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받아들이게 될 (2)
이안은 저 멀리서 키가 큰, 용모가 익숙한 여자를 발견했다.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어보였다. 마침 여자도 이안을 알아본 듯 빠르게 다가왔다. 이안이 말했다.
"여전하시네요. 강 선생님."
한결이 씩 웃더니 이안에게 헤드락을 걸듯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동생 두고 도망친 놈 아냐."
"그런 표현도 여전하시고요. 마지막에 저 울린 건 기억하세요?"
"그런데도 나한테 반갑게 인사해?"
한결의 말에 이안이 소리내어 웃었다. 이안이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저랑 아인이 잘 놀아주셨잖아요.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쑥쓰러워서 괜히 못되게 말하시는 것도 알고요."
이안의 말에 한결이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이안이 자기 얼굴을 못 보게 하려는 듯 이안의 머리를 살짝 누르며 이안의 머리를 헝클였다. 한결이 말했다.
"또, 또 어른인 척 한다."
이안은 큰 반항 없이 한결의 손길을 받아주며 대답했다.
"저 어른이에요, 이제."
"내 눈엔 아직 피도 안 마른 애기야."
한결이 품에서 이안을 놓아주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냥 유학 마치고 돌아왔으니까 와 봤어요. 연구소가 엄청 커져서 좀 놀랍네요."
이안의 말에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가고 연구소에는 꽤 많은 일이 있었었다. 그러니 이안이 이런 변화를 신기해할 법도 했다. 한결이 예전의 연구소를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은 좀 다르긴 하지."
한결이 고개를 들어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느낌이 꽤 많이 변해 있었다. 어른이라. 한결은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아인이 성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이안도 성인이 되었겠지. 하지만 한결의 눈에는 이안은 그냥 키만 훌쩍 큰 어린 아이 같았다. 이젠 놀려도 울지 않을 것 같은 아이 말이다. 한결은 이안의 뒤로 저 멀리 걸어오는 남자를 알아보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안이 한결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뒤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깔끔하게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이안과 한결을 향해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영현은 또 어린 친구와 시시덕거리고 있던 한결을 보며 무표정을 살짝 고쳐 조금 부드러운 인상으로 한결을 쳐다보았다. 영현이 말했다.
"강한결, 잘 지냈냐."
영 무뚝뚝한 영현의 말에 한결이 빈정거렸다.
"뭐야, 여기가 만남의 광장이었나보네."
한결은 자신을 부른 영현에게 날을 세우며 물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반기는 사람도 없는데."
둘 사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이안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인사를 한 뒤, 한결에게는 먼저 자리를 뜨겠다며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영현은 이안의 인사를 고개를 까딱이며 받아주었다. 이안이 떠나자, 영현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메세지는 봤냐?"
"빌려줄 사람 없어요. 보낼 사람도 없고."
한결의 단호한 태도에 영현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한결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던 영현은 당연하다는 듯, 한결의 약한 부분을 찔렀다. 영현이 말했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요."
영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목숨 하나 구해준 사이지."
영현의 말에 한결이 영현을 노려보았다. 목숨을 빚졌다는 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한결은 영현으로부터 톡톡히 배우고 있었다. 아주 평생 울궈 드시겠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옴싹달싹 못하게 하는 영현의 방법이 한결은 너무 싫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결이 딱딱하게 말했다.
"…… 따라오세요. 왜 필요한 지 설명이나 해주세요."
영현이 빠르게 한결의 옆으로 가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영현이 답했다.
"혼돈이 다시 움직이는 거 같은데, 뒤통수 맞기는 싫어서."
영현의 말에 한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현의 목적이 뭐였나 했더니, 저런 위험한 곳으로 애들을 보내려고 했다니. 한결은 좌우로 까딱이며 말했다.
"그러면 더욱 더 우리 애들을 보내주기는 싫은데요."
한결이 더는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 쓰세요. 다니던 회사에 아는 사람들 많잖아요."
빠르게 선을 긋는 한결의 말에 영현이 인상을 썼다. 영현이 말했다.
"혼돈을 섬겨오던 집안들이 어떤 집안인지 다 알잖아. 걔네들 들어갔다간 오히려 나한테서 정보를 빼갈 걸."
영현의 말에 한결이 킬킬거리며 그들을 비웃었다. 한결이 잔뜩 목에 힘을 주고 비꼬았다.
"네네, 유서깊은 정신조종자들만 모인 집단이죠. 거기에......."
한결의 비꼼을 듣고 싶지 않았던 영현이 한결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옛 신화와 비슷하지. 자연을 다루는 사이람과......."
영현이 자신의 말을 채간 게 기분이 나쁜 한결이 말투를 좀 더 예의바르게 고치며 영현의 말을 가로챘다.
"온갖 대단한 사이람들은 다 끼어 있잖아요?"
한결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영현이 거기 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 들은 게 꽤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때만 생각하면 한결은 다시 화가 나는지,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한결이 말했다.
"거기 끼여 계셨던 거, 저 아직 용서 안 했어요."
한결의 모든 말들을 쉽게 받아치던 영현은 이에 대해서는 곧장 말을 하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 뒤에 영현이 입을 열었다.
"난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줄 알았어."
한결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결이 말했다.
"그자들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요? 제가 여태 만난 그런 사이람들은 죄다 밥맛이었는데."
영현은 그에 답하지 않았다. 한결은 예전에 스쳤던 사이람들을 다시 떠올렸다. 하나같이 모든 사이람은 자신이 뭐라도 된다는 것마냥 굴었었다. 그게 정말 밥맛이라 한결은 영현과 뜻을 함께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한결은 그런 사람들과 같이 지낼 바엔, 심심해 죽더라도 혼자 지내는 쪽을 택했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를, 자신들이 겪어본 적도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며 모든 걸 옛날로 돌려놓으려는 사람들과는 전혀 함께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한결이 말을 이었다.
"아, 그래서 아저씨도 밥맛인가?"
"이젠 기어오르겠다는 거냐?"
한결이 자신의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영현이 문을 잡고 한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한결이 화를 못 참고 영현을 노려보았다. 한결이 자신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날 살린 사람이라는 거, 잘 알겠는데, 날 버린 것도 아저씨잖아요. 여기에 날 두고 간 거, 기억 안 나요?"
한결이 이를 갈며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영현은 한결의 행동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영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결의 말을 받아쳤다.
"잘 살아 남았잖아. 여기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도 했고."
"무슨 의도에요?"
"다 잘 되었으니 좋은 거 아니겠냐는 거지."
한결에게는 영현의 말이 자신을 구슬리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결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한결이 말했다.
"뭐가 되었든 우리 애들 중에는 보낼 사람 없어요. 뭘 하기엔 너무 어려요. 아는 것도 없고, 애들 자체도 별로 없어요."
한결의 말에 영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영현이 들었던 이야기랑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영현이 자신의 앞에 있는 소파에 편히 앉으며 말했다.
"몇 명 받은 애들 있잖아."
그 말에 한결이 인상을 찡그렸다. 몇 명 받은 애들? 영현은 여기 연화연구소에 있는 신월들이 어떻게 생겨나는 지 뻔히 알면서도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결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아직도 자신이 평범한 사람일 거라고 믿는 아이들을 영현의 밑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결이 이를 갈며 말했다.
"걔네가 멀쩡해서 여기 왔겠어요? 너무 늙어서 노망난 거에요, 뭐에요?"
한결이 혼자 속 편해 보이는 영현을 노려보다가 속이 너무 답답했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영현은 사자후나 다름 없는 한결의 고함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한결이 말을 이었다.
"왜 갑자기 와서는 이렇게 속을 긁는 건데요? 내가 무슨 복권이에요? 긁으면 뭐라도 나오게? 정 궁금하면 그쪽에다 대놓고 물어봐요, 옛정이 있으면 당신한테 뭐라도 털어놓겠지. 그러니까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한결이 말을 우다다다 쏟아내자, 영현이 한결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아, 알겠어. 그만 해."
"알았으면 그만 가세요."
영현이 손을 들어 한결의 말을 막았다. 영현이 말했다.
"그러면, 그냥 네 생각이 궁금해서 그러는데."
"또 뭔데요."
"차라리 거기 보름을 보내는 건 어떨 거 같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영현의 말에 한결이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 영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현은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기에, 한결은 영현이 정말 이 생각을 머릿속에서 고려하고 있다는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었다. 한결이 당황해서 물었다.
"...... 진짜 노망 났어요?"
"걔네한테도 중요한 사람인데 잘못 건드리진 않겠지."
영현의 말에 한결이 팔짱을 꼈다. 그래, 한 번 들어나보자 하는 심정으로 한결이 말했다.
"누구 보낼 건데요?"
지금 한결과 영현이 둘 다 알고 있는 보름은 두 명이었다. 영현이 데려가 보호해주었던 셀과 여기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제윤이었다. 아직 한 명의 행방은 둘 다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영현이 손끝으로 턱 끝을 만지며 말했다.
"그게 고민이야. 여기 있는 애는 너무 민간인이지 않나?"
"잘 아시네요. 그러면 아저씨한테 금지옥엽이나 다름없는 보름 보낼 거에요?"
영현이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영현은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보내자니, 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보내는 것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히 보냈다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그들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셀을 보내자니,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였다. 일단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영현이 말했다.
"그건 또 싫은데... 일하라고 보내 놓으면 잘할 거 같단 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고 있는 영현을 보고 있자니 한결은 속이 터졌는지, 이 좁은 공간에서도 능력을 써서 영현의 바로 뒤로 순간적으로 이동해, 영현의 어깨를 꽉 잡아 누르며 말했다.
"걔네한테 문 열라고 열쇠를 쥐어주는 꼴이잖아요. 그럴 거면 뭐하러 데려왔어요? 평생 그들이랑 함께 살게 두지?"
"말이 너무 심한데, 이거."
말이 심하다는 사람치고는 목소리에서 여유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깔보는 거나 다름 없는 영현의 행동에 한결이 힘껏 그의 어깨를 손으로 꽉 눌렀다.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어."
영현은 한결의 행동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현이 말했다.
"네가 가는 건 어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