서진이 말했다.
“대략적이어도 상관 없어요.”
그 말은 정원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부러 상처주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닌 거 같기에, 정원은 속으로 감정을 삭혀야만 했다. 억울함과 서운함, 부끄러움이 한데 섞인 것을 겨우 처리하고 나서야 정원은 입을 열 수 있었다.
“기억이 안 나요. …… 이럴 리가 없는데.”
“왜?”
“그야…… 난 다 기억하니까. 아니, 못 잊는 게 맞다고 해야하나. 나 초기억 사이람이잖아.”
셀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래서 아까 내가 물어보는 걸 족족 다 대답했구나. 어쩐지 자판기처럼 답이 툭툭 나오더라.”
“뭐?”
서진이 머리를 쥐어짜듯 뒤로 쓸어 넘겼다. 서진은 이제야 셀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정원의 표정이 왜 그렇게 당연한지, 왜 여기서 자신이 그렇게까지 쓰레기 평판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기솔과 혜정의 태도도 달랐던 게 이해가 갔다. 그러면 혜정과 솔의 능력도 서로 바뀌었을 거고…… 서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다음 계획을 생각했다. 정원이 말했다.
“뭐 문제 있어요?”
“이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대충 알 거 같아서요. 정원 씨, 혹시 타인의 기억을 꺼내본 적 있어요? 아니면 읽어본 적은 있어요?”
정원은 셀과 서진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 기억 안 난다고 잡아 떼는 사람들에게 다시 기억을 되새겨준 적은 있어요.”
“스스로한테 해본 적 있어요?”
“아뇨. 저한테 쓸 일은 없죠.”
정원과 서진 간의 이상한 대화를 듣고 있던 셀은 서진을 불렀다.
“김서진. 아까 말한 두 친구들 부를 수 있어? 굳이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
셀은 자꾸만 기억에 집착하는 서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진은 기억을 되돌린 후에 서진이 줄창 말했던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셀의 눈에는 그 방법이 그다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는 거야, 그냥 돌아갈 수 있지 않나? 셀의 말에 서진은 고민하듯, 머리를 긁적였다. 서진이 말했다.
“되살리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 예측이 안 되어서 그래.”
“여기 올 때 기억이 바뀌거나 사라졌다면 돌아갈 때는 원상복구 되지 않을까? 기억만 되돌리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그렇진 않아.”
그걸 겨우 돌려놓아도 여전히 많은 게 뒤바뀌어 있었다. 서진은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한 첫 단추로 기억을 꼽았을 뿐이었다. 기억이 있으면 아무래도 편리하니까. 돌아가야만 한다고 설득할 필요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매달리는 건데?”
옆에서 정원이 셀을 팔꿈치로 치며 속삭였다.
“야, 너무 몰아세우는 거 아냐?”
자꾸만 움직이려는 셀의 손을 정원이 소매를 꽉 잡으며 막았다. 정원이 셀에게 무언의 시선을 보낸 뒤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 김서진 씨가 진짜 원하면 시도는 해볼 수 있어요. 근데 성공은 보장 못해요.”
“이제 내 말 믿어주는 거에요?”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뭐 어쩌겠어요.”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셀이 말했다.
“먼저 연락해.”
셀의 말에 정원도 가담했다.
“일단 부르고 기다리면서 해보죠.”
“무작정 불러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그냥 하라고 해. 그런 것도 안 해주는 게 팀원이야?”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너도 내 팀원이야.”
서진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적어도 뭘하고 있는지 이해는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거 아냐.”
정원이 말했다.
“저는 이해를 당했는데요?”
정원의 말에 서진은 셀과 정원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뒤져 기솔과 혜정의 연락처를 찾으며 말했다.
“부를게, 부를게. 셀, 네 말대로 애들 부르고, 정원아, 네 말대로 애들 기다리면서 기억 찾는 게 가능한 지 확인하자. 그래도 안 되면, 그냥 데려가서 해버리자. 그럼 됐지?”
서진은 정원과 셀 앞에서 보란 듯이 혜정과 기솔에게 연락을 취했다. 서진이 연락하는 모습을 보며 정원이 셀에게 속삭였다.
“그 새끼랑 다르긴 하네.”
“뭐가 다른데?”
정원은 금방이라도 복장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셀을 쳐다보았다. 셀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셀이 아는 서진은 지금 만나고 있는 서진이 다였다. 물론, 정원이 아는 ‘진짜’ 서진은 이야기로만 대충 들어도 쓰레기인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원은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아, 하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정원이 말했다.
“이 짓을 하루종일 하고 있네, 진짜. 말씨름 좀 하다가 그냥 져줬잖아. 말투도 훨씬 부드럽고. 내가 너랑 그 새끼 사이에 끼여 있을 땐 정말…….”
연락을 마친 서진이 바짝 붙어 있는 정원과 셀을 보았다. 평소랑 다르게 유난히도 바짝 붙어 있는 걸 보며 서진은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진짜가 아닌 것에까지 질투심을 느낄 필요는 없잖아. 서진은 잠깐 틔어오른 불씨를 미련 없이 꺼버렸다. 서진이 그 둘을 보며 말했다.
“둘 다 30분 안에 온대.”
“그래? 그러면 좀 앉아 있어야겠다.”
셀은 그제야 서진이 앉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 탓에 정원은 서진과의 거리를 조금 더 좁혀야만 했다. 정원은 이제야 서진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서진의 얼굴을 살피던 정원은 서진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을 후회했다. 서진의 외모 덕에 그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정원은 머릿속의 그 사람을 떨치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누구 기억을 끄집어 내고 싶은 건데요?”
“개인적으로는 누구든 상관 없지만…… 네 생각엔 누가 더 좋을 거 같아?”
“저 말 놓으라고 한 적 없어요.”
지금 서진에게 쉽게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서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니, 그래요. 정원 씨 생각은 어때요?”
“제 자신에게 해본 적은 없어서 정확하게 될지 안 될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셀한테…… 하자니, 쟤는 지금 도화지라 쉬울 거 같긴한데 이런 일엔 협조를 잘 안 해줘서요.”
옆에서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셀이 말했다.
“할게.”
정원이 고개를 비딱하게 세우며 말했다.
“너, 네 머리 헤집어대는 거 싫다 그랬잖아.”
“그렇다고 네가 안 했냐? 네가 억울해 죽을 거 같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 있던 기억을 꺼낸 게 한두 번이야?”
“네가 사람 억울하게 안 만들면 안 썼어.”
“그래서 내가 이번만큼은 허락해준다잖아. 허락 맡고 마음껏 뒤져봐.”
정원은 셀에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서진은 이 둘 사이를 이전처럼 중재해야할 지, 가만히 지켜보아야할 지 고민했다. 다행스럽게도 정원이 셀의 기억을 끌어내보기로 하며 상황은 진정되었다. 서진이 정원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원은 서진의 배려를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원의 입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정원이 말했다.
“질투 같은 건 없어요?”
서진은 정원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건지 궁금해졌다. 다만, 정원의 시선이나 표정이 사람을 떠보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서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 여자친구도 아닌 걸.”
“아아. 그래요.”
정원은 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 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라는 정원의 말에 셀도 눈을 감았다. 곧 정원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어쩔 때는 빈 손을 꼼지락거리기도 했고, 어쩔 때는 셀의 손 위에 놓인 손이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서진은 거기서 그냥 눈을 떼기로 했다.
서진은 멀리서 기솔과 혜정이 걸어오는 걸 보았다. 서진이 손을 크게 흔들자, 기솔도 서진을 따라 손을 크게 흔들었다. 혜정은 가만히 있었다. 서진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기솔과 혜정은 벤치에 앉아 있는 정원과 셀을 목격했다. 둘은 서진에게 눈빛으로 어떤 신호를 보냈다. 무슨 신호인지 대충 짐작이 간 서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괜찮아.”
“그런데 여기는 왜 오라고 했어요?”
“너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겸사겸사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서진은 정원이 셀의 기억을 찾아내는 동안, 기솔과 혜정에게 간략하게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기솔과 혜정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진을 쳐다보았다.
“형, 뭐 잘못 드셨어요?”
“혜정이 네가 그러니까 좀 마음이 아프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서진은 기솔과 혜정의 표정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딱 봐도 숨쉬듯이 거짓말을 한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많이 했죠. 이제 오빠 말을 백퍼센트로 믿는 사람은 없을 걸요.”
서진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이곳의 김서진을 실제로 보면 반드시 주먹으로 얼굴을 갈기고 말겠다는 결심만 점점 완고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서진은 최대한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다. 서진이 쓴 웃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래도 내 연락 받고 여기까지 왔잖아.”
“그래도 그 이야긴 진짜 이상해요.”
“그러면 그거 말해주려고 우리 부른 거에요?”
사실 그렇다고 서진이 말하려는 순간, 정원이 서진의 옷소매를 세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 더 이상 못하겠어요.”
정원은 잔뜩 지친 사람처럼 숨을 크게 고르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내뱉던 정원은 셀의 반대쪽으로 반쯤 엎어지다시피 벤치 위로 엎어졌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못 찾겠어. 너무 어지러워.”
“물 있으면 좀 줄 수 있어?”
서진의 말에 혜정이 가지고 있던 물을 건넸다. 서진이 정원의 의식을 확인하며 손에 물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셀은…… 서진의 눈에 셀은 생각보다 평온해보였다. 서진이 물었다.
“셀, 괜찮아?”
셀은 어딘가 불편한지, 눈을 찡그리며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았다.
“나도 좀 느낌이 이상한데. 그냥 좀 어지러운 거 말고는 괜찮아.”
“기억을 찾아내는 건 아무래도 실패한 거 같네.”
“그건 사실 잘 모르겠네. 뭘 보기는 했거든. 그런데…….”
셀이 정원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원은 좀처럼 몸을 일으키기가 힘든지,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정원의 상체는 숨을 쉴 때마다 들썩거렸다. 셀은 그런 정원이 안쓰러웠는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억 같은 게 좀 더 가까이 보이려는 순간, 정원이가 뛰쳐나갔어.”
셀이 벤치 뒤쪽을 손으로 짚으며 몸을 살짝 틀었다. 셀이 서진을 향해 말했다.
“뭔가 우리를 막고 있는 거 같기도 해.”
“서진 오빠가 이야기하는 걸 믿으시는 거에요?”
“네, 믿기로 했어요. 이제 아마 옆에서 사경을 헤메는 이 친구도 믿을 걸요?”
셀이 말을 하며 정원의 팔뚝을 가볍게 잡았다. 정원은 셀의 손을 뿌리칠 힘도 없는지, 가늘게 뜬 눈으로 셀만 쳐다보고 있었다. 셀이 말했다.
“이제 내 말대로 하는 거지?”
“쭉 네 말대로 하고 있었어.”
“쭉은 아니지.”
“나는 항상…… 아니다, 지금 말해서 뭐하겠어. 그래, 이제 네 말대로 하자.”
서진이 말을 정정하자, 셀이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서진의 말을 받아주었다. 서진과 셀이 주고 받는 말들과 행동들을 보던 기솔과 혜정은 눈을 어찌나 크게 떴는지, 그 큰 눈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정원은 충분히 쉬었는지 이제야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고 할만한 자세로 앉았다. 정원이 기솔과 혜정의 표정을 보며 킬킬거렸다.
“드디어 내 맘을 이해해줄 사람이 생겼네.”
정원은 쥐고 있는 물병을 들어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이제 좀 살 만 하냐는 서진의 물음에 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의 상황을 쭉 지켜본 기솔이 진지하게 물었다.
“벼락이라도 맞았어요, 오빠?”
너무나도 진지한 기솔의 태도에 서진은 실소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서진이 그만 하라는 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나 기솔은 서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혹은 자신의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서진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는지 폭주기관차처럼 말을 뱉어내었다.
“어쩐지, 이 언니랑 같이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했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바람핀 거 들켰다고 빌빌거리던 사람인데.”
기솔의 말에 정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야, 빌빌거릴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
정원의 목소리에 기솔의 시선이 정원에게 갔다가 셀에게 그대로 옮겨갔다. 기솔은 셀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이 굳어버린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셀을 쳐다보았다. 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그 기억이 없어서. 근데 듣고 있으니 좀 흥미롭긴 하네요. 내가 어쩌다 그런 쓰레기랑 사귄 거지. 남자 복이 없나?”
“네가 그 인간을 왜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저 김서진이랑 외모나 덩치가 비슷하면, 그래도 상당히 준수한 편 아냐?”
“에이, 그렇게 따지면 껍데기 밖에 없잖아요.”
“정원아, 나 껍데기 좋으면 그냥 오케이하는 사람이었냐?”
“좀 중시하는 편이긴 했지.”
서진은 저 모든 이야기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서진은 왜 이 수치심을 자신이 받아야 하는지 생각했지만,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일도 아니었다. 그냥 이런 일이 벌어진 걸 어쩌겠는가. 서진이 헛기침을 두어 번 뱉으며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서진은 자신이 지금 당장 낼 수 있는 가장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다 했으면 그만 갈까? 이제는 가도 될 거 같은데.”
서진은 언제쯤 돌아갈 수 있냐는 혼잣말까지 늘어놓았다. 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혼잣말 자꾸 하면 늙은 거라던데.”
서진이 정원의 말을 받아쳤다.
“너도 많이 하는 편이야, 정원아.”
“어디로 가는 거에요?”
“얘들아, 학교에서 개구리 석상 어디 있는지 알아?”
정원과 기솔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두 사람의 손 끝을 본 혜정이 말했다.
“저 주변에 똑같이 생긴 거 두 개 있는데, 어디로 가야해요?”
“나눠서 가야 해. 근처까지만 누가 앞장 서줄래?”
자연스레 길을 아는 세 명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아는 게 전혀 없는 서진과 셀이 움직였다. 서진은 미묘하게 다른 자신들의 팀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개구리 석상에 도착하면 그때는 제발 내 말대로 움직여줘, 얘들아.”
서진의 말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가 저마다 긍정의 대답이 앞에서 들려왔다. 정적이 일었던 그 순간이 서진은 조금 웃겼는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앞장 선 세 명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표했다. 셀이 물었다.
“원래 시킬 때도 그렇게 말해?”
“너네가 더 말을 안 듣는 편인데, 여기서 내 입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 같기도 해. 그래도 그 쓰레기 새끼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내 말을 믿고 다들 여기까지 따라와준 거 같아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 처음엔 나를 믿지 않았더라도, 지금은 이렇게 같이 가주고 있잖아?”
“이미 그 쓰레기랑 네가 다른 사람인 거 다 알았을 거야.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다른 걸? 나도 이번엔 고분고분하게 네 말 들어줄게.”
“오늘 네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두 번째로 반가운 말이네.”
두 번째라는 말에 셀은 별 흥미 없이 질문을 던졌다.
“첫번째는 뭔데?”
서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이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나한테 만나자고 연락 왔던 거.”
앞에서 이야기를 쭉 듣고 있었는지, 정원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정원이 서진을 놀리듯 말했다.
“연애 프로라도 찍는 거예요, 뭐에요? 이제 다 왔으니까 다음 계획을 슬슬 세워보는 건 어때요?”
정원이 서진을 놀렸다는 건, 곧 셀을 놀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서진 혼자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셀의 시선을 느낀 정원이 고개를 황급히 앞으로 돌렸다. 셀이 차갑게 말했다.
“앞이나 똑바로 봐.”
정원은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졌다. 이들은 연못 앞에 금방 도착했다. 서진은 강변을 수색했을 때처럼 팀을 똑같이 나누었다. 셀과 정원을 함께 보내고, 서진은 기솔, 혜정과 함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이곳의 개구리 석상은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딱 연못 하나를 거리에 둔 정도였으며, 물 옆에 서 있는 석상치고는 보존 정도가 우수했다. 강변에 있던,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서진은 셀과 전화를 연결한 뒤, 개구리 석상을 만졌던 혜정과 셀에게 순서대로 손을 얹으라고 말했다. 혜정이 손을 얹고, 셀이 손을 얹었다는 이야기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그들은 이번에도 똑같이 개구리에게 잡아 먹혔다.
***
기솔은 자신이 들고 있던 신호기에서 파장이 점점 높은 폭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신호가 거의 바닥에 가까워지자 기솔이 말했다.
“갑자기 신호가 뚝 떨어졌네요.”
옆에서 목을 쭉 내밀고 기솔과 같이 신호기를 보던 혜정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아무것도 아닌 거 아닐까요?”
“선배, 기기가 오작동하는 건 아닐까요?”
서진은 답이 없었다. 서진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석상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기솔이 혜정과 시선을 한 번 교환한 뒤 다시 서진을 불렀다.
“선배?”
무전기에서 정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별 일 없지? 이쪽은 신호가 갑자기 뚝 떨어졌어.
기솔은 서진을 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정원의 말에 대답했다.
“여기도 신호가 뚝 떨어졌어요.”
손을 석상에 대었다 떼었다를 반복하던 혜정이 기솔의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
“손을 떼었다가 다시 만져봐도 파장이 안 움직어요.”
-셀, 너도 해볼래?
무전기에서 잠깐 당황한 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중 안 하고 뭐하냐는 정원의 나무라는 소리 이후, 잠시 정적이 일었다. 셀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 나왔다.
-이쪽도 별 변화가 없네.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아? 난 좀 멍한 느낌이어서.
셀은 석상에서 손을 떼어 자신의 머리를 손 끝으로 꾹꾹 눌렀다. 셀의 모습을 보던 정원이 다시 무전을 보냈다.
“혜정이는 괜찮아?”
-전 멀쩡해요!
셀은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는지, 석상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정원은 그 모습을 보며 신호기를 확인했지만, 신호기에서는 더 이상 신호가 큰 폭으로 증가하거나, 더 이상 감소하는 등의 파장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이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엔 괜찮았지?”
셀은 갑자기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있으면 안 되는 게 머릿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잠시동안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셀은 겨우 눈을 뜨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 꿈을 꿨다고 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셀.”
“어?”
“괜찮은 거 맞냐고.”
하지만 셀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너 기분 나쁜 일 있었어? 말을 왜 그렇게 해?”
“무슨 소리야.”
“좀 사근사근한 말투였는데?”
정원은 곧장 무전기를 통해 셀이 이상하다고 말하며 그쪽에는 다른 이상은 없는지 말했다. 무전을 기다리며 정원은 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솔의 무전이 다시 들려왔다.
-어떻게 이상해요?
정원은 자신의 무전에 솔이 계속 답을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혜정이 간헐적으로 끼어들고는 있었지만, 정작 여기서 답을 해야할 사람은 전혀 말이 없었다. 정원이 말했다.
“헛소리 하는데.”
정원의 말에 셀이 궁시렁거렸다. 환자한테 헛소리를 한다고 하는 게 맞냐, 왜 자기는 멀쩡한데 그렇게 말을 하느냐는 등 죄다 정원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말들이어서 정원은 셀의 그 말을 전부 무시했다. 답이 빨리 돌아오지 않자, 정원은 다시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서진 선배 빼고 너네는 괜찮은 거 맞지?”
-네, 저랑 혜정 씨는 괜찮아요. 그런데…… 선배가 좀 이상해요. 넋이 나간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불러도 답이 없고, 만져봐도 가만히 있어요.
-그렇게 만져도 돼요?
“혹시 모르니까 조금 떨어져서 계속 상황 보고 해. 내가 셀 데리고 그쪽으로 갈게. 혹시 너네 못 알아보고 위협하면 대응하지 말고 최대한 거리 벌려.”
-그럴 일이 생길 거라 예상하시는 거예요?
솔의 목소리에서 불안함이 느껴졌다. 정원이 답했다.
“그럴 확률은 아주 낮긴 한데…… 무슨 일 생기면 너네 안위부터 챙기라는 말이야. 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셀 선배는 어때요?
“사람은 알아보는 거 보면, 당장은 너네 보단 상황이 괜찮은 거 같아. 일단 계속 주시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솔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정원은 곧장 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셀은 정원이 오는 걸 보고 눈동자를 굴려 정원을 쳐다보았다. 정원이 말했다.
“셀, 이동할 수 있어?”
“너는 왜 멀쩡해?”
“아무 일도 없었잖아. 괜찮지 않은 게 이상한 거지.”
“아니, 아무 일이 없었던 게 아닌데.”
“일단 움직이자.”
“넌 진짜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거야?”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어. 아까 애들이랑 이야기한 건 들었어?”
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냉한 정원의 태도가 서운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정원이 초조해보여서 당장 이걸 풀 수는 없어 보였다. 셀이 서운함을 속으로 삭히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셀이 말했다.
“가면서 이야기하면 들어줄 거야?”
정원은 자신에게 평소보다 더 친근하게 굴어오는 셀을 멀리할 수도 없었다. 정원이 일단 움직이자고 손짓했다. 셀은 정원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셀은 평소보다 정원과의 거리를 좁힌 채 정원의 보조를 맞추었다. 정원은 평소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셀의 반응을 예측할 수가 없어서 자신의 욕구를 꾹 누른 채 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린 서진은 몸을 주춤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흙과 잡초들이 무성한 바닥이 눈에 들어오자, 서진이 깨질듯한 머리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아니, 제자리로 돌아온 게 맞나? 서진은 자신과 넓게 거리를 둔 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두 명의 귀여운 후배들을 보았다.
“얘들아?”
“괜찮으세요?”
“난 괜찮은데…….”
기분 나쁜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게 다 괜찮았다. 입고 있던 옷, 상대적으로 침착해보이는 애들까지 모든 게 다 괜찮았는데, 애들과의 거리가 문제였다. 서진이 말했다.
“무슨 일 있었니?”
“방금 전까지 계속 넋 놓고 계셨어요. 괜찮으신 거 맞아요?”
“다시 돌아왔는데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서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서진은 말 그대로 괜찮았다. 서진에겐 그 이상한 곳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솔의 표정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솔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여기도 이상해요.”
-선배도 정신 차렸어?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
“저희가 다시 돌아왔대요.”
-돌아왔다고?
솔이 무전기에 대고 대답했다.
“다시 돌아왔으니까 괜찮다고 하셨어요.”
-우리 이제 곧 도착해. 중간에 문제 생기면 연락해.
팀원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진이 자신의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정원아.”
-네, 말씀하세요.
서진은 무미건조한 정원의 태도에 안도감을 느꼈다. 서진이 말했다.
“도착까지 얼마나 남은 거 같아?”
-5분이면 도착해요.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대도. 불안하면 직접 와서 확인해도 좋고.”
-그러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네, 하나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정원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서진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혜정과 기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서진은 자신이 꼭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서진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정원이 말했다.
-혜정이가 주는 사탕 하나만 먹어주세요.
정원의 말에 서진이 인상을 썼다. 서진이 다시 입을 떼려고 하자, 기솔이 말을 덧붙였다.
“혜정이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으로 먹어주세요.”
서진이 기솔을 원망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대체 얘네는 지금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기솔은 서진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정원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려왔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가능하시죠?
서진은 혜정의 가방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서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혜정을 쳐다보았다. 서진과 눈이 마주친 혜정이 서진의 눈을 피해 시선을 돌리다 기솔의 등 뒤로 숨었다. 기솔이 본능적으로 혜정이 숨은 쪽의 팔을 뻗어 혜정을 보호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정원이 말했다.
-사탕 먹는 거 별 거 아니잖아요.
“대신 내가 사탕을 고를 수 있게 해줘.”
-고른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거 잘 알잖아요. 저희 다 왔어요. 보여요?
서진과 솔은 멀리서 정원이 손을 흔드는 걸 보았다. 서진과 솔은 정원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정원은 서진에게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셀은 반대편으로 가는 내내 정원에게 틈틈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해주었다. 정원은 셀의 말에 적당히 반응해주며 전혀 일어날 수가 없는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셀은 정원의 듣는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입을 막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면서 셀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는 말할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러서야 셀은 입을 다물었다.
셀은 정원의 표정을 살폈다. 정원은 정말 자신이 하는 말을 하나도 듣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어디서 말을 끊었는지도 모를 터였다. …… 그래야만 했다. 셀은 이 개구리 뱃속에서 자신과 서진이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왜 그렇게 자신은 차분했을까? 김서진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 말들에 자신은, 그러니까 그곳에서의 셀은 서진의 말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던 걸까?
셀은 이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담아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랬다간 서진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할 거 같았다. 말은 남이 했는데, 왜 책임은 내가 져야 하냐고!
“셀, 잠시만.”
정원의 목소리가 셀의 생각을 찢고 들어왔다. 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난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정원의 찡그린 얼굴이 셀의 눈에 들어왔다. 셀은 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정원의 시선이 닿지 않을 곳으로 홱 돌렸다. 이해할 수 없는 셀의 행동에 정원이 인상을 더 구겼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아니,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너 열 있는 거 같은데.”
“괜찮다니까?”
“그러면 그곳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말을 하다 말았잖아.”
셀이 곁눈질로 정원을 보았다. 셀은 답을 원하는 정원의 얼굴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셀이 말했다.
“다 듣고 있긴 했어?”
“무시하기엔 네가 너무 열심히 말하더라.”
“안 듣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야?”
셀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서진과 있었던 일들을 어떤 식으로 전달하면 좋을 지 생각했다. 정원이야 워낙 로봇같은 사람이니, 셀은 정원이 자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셀은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게 싫었다. 당장은 그 일을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셀은 정원이 일일이 캐묻지 않기를 바라며 대충 둘러대기로 결심했다. 셀이 정원과 눈을 겨우 마주치며 말했다.
“지금 김서진 얼굴 보는 게 조금 껄끄러워서 그래.”
돌아오는 정원의 답이 없었다. 정원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래.”
“계속 보기 껄끄러울 거 같아?”
“아냐, 지금 당장 보는 게 좀 그런 거고……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정원의 표정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정원은 멀리 서 있는 서진을 한참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이 말했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여기서 기다릴래? 솔이나 혜정이랑 같이 돌아가. 가서 검진 신청하는 거 잊지 말고.”
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원을 쳐다보았다. 정원이 말을 이었다.
“최대한 일주일 정도는 안 부딪히게 해줄게.”
정원은 셀에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당부를 한 뒤, 곧장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셀은 멀어지는 정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서진이 가만히 있을까? 뭐, 정원이 말릴 수 있으니까 저렇게 간 거겠지.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가 싶더니, 곧 솔과 혜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솔과 혜정이 가까워지자 셀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너넨 괜찮아?”
“몸은 괜찮으세요?”
솔이 다가와서는 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문제가 조금 있다고 들었어요.”
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정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원 선배가 저희 먼저 돌아가라고 하시던데요?”
기솔이 셀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으며 말했다.
“운전은 제가 할게요.”
서진은 멀어지는 셀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정원의 말에 따르면 셀은 여전히 몸이 안 좋았다. 그런데 자신은 못 만난단다. 대체 왜? 서진은 셀이 부탁했다는 말에 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걸 그만두었지만,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형도 개구리 뱃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한다고 하셨죠?”
“개구리뱃속?”
“몰라요. 셀이 그렇게 표현하기에 그걸 그대로 쓴 것 뿐이에요. 그래서 기억해요?”
“기억하지.”
당연하다는 듯한 서진의 대답에, 정원은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셀한테 뭔 짓 했어요?”
“내가?”
서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원도 서진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서진은 정원의 뚱한 표정을 마주하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그랬겠어?”
서진은 이곳에서조차 자신의 무고를 입증해야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잘못 살았었는지 정말 되짚어보아야할 시간이 다가온 것일지도 몰랐다. 정원이 말했다.
“미움 받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그랬을 거 같지는 않은데. 저 이런 거 추궁하기 싫으니까 빨리 알아서 말씀하세요. 안 그러면 팀장님한테 넘길 거예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리고 거기서 셀이랑…….”
서진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서진은 바닥만을 응시한 채 한참을 쳐다보았다. 서진은 그 끔찍한 곳에서 셀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나 서진은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문제들 때문인지, 아니면……. 정원이 말했다.
“셀이랑 뭐요?”
셀이 정말 그 대화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서진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진 뒤, 오늘 생각한 가장 멍청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셀이 이 일에 대해 기억을 한다면, 부분적인 기억만 갖고 있진 않겠지. 셀은 기억을 다루는 사이람이니까. 서진이 깊은 한숨을 뱉어내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서진이 말했다.
“…… 그냥 대화만 좀 나눴을 뿐이야.”
정원은 여전히 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흥미가 없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셀은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거라고 해서 일단 일주일 동안 최대한 안 부딪히게 해준다고 했어요. 형도 괜찮으시죠?”
“어…… 괜찮아.”
서진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셀이 자신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데, 그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는데, 해결된 건 하나도 없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해결해야하다니. 서진이 말했다.
“일주일이라는 기간은 셀이 말한 거야?”
정원이 패드로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
“제가 말했어요. 셀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요.”
서진의 대답이 없자, 정원이 눈썹을 한 번 까딱거렸다. 정원이 휴대폰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일주일 안에 만나려고 하는 건 아니죠?”
“아니야. 기다려야지.”
서진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뭔지는 알아내어야 셀에게 사과를 하든, 스스로 계획을 세우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서진은 일단 사과는 피할 수 없는 일일 거라 생각했다.
정원이 패드를 가방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듯,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저희도 이제 움직이죠? 애들 출발했대요.”
“애들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형 보기 싫다는데 어떻게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해요?”
정원의 말에 서진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서진의 기억에는 모두가 한 차를 타고 같이 이동했기 때문에 다른 차가 있었는 지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다. 하지만 서진의 기억에는 따라왔거나, 사이람 팀을 보조해줄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았었다.
“우리 차 한 대 뿐이었잖아.”
서진의 말에 정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정원은 너무 당연하게 자신에게 또 다른 차의 존재를 물어보는 서진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나 서진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원이 말했다.
“형은 검사 받기 전엔 그냥 쉬시는 게 어때요?”
“왜? 나 멀쩡해.”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일단 주차장으로 가죠. 가는 길에 검진 신청하세요. 일반 병원에서는 못하시잖아요.”
퇴근을 재촉하는 정원의 손짓에 서진이 일단 걸음을 옮겼다. 서진이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했다.
“우리 올 때 차 한 대로 왔었잖아.”
“제가 있는데 차가 한 대든 두 대든 무슨 상관이에요.”
서진이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서진은 정원이 저런 말을 내뱉고 나서야, 여기서의 정원의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서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지, 참.”
“돌아가는 길에 꼭 검진 신청하세요. 일정 나오면 알려주시고요.”
“넌 언제 받으려고?”
“저는 내일 아침에 비어 있으면 그 시간대에 받으려고요. 저라도 이상이 없다는 걸 빨리 알아야, 다른 사람들 도와주기가 쉽잖아요.”
정원은 연락을 받았는지, 다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정원은 눈으로 빠르게 메세지를 읽으며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정원이 이어서 말했다.
“저는 주차장에 먼저 가서 차 준비 해놓을게요.”
“같이 가도 되지 않아?”
“형은…… 죄송한데 오는 길에 커피 한 잔만 사다주실 수 있으실까요.”
서진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정원이 굳이 이런 일까지 부탁하는 걸 보면 애들과 자신과의 동선을 겹치지 않게 만드려는 게 틀림없었다. 서진은 카페가 있던 위치를 떠올렸다. 주차장에서 멀진 않았지만, 여기서 주차장으로 가는 것보다는 조금 돌아가는 길에 위치해 있었다. 서진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정원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일주일 간 혼자 퇴근할 생각을 하니, 서진은 벌써부터 허전함이 밀려오는 거 같았다.
집에 오는 내내 셀은 툭하면 서진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말들을 그렇게 아무렇지나 않게 하는 게 어디있어? 어쩌면 그것들은 꿈인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꿈이니까 서진이 그렇게 말을 했겠지. 현실이었어봐, 절대로 그런 말 안 했을걸? 셀은 집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잠옷으로 환복하기 전 바지주머니를 확인하던 셀은 바지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볼펜 두 개를 꺼내들었다. 셀이 중얼거렸다.
“볼펜?”
곧 이 볼펜으로 무얼 썼는지 생각이 난 셀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볼펜을 부러트릴 듯이 세게 쥐었다. 사라졌어야할 볼펜이 사라지지 않고 주머니 속에 있었다는 건 셀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셀은 볼펜을 올려놓을 수 있는 곳 아무데나에 올려놓은 뒤 바로 잠옷으로 환복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안한 자세로 쉬어야지. 절대, 절대로 그 어떤 생각도 하면 안 돼.
아, 사탕 먹이는 걸 깜빡했네. 잊었던 게 생각난 정원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금방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서진이 평소처럼 사탕을 먹기 싫어했으니, 사탕은 그것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를 다한 셈이기는 했다. 그나저나 이런 걸 까먹다니,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 없었다. 정원은 내일 오전자로 예약한 시간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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