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림자 (4) / 16. 회절 (1)
"연락 받고 안 올 줄 알았는데."
이내가 피곤한 투로 말했다.
"…… 네가 날 저녁에 부르면 사적인 일 때문에 부르는 거잖아."
영현은 이내가 왜 굳이 피곤한 와중에도 자기를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영현과 이내는 서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서로를 부르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고 달려왔다. 정말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영현은 이내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 거였다. 영현이 장난으로 말했다.
"공적인 일은 안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내가 장난으로 받아쳤다.
"공무원은 겸직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 너도 알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런 일로 영현이 자신을 부를 리가 없다는 걸 이내는 잘 알고 있었다. 영현은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하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내한테는 언제나 이내의 의사를 우선시해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영현이 몸을 돌려, 막고 있던 입구를 열어주며 말했다.
"들어와."
이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거 같네."
"변할 필요가 없으니까. 마실 건 무엇으로 할래?"
"늦었으니까 물만 줘."
이내가 영현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영현은 이내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이내는 컵을 손 끝으로 두드렸지만 물은 마시지 않았다. 영현이 이내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셀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괜찮냐?"
"안 될 건 뭐야?"
영현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너는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하나 싶어서."
그날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이내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셀 이야기라는 말에 얼굴을 고쳐 밝은 표정을 보여주려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내가 딱딱하게 말했다.
"기억하지, 더러운 기억도 함께 있어."
영현은 공격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이내의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셀이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정상적인 일이겠지?"
"너답지 않게 무슨 소리야?"
"어딘가 찝찝해서 말이야."
영현은 끙, 하는 으레 나이 든 사람들이 낼 법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도 물 한 컵을 가져왔다. 영현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뭐…… 이화가 잠깐 데리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이화의 언급에 이내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이내가 말했다.
"왜? 뭘 기억을 못해?"
"사고 당시 기억에 접근을 못하더라고. 트라우마 때문인가 싶기는한데…… 셀 표현도 좀 이상해서."
영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접근을 못해요, 라고 했어. 기억을 못 찾겠어요, 도 아니고 접근을 못한다고 한 거면 이상하지 않나? 어디 있는 지는 안다는 거잖아."
이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셀이 뛰어난 사이람인 건 맞았지만, 영현이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건 그가 셀에게만큼은 팔불출이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이내가 말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아냐?"
영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영현이 말했다.
"셀을 수십 년 가까이 봤는데, 기억을 못 찾으면 못 찾는다 하지, 그런 식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어."
이내가 턱을 괴었다. 이내는 기억을 더듬어 이전에 셀과 이야기 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 하긴 셀이 저번에 나한테도 그랬어. 자기가 진술한 기억이 없다고. 그런데 그때 담당 형사는...진술서를 받았다는데... 사실 나도 기억에 셀이 진술을 했는지 모르겠어."
"너 그땐……."
이내는 당시를 생각하면 또 화가 나는지, 다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내는 주먹을 꽉 쥐었지만 책상을 내려치지는 않았다. 내려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가 말했다.
"그래, 제정신이 아니었지. 비단 그일 때문만이 아니라 신이화, 그 새끼 때문에 더욱 그랬었지."
하지만 이화의 이름을 담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는지 결국 식탁을 쾅 하고 주먹으로 내리쳤다. 영현은 그에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이내를 쳐다보았다. 이내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나 그 새끼 때문에 경찰에서 잘릴 뻔 했잖아."
"그거 막은 것도 걔야, 알지?"
"너 지금 그 개자식 편 드는 거야?"
영현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그거 다 날 수족처럼 부리려고 그랬던 거잖아. 병 주고 약 주고 하냐고. 물론 약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이내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화를 다스렸다. 이화에 대한 이내의 악감정은 풀고 풀어도 모자를 만큼 거대했다. 이내는 더는 감정소비를 하고 싶지 않은 지, 심호흡을 몇 번 더 하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영현은 말없이 이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내가 말을 이었다.
"너 아직도 그 새끼 만나?"
"안 본 지 꽤 됐어."
이내의 질문이 어이가 없었는지, 영현이 코웃음을 쳤다. 영현이 이어서 말했다.
"셀, 내가 데려온 거야. 알잖아."
알지알지, 이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는 몸을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었다. 영현이 셀을 이화로부터 데려온 건 맞았다. 이화는 대체 그 난리통에서 어떻게……. 이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야 이화 주변엔 뭐가 되었든 그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그리고 그 당시엔 셀과 또래의 아이도 있었으니, 잠깐 데리고 있는 데엔 이화가 적격이라고 다들 생각했겠지. 이내가 중얼거렸다.
"알아보고 싶은데…… 진짜 그랬는지."
영현이 확인 차 이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걔가 셀 기억을 조작했는지 말이야?"
영현의 태도는 이화가 정말 셀의 기억을 조작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첫 운을 뗀 사람이 저렇게 밋밋하게 반응할 줄이야. 이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리 둘 다 같은 거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영현이 옆머리를 긁었다.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현이 당장 무얼 할 수 있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내가 더 뭔가를 알아낼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영현이 말했다.
네가……."
하지만 이미 다른 일로 시간선을 여행 중인 이내에게 이런 일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는 이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감정적으로 편견을 갖고 대할 가능성이 컸다. 영현이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내가 한 번 다른 사람 통해서 확인해볼게. 시간은 좀 걸릴 거야. 결국 못 알아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영현은 이내가 알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지는 알고 싶었다. 영현이 이내를 슬쩍 떠보았다.
"미래로 가서는 알아낼 수는 없냐?"
이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내가 말했다.
"알잖아, 난 하나의 시간선에서는 한 명 밖에 못 있다는 거."
"네가 죽은 시간선이 그리 많다는 게 이해가 안 가."
"뭐, 시기가 안 맞는 거지. 내가 이미 늙어 죽었을 수도 있는 거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거고. 어차피 내가 존재하는 시간을 피해서 그 시간선의 흐름을 보는 거니까."
이내가 줄줄 이야기를 시작하자, 영현은 흥미가 떨어진 사람처럼 이해하지 못한 듯한 태도를 취했다. 이내가 말했다.
"어이, 왜 또 이해못한다는 표정이야? 자기는 더 어마어마한 걸 하면서."
영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답했다.
"난 좌표 찍기 밖에 할 줄 몰라."
자신을 낮추는 듯한 영현의 태도에 이내가 툴툴거렸다.
"비슷한 거잖아."
비슷한 거면 좋았을 텐데. 영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내와 달리 자신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내보다 쓸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 많았지만, 이내처럼 여기저기를 오갈 수는 없었다. 영현이 이내의 말을 반박했다.
"난 여기 얽매여 있어. 자유로운 너랑은 다르지."
영현이 남은 물을 모두 들이킨 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사람 써서 알아볼게. 알아낸다고 걔를 어쩔 수 있을 거 같진 않지만."
이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가 잘 물어주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아서라, 그 놈이 어떻게 빠져나왔는 지 잘 알면서 그걸 또 하겠다는 거야?"
"나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냐."
"능력이 안 통하는 사람으로 뽑는다 한들, 걔가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에겐 유혹적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 새끼도 약점 하나는 있겠지."
이내의 말에 영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영현이 말했다.
"너 요새 그런 거 찾으러 다니냐?"
영현의 말에 이내는 말없이 웃었다. 이내는 물을 몇 모금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이야기는 다 한 거 같은데, 나 그만 가도 되지?"
"…… 그래, 다했어. 그나저나……."
영현이 시선을 돌린 사이, 이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영현이 헛웃음을 작게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를 정리했다. 영현이 중얼거렸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하다니까."
16. 회절
셀은 자꾸만 그날이 생각났다. 기억을 열지 못했던 그날이 말이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기에 셀은 적잖이 당황했었다. 웬만하면 다 자물쇠라도 달려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때 그 상자는 어디에도 그런 흔적이 없었다. 영원히 봉인된 상자마냥, 뜯어내지 않으면 안에 든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뜯었냐 하면 뜯지도 못했다. 너무 단단히 봉인되어 있어, 셀은 그 기억에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상자는 너무나도 굳게 닫혀 있었다.
"셀리엇씨? 방어하지마세요."
"전...... 안 하고 있어요."
셀은 당황했다. 셀이 발견한 상자는 원래 열린 적도, 닫힌 적도 없었던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셀은 바닥을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상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서열이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못 들어가겠는데, 이거."
셀이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손을 비볐다. 셀이 말했다.
"......다시 해볼게요."
그러나 상자는 셀이 원하는 것을 그리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셀이 이마를 짚으며 상자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이런 게 잠들어 있었다고? 서열이 상자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아니면 다른 곳을 먼저 둘러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까요? 뭐가 달라져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셀이 무의식적으로 볼펜을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열은 그때, 트라우마가 생겨서 아직 그걸 열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트라우마라.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워낙 크게 난 사고고, 그 일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랑도 헤어져 영현과 지내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영현의 밑에서 큰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셀은 손에서 볼펜을 놓치면서 생각에서 벗어났다. 볼펜이 책상과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셀이 가만히 볼펜을 쳐다보았다. 일단 이건 그만 생각해야지. 셀이 볼펜을 쥐어 연필꽂이에 도로 집어 넣었다. 일하자, 일.
서진이 인사를 하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꼬박 일주일 만에 돌아온 사무실은 역시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달라진 거라고는 자신과 셀과의 관계 뿐이었다. 셀이 이미 사무실에 있다는 걸 눈치챈 서진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자기 자리로 가 짐을 풀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서진은 자신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다른 사람의 귀에 자신의 심장박동이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건 서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셀과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진은 기쁜 맘도 잠시, 셀이 자신의 말을 들어줄 지에 대해 걱정했다. 그래도 여태 봐온 정이 있는 데 말할 기회는 주겠지. 적어도 사람이 오면 아는 척은 해주겠지. 서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댓글 0
추천 포스트