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제안
“셀, 오늘도 그 사람이랑 점심 먹어?”
“그 사람?”
민하가 바깥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셀이 민하의 시선을 따라 몸을 뒤로 반쯤 눕혀 밖을 쳐다보자, 키가 큰 사내가 바깥에 서 있었다. 오늘은 별 말 없었는데. 민하가 놀리듯이 물었다.
“오늘도 나 버리고 데이트 가는 거야?”
셀이 한숨을 짧게 내쉰 뒤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셀, 요새 여직원들 사이에서 저 사람 말 많은 건 알지?”
“뭐?”
셀이 민하의 표정을 눈으로 훑다가 물었다.
“너한테 소개 시켜달라는 이야기야?”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단 이야기지. 나는 저런 타입은 아니야. 그냥, 네가 밥도 자주 먹고 하니까 잘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너랑 잘 어울려 보인단 말야. 민하의 사심이 가득한 말에 셀은 미간을 찌푸리며 민하를 째려보았다. 셀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짜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점심 시간만 되면 여기까지 내려와?”
셀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혼자 먹기는 또 싫은가봐.”
셀이 민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보내고 올게. 오늘은 나랑 같이 밥 먹어.”
“어? 아니, 굳이…….”
“꼭 같이 먹자.”
셀은 곧장 밖으로 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키 큰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민하는 셀을 핑계로 남자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얻었다. 남자는 짧은 머리에 키가 엄청 컸다. 그리고 온 몸이 다부져보이는 게 옷 너머로도 훤히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민하의 첫인상은 저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구나, 였고, 두번째는 저런 사람이 나랑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 되는구나, 였다. 민하는 셀이 부럽다기 보다는, 저런 사람을 안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셀은 충분히 예쁜 사람이고, 이런 지하에서 썩기엔 아까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런 사람을 알고 지낸다는 게 민하에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셀은 문을 열고 나가 서진의 팔을 손으로 찔렀다.
“김서진.”
그러고는 뒤를 슬쩍 쳐다보자, 민하가 자신과 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셀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서진이 셀을 보고 반갑다는 듯, 밝게 웃었다.
“점심, 먹을 거지?”
“오늘은 팀원이랑 먹을 거야. 그리고…… 왜 계속 말도 없이 찾아와?”
“나랑 밥 먹는 거 별로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누구랑 밥 먹는데?”
“저기 뒤에서 우리 쳐다보는 사람이랑.”
서진이 고개를 돌려 민하를 쳐다보았다. 서진은 민하가 저번에 셀과 같이 붙어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서진이 민하에게 손인사를 하며 물었다.
“저 분도 너랑 같은 사이람이야?”
“일반인이야. 서류 작업 위주로 일해.”
“이름은?”
“박민하인데…… 왜?”
“그럼 내가 끼여서 같이 밥 먹어도 돼?”
“아니, 왜 애처럼 굴어? 나보다 사회 경험이 많으면, 좀, 혼자서 먹을 줄도 알아야지.”
“같이 먹으면 더 맛있잖아. 내가 사줄게.”
서진이 민하를 향해 이리 오라고 정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민하가 얼굴을 내밀자, 서진이 웃으며 물었다.
“민하 씨, 저도 오늘 밥 같이 먹어도 돼요?”
“네?”
“뭐?”
“아, 제 소개를 안 했죠. 김서진이에요. 이번에 신설된 사이람1팀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민하는 홀린 듯 걸어나와 서진과 악수를 했다.
“박민하에요. 셀이랑 같은 팀인 증거물 기록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민하가 서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셀이랑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돼요?”
“어…….”
서진이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조금 설명하기 복잡하긴 한데, 친구 사이라고나 할까요? 오래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서 일을 한다고 해서 그냥 친구랑 같이 밥이나 먹을 겸 해서 여기까지 내려왔던 거예요.”
“아아, 그러시구나.”
“아아?”
셀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같이 먹을 생각 없는데. 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진을 쳐다보았다. 셀의 마지막 기억엔 이런 능구렁이 같은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서진도 나이를 먹었는지 어느 새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셀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민하도 한 번 째려보았다. 지금 홀라당 넘어간 거냐고. 민하는 눈을 반짝이며 셀을 쳐다보더니 예의, 그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런데 어떡하죠? 제가 잊었던 일이 갑자기 떠올라서요.”
“뭐?”
“그러니까 셀, 서진 씨랑 점심 맛있게 먹고 와.”
민하는 셀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민하가 사라진 자리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분명히 같이 밥 먹자 할 때는 언제고……! 자신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때는 언제고, 민하는 갑자기 커플 사이에 낀 사람 마냥 쏙 빠져 나갔다. 내가 언제 셋이서 밥 먹자 그랬어? 둘이서 먹자고 한 건데, 혼자서만 이렇게 빠져나가는 게 어디 있어……. 서진이 민하와 셀 간의 분위기를 읽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점심 같이 먹는 거 아니었어?”
“…… 아니었나보네. 하하, 내 착각이었네.”
서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괜히 내가 약속을 깨게 만든 거 같네…….”
“됐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빨리 먹어야 빨리 쉬지.”
셀은 민하에게서 온 문자를 읽었지만, 화가 나서 답장하지 않았다. 셀은 민하가 자신과 서진을 붙여놓고 민하가 쏙 빠진 것에 대해서는 더는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민하가 보낸 문자가 더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서진 씨랑 점심 맛잇게 먹어~ 둘이 잘 어울린다^^”
데이트 따위를 하는 게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 싶었지만, 이건 사람의 지성을 의심해야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셀은 그저 속으로만 분을 삭혀야만 했다. 셀이 말했다.
“그냥 여기 앞에 있는 곳에 가자.”
셀의 말에 서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더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진에게는 이미 충분히 더운 날씨였다. 웬만하면 셀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는 서진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토를 달아야 했다. 서진이 말했다.
“덥지 않을까?”
“…… 그러면 국수 먹으러 가자.”
서진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경찰서 바로 앞에 있는 식당이 음식을 빨리 내온다 하더라도, 그곳엔 죄다 따뜻한 음식 뿐이었다. 셀이 한 손으로 해를 가리며 서진과 함께 국수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국수집에는 그래도 비빔국수라도 있으니, 더위를 피하기엔 평범한 국밥집 보단 나을 터였다.
서진과 셀은 익숙하게 매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더니, 바로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며 서로가 짜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서진과 자신의 앞에 수저를 두며 셀이 물었다.
“그런데 진짜 왜 자꾸 나랑 밥 먹는 거야? 거기 사람 없어?”
“지금은 나 혼자지?”
“팀장님 계신다며.”
서진이 물이 든 잔을 셀 앞에 두며 대답했다.
“워낙 바쁘셔서, 지금은 팀원 모으느라 정신 없으셔.”
“너는 안 도와드려도 돼?”
“아, 그게.”
서진은 운을 띄워놓고는 밑반찬을 가지러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은 곧 단무지와 김치를 들고 와 테이블의 중앙에 내려 놓았다. 서진이 자리에 앉으며 셀을 불렀다.
“셀.”
“왜.”
“나랑 같이 일할래?”
“응?”
“나랑 같은 팀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고.”
서진이 단무지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셀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서진의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셀이 곧장 대답하지 않자, 서진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너와 같은 기억 사이람을 찾고 있는데, 내 생각엔 너만한 사람이 없는 거 같아서 너를 팀장님한테 추천드렸어.”
국수집의 장점은 음식이 빨리 나온다는 게 장점이었다. 서진의 앞에 비빔국수가 도착했다. 서진이 국수를 편하게 비비기 위해 같이 나온 장국을 국수에 살짝 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옮기기 좀 그런가? 너도 그 팀에서 잘 지내고 있을 텐데, 그치?”
셀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살짝 감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서 여태 굳이 내려와서 밥을 같이 먹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셀의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서진은 비빔국수를 먹기 좋게 비비고 있었다. 셀이 물었다.
“그거 채용 비리 아냐?”
“에이, 팀장님 마음에 안 들면 안 데려 가실 텐데 뭐가 채용 비리야. 나 그 정도로 입김 센 사람은 아냐.”
“팀장님이 여기 오면서 바로 뽑았다며.”
“나도 면접 보고 들어온 거야. 사람은 여기저기서 추천 받으시는 거 같긴 하더라고. 좀 깐깐하게 보시는 거 같았는데…… 너 정도면 무사히 면접 통과할 거 같아서. 그리고 넌 원래 서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출퇴근 문제도 없고.”
셀이 주문한 열무국수와 곁들여 먹을 만두가 함께 테이블에 올려졌다. 셀의 음식까지 모두 나오자, 서진은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함께 비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셀이 서진이 먹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진짜 나한테 왜 같이 일하자 하는 거야?”
서진이 입에 있던 국수를 모두 넘긴 뒤 말을 이었다.
“진짜 저 이유가 다야.”
“또, 뭐 보호하고 이러는 거 아니지?”
“나 더 이상 대표님이랑 일 안 해.”
아, 맞다. 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야 서진이 자신의 보디가드로 일했지, 지금은 더 이상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같이 녹봉이나 받아 먹고 있지. 셀이 말이 없자, 서진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셀,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아냐, 그냥 다른 게 있나 싶어서 말한 거야.”
그리고 셀이 근육을 과시하는 것처럼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도 이제 남자 한두 명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고.”
셀의 말에 서진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서진이 어린 아이를 대하듯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래도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 알겠지?”
“아, 진짜라니까?”
“응, 얼른 밥 먹어.”
셀이 서진 보고 들으라는 듯, 궁시렁거리며 국수를 먹기 시작했지만, 서진에게는 닿지 않는 듯했다. 서진은 큰 만두 하나를 한 번에 입에 넣고 입을 크게 움직이며 만두를 씹어댔다. 그 와중에도 서진의 시선은 셀에게 꽂혀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당연히 셀에게 가 있어야할 것처럼 가 있기도 했고, 셀이 밥을 잘 먹는 지 궁금해 하는 시선이기도 했다. 서진이 셀의 앞접시에 만두를 하나 가져다 놓아주며 말했다.
“어쨌든 잘 생각해보고 말해줘. 우리 팀에 들어오는 거 말이야.”
“…… 알겠어.”
셀이 옆에 생긴 만두를 보고 물었다.
“이건 왜 옮겨놓았어?”
“잊지 말고 챙겨 먹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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